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서(남인)
1. 개요
남인에서 분당한 청남에서 다시 분당하여 신서가 되었다.
2. 상세
영조조 초 소론은 노론 제거를 위한 무장봉기인 이인좌의 난을 일으킨다. 이후 노론은 난 이후 남인과 소론을 철저히 제거했다. 영조조에는 탕평책을 진행하여 남인도 등용되었으나 사실상 노론의 독주였다. 영조 사후 정조가 즉위하여 남인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기용하자 벽파가 채제공을 공격했고, 이같은 벽파의 공격에 대한 남인의 대응 태도 때문에 정조 14년인 1790년 무렵 남인도 대노론 강경파 시파와 대노론 온건파 벽파로 갈리게 되었다.
이후 천주교(서학)과 관련해서 정쟁이 심해지며 대노론 강경파 시파는 신서로 발전하여 나뉘어서 대립했다. 과격적인 개혁과 서구 과학 및 서학을 대거 수용했다. 또한 1790~92년 동안의 채제공 독상 체제를 옹호했다.
서학을 대거 수용한 만큼 신유박해때 신서는 탄압당했다. 신서의 대표적인 인물인 정약용과 공서의 대표적인 인물 이기영은 서학에 대한 견해 차이로 남인이면서도 서로 정적이 되었고 목만중의 가문인 사천 목씨는 가문이 당파가 남인이었다. 홍낙안도 채제공의 조카로 진산사건때 천주교를 믿는 권철신과 이승훈의 경위를 채제공에게 고하여 그들이 문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