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아편전쟁

 

'''第二次阿片戰爭
제2차 아편전쟁'''

[image]
'''명칭'''
중국어: 第二次鸦片战争(정체자) / 第二次鴉片戰爭(간체자)
영어: Second Opium War
프랑스어: Seconde guerre de l'opium
러시아어: Вторая опиумная война
'''날짜'''
1856년 10월 8일 ~ 1860년 10월 24일
'''장소'''
청나라 해안
'''결과'''
'''청나라의 참패'''
톈진 조약, 베이징 조약 체결
러시아 제국에게 연해주 할양
영국에게 홍콩 섬의 주룽 반도 할양
'''영향'''
양무운동 실시
'''교전국'''
[image] '''청나라'''
[image] '''영국'''
[image] '''프랑스 제2제국'''

지원국
[image] '''러시아 제국'''
[image] '''미국'''
'''지휘관'''
[image] 함풍제
[image] 혁흔
[image] 엽명칩
[image] 보르지기트 셍게린첸
[image] 빅토리아 여왕
[image] 제임스 브루스
[image] 제임스 호프 그랜트
[image] 마이클 시모어
[image] 찰스 반 스트라우벤지
[image] 사무엘 비얼
[image] 쉬어드 오스본
알버트 헤이스팅스 마크햄
[image] 장바티스트 그로

[image] 오귀스트 레오폴드 포테
[image] 샤를 쿠생몽토방
[image] 레오나르 샤르네르
[image]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예프
[image] 앤드류 헐 푸트
[image] 제임스 암스트롱
[image] 조시아 탈트날
'''병력'''
200,000명
영국: 11,000명, 군함 173척
프랑스: 6,700명, 군함 33척
러시아: 군함 1척
미국: 군함 3척
'''피해 규모'''
사망자:21500명
사망자:405명
1. 개요
2. 발단: 애로호 사건
3. 전개
4. 결과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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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번째로 일어난 아편전쟁.
공교롭게도 이 전쟁에서 청나라는 당대 최강의 2개국인 대영제국프랑스 제국의 연합과 맞붙었으며 저 연합을 지원한 지원국은 미국러시아였다.

2. 발단: 애로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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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의 승리로 개항과 무역 독점권을 얻었지만, 생각보다 큰 돈이 되지 않았고 여전히 대중국 수출은 아편에 의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 백성들이 아편을 몰래 자체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무역적자가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유무역 덕분에 청의 차 수출량이 급증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맞은 것이다.
'''그러던 와중 영국은 형국을 뒤집을 핑곗거리를 하나 잡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애로호 사건이다.'''
마침 청 수군이 영국인 선주 소유의 청나라 선박 애로(Arrow)호[1]를 단속하였는데 소유주만 영국인일 뿐, 모든 승조원은 중국인이었으며 이들은 해적임이 분명했기에 '''청의 정당한 공무집행'''이었으나 영국은 단속 과정에서 명예로운 자국 국기가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전쟁을 선언했다. 안 그래도 무력 개입의 핑곗거리가 없어서 고민하던 영국이 말도 안 되는 사유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하도 황당한 개전 사유에 영국 하원마저도 전쟁 안건을 부결시켰고 글래드스턴은 아예 정부 불신임안까지 내놓았으나 당시 총리였던 파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2]은 하원을 해산하고 투표를 통과시켰다. 영국 측에서는 전술한 것처럼 1차 아편전쟁이 너무 일찍 끝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청나라 백성들의 배외감정들로 인한 여러 사건들로 영국의 여론도 전쟁을 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당시 1차 아편전쟁을 지휘한 페리 제독[3]은 "1년만 더 전쟁했어도 중국을 확실히 밟았을 건데..." 라고 했다.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청이 전쟁에 완전히 패배함으로써 청나라는 제국의 위상을 잃어버리고 영토만 컸지 국력은 약한 국가가 되었다.
여기에 프랑스도 자국 선교사 오귀스트 샤프들랭광서성에서 처형된 것을 구실로 전쟁을 선포, 청은 졸지에 유럽의 두 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했다. 특히 당시 프랑스의 황제 루이 나폴레옹은 큰아버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영국과 적대한 것이라고 보고[4] 영국과 협조 관계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고 서유럽의 양대 강국인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오랜 경쟁과 갈등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해관계가 상충하지 않는 아편 전쟁이나 크림 전쟁 등의 사건에서는 두 나라가 그럭저럭 협력할 수 있었다. 여기에 미국과 러시아도 참전은 안 했지만 여차하면 개입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등 열강의 청 십자 포화 수준에 가까운 상황이 초래되었다.

3. 전개


태평천국의 난으로 국가적 역량이 크게 쇠퇴하였던 청은 침공의 위협에 노출된 광둥성 일대 등 남부지방에서 제1차 아편전쟁과 같은 조직적 저항이 어려운 상태였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손쉽게 청의 지방군대를 격파하고 광저우를 비롯한 광둥성 일대를 점령, 통치에 나서는 한편, 지난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해군력을 이용해 중국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양쯔강 일대에서 분탕질을 저지르고 다시 북상하여 마침내 청으로선 용인할 수 없는 발해만까지 진출했다.
연이은 패배와 전쟁 수행능력의 부족, 국가적 역량 한계와 수도 함락 위험 등을 느낀 청은 1858년 6월 배상금 지급, 개항항구의 확대, 베이징에 외국 외교관 상주 허용, 기독교 공인, 장강 통행 및 외국인의 중국 내륙여행 자유 등을 골자로 하는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청과 각국은 천진 조약을 체결하고 1년 뒤에 비준하기로 했다. 북경에 가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긴 영국군, 프랑스군은 조약 체결이 이뤄진 지 1년이 되는 1859년 6월에 북경에서 비준하기 위해 북상하였는데 북당으로 상륙하라는 청국 정부의 요청을 무시하고 대고로 와서 해변의 장애물을 제거하다 승격림심이 지휘하는 대고 포대의 포격을 받아 큰 피해를 보았다.[5]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 언론은 중국이 조약을 파기했으며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천진 조약에는 장강 및 각 항구에 군함의 진입권을 명시했으나 '백하'에 대한 진입권은 명시하지 않았고 '군함이 위협행위나 해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자유로이 진입할 수 있다'라는 조항이 있었으므로 청군이 설치한 장애물을 자기 마음대로 제거하려 한 것은 엄연한 위협행위이자 도발이었다. 이것은 영국이 조약을 먼저 파기했다는 것이고 외무장관 러셀이나 조약을 비준하러 온 특명전권대사인 브루스 역시 이 사실을 인정했다. 반면 미국은 북당에 상륙하라는 청국 정부의 요청을 수용하고 북경으로 가 대통령의 친서를 전하고 북당에서 비준서를 교환했다.
하지만, 영국 언론과 정치인들은 청나라 측의 비열한 기습공격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이에 맞춰 당시 지휘관이었던 패장 호프제독에게 바스훈장까지 수여해주었다. 청과 영국, 프랑스의 갈등은 폭발해 영국과 프랑스 양측이 연합해 청을 공격하기로 했다. 청으로선 불행히도 안 그래도 강력한 연합군의 전력은 크게 증강된 상태였다. 일단 연합군이 확실한 승리를 위해 '''수도 베이징 함락'''을 목표로 삼으며 전력을 증강했고, 전쟁 초중반기에는 동시에 진행된 세포이 항쟁으로 영국군이 인도에 주력하고 있었지만, 전쟁 후반기에는 세포이 항쟁이 종식되면서 인도에 묶인 병력을 대거 차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영국은 한개 사단 규모의 지상군 약 20,000명에 173척의 병력을 동원했고 프랑스는 두개 연대 규모의 병력 6,300여 명과 군함 33척을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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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으로 진격하기에 앞서 발해만의 주요 항구를 모조리 초토화하고 점령한 영-프 연합군은 러시아 공사 이그나티예프의 정보를 받아 방어시설이 없는 북당에 상륙해서 문제의 대고 포대를 후면에서 공격해 세 번의 전투 끝에 수비군을 전멸시키고, 포대를 초토화했다. 이에 협상을 다시 개시했으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마침내 8월 3일 톈진에 상륙하여 수비군을 격파하고 점령한다.
연합군이 수도 근처까지 왔다는 소식에 공포에 질린 함풍제와 숙순 등의 주전파는 일제히 열하로 튀었고, '''수도를 지키던 팔기군을 완파한 연합군은 결국 10월에 베이징에 입성했다.''' 외적이 베이징에 입성한 사건은 1644년 명의 멸망 이후 무려 200여년 만의 일이었다. 당장 청도 명과 전쟁을 벌여서 베이징에 입성한 게 아니라, 그냥 투항한 명군의 안내를 받아 입성했을 뿐이었기에 충격은 컸다.
이후 청나라는 서양세력에 의하여 베이징을 아예 점령까지 당하게 되고 이후엔 일본군에게 한 번 더 점령당하게 된다.
한편 북경 외부에는 별궁인 원명원이 있었는데 이곳은 전 세계에서 청 황제에게 진상된 각종 보물과 함께 진기한 동물들이 서식했던 동양 최고의 정원이자 보물창고였다. 다시 말하면 황제의 컬렉션 보관소이자 놀이터. 이 사실을 안 연합군은 이곳에 쳐들어가 집중적으로 약탈했고, 그 후 죄다 때려 부수고 불태워버렸다.[6] 도망간 황제에게 보내는 연합군의 경고였다.
결국, 청은 저자세로 나올 수 밖에 없었고, 러시아의 중재로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여 톈진 조약에다가 추가로 개항장을 늘려야만 했고 배상금도 늘어났으며 홍콩에 접한 구룡반도까지 추가로 할양해야 했다. 여기에 통상/선교의 자유와 중국의 내륙 수운인 양쯔강에서의 군함 항해까지 인정하는 등 온갖 굴욕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러시아에는 이 조약을 중재했다는 명분으로 연해주를 내줘야 했다. 게다가 말이 좋아 중재지 러시아도 청나라의 영토를 노렸기에 여차하면 연합군에 합류할 움직임을 보였다. 즉, 협박이었다.
베이징이 점령되자 당시 청나라 조정은 다급한 나머지,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신식 군대를 이끌고 태평천국군과 대치하던 증국번이홍장에게 병력을 북경으로 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증국번과 이홍장 입장에서 이건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이었다. 아직 난이 진압되지 않는 상태에서 병력을 보냈다간 전황의 균형이 무너질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당시 북경 일대의 상황을 분석한 증국번과 이홍장은 어차피 병력을 보내봤자 도움도 안되고 시간도 늦는다고 판단하고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만 대놓고 가지 않기엔 조정의 명령을 어기는 격이 되는지라 크게 의미가 없는 실무적인 질문 보고를 하며 시간을 끌었고, 곧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며 북상 명령은 취소되었다.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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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에게 분할당하는 청, 르 프티 주르날, 1898[7]
이 때까지만 해도 서양 열강들은 청나라에 대해 대국, 동양의 잠자는 사자 등의 '침묵의 강자'라는 신비로운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선뜻 선전포고를 걸지 않았으나 아편전쟁 이후 허약한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자 중국은 서구 열강[8]의 덩치 큰 호구,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베이징 조약을 맺은 이후 중국은 서구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중화 우위의 질서가 무너지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은 청의 조공국이었지만 청의 정보 전달도 늦고 부정확했다. 조선은 청국의 관영에서만 제한적인 정보를 받았고 그러한 정보는 당연히 제대로 된 것일 리가 없었다. 조선은 되려 제1차 아편전쟁을 영국이 토벌된 것으로 받아들였고 후에 전라도 지방에 떠밀려온 프랑스 선원이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름'이라고 전했는데도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북경이 함락된 제2차 아편전쟁은 당시 조선에도 전해져 적잖이 충격을 안겨 주었지만, 단순히 양이들의 분탕질로 황제가 북쪽으로 잠시 피신한 거로 해석해 전혀 대외관에서 변화가 없었다.

"양이와 억지로 화친하였지만 외구(外寇)가 점점 치성하여 황가(皇駕)가 북수(北狩)하기에 이르렀으니, 천하가 어지럽지 않다고 이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궐(城闕)·궁부(宮府)·시창(市廠)·여리(閭里)는 편안하기가 옛과 같고, 장병이 교루(郊壘)에 주둔해 있는데 기색(氣色)은 정돈되어 태연하며, 적이 근성(近省)에 숨어 있는데 방어함이 침착하고 여유가 있으니, 이는 민심이 일에 앞서 소란스럽게 하지 않고 조정의 계략도 기한을 주어 군색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철종 13권, 12년(1861년, 3울 27일 첫번째 기사)

하지만 제 2차 아편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들리자, 조선 사회에서는 곧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와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보따리를 싸들고 산과 계곡으로 피난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때의 불안한 민심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의 글인 권학가와 포덕문에서도 드러나는데, "요망한 서양의 적이 중국을 범하여 (중략) 서양은 싸워서 승리를 취해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서양이 천하를 진멸하니 순망지탄이 아닐 수 없다."라며 두려워하였다.(출처: 조선의 예언 사상 하권/ 김탁 지음/ 북코리아/ 351~352쪽)
반면 일본은 네덜란드로부터 '''매우''' 정확한 정보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 이 때 네덜란드는 거의 병적인 수준으로 디테일에 집착해 왜 전쟁이 났는지 상세히 설명하며 주요 인물들의 이름과 경력까지 기록했고, 전투 기록의 경우에도 지휘관의 이름과 병사의 수, 동원된 총기와 선박, 대포의 수량, 전투 장소와 시간, 양상, 피해 모두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해 일본에 전달했다.# 거기에 더해 당시 국왕이던 빌럼 2세가 직접 아편전쟁의 결과 등 세계정세를 설명하고 개국을 추천하는 친서를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에게 보내기도 했다. 이때는 비록 거절했으나 그로부터 9년 후 미국이 군함을 이끌고 개국을 요구해 왔을 때 에도 막부는 청이나 베트남과는 달리 서양과 전쟁을 한다는 멍청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다만, 막부가 알고 있는 지식과는 별개로 이런 결정은 국내적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더욱이 이 과정에서 천황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막부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약점이 잡혀 결국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메이지 유신까지 간간히 서양인에 대한 적개심을 바탕으로 한 서양인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다행인지 서구 열강은 중국의 이권 획득에 정신이 팔려 이를 빌미로 중국만큼 심한 요구를 하진 않았다고.(물론 개항 항구를 늘린다거나 외교공관 수비병을 허용하게 하는 식의 요구를 간간히 했고 막부측에선 천황이나 개항을 반대하는 측의 반대에도 이를 들어주었다.) 이후 개항을 반대하는 측은 사쓰에이 전쟁시모노세키 전쟁을 통해 서양의 힘을 제대로 알게 된다.
청나라는 이에 충격을 받고 서구의 것을 배우자는 양무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세계사 교과서에 나온 것만큼 중국인들이 받은 충격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고 한다. 워낙 땅덩어리가 크기 때문에 저 멀리 최남단에서 벌어진 전쟁에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예전부터 중국은 중화사상이 팽배했기에 아편전쟁의 패배는 '에이, 재수 없이 똥 밟았다.'라는 수준이다.
정작 청 조정이 심각하게 생각한 건 아편 전쟁이 아니라 태평천국의 난이었다. 실제로 아편전쟁 이후에도 중국의 국내 정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냐면, 아편전쟁으로 개 털리고 난 후에도 이홍장, 증국번 등의 청의 실권을 장악한 한족 군벌 세력이 양무운동 같은 것이나 하고 전면적 근대화를 시행하지 않아 꽤 오랫동안 무인시험에서 여전히 '말을 타거나 활을 쏘는 기술'을 시험 과목으로 유지했을 정도였다. 결과는 청일전쟁 패배였다.
이 부분은 보충설명이 필요한데 "어휴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돈 내놔라 하는게 역사상 한 두번 있는 일도 아니고..."라는 식으로 받아들인건 어디까지나 '''1차''' 아편전쟁까지의 얘기다. 위 문단에서 최남단에서 벌어진 전쟁 어쩌구 하는 부분도 1차 아편전쟁의 이야기고[9] 2차 아편 전쟁 때는 수도 북경이 함락됐고 자금성에 유니언 잭과 삼색기가 휘날렸으며 원명원이 활활 타버렸다. 때문에 제대로 당한 2차 아편전쟁부터는 충격이 컸다.
여기서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 방식의 차이가 나는데, 중국은 서구의 조선 기술이나 군사 기술 등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만 받아들이기 시작하지만, 일본은 이런 기술 뿐만 아니라 대량생산 체계, 그 기술, 그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근대식 교육과정 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양무운동 조차도 중국이 근대화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 계기인 제2차 아편전쟁 이후다. 물론 일본에서도 이 과정에서 누가 주도권을 갖고 진행하냐에 막부와 막부를 반대하는 측과에 이견이 나눠져 있었고 결국 최종적으로 보신전쟁을 통해 막부를 반대하는 유신 웅번들이 주도권을 잡고 근대화를 진행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를 주도한 유신지사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생겨 세이난 전쟁까지 가서야 겨우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고,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외세의 적극적 간섭이 없었다는 천운이 있었다.[10]
이듬해 청국은 총리아문을 발족한 뒤 자연스러운 순서로 국제 조약에 관심을 가지고 1864년 마틴에 의해 만국공법(만국율례)이 번역되기에 이르지만, 만국공법 소개 이후 야단법석이라고까지 표현되던 일본과 달리 정작 청국은 여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청국의 외교 정책은 만국공법을 서양을 견제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등, 일본이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불평등 조약 개선에 나섰던 것과 달리 방어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결국, 이 결과가 나타난 것이 바로 청일전쟁(1894)으로, 따지고 보면 중국이 '''제대로''' 충격을 받은 것은 아편전쟁 때가 아니라 청일전쟁(1894) 이후라고 할 수 있다.[11]
조선은 아편에 찌든 청으로부터 덕을 봤는데 아편 중독으로 건강을 해친 중국인들 사이에서 이전부터 명약으로 알려져 있던 조선 인삼의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 마침 이때 조선에서는 18세기 후반 이후 인삼 재배가 성한 이래로 홍삼 가공이 흥하던 시점이라 18세기 중반 미국 백삼의 중국 유입과 일본의 인삼 재배로 적자로 돌아섰던 무역 수지가 크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해와 19세기 후반의 무역 개방으로 얼마 안 가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중국을 뜯어먹고 엄청난 이익을 얻는다. 또한, 러시아도 이때 영불과 중국을 중재하면서 슬금슬금 중국을 등쳐먹기 시작했다. 당연히 아편이 퍼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고 중국 전역이 마약 중독에 시달렸다. 다만 중국에 아편이 급속도로 퍼진 것은 맞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득은 줄어들었다(다만 1851년경의 아편 수입은 1840년의 2배에 달했다고 한다). 이유는 이젠 중국인들이 스스로 아편을 제조하기 시작해서이다.

5. 관련 문서




[1] 영국인 선주 소유였기에 일단 명칭은 영어이다. 참고로 중국쪽 문헌에서는 저걸 아라호(亞羅號. 간체자로는 亚罗号)로 음차하고 있다.[2] 1차 아편전쟁 당시에는 외무장관이었다. 참고로 이 사람,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 등에서는 훈훈한 이야기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가령 '나랏일로 바쁜 와중에 짬짬이 시간을 내서 산책하러 나가던 어느 날, 우유를 배달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우유통을 깨뜨린 소녀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 소녀를 위로해주며 우유와 우유 통 값을 자기가 대신 주려고 하였는데 하필 지갑을 두고 나와서 내일 다시 만나면 값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다음 날 내각회의로 바쁜 와중에도 소녀와의 약속을 생각해서 장관들에게 굳이 말하지 않고 소녀와 약속한 곳에 다시 만나서 우유와 우유 통 값을 내고 다시 회의실로 돌아와서도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라는 이야기다.[3] 일본쿠로후네 사건에 등장하는 페리 제독과는 동명이인이다.[4] 실제로도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유 중 하나가 외교 실패이다. 특히 결정타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패배였는데 나폴레옹 본인이 퐁트 코르보 공작 작위까지 줘가면서 아꼈던 칼 14세 요한이 배신해서 이 전투에서 반프랑스 동맹으로 붙었고, 거기에 의붓아들(정확히는 아내인 조제핀 드 보아르네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바람을 피운 건 아니고 원래 조제핀은 이혼녀였다.)인 외젠 드 보아르네마저 락다운이 걸려버리면서 이 전투에 참전을 못하게 되어 나폴레옹은 진퇴양난 상태가 된 끝에 기록적인 대패를 당했다.[5] 영국 군함 4척이 격침되고 2척이 나포되었으며, 5백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났다. 당시 청군이 서구 열강에 비하여 낙후된 무기를 사용했던 점과 당시 투입된 연합군의 병력이 한개 대대+한개 중대 규모인 1,200여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굉장히 대단한 전과이다.[6] 여기서 털린 각종 보물 또는 유물들이 오늘날 가끔 경매에 나오거나 우연히 발견되곤 한다. 예를 들어 한 영국 가정집에서 우산꽂이로 쓰던 도자기가 알고보니 건륭제의 화병이었다든지, #[7] 앞줄 왼쪽부터 대영제국,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프랑스 제2제국, 일본 제국, 뒤에서 놀라는 사람은 당연히 청나라.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 독일제국은 빌헬름 2세, 러시아는 니콜라이 2세, 청나라는 이홍장을 모티브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달리 프랑스는 마리안느를 형상화하였고 일본 제국에는 특정 인물모티브 없이 오리엔탈리즘이 적용된 일본인 형상을 그려놓고 있다. [8] 영국의 아편전쟁 이후 미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가담해서 중국을 조금씩 갈취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 이후엔 독일도 이에 합류.[9] 사실 이때도 최남단이 아니었다. 영국군은 광저우에서 멈추지 않고 북상하여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청제국 물류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진강을 움켜쥐었고 이 때문에 청나라가 항복한 것이다.[10] 일본의 문짝을 걷어찬 장본인인 미국은 남북전쟁, 영국은 세포이 항쟁 진압,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식민지화 등에 열을 냈고 게다가 메인디쉬(?)라 할 수 있는 청나라를 뜯어 먹는게 제일 중요한 일이라 처음부터 일본에 대한 관심 자체가 청나라보다 훨씬 적었다.[11] 본국과 머나먼 거리에 위치한데다 상대적으로 매우 작으면서도 긴 시간 고립되어 살아왔던, 한낱 관심거리도 안 되었던 섬나라인들의 공세에 처참하게 말렸으니... 게다가 당시 일본군과 청군의 병력비는 '''1 : 3.''' 머릿수로는 이미 청나라가 우세한데다가 전력 자체도 일본군과 맞설 만큼 키운 수준인데도 털린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