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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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아껴 쓰는 데 있고, 아껴 쓰는 근본은 검소하게 말하는 데 있다. 검소한 연후에나 능히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한 연후에나 능히 자애로울 수 있으니, 검소한 자가 되는 그 자체가 백성을 다스리는 수장의 의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조선이 낳은 천재이다. 1762년[12]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는 귀농(歸農), 호는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등이 있다.이 편지가 번화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펴보더라도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더라도 조롱받지 않을만한 편지인가를 생각해야 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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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특징
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는 문도(文度). [13] 조선 후기 최고의 유학자 중 한 명으로 원효, 이황과 함께 한국 철학 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유배당했을 때 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가 대표작. 현재는 그의 학문 체계를 그냥 '다산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는 '다산학(Journal of TASAN Studies)'이라는 저널을 6개월에 한 번 정기적으로 발행해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한 개인과 관련되어 가장 많은 논문이 발표된 인물이며 그런 상황이지만 아직도 해석이 분분한 (심지어는 극단적으로 갈리는) 면모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조선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꼽는다고 한다. 여전제가 공동 경작과 공동 분배를 기초로 하기 때문에.[14] 정작 북한에서 그의 저작물인 목민심서는 금서인데다가[15] '''나중에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자체가 금지되어 있지만.'''
좌우간 경세제민을 널리 실현코자 한 당대 최고의 '''인본주의자'''다.
당시 남인들이 가톨릭을 자체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정약용도 가톨릭을 깊게 이해했으나 나중에는 철저히 거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해서는 아래 문단 참조.
3. 생애
외가가 해남 윤씨이며 어머니는 국문학사를 공부할 때에 꼭 나오는 문인인 윤선도의 후손이다.[16] 부친의 관리 생활을 보고 자람으로써 백성 중에 사회적 약자들인 궁민(홀로 사는 노인, 과부, 홀아비, 고아)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할 것인지를 깨달았다. 외가의 학문과 친가의 실천이 다산의 이론과 실천에 도움을 준 것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던 해인 1762년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적 성격은 매우 차분하고 화를 잘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일화로 어릴적 천연두에 걸려 얼굴에 종기가 큼직하게 났는데 눈가에 나서 또래들이 마치 눈썹같다고 그를 삼미, 말 그대로 눈썹이 3개라고 놀리듯이 불렀는데 화내지도 않고 어 그러냐?라고 대했다고 한다. 아예 스스로를 삼미라고 부르고 삼미집이라고 글을 쓰는 통에 놀리던 아이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1783년 회시에 합격, 1784년 이벽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익의 성호학파 중에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서파에 속한다. 이는 당시 남인들의 복잡한 혼맥도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익의 종손이 이가환이고[17] 이가환의 외조카가 이승훈이며 이가환의 누이의 아들이 이벽이고 이벽이 정약용의 누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처남 매부 관계가 된다.
성균관 유생 시절 때 성균관 우수학생들을 모아 상을 주는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정조는 정약용을 처음 보았다. 이후 마음에 들었는지 자주 불러 시를 짓게 했다. 정조의 눈에 들어 예쁨을 받았으나 최종 시험인 대과에는 계속 미끄러진다. 그것도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성균관 시험에서는 툭하면 1등을 먹는데 대과만 보면 떨어지는 것이다. 1년 내내 모의고사 만점 받다가 갑자기 수능날에 망치는 케이스.
정약용의 대과 불합격이 남인인 그를 견제한 노론의 입김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는 음모론이 있는데 하필 남인 영수인 채제공이 주재한 시험에서 정약용이 합격한 사실이 음모론의 주된 근거가 된다. 물론 음모론에 대응하는 반론 또한 존재한다. 단국대 사학과 김문식 교수는 사암연보의 기록을 토대로 남인 계열인 정약용이 갑자기 출세하거나 급제하면 노론의 공격을 받게될까 우려해 정조가 천천히 급제시켰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의 반응을 보면 건국대 사학과 신병주 교수와 당시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였던 최태성도 이 주장에 동의하는 모양[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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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20] 하고 등용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받고 해미에 유배된지 10일만에 풀려난다.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정조가 청나라에서 수입한 기기도설을 전해주고 연구하도록 해서 이를 바탕으로 거중기와 녹로(轆轤)[21] 를 제작하고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이었던 수원화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 연천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22] 허나 이 일은 후에 그의 발목이 잡히는 큰 계기가 된다. 서용보는 파직되었음에도 화려하게 부활하여 후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의 반열에까지 오르는데 순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총애가 깊어 이를 기반으로 권세를 휘두른다고 당대 유생들에게 비난을 듣기도 했으며 훗날 정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편찬 위원에까지 참가하게 되었고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정약용을 괴롭힌다.
이후에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년) 3월 신유박해 때 두 형과 함께 경상도 장기현(오늘날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유배되었다. 노론에서는 정 씨 형제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셋째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만 순교를 택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이후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23] 되었다.[24]
정약용이 18년 동안 귀양 생활을 조정에서 끊지 못했던 것도 영의정이던 노론 벽파의 거두 서용보가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25][26]
강진이 그의 외가가 있는 지역이었고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기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다. 해남에 있는 '녹우당'이 해남 윤씨의 종가로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을 지어놓았다. 바로 이 집안이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종가다. 신위를 불태워 처형된 윤지충, 권상연은 정약용과 먼 외가 친척 사이가 된다. 그런데 하필 강진현감이 노론 벽파의 맹장 이안묵이였는데 이안묵은 금평군 이제의 증손이고 이하술의 손자였으며 종친의 후손이였는데 이안묵은 서학의 추종자의 친척이고 남인인 정약용을 못마땅히 여겨 유배지에서 정약용을 냉혹하게 대했고 정약용도 이안묵 재임 3년 동안 유배지에서 힘들었다. 이안묵은 강진현감에 있었을 때 토색질을 하여 탄핵당하고 권유와 합작해 대혼저지기도 사건에 가담하여 역적으로 몰려 정법당했다. 진짜 정약용을 괴롭힌 사람은 노론에서 악연인 서용보와 친했지만 서학 문제로 원수가 되버린 이기경과 노론 벽파의 강경파인 이안묵이 되겠다.
처음에는 정치 제도를 새롭게 수립하는 방례초본을 만들었으나 자신의 처지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 제도 개혁은 포기하고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 경세유표를 썼다. 목민심서는 지방관이 부패하지 않도록 권고하기 위한 책이고 흠흠신서는 공정한 재판을 논한 책. 실학뿐만 아니라 조선의 유학 전체를 아우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유배되어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연구의 성과가 나타나는 유배 후반기에 탈고된 것이 많다. 정약용을 공격한 노론 벽파가 몰락했지만 당시 정국에는 평지풍파가 일어났었기에 조정에서는 정약용의 유배를 잊어버리고 석방하지 않았다.[27] 아들들이 가끔 석방을 위해 격쟁(왕의 행차에 꽹과리를 치면서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기록도 있고 그의 죄안을 삭제하려다가 도리어 공격당하는 기록도 있다. 이 시기에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가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1818년 8월에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저술 활동에 힘쓰며 여생을 보내다 1836년 2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4세. 정약용이 사망한 날은 다름 아닌 60주년 결혼 기념일(회혼일)이었다고. 정약용이 죽은 2년 후 15세에 약혼을 맺었던 부인 홍씨도 세상을 떠났다.
정조와는 그야말로 소울 메이트인데 젋은 시절부터 술자리고 개인적인 자리까지 항상 불렀다고 한다. 정조 사후 그는 박해를 받지만 정조의 증손자인 헌종이 즉위하면서 달라지는데 헌종은 안동 김씨를 밟으며 개혁을 추진하던 개혁 군주였고 김정희, 조병헌 등 유배를 가있던 개혁적 성향의 선비를 데려와 개혁을 추진하였다. 일설에는 정약용이 죽은줄 모르고 벼슬을 다시 제수하려 했으나 죽은 것을 알고 슬퍼했다는 야사가 있다.
4. 사상과 학문
그는 유학자 겸 실학자 겸 정치가 겸 법과 형사재판, 그리고 법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지리학과 의학에도 손을 댔으며 언어학자, 아동 교육학자, 필력 좋은 작가 겸 시인, 건축가, 이하 다수라고 할수 있겠다. 그야말로 만능 프로페셔널.
4.1. 유학
원래 유학자인만큼 사서 육경에 관한 해석들이 있다.
- 경세유표(1808년)
- 마과회통(1798년)
- 타맥행(보리타작노래)
- 3론
- 흠흠신서(1822년)
- 아방강역고(1811년 - 1813년)
- 아언각비
- 아학편
현재 유학계에서는 정약용의 유학에 대한 관점을 주자에서 공자로의 회귀라고 보고 있다. 당대의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해석을 따르고 감히 주자를 비판하지 못했다.
그런데 정약용은 주자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받아들여 '논어고금주'란 논어 주석본의 통합본을 펴내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오규 소라이와 같은 일본의 유학자들의 해석까지 참고한 것은 대단한 점. 그런데 '일본이 이렇게 유학이 발달했으니 이제 일본은 조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란 생각을 한 건 빗나갔다. 일본이 나중에 서양 학문과 함께 제국주의도 받아들인 것까진 보지 못했기 때문.
그러한 점 등 이런저런 이유로 2000년대에 접어든 현재에도 유학과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유학자. 졸업 논문을 써오면 90%가 정약용에 대해 써 오는 신나는 일이 벌어진다.
4.2. 토지 제도
또한 중농학파의 실학자로서 여전론을 주장하였다. 간단히 설명하면, 국가가 장기적으로 토지를 사들여 빈농에게 배분하고, 아직 사들이지 못한 토지는 농민들이 골고루 소작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전남 강진군으로 유배 후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경세유표에서 중국식 정전제로 토지 제도 개혁 방향을 변경 하였다. 다소 아이러니한 것은, 애시당초 여전론이 중국의 정전제를 모델로 조선의 현실에 맞췄던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조선 현실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해석해야 마땅하다.
4.3. 문학
애절양이라는 노래도 기록했다. 이는 백성들이 군역의 고통에 시달린 나머지 '이렇게 아이를 낳은 내 물건이 죄다'라는 의미에서 고자되기를 선택해버린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 시의 형식은 지키면서도 그 내용은 민중의 고통을 정면으로 다룬 것으로 시의 내용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것으로 유명하며, 시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시는 시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비판하였다. <애절양>은 한국 역사에 남은 사회 비판 시가 중에서도 손가락 내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명시라서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시다. 또한 경기도 암행어사 직을 수행하다가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지은 한시 '적성촌에서'[28] 역시 오늘날까지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를 비판하는 데에 자주 언급되는 한시 중 하나다. 안빈낙도를 노래한 타맥행(打麥行, 보리타작이라는 뜻.) 역시 자주 언급되는 작품.
당시 폐단이 심했던 풍수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에 대해 비판한 적도 있다. <풍수집의>를 통해 풍수 자체를 학문적으로 분석한 적도 있지만, <풍수론>에서 '말라 비틀어진 뼈가 어떻게 산 사람에게 복을 내릴 수 있는가'라며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정약용 자신이 죽을 때도 유언으로 '괜히 명당 찾으려고 지관에게 물어보지 말고 그냥 고향 뒷산에 묻어 달라'고 할 정도였다. 유언대로 다산은 광주 마현의 고향집 뒷편 언덕에 묻혔다. 재미있는게, 현대의 풍수 전문가들 중에는 정작 정약용의 묘소가 훌륭한 명당이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행정 구역이 변한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속한다.
문학적으로도 굉장한 성과를 냈다. 여러 문학론을 전개하는 한편 시문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중국의 것을 벗어나서 조선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내용과 표현 면에서 독특한 작품들을 여럿 창작했다. 그러나 당대 사대부들의 문자가 한문이었기 때문인지 결국 한시만을 중점적으로 남기는 데 그치고 국문시가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소설문학 쪽에는 비판적이어서, 당대에 흥미 위주로 유행하던 소설들을 모두 퇴출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는 북학파의 실학자이며, 호질을 쓴 문학자로 유명한 박지원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박지원 쪽이 더욱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웠던 반면, 정약용은 냉철하고 꼼꼼한 면이 더 강하다. 소설을 배격한 것도 그 내용이 현실의 문제를 바르게 인식하고 바로잡기보다는 흥미 위주의 허무맹랑한 쪽으로 흘러가는 데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4.4. 법의학
평소 법의학에 관한 저서를 저술하기도 했고 본인도 영민한 인물이라는 점이 반영되었다. 흠흠신서에선 조선시대에 벌어진 살인 사건들에 대하여 상세한 사건 내역과 해결, 범인들에 대한 이야기 및 미지의 사건으로 끝난 살인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까지 싣고 있다.
그런데 그 사건 가운데에선 인체발화 사건까지 들어가있다. 1808년 두 남녀가 타죽었는데 옷은 멀쩡하고 사람만 재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방화라고 하기에는 방바닥조차 탄 잿자국 빼곤 깨끗해서 당시 포도청들 사건 기록도 미해결로 끝났는데 정약용도 이 사건을 미해결로 처리한다.
현대 법학의 측면에서 본다면 정약용의 방법론은 상당히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다 할 수 있다. <흠흠신서>에서 "고을 수령이 괜히 자비를 베푼답시고 중범죄자의 처벌을 가벼이 하는 것은 쉽게 재범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니, 일벌백계가 옳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법학의 사상적 바탕이 되는 여러 학문들과는 전혀 다른 학문적 배경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정약용의 방법론에 대한 현대 법학적 관찰에는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29]
5. 저서
주요 서술로는 여유당전서 500여권에 포함되어 있는 사서 육경에 관한 저작들, 1표2서(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3론, 마과회통, 아방강역고, 아언각비, 아학편 등이 있다. 500여권의 전서중 연구 및 번역이 이루어진 것은 그 반 정도. 워낙 학문 분야가 광범위해서 고르게 연구되지 않았다는 평도 있다. 그래서 아예 다산학이라고 따로 분류할 정도이며 한글로 완전히 풀이된 저서는 절반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2018년 현재도 계속 연구되며 번역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정약용/저술 문서 참조
6. 한국 천주교와의 관계
초기 조선 천주교회의 신자 중 하나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례명은 사도 요한.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권철신, 이총억 등 남인 계열 학자들과 함께 천진암에서 천주교 서적들을 읽고 토의하곤 했는데 그들은 천주교를 신앙으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였던 천진암은 한국 천주교의 시발점으로서 성지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 행적에 논란거리가 있으며 한국 천주교 입장에서는 X맨 같은 존재.
본래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였지만, 신해박해(1791년) 당시 조상의 제사를 불허하는 교황 비오 6세의 교서가 내려지자 대부분의 양반 신자들과 함께 배교하였다. 이후 신유박해(1801년) 때는 형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문제로 같이 국문을 받았으나, 정약종의 집에서 발견된 문서에서 '정약용이 모르게 해야 한다', '형제가 함께 서학(천주교)를 할 수 없으니 내 죄다.' 같은 문서가 발견되면서 해당 시점에서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혐의가 사라진다.
오히려 정약용은 권철신, 황사영 등을 고발했다. 나아가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를 추쇄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믿음이 약하고 사리 분별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노비나 어린이를 중점적으로 심문하여, 천주교 신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방법이었다. 어떻게 보면 심리적 심문의 한 방법이니 천재적 발상이긴 하다. 덕분에 북경 천주당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세례성사를 받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자 정약용의 매부이기도 했던 이승훈은 정약용에 대해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분노했고, 다른 신자들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다문 반면 정약용은 자진해서 자신이 세례성사를 주었다고 자백할 정도였다.
정약용은 이런 행적에도 불구하고 신유박해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하나는 워낙에 신유박해가 정치적 성향이 컸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형인 정약종에 대해서 고변하라는 것은 거부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후 행적. 과연 이후에 정약용이 배교자로 남았는지, 아니면 회개하고 천주교로 원복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믿었음을 후회하는 글을 여럿 남겼으며, 아무도 볼 위험이 없고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묘지명[30] 에서조차 천주교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정약용이 끝까지 배교자로 남았다고 간주하고 있다.
반면 샤를르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약간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주요 참고 문헌으로 작성했다고 하나 <조선복음전래사>가 실존하는 서적인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많다. 달레 신부는 이 책이 박해 기간 중에 땅에 묻혀 유실되거나 가족들이 비본(秘本)으로 소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재로 고종 때 정약용 문집이 <여유당전서>로 출간되었을 때 공개되지 않은 저서가 일제강점기에 출간되기도 했는데, 거기에 <조선복음전래사>는 없었다. 허나 일제강점기에 공개된 비본 중 앞서 언급한 자찬묘지명과 신유박해 때 유배간 친지들 묘지명이 있었다. 이에 실제 <조선복음전래사>라는 책은 없고, 달레 신부가 정약용의 묘지명들을 그리 부른 게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일단 이 <조선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정약용이 배교 행위에 대해 참회하였으며, 수시로 몸에 고통을 가하는 보속 행위를 하였고, 죽기 전에는 마침 조선에 들어와 있던 중국인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31] 에게 병자성사를 받았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동일한 얘기가 정약용의 집안에서 구전되고 있다고 한다. 기록이 없는 것은 천주교로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 상태니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원복했다는 기록을 남기긴 힘든 상황이기도 하고 실제로 신유박해 시기에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처형된 3남 정약종 집안은 나주 정씨 문중에서 축출되었다가 1961년 원복하였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이후에 가까이 했다는 물증으로, 정약용의 무덤을 이장하기 위해 발굴했을 때 십자고상이 실제로 출토되었다. 현재 이 십자고상은 부산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즉 정약용의 장을 치르고 관에 유해를 넣을 때 다가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람들이 천주교인이었으며, 그들은 정약용이 죽는 순간 천주교인이었음을 확신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정약용이 배교하여 다른 신자들을 체포하는데 적극 협력해서 '''천주교인들의 원수'''쯤으로 생각되고 있었는데 십자가를 함께 묻어줬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당시 한 동네에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형수 유소사 세실리아와 조카딸 정정혜 엘리사벳도 살고 있었다. 정약용의 직계 후손도 4대손부터 천주교로 분명하게 원복했고, 그 전에도 박해를 피해 대놓고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지는 않아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현재 정약용 직계 7대손인 정호영이 정철상과 정하상의 순교로 대가 끊긴 정약종의 후손까지 대표하고 있다.
단 십자고상은 가짜 성유물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종손인 정호영이 "정약용의 묘는 이장이나 파묘를 한 적이 없다"고 십자고상의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 반면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서는 "정약용의 후손에게서 기증받았다"는 말을 제외하고 언제 이장했으며 누구에게 언제 이 유물을 받았는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 십자고상의 진위에 대한 논란 때문에 바티칸박물관 전시도 무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기사
일단 한국 천주교에서는 딱히 정약용을 교회의 위인으로 밀고 있지는 않다. 한국 천주교는 신유박해 당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추진하였지만, 이 당시의 배교로 인하여 정약용은 시복시성에서 제외되었다는 것만 봐도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에서 정약용을 위인으로 삼는 것과 시복시성은 약간 뉘앙스가 다른 문제다. 정약용은 일단 순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복시성이 추진되더라도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최양업 신부와 같이 '증거자'에 들어야 하는데 당연히 조건에 한참 미달한다.
하지만 일부 신자들이나 박물관을 중심으로 정약용을 천주교의 위인으로 밀고는 있다. 그 때문에 한문학과 한국 철학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천주교가 정약용의 사상적 공헌을 가로채려는 행위 아니냐는 비판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천주교 입장에서도 정약용은 배교자이고, 원복했다는 확증이 없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다산학의 권위자 박석무는 정약용이 천주교인이었냐는 질문에 '''"아직도 그런 얘기가 돌고 있느냐?"'''며 불편한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진다.[32]
이게 중요한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 철학사를 다시 쓸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정약용의 사상적 기반이 유신론에 있는지 무신론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단서라는 것이다. 물론 단적으로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 규정하기보다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적어도 그가 천주교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있고, 유신론에서도 동양의 전통 사상과 서로 넘나들면서 학문적 장치로 활용했다는 연구도 있어 전공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정약용이 초기에는 확실히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이다. 동시에 유학자기도 했고.
7. 개인적 일화들
정약용은 술을 잘 못했는데 정조는 애주가 중의 애주가라서 정조가 술 따라줄 때는 정약용 본인도 영 힘들었던 듯. 하필 정조의 술버릇이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간다는 주의였으니...... 소주를 필통에 따라줬다는데, 요즘으로 바꾸면 '''500cc 맥주잔에 보드카를 따라준 격''', 아니 혹은 '''그 이상'''이다.[33] 이 때문인지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편지로 교육하면서 술을 가급적 피하고, '원샷'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며 술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상단 생애에 언급된 정약용과 차의 관계에 관련해서 더 첨언해 보자면 확실히 그는 차(茶)의 달인이다.'''나는 태어난 이래 아직까지 크게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어, 나 자신의 주량을 알지 못한다. 포의(布衣)로 있을 때에 중희당(重熙堂)에서 삼중소주(三重燒酒)를 옥필통(玉筆筒)에 가득히 부어서 하사하시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마시면서 ‘나는 오늘 죽었구나.’라고 마음속에 혼자 생각했었는데, 몹시 취하지 않았었다. 또 춘당대(春塘臺)에서 임금님을 모시고 고권(考券)할 때에 맛있는 술을 큰 사발로 한 그릇 하사받았는데, 그때 여러 학사들은 크게 취하여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남쪽으로 향하여 절을 올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연석(筵席)에 엎어지고 누워 있고 하였지만, 나는 시권(試券)을 다 읽고, 착오없이 과차(科次)도 정하고 물러날 때에야 약간 취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내가 술을 반 잔 이상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는 것이다. 소가 물을 마시듯 마시는 저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는 적시지도 않고 곧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무슨 맛이 있겠느냐. 술의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다. 저 얼굴빛이 주귀(朱鬼)와 같고 구토를 해대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자들이야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 요컨대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대부분 폭사(暴死)하게 된다. 술독이 오장육부에 스며들어 하루아침에 썩기 시작하면 온몸이 무너지고 만다. 이것이 크게 두려워할 만한 점이다.'''
다산 시문집 권21 <유아(遊兒)에게 부침>
위에 기술되었다 시피 정약용은 한방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아암 선사에게서 배우기 이전에도 본래부터 차에 관심이 많았으며 스스로 능히 독자적 연구와 제조마저 가능하였다. 다산초당에서 칩거할 당시 호구지책을 강구하는 와중에서도 재배하였고 이를 일종의 약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한방의 구증구포(九蒸九泡)의 원리로 차를 달이고 농축해 장기간의 보존이 가능하도록 '떡차'를 주로 만들었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정약용과 한반도에만 전래되는 차의 제조 방식이다. 다만 그는 차를 즐겨 음용하는건 한민족의 체질상 알맞지 않고 건강을 다스리는 일종의 약의 연장선으로 여긴 흔적이 명확하다.
고려 시대 이후 조선조에 억불과 멸불 정책의 반복된 시행 과정과 성리학의 지배가 장기화되어 중국의 다예(茶藝) 일본의 다도(茶道)가 흥성하는 와중에도 유독 차의 위상이 조선에선 맥을 추지 못한다. 이렇게 한반도의 차(茶) 문화가 대다수 소실되는 와중에도 그 맥은 계속 이어져 갔는데, 초의선사는 오늘날 한국의 차 연구에서 선구적인 인물로 존재한다. 바로 이 초의 선사에게 떡차를 비롯해 차를 가르친 이가 바로 정약용이리라 학자들은 짐작하고 있다.#
활쏘기, 말타기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학자임을 감안한다면 이상한 것도 아니지만.[34] 여유당전서에 직접 써놓았는데 정약용 뿐 아니라 규장각 각신들은 하나같이 10순(50발)을 쏴서 4발도 못 맞췄다고 한다. 덕분에 자신을 비롯한 규장각의 각신들을 정조가 북영(훈련도감의 본영)에 가둬두고 20순(100발) 중 최소 20발은 맞춰야 풀어주게 했다. 나중에는 5발 중 3발을 맞출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었다고 적어놓았는데 그 와중에도 깨알같이 정약용 본인이 가장 으뜸이었다고 자랑한다. 정약용 본인도 선비의 육예 중 두 가지를 못 하는 것에 대해 자신 활쏘기 훈련 부족 뿐 아니라 무를 천시하는 세태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며 한탄했다.
주역에 뛰어나 미래를 예측하는 데 뛰어났다고 한다.
2006년 TV쇼 진품명품에서 한 건물주가 폐지 줍는 할머니에게서 구매한 책을 가지고 나왔는데, 이 책이 정약용이 직접 아들들을 위해 작성했던 하피첩(霞帔帖)으로 밝혀졌다.[35] 2012년 7월 15일에 방영된 TV쇼 진품명품에서 다산이 직접 작성한 처방전이 최초로 발견되었다.
젊을 적엔 도박을 즐겨서 투전과 골패를 연구했고 진주 촉석루에서 기생들이랑 쌍륙을 하다가 3천 전을 따서 뿌린 적도 있었다.(출처: 다산시문집 18권 서 김절도사에게 보낸 편지) 하지만 훗날 자신의 저서에서 도박을 경계하는 글을 남겼다.
어린 시절에는 하도 씻기 싫어해서 형수인 큰형 정약현(정약용과는 11살 차이)의 아내가 붙잡고 박박 씻기는 행사가 매일 일어났다고 한다. 장을 담그는 것처럼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 함께 저포놀이를 하며 놀아 주는 등 이 형수가 정약용을 많이 챙겨줬다고.
천연두와 관련이 많다. 두 살 때 홍역을 앓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다행히 홍역 전문의로 유명했던 이헌길의 구제를 받아 살아났다. 이 때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썹 위에 흉터가 남아 마치 눈썹이 세 개가 있는 것 같이 보였고, 때문에 자신의 호를 삼미자(三眉子)라고 했다. 10세 이전의 시문을 모아 자신의 문집을 엮어서 ‘삼미자집(三眉子集)’을 만들었다. 비극적이게도 어린 아들을 천연두로 잃었고, 슬픔에 벅차 지은 시가 여유당전서에 남아있다. 이후 천연두에 대한 연구를 해 <마과회통>을 펴냈다. 한편 자신를 살려준 이헌길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유사역사학자들은 한사군 한반도설이 식민 사관이라 주장하는데 사실은 정약용도 한사군 한반도설을 주장 했다.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참고.
또한 유사역사학자들이 툭하면 주장하는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를 되찾자'라는 식의 주장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 적이 있다. 원문('여유당전서 시문집 12권 요동론') 요약하면, 조선의 힘으로는 요동을 차지해도 나라에 피해만 크다는 주장이다.[36] 요동반도 항목에서 전문을 볼 수 있다. 경세제민을 주장하던 정약용다운 생각.
고등학교 사회탐구 영역 중 윤리와 사상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주된 적 중 하나다(...). 퇴계와 율곡의 사칠논변에서 이미 질릴대로 질려버렸는데 설상가상으로 정약용마저 여기에 참전(...)하여 성기호설(性嗜好說)을 제창하니...
노비 종모법을 실시한 이래 노비가 감소하자 이를 비판하며 오히려 그 이전의 악습인 일천즉천(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일이 있다. “신해년(1731년) 이후 출생한 모든 사노(私奴)의 양처(良妻·양인 신분의 처) 소생은 모두 어미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하니, 이때부터 위는 약해지고 아래가 강해져서 기강이 무너지고 민심이 흩어져 통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노비법을 복구하지 않으면 어지럽게 망하는 것(亂亡)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발언은 정약용에게 일부 탈성리학적 일면이 있음만을 강조하며 조선 후기 개혁 담론의 최선봉에 세우고, 정약용을 기준으로 조선 후기의 변화와 식자층의 담론을 평가하는 현 대중의 인식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준다. 정작 대중들에게 수구꼴통 취급받는 서인 노론이 바로 정약용이 폐단으로 규정한 노비종모법을 주장했던 이들이다.[37]
기록에 의하면 얼굴이 희고 단아하게 생겼으며, 정조가 정약용을 보고 아름답다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즉 '''외모도 되는데 온갖 지식을 죄다 섭렵하고 인간 됨됨이까지 좋은 완전체, 엄친아였다.''' 그러나 정약용이 너무 뛰어난 인물이다보니 반대급부로 정적이 너무 많아져서 정조 승하 후에 괴롭힘을 받게 된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역인 현릉원의 식수를 마무리하고 논공행상을 하려고 하는데 수레로 싣고 온 문서뭉치를 표 하나로 정리했다는 일화가 있다. 식목연표(植木年表)에 발함 해서 농담조로 "정약용은 엑셀 사용의 선구자였다"라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
참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8. 인간관계
8.1. 가족
정약용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월등하게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 정약용의 형제는 모두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나다.(<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라는 책이 있을 정도)
맏이인 정약현은 다른 세 동생들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진다. 그래도 1795년 식년시 진사 3등으로 급제한 어엿한 과거 합격자 (벼슬은 못 했다). 아버지 정재원의 상을 치를 때 마당에 누대를 짓고, 상복을 벗자 그 누대를 망하루(望荷樓)라 이름붙이고[38] 매일 아침 올라 아버지 묘소를 바라봤다는 효자다. 자기 집을 수오재(守吾齋)라고 이름붙였는데, 정약용은 이를 떠올리며 "나는 형처럼 나를 지키지 못하고 살았다"라고 자책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 사람의 사위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조정의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불러온 황사영이다. 황사영의 아내 정 마리아[39] 는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황사영과 정 마리아의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서 자랐다. 다만 정약현 본인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천주교 때문에 어쨌거나 풍비박산나게 된 집안을 지키다가[40] 1821년 전염병으로 생을 마쳤다. 정약현 사망 3년 전에 해배된 정약용이 묘지명을 지어줬다.
둘째인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 이후 섬 주민들과 가깝게 지내며 책 하나를 쓴다. 그것이 그 유명한 자산어보. 정약용이 '''"약전 형님이 나보다 낫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다만 정약전은 유배에서 풀려난 정약용과 달리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정약용은 특히 둘째 형인 정약전과의 우애가 남달라 학문과 정신적인 면 모두 크게 의지하였으나 결국 유배 이후 임종시까지 평생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셋째인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본래 도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그는 형제들 중에 가장 늦게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나,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신앙 생활을 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이었고, 신유박해 당시 약전, 약용과 달리 끝까지 배교하지 않아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 순교 과정이 놀라운데, 설화에 따르면 처형 때 하늘을 보고 죽겠다며 누워서(!) 망나니의 칼을 받았고, 첫 칼질이 잘못되어 목이 반만 잘리자 일어 앉아서 성호를 긋고 다시 칼을 받아 처형되었다고.[41] 124위 복자로 시복되어 있다.
정약종의 가족은 특히 신실한 집안이었는지 거의 몰살당했다. 차남 정하상은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기 위해 30년 동안 동정을 지켰지만, 1839년 기해 박해 때 순교하며 한국 103위 순교성인으로 시성됐다. 장남인 정철상도 순교자고, 약종의 후처 유조이 체칠리아[42] 와 딸 정정혜 역시 한국 103위 순교성인이다. 장남 정철상도 124위 복자로 시복되었고, 시성 심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서자인지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복 동생 정약횡도 유명한 의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우애도 좋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보건대 다산의 아버지인 정재원은 '''자식 농사에서 역사상 보기드문 대성공 사례'''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다. 아들들이 모두들 엄친아들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막내(적자 중에서. 정약횡을 포함하면 넷째) 정약용은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겼고 손자들까지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니.
친인척 관계는 다음과 같다. 정조 대 명재상 채제공과 정약용 형제는 사돈 어른과 사돈 총각 관계이다. 정약용이 어머니를 여읜 후 정약용 형제를 키운 서모 김씨의 큰딸이 채제공의 유일한 혈육이자 서자인 채홍근과 결혼했다. 외가쪽으로 정약용의 어머니인 윤씨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손녀이다. 즉 정약용은 윤두서의 외증손이며 해남 윤씨 가문은 정약용의 외가가 된다. 더 올라가면 윤선도가 윤두서의 증조부이므로 이쪽으로도 연결이 된다. 진산 사건의 윤지충 바오로 역시 정약용의 외사촌.
정약용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차남 정학유는 역사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농사 지침 가사', 농가월령가를 저술했다.[43]
8.2. 당대 인물들과의 관계
정조가 초계 문신제를 통해 직접 키운 대단한 인재이고 그의 정치 활동은 사실상 정조가 죽은 뒤 끝나기 때문에 정조를 묘사할 때는 열에 아홉은 정약용이 언급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실록에서 정약용의 기록은 서학(천주교)과 관련하여 나온 게 전부다. 정약용이 활약했다던 화성 건축에서도 그가 언급된 기록은 전무하다. 정확하게는 이익에서 이어지는 남인계열 인물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예를 들어서 안정복은 공서파로 영조 대에 출사해서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가르치던 세자 시강원에도 들어있었는데 정조 이전의 기록이 전무하고 60대 이후인 순조실록부터 기록이 나온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실감나는 부분이다. 이후 순조실록에서는 효명세자와 순조가 죽기 직전에 정약용의 의학 지식을 높이 사 그를 불렀던 기록이 있다. 하지만 둘다 너무 늦어서 미처 정약용이 도착하기 전에 사망하였다.
정조 암살설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인물이다. 정조 사후에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다고 직접 주장했던 것.
아암 스님에게서 다도를 배워서 다산이라는 호가 생겼다는 설도 있고, 목민심서에서는 자신이 유배당한 장소의 뒷산이 다산이라서 호를 다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초의 스님이나 추사 김정희 등과도 서신 왕래를 하는 등의 교류를 했다. 그리고 이들 중 1811년에 죽은 아암 스님을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친교를 유지했다.
실학계의 거두인 연암 박지원과는 동시대의 인물(25살 차이)이지만, 직접적인 접점이 거의 없다. 그런데 박지원이 일원인 백탑파 중 박제가는 정약용과 친분이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정조가 매우 관심을 기울였던 인사라는 공통 분모도 있었다. 덕분에 마과회통 저술 당시 박제가와 함께 천연두에 대한 치료법인 종두법을 연구했다.
8.3. 윤치호의 평가
서인 노론 계열의 후손이며 소론 쪽 등에도 일가친척들이 있던 윤치호는 위의 언급처럼 정약용을 높이 평가하면서 노론벽파의 후손들은 1930년대까지도 다산 정약용을 싫어하여 정약용의 책은 사지도, 읽지도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약용 사후에도 120년이 지난 뒤에도 노론의 후손들이 그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이다.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다. 그는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의 정적들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학자의 진가를 알고 있었던 정조(正祖)가 그를 어여삐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처형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16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 윤치호, 《윤치호일기: 1916년 ~ 1943년》 (김상태 편역, 역사 비평사, 2001년) 613페이지
9. 현대의 정약용
고향이 현재 남양주시 영역이다. 엄밀히 말하면 고향은 남양주가 아니라 광주다. 현 남양주시 조안면 지역은 조선 시대에는 광주부 초부면이었다. 당시에는 남양주도 없었고, 조안면이 양주군로 넘어온 것은 구한말인 1906년의 일이다. 현재 남양주 시에서 마스코트로 활용하고 있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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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시에서 공식 제작한 정약용 캐리커처. 길거리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방법은 캐리커처를 도입한 남양주 PAY N 지역화폐 환영 문구가 붙어있는 가게를 보면 된다. 들고 있는 책은 <목민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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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다산의 묘소를 중심으로 다산 유적지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 경기도에서 건립한 실학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건너편에는 다산 생태 공원도 위치하고 있다. 이 일대로 가는 교통 수단은 남양주 버스 167, 63, 56, 양평 버스 8-8, 양평 버스 2000-1번이 있으며 직접 연계는 56번 뿐이다(나머지 노선 이용시 다산유적지 입구 로터리 하차 후 도보이동).
강진군에 있는 유배지인 다산초당 또한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집필한 서적'''만''' 해도 약 500권이 넘다보니, 그의 저서들은 지엽적인 문제로 유명한 공무원 한국사 시험에 정약용은 늘 좋은 소재이다(...) 이 책의 저자가 한(또는 아닌) 행동 / 업적을 고르시오라는 문제를 내고 관련 보기나 답으로 지엽적인 것을 낸다면... 물론 학원가에서는 500권 및 모든 행적을 다 외우게 하는 것은 아니고 자주 나오는, 일명 '메이저'를 추려서 외우게 하는 듯.
5만원권 지폐 인물 후보로도 올라간 적이 있다. 크게 역사적 여성 인물, 강점기 독립 운동가, 과학 기술인의 세 범주로 나뉘어져 있던 후보군에서 맨 마지막에 속해 있었는데, 이 중 과학 기술인 도안을 지지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정약용에 대한 지지가 꽤 많았다. 대외적으로 문제 될 일이 없으며, 사상이 실용적이며 미래지향적이었고, 인간적인 평가도 훌륭했던 점에서 꽤 괜찮은 후보로 평가받았다.
현재 그의 직계 6대손 정해인이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또다른 후손인 정일우도 배우로 활동중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가톨릭 신자이기도 하다.
2017년 12월 18일부터 경기도 도농동과 가운동이 다산동으로 바뀌었다. 다만 현지 반응은 '''왜 바꿨음?''' 정도로 요약 가능하다. 도농동과 가운동 생활권은 생각보다 분리된 편이라 그리 단합성이 높은 편은 아니다.
9.1. 그의 이름을 딴 것들
서강대학교의 D관(다산관)은 그의 호를 딴 것이다. 그런데 서강대학교의 건물 이름은 가톨릭 관련 인물을 중심으로 정해지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배교 문제가 얽혀 있어서...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도 '다산정보관'이라는 이름의 도서관이 있다. 한기대의 이념인 '실사구시'에 꼭 어울리는 인물이라 따온 것으로 보인다. 1층 내부에 영정과 업적이 기록되어 있고, 도서관 앞에는 '다산 선생께서 이 앞에서 담배피지 말라 하셨다!'라는 표지도 있다. 도서관의 외부 벽면과 엘리베이터가 전부 유리로 만들어져있어 상당히 멋진 외관을 자랑한다.
한국경제신문에서 "다산(茶山) 경제학상, 다산 경영상, 다산 기술상, 다산 금융상"등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에도 다산 경제관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 5층짜리인데, 강의실 보다는 학과 사무실, 교수 연구실, PC실... 등등이 더 많다. 대부분의 경제학과 강의는 연결되어 있는 퇴계 인문관에서 진행된다. (이황의 호 퇴계 맞다.) 둘 모두 성균관 출신을 학교 건물에 쓴 예.[45]
아주대학교에서도 다산관이 있다. 인문대와 경영대가 같이 사용하고 있다.
강원대학교의 남자 기숙사 건물 중 하나의 이름도 다산관인데, 주변 기숙사(퇴계관, 율곡관)의 이름이 유학자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전통을 지킨듯. 게다가 강원 대학교의 교훈이 실사구시이기도 하다. 또한 강원도 인재 개발원의 기숙사 두 동 중 한 동의 이름도 다산관이다. 나머지 한 동은 율곡관.
서울과학기술대학교를 상징하는 건물인 다산관(등록문화재 12호)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본관이었으며, 해방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본관 건물이었다. 과거 건물 꼭대기에 시계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안전상 이유로 철거되었다. 학내 건물 번호는 2번.
세종대학교에도 다산관이 존재한다.
강원도 횡성군 소재 민족사관고등학교에도 다산관이란 건물이 있다. 이 건물과 충무공 이순신의 호를 딴 충무관 두 건물은 민족 사관고를 상징하는 건물이자 쌍둥이 수업동이다. 헌데 정약용이 이순신을 평가한 사례를 본다면 영 껄끄러운 연결이다. 원래 파스퇴르유업이 세운 것이라 한쪽은 의료진 지원 요구가 실질적 물량 공급 요청이었던 나머지는 자신이 다 해결한 전설적 명장이고, 파스퇴르가 붙인 우두법을 조선에서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주역이란 점이 붙어진 이유일 수 있다.
서울특별시에서 운영하는 다산콜센터가 바로 정약용의 호를 딴 것으로. 정약용처럼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알려준다는 취지로 전화 한통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또한 서울에는 그의 호를 딴 다산로도 있다.
북극의 다산 과학기지도 있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에는 '화서다산도서관'이 있다.
경상북도 영주시 소재 동양 대학교에도 다산관이 있다. 유아교육과나 사회복지학과 등 인문/사회 관련 학과가 사용 중이다.
다산신도시라는 신도시 명칭도 그의 호를 딴 것이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으며, 마침 남양주시는 조안면 능내리 일대에 정약용의 생가 및 그 주변을 관광지로 한 다산 유적지가 있기도 하다.
9.2. 대중문화에서
<영원한 제국>, <원행> 등의 정조의 시대를 다룬 소설 등에서는 정적의 행동을 사전에 간파하는 기민한 탐정의 역할을 맡는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조선추리활극 정약용>이라는 퓨전사극도 방영된 바 있다.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의 명탐정이 정조 시대라 및 나머지 사항(죄다 스포일러다. 해당 문서 참조.)을 미루어볼때 정약용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인 듯하다. 심지어 가제도 '''조선명탐정-정약용'''이었다고 한다.
탐정 역할로 나오지 않더라도 영민하고 다재다능하고 실학에 밝았던 선구자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해, 이산, 성균관 스캔들 등 사극에서도 지혜롭고 선한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산에서는 극 후반에 등장하여 활약상이 많지는 않으나 홍국영 퇴장 후 그를 대신하는 정조의 에이스로 활약한다. 학식이 뛰어난 먼치킨이나 과거 대과에는 번번히 낙방하고 있었으며, 성균관 담을 넘어다니다가(...) 평복 차림으로 미행중이던 정조 이산과 만나게 된다. 자기를 떠보는 정조의 말을 믿지 않고 '네가 왕이면 나는 영의정이다'라고 비웃지만... 기존의 정약용 이미지대로 온갖 첨단 과학지식을 활용하여 위기를 극복하거나,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백성들을 돕는 등 진보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인의 모습이 강조된다. 배우는 송창의.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안내상씨 특유의 개그 연기가 잘 녹아 들어가 더욱 개성있는 캐릭터로 탈바꿈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어린 정약용이 나왔으며 에필로그에서 성인이 되어 과거에 급제하여 정조 앞에 나아가는 장면이 나왔다. 이후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안내상씨가 정약용으로 다시 열연했다. 전작과는 달리 노년의 모습.
2017년 1월 KBS 1TV에서 다산 정약용이 방영될 예정 이었으나 무산됐다.
조선왕조실톡 2017년 6월 7일자 연재분에서 정약용의 유배생활 당시 집대성한 학문을 '다산위키'라고 패러디해놓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등장했는데 여기서는 정군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로 나오고 나중에 쿠키영상에서 성인이 된 모습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