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광제

 



'''
宣宗 道光帝
선종 도광제
'''
'''묘호'''
'''선종(宣宗)'''
'''시호'''
만주어: 샹안 후왕디(ᡧᠠᠩᡤᠠᠨ ᡥᡡᠸᠠᠩᡩᡳ)
한자: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한호'''
도로 얼덩어 한(ᡩᠣᡵᠣ ᡝᠯᡩᡝᠩᡤᡝ ᡥᠠᠨ᠌)
'''칸호'''
토로 게렐투 칸(ᠲᠥᠷᠥ ᠭᠡᠷᠡᠯᠲᠦ ᠬᠠᠭᠠ)[1]
'''연호'''
만주어: 도로 얼덩어
한자: 도광(道光)
''''''
'''만주어'''
아이신기오로 민닝(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ᠮᡳᠨ ᠨᡳᠩ)
'''중국어'''
아이신줴뤄 민닝(愛新覺羅 旻寧)[2]
'''한국식 독음'''
애신각라 민녕
'''신장'''
165cm[3]
'''생몰'''
음력 1782년 9월 16일 ~ 1850년 2월 25일
'''능묘'''
'''모릉(慕陵)'''
'''재위기간'''
음력 1820년 10월 13일 ~ 1850년 2월 25일 (29년 145일)
1. 개요
2. 즉위 전
3. 즉위 후
3.1. 아편 전쟁
3.2. 죽음
4. 가정 관계
4.1. 아내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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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8대 황제이자 유일한 적장자 출신 황제이다.'''[4] 황자 시절에는 지친왕(智親王)으로 불렸다.
그의 재위기 청나라는 건륭제 말기, 가경제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몰락세가 심해져 점차 국력이 심각하게 약화되는 시기였다. 청은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게 대패하며 그 허약한 국력을 열강들에게 들켜버렸고, 열강들은 이때부터 청나라를 좋은 먹잇감 정도로만 생각하고 이권침탈에 눈이 벌개졌다. 그가 죽은 지 몇 달 후에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민란이라 불리는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며 중국 남부가 완전히 피폐해져 청나라는 멸망의 가파른 길을 탔다.

2. 즉위 전


1782년 9월 16일 가경제와 효숙예황후 희탑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지친왕 시절인 1813년 가경제가 재위한 당시 백련교도들의 일파인 천리교 신자들이 백련교도의 난을 복수하기 위해 자금성 내로 쳐들어오는 사건이 일어났다![5] 이를 '계유지변'이라 부른다. 당시 황태자였던 도광제는 당황하는 근위병들을 지휘하여 손수 권총을 쏘면서 진압했다. 물론 끝난 뒤 내통자들까지 깔끔하게 처벌한 것은 옵션.[6] 가경제는 당시 열하로 피서를 떠나 있어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3. 즉위 후


1820년 즉위해 1850년까지 30년간 청나라를 통치했다. 즉위하자마자 가경제 이후로 쇠퇴에 가속도를 밟기 시작한 청나라를 떠맡았다. 1820년에는 신장-위구르의 호자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1826년경 반란 자체는 진압했고, 주동자는 베이징으로 압송하여 처형했다. 이후 청나라는 반란으로 잃어버린 영토들도 모두 수복하는데에 성공했으나, 계속된 행정마비로 결국 코간드 칸국에 유리하게 관세를 조정해 준 조약을 맺었다. 이후 청나라는 위구르 지방의 통치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전통적인 동군연합 체제에도 균열이 갔다. 위구르/역사 항목 참조.
그의 치세기는 청나라가 열강에게 수모를 당하게 되는 서막을 여는 시대이기도 했다. 1840년의 1차 아편전쟁과 그로 인한 난징 조약(1842년)이 대표적이다.

3.1. 아편 전쟁


도광제는 1810년대부터 마구 들어오기 시작하여 당시 청나라의 최대 문제였던 중독성이 강한 마약인 아편과 정면 승부를 선언했다.[7] 아편이라는 것이 본디 옹정제 시기부터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때만 해도 1년에 200상자 정도로 수입량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양이 불어나며 건륭제 시기에는 1천 상자, 가경제 시기에는 4천 상자, 도광제 시기에 이르자 3만 상자에 달했다. 이때문에 웬만한 고위급 인사들은 모두 아편을 즐겨 피웠고, 사실 황제 자신도 아편을 피웠지만, 워낙 아편의 사회적인 병폐가 심각했기에 임칙서를 파견하여 외국 상인의 아편까지 몰수해 바다에 버리게 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8]
청나라가 자국 상인들의 아편까지 몰수하여 바다에 처넣어 버리자, 서양 상인들은 특히 분노했고 그중에서도 영국이 나서 이를 빌미로 1840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때문에 일어난 전쟁을 제1차 아편전쟁이라고 부른다. 다만 이 아편전쟁은 심지어 영국 내부에서도 비난이 많았는데, 따지고 보면 영국의 명분이 타국에 마약을 팔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었으니 욕을 먹어도 할 말은 없었다.[9] 초기에 청 조정은 단순히 출병한 영국군을 항의사절단 정도로 생각했고, 영국군이 임칙서를 비난하자 임칙서를 파면하는 선에서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려 하였다. 허나 임칙서가 쫒겨난 이후에도 영국군이 중국 남동부 해안가를 침공하여 파죽지세로 밀려오자 청나라는 깜짝 놀라 남부의 군대를 끌어모아 겨우겨우 이들을 막으려 들었다. 허나 이미 망해가는 청나라에는 최신무기로 무장한 영국에 맞설 힘 따위는 없었고, 심지어 난징이 거의 함락되자 전의를 상실하고 1842년에 영국과 난징 조약을 체결하였다.
청나라는 난징 조약으로 홍콩을 영국에게 99년간 넘겨주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푸저우 지방의 항구들을 일부 개항하였다. 이후 아편의 수입량은 폭증하며 청나라는 갈수록 망해갔고, 영국의 승리 소식을 들은 다른 서구 열강들도 개떼처럼 모여들어 영국과 비슷한 이권을 뜯어가며 중국은 갈수록 혼란스러워져만 갔다.
당시 청나라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은 서양 문명 및 제국주의를 막아낼 능력이나 세계정세의 이해 부재, 설상가상으로 팔기군/녹영이 중심이 된 국방력의 저하 등이었다. 게다가 당시 중국 관료층은 산업혁명이나 신기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지난 4천여 년간의 틀에 갇혀 유연한 사고를 할 기량 따위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아편 전쟁 이후 70여 년간 중국은 외세의 반식민지 상태에 처했다. 이는 도광제와 임칙서 개인의 능력 문제라기보다는 부패기득권층인 만주 권귀들의 모함과 당쟁, 그리고 무능의 극치를 달리던 만주팔기와 한족 녹영의 영향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다만, 도광제 역시 아편전쟁 초창기에서 군함끌고 온 영국군을 그냥 단순한 '항의사절단'으로 생각하고 결사적으로 싸우기 위해 전력을 다하려던 임칙서를 파면하는 등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3.2. 죽음


도광제는 1850년 2월 26일 여름궁전 원명원에서 붕어하였다. 이후 약 10년 후 원명원이 제2차 아편전쟁에서 서양 침략군에게 불타버리면서 도광제는 원명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마지막 황제로 남았다. 그가 승하한 후에는 넷째 아들 혁저가 함풍제로 즉위하였다. 도광제의 시신은 청서릉의 모릉(慕陵)에 묻혔다. 한편 도광제가 죽음 직후인 12월에 중국 사상 최악의 민란인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했고, 이후 청나라는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며 서서히 망국의 길을 걸었다. 여러모로 청나라의 본격적인 쇠락기를 맞이한 황제로 평가받는다.

4. 가정 관계



4.1. 아내


효목성황후 니오후루씨(孝穆成皇后 鈕祜祿氏)
1781년 출생 ~ 1808년 사망
효신성황후 퉁기야씨(孝愼成皇后 佟佳氏)
1790년 출생 ~ 1833년 사망
* 황장녀 고륜단민공주 1813년~1819년
효전성황후 니오후루씨(孝全成皇后 鈕祜祿氏)
1808년 출생 ~ 1840년 사망
* 황4자 문종 함풍제 혁저(奕詝) 1831년~1861년
* 황3녀 고륜단순공주 1825년~1835년
* 황4녀 고륜수안공주 1826년~1860년
효정성황후 보르지기트씨(孝靜成皇后 博爾濟吉特氏)
1812년 출생 ~ 1855년 사망
* 황2자 다라순화군왕 혁강(奕綱) 1825년~1826년
* 황3자 다라혜질군왕 혁계(奕繼) 1829년~1829년
* 황6자 화석공충친왕 혁흔(奕訢) 1833년~1898년
* 황6녀 고륜수은공주 1831년~1859년

5. 여담


아편전쟁 시기의 황제인지라 로마자 표기가 자주 나온다. 19세기 당시에는 Taou-Kwang, 현대에는 Dao-guang으로 표기한다.
그는 매우 검소한 황제였다고 전한다. 황궁의 예산은 은 20만 전을 넘지 못하게 했고, 스스로 솔선하여 낡은 옷을 입었다. 이것이 유행을 탄 나머지 고관들도 모두 낡은 옷을 입고 나와 자신의 '''청렴을 과시'''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낡은 관복이 새 관복의 두 배 가격을 하고, 그마저도 구입하지 못해 새 관복을 열심히 해지게 하고 더럽히는 촌극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청렴 프렌들리 정책' 덕분에 무영전 대학사 조진용(曹振鏞)이 총애를 받았는데, 이 자는 채소장수와도 직접 흥정을 할 정도로[10] 쪼잔한 인물이었다. 청렴하단 이유로 고기야 무장가(郭佳 穆彰阿)라는 대신도 총애를 받았는데, 정작 그는 밖에서는 사치로 악명이 자자한 위선자였다. 청렴한 임금이 반드시 명군은 아니며, 군주가 청렴하다고 신하들까지 청렴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케이스(비슷한 예로 명나라숭정제가 있다).
어이없게도 자린고비를 자처한 황제 자신이 사후에 안장될 능묘인 모릉(慕陵) 공사에는 훗날의 서태후의 정동릉(定東陵)이나 이전 황제 중 최대인 건륭제의 유릉(裕陵) 공사비보다도 더 많은 240만 냥을 소모했다. 이는 동릉 구역에 처음 지었던 능묘에 물이 새는 하자가 발견되자 그걸 수리해서 재사용하는 대신 아예 서릉 구역에 새로 능묘를 다시 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능묘의 위치가 동릉에서 서릉으로 옮겨진 덕분에 뒷날 군벌 쑨뎬잉동릉 구역의 황릉들을 무차별 도굴할 때 무사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검소함의 보람이 있긴 한 셈이다. 대신 도광제가 받았어야 할 횡액은 아들 함풍제에게 넘어갔으니.[11](...)
초상화를 보면 별로 안 그랬을 것 같지만 지친왕 시절엔 '거동이 멋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도광제는 친왕 민녕 시절에는 할아버지 건륭제 앞에서 팔기식 궁술을 선보이며 사슴을 잡아내는 등 무예가 뛰어났고, 가경제 시절에 자금성으로 반란군이 잠입하자 손수 권총을 들고 이들을 제압했던 경력이 있다. 더불어 이 시기의 도광제는 럭셔리함의 상징이었던 아편을 정말 멋들어지게 피웠기에 이를 지켜보던 신하들도, 궁녀들도, 심지어 아버지 가경제도 도광제를 멋쟁이로 보았다. 초상화의 수척한 모습은 아편 중독의 부작용인 듯하다.
도광제의 재위기간은 조선의 순조(1800년 ~ 1834년), 헌종(1834년 ~ 1849년)과 겹친다.


[1] Törö Gereltü.[2] 형제들은 면(綿)자 돌림인데, 도광제는 이 글자가 상용한자인 관계로 즉위시 피휘를 위해 동음이자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3]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4] 선제인 가경제의 차남임과 동시에 유일한 적자였다. 거기다 형이 일찍 죽었기에 그가 실질적인 장남이었다. 도광제의 아들인 함풍제 또한 황후 출신의 적장자이지만, 함풍제가 태어날 당시 시점에서 생모는 후궁신분이었고, 훗날에 황후로 승격이 되었고, 위의 형들이 모두 요절하게 되면서 적장자가 된 것이다.[5] 처음엔 200명이나 되던 인원들이 뚫는 과정에서 80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고.[6] 당시 내시들이 총을 장전해주었고 도광제는 사격만 했는데, 내시 중에도 내통자가 있어 총알 없이 화약만 장전된 총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도광제는 수 차례 총을 쐈는데도 적이 죽지 않자 내시 중 내통자가 있음을 알았으나 전투 중인지라 그 자리에서 처벌하지는 않았고, 총알 대신 옷 단추를 뜯어넣어 발사해서 위기를 넘겼다고.[7] 서구열강들은 청나라의 은을 빼오기 위해서 일부러 고가의 아편을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이때문에 18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청나라는 세계 은의 블랙홀이라고 할 정도로 막대한 은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후부터는 은의 순유출이 가속화되었다.[8] 이때 도광제 본인도 황제로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자 시절부터 즐기던 아편을 과감히 끊어버리며 아편 문제에 강경하게 대응했다.[9] 영국 하원에서 전쟁 찬성이 271표, 반대가 262표가 나왔다. 그만큼 의원들 내부의 의견 차도 심했다는 이야기. 반전파이자 훗날 영국 총리가 되는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의원은 "우리 대영제국의 양심이 262명밖에 안 된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10] 물론 장을 보는 것이 주제거리가 될 만한 일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청 제국 대학사가 채소장수와 흥정을 하는 건 역시...[11] 건륭제 때 확립된 청나라 황실의 조장 제도에 따르면 황제가 동릉 구역에 능묘를 마련하면 그의 뒤를 이은 황제는 서릉 구역에 능묘를 마련하는 식으로 동릉과 서릉을 번갈아 사용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건륭제는 동릉의 유릉, 가경제는 서릉의 창릉이었으므로 응당 도광제는 동릉으로 가야 했으나, 서릉의 모릉으로 조장 제도의 방향을 틀어버리자 아들 함풍제는 어쩔 수 없이 동릉의 정릉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