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

 



'''채제공
蔡濟恭
'''
<colbgcolor=#94153e> '''시호'''
'''문숙(文肅)'''
'''본관'''
평강 채씨
'''이름'''
채제공(蔡濟恭)
''''''
백규(伯規)
''''''
번암(樊巖), 번옹(樊翁)
'''출생'''
1720년 음력 4월 6일 조선 충청도 홍주목
'''사망'''
1799년 음력 1월 18일 조선 한성부
1. 개요
2. 생애
2.1. 노론 벽파와의 갈등
2.2. 업적
2.3. 채제공 vs 유생
3. 사후
4. 저작시
5. 창작물
6. 기타
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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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채제공(蔡濟恭)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영조정조 때 살았고 당색은 남인이며 시파[1]에 속한다. 조선후기 내내 탄압받는 야당 이미지였던 남인 중에서는 가장,그리고 최후의 거물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


할아버지는 참판 채성윤(蔡成胤)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채응일(蔡膺一)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 현감 만성(萬成)의 딸이다.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나 1743년(영조 19년)에 병과로 과거에 급제했다. 동부승지 시절 사도세자후견인이 되어 사도세자가 영조와의 갈등이 심각해졌을 때 이를 중재해 주는 역할을 주로 했다.
1758년(영조 34년)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한다는 교서를 내렸는데 당시 승지였던 채제공이 눈물까지 흘리며 만류하는 통에 그만두었으나 4년 뒤에는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모친상을 당해 내려가 있어서 사도세자를 돕지 못했다. 물론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사도세자는 결국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영조가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나중에 세손(정조)에게 말할 정도였다.
이후 정조 때에는 홍국영과도 잘 아는 사이였고[2]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여 선왕(영조)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등의 공격을 받아 이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 은거 생활을 하였다.
그럼에도 정조는 반대를 무릅쓰고 채제공을 중용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하려 했던 효심깊은 정조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1786년(정조 10년)에는 평안병사에 제수했다.
남인 채제공의 복귀에 노론 벽파와 소론이면서 벽파에 우호적인 서명선 등이 손을 잡고 격렬하게 탄핵하였고 서명선은 "채제공이 역적이 아니면 제가 역적입니다!"라고 선언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도 채제공이 이전에 하던 벼슬의 높이를 생각하면 별 거 아니다. 그런데 막상 김종수, 심환지 등 노론은 서명선이 소론이라는 이유로 도리어 원수 취급했다.
1788년(정조 12년) 2월에는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1790년(정조 14년)에는 좌의정, 1793년(정조 17년)에는 영의정을 역임했다. 좌의정에 있을 때는 영의정이 없어 독상이라고 불려 실제 조정의 영수였는데 1791년 신해통공을 적극 추진하는 입장에 섰다. 그러나 노비종모법을 폐기해 많은 양인천민으로 돌리고 서얼 허통은 국법이 아닌 집안 별로 행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3]
채제공은 영의정에 오른 직후 승부수로 사도세자의 신원을 하자는 동호지필(董狐之筆)이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노소론을 막론하고 조정 내에서 반발이 심해지자 정조는 영의정 채제공을 파직하는 대신 벽파 청명당인 좌의정 김종수도 함께 파직해버린다. 이렇게 쌍으로 묶이며 임용과 강경 상소, 파직과 낙향을 반복하던 채제공과 김종수는 며칠 차이를 두지 않고 1799년 세상을 떠난다. 1800년 정조도 세상을 떠나니 정조 시대의 벽파와 남인의 대결도 이렇게 끝났다.
이른바 다섯 신하인 김종수, 심환지, 정민시, 서명선, 채제공은 정조가 아끼고 신임했으나 거기까지였다. 개인적으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정도로 불협화음이 심했고 정조가 이를 조율하고 제어하는데 힘이 부칠 정도였다. 재미있는건 5명 모두 1790-1800년대 사망[4]함으로써 정조 시대의 막도 내리게 된다. 그만큼 상징성이 강한 인물들인 것이다.
김종수가 세상을 떠난 이후 벽파는 정순왕후수렴청정과 함께 몇 년이나마 집권했지만 남인은 채제공 이후로 정승 하나도 배출 못할만큼 위축되고 신유박해로 그야말로 정계에서 퇴출당한다. 당초 채제공은 영조 시대의 탕평 분위기를 타고 성장했으나 정조가 채제공의 후임으로 키우려던 이가환형조판서를 1번 역임한 것 외에는 서인들의 반발로 인해 정승에 올라가지 못했다. 서인 일변도의 정국에서 채제공의 입지가 그만큼 불안했다는 증거이지만 거꾸로 말하면 남인에게 그만큼 중요한 거물이었다는 뜻.

2.1. 노론 벽파와의 갈등


과거 남인은 숙종 시절 갑술환국으로 사실상 박살났고 정조 시기 조정은 벽파가 원내 다수당이었다. 채제공은 이 판을 뒤집고 조정을 다시 남인 주도로 돌리기 위해 수시로 사도세자의 추숭을 건의했고 이에 따라 노론 벽파(특히 이들의 수장이었던 김종수)와는 극한 대립의 관계였다. 영의정이 된 이후 사도세자의 추숭을 건의하다가 바로 벽파의 역풍을 맞은 적도 있었다.[5][6]

2.2. 업적


이조전랑의 권한인 통청권과 자대권[7]을 없애 당쟁을 완화했고 신해통공[8]을 제정해 자유로운 상업의 발달을 하는데 이바지했는데 이 정책으로 조선 후기의 경제가 크게 발달했다.[9]

2.3. 채제공 vs 유생


1790년 음력 5월 22일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 날 당시 좌의정이었던 채제공이 갑자기 사직 의사를 나타냈다.
하루는 채제공이 권두(權頭. 정 1품 아문에서 보좌관 역할을 하는 일종의 비서. 주업무는 경호)와 함께 돈의문(서대문)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두 유생이 서로 건방지게 팔짱을 끼고 가마 옆에 서서 곰방대를 물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현대로 치면 비행청소년이나 일진들인 셈이다. 이 '시건방진 고딩'들의 짓거리를 보다 못한 권두가 담배를 그만 피우라고 훈계했다. 그러자 청년들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런 다음 이렇게 내뱉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자를 보고 담뱃대를 빼겠나(吾豈見渠而去竹乎).”'''

유생들은 담배를 빼고 사과해도 모자를 판에 "저 노인네가 뭔데 우리한테 담배 피우지 말라고 참견이냐"며 대든 것이다. 저 참고로 당시 채제공은 71세의 노인으로 두 청년의 할아버지뻘이었다. 수명이 짧고 조혼 풍습이 만연하던 시대에 마흔살이면 손자를 보는게 당연시되는 시대였다. 채제공 정도의 나이면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장수한 것이고, 조부를 넘어 넉잡아도 증조부뻘이다. 명색이 예를 중시하는 유학을 배운다는 것들이 자기 할아버지뻘 되시는 분한테, 그것도 ''' 한 국가의 재상'''한테 막말을 퍼부은 것이다. 게다가 채제공의 말에 따르면 두루마기도 걸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유생으로서의 옷차림도 엉망이었다는 뜻. 이 말을 들은 채제공은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그래서 권두가 하인들을 시켜 두 청년을 옥에 가뒀다.
두 청년의 이름은 김관순과 김병성이었다. 김관순은 돈령부 참봉 김세근의 아들이었고, 김병성은 동부봉사 김이의의 아들이었다. 돈령부는 왕실의 친족 중 종친이 아닌 인사들의 명단을 관리하는 부서이고 동부봉사는 한성부의 동부 관아에 속한 관료이다. 채제공에게 직접 저 말로 패악을 부린 청년은 바로 김관순이었다. 채제공은 하루나 이틀 정도만 붙잡아놓고 풀어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정종(人定鍾)이 있은 후 3경쯤(밤 11시~새벽 1시 사이) 되었을 때 중부학당의 유생 수십 명이 옥사 앞에 몰려온 것이었다. 이들은 전옥서 관리들에게 “지금 갇혀 있는 유생은 곧 중부학당의 장의(掌議)[10]이며 또 소청(疏廳)의 담당자이다. 너네 관원에게 말하고 대신에게 전달하여 풀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며 옥문을 때려 부술 기세로 과격 농성을 벌였다. 만약 두 사람을 석방하지 않으면 전옥서의 관리를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비변사에서 전옥서 관리들에게 심문한 내용을 보면 더 가관이다. 전옥서 관리들이 이걸 입직관(入直官)[11]에게 보고했고 입직관은 이들은 대신(채제공)이 체포를 명령했으므로 대신의 허락이 없이는 함부로 석방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내용을 학당 유생들에게 말하였으나 유생들은 물러나지 않고 계속 버티고 서서 “아 됐고 풀어내라고”식으로 전옥서 관리들을 거의 협박을 했다고. 이 과정에서 “너희들을 지금 당장 학궁으로 끌고 가서 때려 죽여줄까?” “우리가 지금 여기서 옥문의 자물쇠를 부수고 갇힌 사람 빼낼까?” 하는 식의 살벌한 말이 유생들로부터 나오기도 했다.[12]
소식을 들은 채제공은 더욱 괘씸해서 두 청년을 형조로 넘겼다. 그러자 다음 날부터 유생들이 채제공을 욕하고 헐뜯는 사발통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화가 난 채제공은 이들을 정식으로 고발해서 엄히 다스릴 작정을 했다. 하지만 김병성의 아버지는 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의 볼기를 치면서, 문제의 ‘담뱃대 청년’인 김관순의 할아버지도 ‘백배 사죄’를 구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위에 언급했듯이 두 사람의 아버지들은 겨우 정 8품 정도의 하급 관료 나부랭이였지만 채제공은 그냥 정1품도 아니고 조정 내 인사권을 틀어쥔 판이조사를 겸직하는 최고의 실세인 좌의정이었다. 게다가 예를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 그 정도 모욕 사건이면 정8품인 부친 따위는 파직으로 끝나면 다행인 수준이었으니 그냥 알아서 길 수밖에 없었다. 이에 채제공은 결국 화를 풀고 이들을 용서해주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여진이 계속됐다. “채제공이 유생들을 욕보였다”면서 “선비(유생)는 죽일 수 있어도 욕보일 수 없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온 것이다.[13]
이에 채제공은 크게 분노해 이렇게 말했다.

'''“대낮 큰 길가에서 홀옷 차림으로 담뱃대를 피워물고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앞으로 선비라는 이름으로 온갖 패악질을 해도 가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 다음 '''사의를 표하고 조정을 떠났다.''' 정조는 그런 채제공에게 “제발 돌아오라”고 사정한다. 그러면서 무리를 지어 전옥서로 몰려가 행패를 부린 주동자 및 가담자들을 엄벌에 처했다. 주동자는 '''‘과거 응시 종신 금지령’'''의 중벌을 받았고, 가담자 4명에게는 ‘응시 '''10년''' 금지령’을 내렸다. 과거시험이 당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면 주동자에게는 거의 매장 선고. 더 나아가 정조는 가담자들은 선비가 아니다라고 하며 아예 유적(儒籍, 유학자들의 가계, 학통 등을 기록하는 문서)에서 이름을 빼버리라고 명한다.
현대로 치면 국무총리가 길 가다 각각 행정안전부서울시 산하 구청에서 일하는 8급 지방공무원의 중고딩 아들들이 그것도 총리급 직위에 할아버지뻘 되는 분 면전에서 담배나 피우며 안하무인하게 군 것이다. 그래서 국무총리비서실 직원이 이들에게 담배 피우지 마라고 훈계하자 오히려 쌍욕을 퍼부었고, 근처 경찰서 유치장에 인계되자 또래 학생들이 떼로 몰려가 교정본부 소속 교정직 공무원들을 죽이겠다고 난동을 부린 셈이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사직을 요청하자 대통령이 만류하여 행안부와 교육부에 지시해 난동 부린 주모자들에게 공무원 시험 응시를 영구 금지하고 추종자들에게도 최대 10년을 금지했으며 학교도 제적시켜버린 격이다. 현대에도 뿌리 깊게 남아있는 공무원 선호 사상과 당시의 유교적 출세주의를 생각해봤을 때 당사자들은 제대로 인실좆당한 셈... 현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예나 지금이나 발 뻗을 자리를 보고 뻗어야 하며, 명분이 없으면 개기면 안 된다. 담배를 둘러싼 폐해가 유교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 이야기의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정조 14년 5월 22일 임인 4번째 기사이다.

3. 사후


1799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정조는 상당히 애통해하였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백성을 걱정하는 한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채제공이 별세했다는 비보를 들으니, 진실로 그 사람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내가 이 대신에 대해서는 실로 남은 알 수 없고 혼자만이 아는 깊은 계합이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 품부받은 인격이 우뚝하게 기력(氣力)이 있어, 무슨 일을 만나면 주저없이 바로 담당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그 기상을 시(詩)로 표현할 경우 시가 비장하고 강개하여, 사람들이 연조비가(燕趙悲歌)의 유풍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 이때부터 영고(寧考)(영조)께 인정을 받아 금전과 곡식을 총괄하고 세법(稅法)을 관장하였으며, 어서(御書)를 윤색(潤色)하고 내의원(內醫院)에 있으면서 선왕의 옥체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매양 주대(奏對)할 적마다 선왕의 웃음이 새로웠는데, 그때는 그의 수염이 아직 희어지지는 않았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참소가 여기저기서 빗발쳤으나 뛰어난 재능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극히 위험한 가운데서 그를 발탁하여 재상 지위에 올려 놓았었다. 이어 내각(內閣)에서 기사(耆社)로 들어갔고, 나이가 80이 되어서는 구장(鳩杖)[14]

을 하사하려고 했었다. 그 지위가 높고 직임이 나와 친근하였으며, 권우가 두텁고 은총이 성만하여 한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입을 못 열고 기(氣)가 빠지게 하였으니, 저렇듯 신임을 독점했다고 이를 만한 사람으로서 옛날에도 들어보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50여 년 동안 조정에 벼슬하면서 굳게 간직한 지절은 더욱 탄복되는 바인데, 이제는 다 그만이구나. 죽은 판부사 채제공 집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의당 관례에 의거해서 거행하되, 승지가 치조(致吊)하는 일은 홍 영부사(洪領府事)[15]의 전례에 의거해서 하고, 내각의 속관을 보내어 상제(喪制)를 돌봐주는 일과 호상(護喪)하는 등의 절차에 대해서는 각신(閣臣)과 대신의 전례에 의거해서 할 것이며, 성복일(成服日)의 치제(致祭)는 승지가 스스로 의당 거행할 것이나, 내각의 치제에 대해서는 또한 김 봉조하(金奉朝賀)[16]의 전례에 의거하여 제문(祭文)을 지어 내리기를 기다려서 각신을 보내 거행하도록 하고, 녹봉은 3년 동안 그대로 보내주도록 하라. 그리고 장사지내기 전에 시호를 의정하도록 하라."하였다. - 정조 23년(1799년) 1월 18일의 기사

정조 사후 1801년 그는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한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면서 삭탈관직됐으나 1823년 영남 만인소로 원상 회복되었다.

4. 저작시


그에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옛날에 가난해서 부잣집 사람들에게 많은 놀림을 받았으며, 산사에서 1년 간 공부한 뒤 각자 시를 쓰면서 회포를 풀었는데 그 때 그가 쓴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바람 불 때 해묵은 잣나무에는 매가 새끼를 치고(秋風古栢鷹生子)
>눈 내린 달 빈 산에는 호랑이가 정기를 기르도다(雪月空山虎養精)
이런 시를 듣자 어느 재상집 아들이 아무런 의미 없는 시라고 아버지께 이야기하자 재상이 이야기하기를 '매는 가을에 새끼를 치지 않는데 새끼를 치는 건 겉모양만 그럴듯한 양반 사람들을 가리키는 거고, 호랑이가 눈 내릴 때에 정기를 기르는 것은 자기 자신을 비유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채제공은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5. 창작물


  • 그는 사시였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김홍도신윤복이 상상만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대결을 할 때, 고명한 정승의 초상화를 사시로 그리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공격을 받자 채제공 본인(!)이 등장해서 사시인 것을 인증하고 김홍도 & 신윤복 팀의 승리를 확정짓게 된다. 이 때 채제공 역할을 맡은 단역 배우가 정말로 채제공과 닮았다.
  • 소설가 이인화의 베스트셀러인 《영원한 제국》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주인공이 속한 남인의 대표로 자주 언급되는데 채재공이 역사인물로 대중에게 알려진 계기.
  •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강성욱[17]이 담당하였다. 9부 《한중록》에서 임오화변당시 모친상을 당해 내려가있다가 상복을 입은채로 상경하여 대궐 앞에서 눈물로 사도세자 구명을 호소하는 모습으로 첫등장하여 10부 《파문》까지 그대로 출연한다.
  • 드라마 이산에서는 배우 한인수가 맡았다. 처음엔 비중이 있을 것 같았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공기화.
  •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배우 김익태가 맡았다. 애초부터 비중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기에 여기도 안습.
  • 영화 사도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최민철. 모친상을 당해 내려가 있던 실록과 다르게 나올 때마다 세자의 처분을 거두어달라고 청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세자를 모시다가 연좌제로 가문이 해를 입을 거나 걱정하던 신하들에게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당신들 가문 걱정할 때냐고 일침을 날리거나, 편집된 장면에서 경연 중 영조에게 세초 명령까지 포함하여 임오화변에 있던 일을 다 기록할 것이라고 말하는 등 강직한 모습으로 나온다.
  • 1990년대에 나온 학습만화 중 따옥이 만화 '채근담'이라는 책에서는 전혀 뜬금없고 어처구니 없는 모습으로 왜곡되어서 나왔다. 어린 시절 천재여서 기대를 받았으며,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 자리를 받아 출세했다가, 젊을 때부터 청탁도 받고 일은 하지 않고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며 놀다가 그 소식을 들어 분노한 왕에게 벼슬을 박탈당하고 쫓겨나면서도 후회하기는 커녕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고 신나게 웃으면서 모아둔 돈이 많다며(관직에 있어서 녹봉을 받아 재산이 많았던 걸 수도 있지만 먼저 언급된 청탁 부분으로 뇌물을 잔뜩 받아서 재산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평생 놀 수 있다고 계속 술을 마시고 기생집에 가면서 여자를 끼며 놀다가 늙어서 재산을 다 날리고 집까지 팔아서 초라한 오두막에서 늙어죽어 인생을 망쳤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왜곡되어서 나왔다(검색해보면 그림 파일은 찾을 수 없지만 텍스트로 남은 글은 있다). 후손들이 분노해서 항의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내용이었고, 실제로 후손 측에서 해당 출판사인 파랑새에 항의해서 출판사는 사과하고 내용을 바꿨다고 한다.

6. 기타


  • 채제공의 초상화를 보면 왼쪽 눈이 바깥쪽으로 돌아가 있는데 잘못 그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시였다.

  • 그가 현직 재상에게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도움을 청하자 재상이 지필묵을 주니 그는 아무리 가난해도 손수 물건을 들고 가는 건 아니지 않나고 하자 재상이 사과하고 하인에게 지필묵을 들고 가게 했다. 그리고 그가 문을 나서다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등에 넣어두었던 개가죽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비웃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인에게 개가죽을 등에 다시 넣어달라고 부탁한 다음 제 갈 길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 정조와의 대화에서 천주교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말이 불교를 배척한다는데 하는 소리가 별반 다를 것도 없으니 그냥 불교의 한 별파라 하겠고,[18] 죽은 사람을 살리고 봉사를 눈뜨게 하고 천상의 문을 연다니, 어떤 멍청이가 그걸 믿습니까?[19]
>- 조선왕조실록 46집3면 정조 12년 무신 8월3일 임진일의 기사
  • 이런 일화도 있다. 1774년(영조 50)때 평안도 감사로 일하던 체제공에게 있던 이야기다.[20]
당시 한양에 살고 있던 채제민(蔡濟民)이라는 젊은이가 사업을 하기 위해 평양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사업이 쫄딱 망해 한양으로 돌아올 노자(路資)마저 없어 이리저리 갈 수 없어 발이 묶여 있었다. 그 때 그가 숙소로 묵고 있던 집주인이 자신의 딸과 채제민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을 눈치 채고는 채제민이 한양 출신 양반이라는 점을 이용해 그를 데릴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결혼 후 채제민은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지냈다.[21] 당연히 그의 장인, 장모는 그를 구박했다.
그러다가 체제공이란 감사가 새로 부임해오자 채제민의 장인은 사위와 성이 같아 '아마 같은 일가라도 되나보다.'라고 생각해 사위에게 "이번 감사가 채제공이라는 분인데 혹시 그 분을 아느냐?"라고 물었다.
장인 장모 괄시가 너무 심했던 나머지 채제민은 장인에게 채제공이 자신의 사촌형님이라고 거짓말을 하고야 말았다. 장인은 깜짝 놀라면서 혹시나 득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사위에게 얼른 사촌형님인 채제공에게 인사 한번 드리러 가자고 한다.
채제민은 "이 꼴로 갈 수는 없다, 옷을 만든다,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라며 변명을 대어 날짜를 계속 미룬다.
그러는 동안 장인은 밖에 나가 새로 부임한 평안도 감사 채제공이 자신의 사위의 사촌형님이라며 자랑하고 다닌다. 소문이 계속 퍼지자 거짓말인 것이 들통날까 두려웠던 채제민은 장인 장모 몰래 홀로 채제공을 찾아간다.
관아에 도착하자마자 울기 시작하는 채제민. 관원들이 다가와 그에게 우는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감사를 직접 만나야만 대답하겠다.' 라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울음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온 평안도 감사 채제공은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평안도 감사 채제공와 단둘이 있게 되자 채제민은 석고대죄를 하며 무조건 용서를 빌기 시작하는데,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채제공은 당황하며 그에게 어디서 온 누구인지 묻는다. 채제민의 이름을 들은 채제공은 깜짝 놀라며 '나와 항렬이 같구나' 라고 말하는데 이에 용기를 얻은 채제민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채제공에게 알린다. 그리고는 자신이 원치는 않았지만 거짓된 소문을 퍼트렸으니 이에 대한 죗값을 달게 받겠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채제공은 껄껄 웃으며 그에게 "내가 너의 사촌형이 되겠다"라고 말하며 "내 객지에서 동생 하나를 얻어 좋고 너도 형 하나를 얻어 좋지 않느냐?"하며 자신의 부인에게 그를 사촌동생이라 소개시켜주고 나서 그의 아들들에게도 인사시켰다.
그리곤 채제민의 장인을 불러 "얘(채제민)와 연락이 끊긴지 오래여서 생사를 몰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따님과 결혼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채제공의 평안도 감사 임기 동안 채제민도 평양에서 살다가, 채제공의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그와 함께 한양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현재 서울 종로구 돈의동에 아랫채와 윗(위)채 두 집을 짓고서 위채에는 채제민이 살고, 아랫채에는 채제공이 살아 의(義)를 두텁게 했다.||
이두호 화백의 역사만화에서도 이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데, 채제공의 대인배스러움을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 채제공의 평안감사 축하잔치 자리에서 채제민이 모든 사실을 밝히자, 채제공이 화를 내며...
'''"이 놈! 이런 천하에 고얀 놈! 너는 어찌하야 장가든 사실을 사촌형인 나에게 이제야 말한단 말이냐!"'''
...면서 채제민의 장인과 평양의 내로라하는 지역 유지들 앞에서 채제민을 자신의 동생으로 공인하는 드라마틱한 결말을 보여준다.
여담으로 서울시 종로구 돈의동의 원래 명칭은 다른 이름이었지만 채제공, 채제민 형제가 이곳에 살기 시작하면서 돈의촌 ~ 돈의동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7. 같이보기



[1] 시파는 노론뿐만 아니라 소론과 남인도 섞였다.[2] 하지만 친하다고 보기에는 무리인게 1779년(정조 3년) 홍국영과의 마찰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던 적이 있었다.[3] 평안병사 시절에는 이런 논지 때문에 서얼에게 멱살이 잡히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4] 서명선(1791 졸), 채제공(1799 졸), 김종수(1799 졸), 정민시(1800 졸), 심환지(1802 졸)[5] 벽파가 직접적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책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은 것은 그것이 채제공의 남인이 내세우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남인은 '사도세자의 죽음은 세자 본인의 과실이 아니라 모함이었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일으킨 것은 당시의 조정 세력이다'라는 논리를 폈고 그렇게 되면 당시의 집권당인 노론은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처럼 쓸려나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6] 모함은 실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세자 제거의 주체는 영조라는게 정설이지만 정조와 시파가 세자를 신원하고 추숭하려는 마당에 왕조 국가의 특성상 감히 선왕이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책임은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노론에게 돌아간다. 남인은 이걸 노리고 추숭 지지파인 시파로 들어간 거기도 하다.[7] 통청권은 정3품 이하의 관리 추천, 자대권은 자기 후임의 지명.[8]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 상인의 특권(금난전권 등)을 박탈해 자유로운 상권 보장. 육의전은 비단, 무명, 종이, 모시, 생선, 명주 등을 말한다.[9] 물론 당연하게도 시전 상인들은 채제공의 행차까지도 막아가면서 원상 복귀를 호소했지만 정조도 채제공만큼이나 정책을 지지해서 결국 신해통공이 이루어졌다.[10] 지금의 학생회장.[11] 이날 당직 책임자.[12] 다만 비변사에서 조사보고할 때는 “그때에 전옥서의 관리가 여러 유생들의 공갈을 못이겨 대신에게 가 보고할 때 사실을 더 보태어 대신을 놀라게 할 계책을 쓴 것은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전옥서 관리들의 진술에 나온 유생들의 깽판이나 막말이 사실 그대로일 리는 없고 서로간에 감정이 좀 격해졌다보니 어느 정도 와전된 말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13] "유생들을 욕보였다"느니 "선비는 죽일 수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라는 말이 웃긴 게 요즘 말로 번역하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 국가의 꿈나무인 청소년들을 공무원이랍시고 이런 식으로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찍어누르고 창창한 애들 앞길을 막아도 돼?'''" 내지 "'''유교를 국시로 삼는 이 나라 조선에서 감히 유학을 공부하는 유생들을 탄압하려 하다니!'''"라고 한 것이다.[14] 손잡이에 비둘기를 새긴 지팡이. 임금이 70세 이상의 공신이나 원로 대신에게 주던 것으로 이것을 하사받는 건 신하로서 최상의 예우를 받는 셈이다.[15] 정조의 모친 혜경궁 홍씨의 6촌 형제이자 영의정을 지닌 홍낙성이다. 그는 1년 전인 1798년에 세상을 떠났다.[16] 좌의정을 역임한 김종수이다. 그는 노론 벽파의 거두로서 채제공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심환지와 같은 강경파는 아니었으며 사안에 따라서는 협력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채제공보다 11일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거의 열흘 간격으로 두 당파의 핵심 지도자가 사망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17] 앞서 5부 《임진왜란》에서 류성룡으로, 이후 11화 《대원군》에서 오경석으로 나왔다[18] 두 종교 모두 천국(극락)이니 지옥이니 하는 내세를 언급하고, 숭배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유학자의 눈에는 충분히 그렇게 보였을 수 있겠다.[19] "그 책에 '하느님이 내려와서 예수가 된 것이 중국에 (堯舜)이 있는 것과 같아 소경을 눈을 뜨게 하고 절름발이를 잘 걷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허무맹랑한 말입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날아서 들어간다는 설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단 채제공은 "그 가운데 좋은 것도 간혹 있으니, 이를테면 하느님
[
上帝
]
이 굽어살피시어 사람들의 좌우에 오르내리신다는 설이 바로 그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 "다만 그 인륜을 무시하고 상도(常道)를 배반하는 것 가운데 큰 것으로는, 저들이 높이는 대상이 하나는 하느님
[
玉皇
]
, 하나는 조물주
[
造化翁
]
이고, 제 아비는 3번째로 여기니 이는 아비를 무시하는 것"이라 덧붙였다.
[20] 참고로 박문수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21] 80년대 어느 한국만화에선 이걸 각색해서 체제민이 장사치로 일했지만 돈도 못 벌고 하다못해 집에서 나무를 패는데 2조각낸 나무땔감이 장독대를 깨부수는 개그로 각색되어 나왔다. 산에서 나무라도 베려고 하다가 사유지로 들어가 나무를 베는 통에 사유지 주인에게 두들겨맞고 나무를 상처입은 댓가로 지게와 도끼를 돈대신 주고 집으로 와야했다. 체제민은 불같이 화낼 장인을 피하려고 몰래 들어왔지만 장인이 방안에서 분노한 채로 기다리고 있어서 몽둥이를 내던져 맞고 별을 보는 것으로도 나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