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정변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1. 개요


1861년 청나라 서태후가 공친왕과 합작하여 함풍제의 고명대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 친위 쿠데타.
신유년에 일어났다하여 신유정변이라 하고, 함풍제의 고명대신들이 동치제가 즉위한 직후 올린 연호인 '기상'을 쓸 때 일어난 사건이라 하여 기상정변이라 하기도 한다.

2. 배경


1861년 8월 22일, 제2차 아편전쟁을 피하여 열하로 몽진했던 함풍제가 붕어했다.
함풍제는 죽기 직전에 군기처의 정친왕 단화, 이친왕 재원, 숙순[1]를 비롯한 8명의 고명대신들을 보정대신으로 지정하고 동태후서태후에게 각각 옥새를 이분화 하여 어상, 동도당을 주었다.
한편 함풍제와 함께가지 못하고 경사인 북경에 남은 재경(在京)대신들은 고명대신으로 지명되지 못하여 불만을 가졌고 특히 그들의 필두에는 도광제시기 차기 유력 황제후보로 고려되었던 공친왕 혁흔이 있었다.

3. 전개


공친왕 혁흔은 9월 5일에 열하로 와서 조문을 하였고 이때 서태후와 만나 정변 모의를 하였다. 서태후는 함풍제 붕어 전부터 황족인 숙순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9월 14일에 산동도감찰어사 동원순이 양궁(兩宮) 황태후가 수렴청정을 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보정팔대신은 이를 거부하여 태후들과 대립하였다.
10월 26일에 단화와 재원과 함께 양궁 태후와 동치제가 먼저 북경으로 출발하고 숙순은 함풍제의 운구를 호종하여 하루 늦게 출발하였다.
11월 2일 선발대 중 양궁태후와 동치제가 먼저 자금성이 입궁하고 단화와 재원은 뒤늦게 입궁하였는데 입궁하자마자 체포되었다. 숙순은 북경 북동쪽 밀운에서 체포되었다.
11월 3일 공친왕은 섭정왕보다는 한단계낮은 의정왕에 임명되었다. 11월 8일, 재원과 단화는 자결을 명받았고 숙순은 참수되었다. 나머지 5인은 실각에서 마무리 되었다.
11월 11일, 애신각라 재순이 즉위식을 올리고 보정대신들이 올렸던 기상(祺祥)이라는 연호를 폐지하고 이듬해를 동치(同治) 원년으로 선포하였다.

4. 결과


함풍제가 본래 의도한 바가 아닌 결과적으로 서태후의 집권을 열어준 사건이 되었다.
새로운 연호인 동치는 여러 설이 있으나 같이(同) 통치한다(治)라는 의미로 황제와 황태후, 공친왕, 좁게봐서는 양궁 태후가 함께 통치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동태후가 동조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숙순을 비롯한 보정팔대신이 황태후와 황제를 업신여기고 있었으며 동태후는 그들보다 공친왕을 신뢰하고 있었을 뿐이고 정사에는 어두워 일부 사안만 충돌하고 나머지는 서태후에 일임하다시피 하였다.
공친왕은 섭정왕이 아닌 의정왕에 임명됨으로써 단지 조정은 건의를 할 수 있을 뿐 실질권력은 서태후가 지니게 된다.
[1] 정친왕 단화의 이복동생으로 8명의 고명대신 중 실세였다. 이친왕 재원과 정친왕 재원은 명목상의 우두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