안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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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회복을 위해 정신적·경제적 자강(自强)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교육과 민족기업 육성에 힘썼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언론·종교운동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891년(고종 28)부터 족형인 서강(西崗) 안익제(安益濟)에게 한학(漢學)을 수학했다.
사립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운 후 1905년 국권회복을 위한 지식의 필요성을 느껴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했으나 교주(校主) 배척운동에 관련되어 중퇴하고 양정의숙으로 옮겨 24세 때 졸업했다. 1907년 민중 계몽과 애국사상 고취를 위해 지방순회강연을 했으며, 지방 유지들과 함께 동래 구포에 구명학교(龜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이어 의령 중동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세웠으며, 다음해에는 고향 설뫼에 창남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이시영(李始榮)과 교의를 맺고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는 한편, 신민회원인 윤세복(尹世復)·김동삼(金東三)·신백우·고순흠(高順欽)·이원식(李元植)·서상일(徐相日) 등 120여 명을 규합,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펼쳤다.
한일합병 후인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모스크바·만주 등지를 돌면서 독립운동가들과 구국방책을 논의했으며, 최병찬(崔秉瓚)과 함께 〈독립순보 獨立旬報〉를 간행했다. 1914년 국내에서의 운동자금 조달과 연락을 위해 귀국했다.
<민족기업·교육활동>
1914년 9월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과 일제 자본에 맞서는 민족기업의 발전을 위해 이유석(李有石)·추한식(秋翰植) 등과 더불어 부산 중앙동에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개인상회로 출발한 백산상회는 1919년 5월 자본금 100만 원과 총주수 2만 주, 주주수 182명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대구·서울·원산·펑톈[奉天] 등지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대규모 회사로 성장하였으며 백산상회의 직원인 윤현진(임시정부 초대 재정차장)을 상해로 보내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하였다. 회사의 확장에 따라 부산상업회의소 부회두와 부산상업학교 이사를 역임했으며, 부산 유지들과 더불어 부산진과 영도에 공립보통학교를 설치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남형우(南亨祐) 등과 국내외 연락을 담당했으며, 의령에서 독립선언서 수만 장을 제작하여 영남 각지에 배포하고 의령지방의 독립운동을 지휘했다. 이해 11월에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회사 관계자 및 영남 유지들과 함께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전진한(錢鎭漢)·안호상(安浩相)·이극로(李克魯) 등 많은 장학생을 각국에 유학시켰다.
1920년 동아일보사 창립 때 최준(崔浚)·허걸(許傑)·이종화(李鍾和)·윤현태(尹顯泰) 등 백산회사 관계자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그해 4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동아일보사 부산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1921년 친일단체 상애회(相愛會) 회장이자 친일파의 거두인 박춘금(朴春琴)의 도항증명서(渡航證明書) 강매 기도에 맞서 부산에서 '박춘금 성토대회'를 열고 항의·진정 투쟁을 벌여 도항증명제를 폐지하게 했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연통제(聯通制)를 구성하고, 그 교통사무국을 만주의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백산무역주식회사에 두게 했다.
그러나 백산무역주식회사는 계속된 독립운동자금 공급과 부채, 일제의 수색, 장부검열 및 회사간부의 감금·고문 등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1927년 해산되고 말았다.
<민족언론·협동조합운동>
1926년 민족자주정신과 경제적 실력을 배양하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전진한 등과 더불어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고, 다음해 이시목(李時穆) 등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설립하여 〈자력 自力〉을 발간했다.
1929년 이우식(李祐植) 등과 함께 재정난에 빠진 〈시대일보〉를 인수, 중외일보로 개칭하고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중외일보〉는 최초 8면 발행과 동시에 민족언론의 입장에서 일제에 항거했으나 이로 인해 여러 번 발행정지 및 휴간을 당했고 결국 1930년 10월에 자진 휴간했다.
<독립운동 근거지 개척 및 대종교활동>
1931년 대종교에 입교했으며, 1933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투쟁의 근거지 마련과 재만주 조선 소작농들의 자력갱생을 위해 닝안 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워 조선농민 3백 호를 유치하고 농장 내에 발해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34년 대종교 제3대 교주이자 총본사(總本司)의 도사(都司)인 윤세복을 동경성으로 맞이하여 총본사를 이곳으로 옮기게 했다. 이후 대종교 참교(參敎)·지교(知敎)·상교(尙敎)를 역임했고, 교적간행회장(敎籍刊行會長)으로서 〈삼일신고 三一神誥〉·〈신단실기 神檀實記〉·〈홍범규제 弘範規制〉·〈종례초략 倧禮抄略〉·〈한얼노래〉 등을 간행하여 종교를 통한 민족자주사상 고취에 힘썼다. 그러던 중 그는 1942년 4월 신병 치료를 위해 귀향했다. 대종교를 독립운동조직으로 간주한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왜곡 번역하여 같은 해 11월 조선어학회 간부 검거와 동시에 대종교 간부 25명을 체포하는 임오교변(壬午敎變)을 일으켰다.
그도 이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병보석으로 출감한후 세시간만에 59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대종교에서는 이때 같이 순국한 권상익 등의 10명을 순교십현(殉敎十賢)으로 추존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위의 취소선은 LG그룹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관련사료가 미비하며 한겨레에서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오히려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사업자금 8천원을 대출받고, 일제가 조직한 진주상공회의소의 의원직을 역임함과,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신문광고에 후원기업으로 이름을 올리고, 전시에 조선의 물자통제를 담당했던 경남상공경제회의 진주지부원을 역임하는 등 친일행위에 대한 근거는 명확하기에 독립운동 지원 여부는 불분명하다. 더욱이 안희제는 1942년 11월에 임오교변이 있기 전까지는 직접적인 항일투쟁 대신 대종교 간부로서 만주에서 합법적인 종교 활동을 하고 있었던 만큼 적어도 임오교변 이전인 7월에는 지명수배 중일 수가 없다.
제헌 국회의원 안준상이 그의 조카이다.
부산광역시 중구 옛 백산상회 터에 백산 기념관이 있다.
1. 인물 정보
- 이름 : 안희제(安熙濟)
- 출생-사망년도 : 1885년 8월 4일 ~ 1943년 8월 3일
- 본관 : 탐진 안씨(耽津 安氏)
- 호 : 백산(白山)
- 출생지 :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1]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0942&docId=1195058&
2. 개요
국권회복을 위해 정신적·경제적 자강(自强)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교육과 민족기업 육성에 힘썼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언론·종교운동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3. 생애
1891년(고종 28)부터 족형인 서강(西崗) 안익제(安益濟)에게 한학(漢學)을 수학했다.
사립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운 후 1905년 국권회복을 위한 지식의 필요성을 느껴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했으나 교주(校主) 배척운동에 관련되어 중퇴하고 양정의숙으로 옮겨 24세 때 졸업했다. 1907년 민중 계몽과 애국사상 고취를 위해 지방순회강연을 했으며, 지방 유지들과 함께 동래 구포에 구명학교(龜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이어 의령 중동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세웠으며, 다음해에는 고향 설뫼에 창남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이시영(李始榮)과 교의를 맺고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는 한편, 신민회원인 윤세복(尹世復)·김동삼(金東三)·신백우·고순흠(高順欽)·이원식(李元植)·서상일(徐相日) 등 120여 명을 규합,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펼쳤다.
한일합병 후인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모스크바·만주 등지를 돌면서 독립운동가들과 구국방책을 논의했으며, 최병찬(崔秉瓚)과 함께 〈독립순보 獨立旬報〉를 간행했다. 1914년 국내에서의 운동자금 조달과 연락을 위해 귀국했다.
<민족기업·교육활동>
1914년 9월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과 일제 자본에 맞서는 민족기업의 발전을 위해 이유석(李有石)·추한식(秋翰植) 등과 더불어 부산 중앙동에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개인상회로 출발한 백산상회는 1919년 5월 자본금 100만 원과 총주수 2만 주, 주주수 182명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대구·서울·원산·펑톈[奉天] 등지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대규모 회사로 성장하였으며 백산상회의 직원인 윤현진(임시정부 초대 재정차장)을 상해로 보내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하였다. 회사의 확장에 따라 부산상업회의소 부회두와 부산상업학교 이사를 역임했으며, 부산 유지들과 더불어 부산진과 영도에 공립보통학교를 설치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남형우(南亨祐) 등과 국내외 연락을 담당했으며, 의령에서 독립선언서 수만 장을 제작하여 영남 각지에 배포하고 의령지방의 독립운동을 지휘했다. 이해 11월에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회사 관계자 및 영남 유지들과 함께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전진한(錢鎭漢)·안호상(安浩相)·이극로(李克魯) 등 많은 장학생을 각국에 유학시켰다.
1920년 동아일보사 창립 때 최준(崔浚)·허걸(許傑)·이종화(李鍾和)·윤현태(尹顯泰) 등 백산회사 관계자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그해 4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동아일보사 부산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1921년 친일단체 상애회(相愛會) 회장이자 친일파의 거두인 박춘금(朴春琴)의 도항증명서(渡航證明書) 강매 기도에 맞서 부산에서 '박춘금 성토대회'를 열고 항의·진정 투쟁을 벌여 도항증명제를 폐지하게 했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연통제(聯通制)를 구성하고, 그 교통사무국을 만주의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백산무역주식회사에 두게 했다.
그러나 백산무역주식회사는 계속된 독립운동자금 공급과 부채, 일제의 수색, 장부검열 및 회사간부의 감금·고문 등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1927년 해산되고 말았다.
<민족언론·협동조합운동>
1926년 민족자주정신과 경제적 실력을 배양하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전진한 등과 더불어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고, 다음해 이시목(李時穆) 등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설립하여 〈자력 自力〉을 발간했다.
1929년 이우식(李祐植) 등과 함께 재정난에 빠진 〈시대일보〉를 인수, 중외일보로 개칭하고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중외일보〉는 최초 8면 발행과 동시에 민족언론의 입장에서 일제에 항거했으나 이로 인해 여러 번 발행정지 및 휴간을 당했고 결국 1930년 10월에 자진 휴간했다.
<독립운동 근거지 개척 및 대종교활동>
1931년 대종교에 입교했으며, 1933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투쟁의 근거지 마련과 재만주 조선 소작농들의 자력갱생을 위해 닝안 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워 조선농민 3백 호를 유치하고 농장 내에 발해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34년 대종교 제3대 교주이자 총본사(總本司)의 도사(都司)인 윤세복을 동경성으로 맞이하여 총본사를 이곳으로 옮기게 했다. 이후 대종교 참교(參敎)·지교(知敎)·상교(尙敎)를 역임했고, 교적간행회장(敎籍刊行會長)으로서 〈삼일신고 三一神誥〉·〈신단실기 神檀實記〉·〈홍범규제 弘範規制〉·〈종례초략 倧禮抄略〉·〈한얼노래〉 등을 간행하여 종교를 통한 민족자주사상 고취에 힘썼다. 그러던 중 그는 1942년 4월 신병 치료를 위해 귀향했다. 대종교를 독립운동조직으로 간주한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왜곡 번역하여 같은 해 11월 조선어학회 간부 검거와 동시에 대종교 간부 25명을 체포하는 임오교변(壬午敎變)을 일으켰다.
그도 이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병보석으로 출감한후 세시간만에 59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대종교에서는 이때 같이 순국한 권상익 등의 10명을 순교십현(殉敎十賢)으로 추존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위의 취소선은 LG그룹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관련사료가 미비하며 한겨레에서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오히려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사업자금 8천원을 대출받고, 일제가 조직한 진주상공회의소의 의원직을 역임함과,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신문광고에 후원기업으로 이름을 올리고, 전시에 조선의 물자통제를 담당했던 경남상공경제회의 진주지부원을 역임하는 등 친일행위에 대한 근거는 명확하기에 독립운동 지원 여부는 불분명하다. 더욱이 안희제는 1942년 11월에 임오교변이 있기 전까지는 직접적인 항일투쟁 대신 대종교 간부로서 만주에서 합법적인 종교 활동을 하고 있었던 만큼 적어도 임오교변 이전인 7월에는 지명수배 중일 수가 없다.
4. 여담
제헌 국회의원 안준상이 그의 조카이다.
부산광역시 중구 옛 백산상회 터에 백산 기념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