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드 알 무민
1. 개요
무와히드 왕조의 초대 칼리파. (재위 1147년 ~ 1163년) 마흐디를 자칭하며 알 무와히둔 공동체를 세운 스승 이븐 투마르트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 즉 칼리파가 되었다. 무라비트 왕조와 7년간 전쟁을 벌인 끝에 결국 1147년 마라케시를 함락하고 그 귀족 3만여명을 학살하며 마그레브에 새 제국의 탄생을 알렸다. 이후 북아프리카를 통일, 튀니지의 노르만인들을 축출하였고 안달루스에 개입하여 레콘키스타 세력의 남진 저지에 나섰다.أبو محمد عبد المومن بن علي
아부 무함마드 아브드 알 무으민 이븐 알리 [1]
2. 생애
1093년 알제리 서부의 오랑 인근의 제나타 베르베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10대가 되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시 마그레브의 학문 중심지 중 하나였던 틀렘센으로 유학하였다. 하지만 학문을 마치기 전에 스승님과 사별하였는데 마침 바그다드에서 알 가잘리로부터 아슈하리 학파를 공부하고 돌아오던 이븐 투마르트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알 무민과 그의 동기들은 기존의 나태해진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과 당당히 토론을 요구하는 이븐 투마르트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고 틀렘센으로 그를 초청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알 무민이 직접 서신을 들고 베자이아 인근에 머물던 그를 찾아갔다. 하지만 고향 틴멜에서 공동체 결성을 계획하던 이븐 투마르트는 초대를 거절하였다. 그에 상관없이 그의 사상에 동조한 알 무민은 알 무와히둔, 즉 '유일신론자'의 일원이 되어 함께 모로코로 향하였다. (1117-19년)
1121년 라마단, 이븐 투마르트가 이길리즈 동굴에서의 은둔[2] 후 스스로를 마흐디로 선포한 후 이듬해부터 알 무와히둔 공동체는 국가 건설에 나섰다. 1124년, 팀멜에는 무라비트 왕조의 첫 수도가 될 리바트 (성채)가 세워졌고 이븐 투마르트의 출신 부족인 마스무다 베르베르 인들로 군대를 편성하였다. 이후 그들은 사하라 무역의 거점인 동쪽의 시질마사를 장악하며 무라비트 왕조를 압박하였고 1128년에는 드디어 하산하여 모로코 남부의 중심 도시인 마라케쉬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아직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무와히둔 군대는 공성전에 능숙하지 못하였고 무라비트 군대가 성을 나와 습격해온 알 부하이라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재상급이던 알 바쉬르를 포함한 지도부의 절반이 전사하였고 이븐 투마르트 역시 충격으로 3달 후 사망하였다. 1,2인자가 연이어 사망한 상태에서 후계자 다툼이 벌어졌고 알 무와히둔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2.1. 정권 장악
알 무민은 우선 10인 위원회[3] 를 통해 위기 상황에서의 사기 저하를 위해 2년간 이븐 투마르트의 죽음을 알리지 말 것을 관철시켰다. 베르베르 3대 부족[4] 중 서남쪽의 마스무다 부족이 무와히둔의 주력을 이루던 상황에서 제나타 출신의 알 무민은 불리한 입지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븐 투마르트가 사망 직전 알 바쉬르가 맡았던 2인자의 위치에 자신을 임명한 것[5] 을 근거로 반대파를 숙청하는 동시에 마스무다 부족장 셰이크 아부 하프스와 인척 관계를 맺으며 무와히둔 공동체를 장악해 나갔다.[6] 그리고 마침내 1132년, 알 무민은 지도자로서의 첫 군사 행동으로 무라비트 왕조가 '마라케쉬의 관문'인 아그마트와 팀멜 사이를 가로막기 위해 산 아래에 세워 놓은 타스기무트 요새를 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후 그 성문을 팀멜까지 끌고 오며 일종의 개선식을 행하며 능력을 과시하였다. 이는 동시에 무와히둔이 건재하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2.2. 무라비트 타도 ( ~ 1147년)
무라비트 왕조가 '골칫거리'인 무와히둔을 고산지대에 가두어 놓기 위해 만든 여러 요새들은 1140년을 전후하여 각개 격파되었다. 그리고 알 무민은 아틀라스 산맥을 따라 진격, 틀렘센, 오랑 등 무라비트 왕조의 동부 전체를 석권하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무와히드 군대에 가장 큰 위협이었던 무라비트 측의 카탈루냐 용병대 지휘관 레베르테르는 틀렘센 인근에서 전사하였다. (1144년) 그의 시체는 십자가에 메달렸다. 이후 무와히드 군대가 오랑을 위협하자 무라비트 조의 술탄 타쉬핀이 친히 방어를 맡았는데, 몇달간 포위된 이후 그는 탈출을 결심하였다. 타쉬핀은 안달루스의 알 메리야에서 함대를 소환하였고 진영을 불태운 후 밤중에 말을 타고 항구로 향했는데, 그 와중에 낙마하여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 (1145년 3월) 그의 후계자인 아들 이브라힘은 14세에 불과하였다. 그러한 상태에서 알 무민은 무라비트 왕조의 동부 영토를 석권한 것이다.
1146년, 무와히드 대군은 페스 등 모로코 북부를 손쉽게 평정하였고 마침내 무라비트 조의 수도인 마라케쉬를 포위하였다. 공성전은 장기화 되었고 이듬해 초 성안에선 어린 이브라힘 대신 그의 숙부인 이샤크가 술탄으로 추대되었으나 그역시 별 수 없었다. 결국 1147년 4월, 무와히드 군대가 사다리를 통해 성벽을 넘었다. 두칼란과 아일란 문이 열렸고[7] 이로써 11개월의 공성전 끝에 마라케쉬는 주인이 바뀌었다. 그리고 알 무민의 명령에 따라 3만에 달하는 전조의 왕족 및 고위층이 학살당하였다. 반란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의도였다. 허나 그 후로도 알 무민은 입성을 거부하였는데, 미흐랍의 방향이 틀어져 있는 등 사원들의 배치가 잘못되었다는 이유였다.[8] 그는 병사들이 궁전을 포함한 기존 건물들을 모두 헐어버린 후에야 입성하였고 우두를 위한 코우바 분수 정도만이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2.3. 안달루스 & 이프리키야 원정 (~ 1159년)
무라비트-무와히드 전쟁이 한창이던 1137년 8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가 아라곤 국왕 라미로 2세의 독녀 페트로닐라와 약혼하며 카탈루냐 지방이 하나의 왕조 하에 통합되었다.[9] 같은해 포르투갈 백작 아폰수가 레온-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7세에게 복종을 서약하였고 1140년에는 라몬이 뒤따르며[10] 레콘키스타 세력의 화합이 회복하였다. 1139년 7월, 아우리크 전투에서 포르투갈 군은 무슬림 군대를 격파하였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아폰수는 프린켑스 (왕공) 대신 렉스, 즉 왕을 칭하였다. 1143년 10월, 자모라에서 아폰수와 회동한 알폰소 7세는 그의 왕위를 인정하였다. [11] 한편 그해에 카디스 토후국이 독립한 것을 시작으로 1144년 메르톨라의 이븐 카시가 마흐디를 칭하고 자립하는 등 무라비트 조의 안달루스 패권은 약해지고 있었다. 1144년 6월 알폰소 7세는 가르시아 라미레즈와 자신의 딸 우라카를 결혼시켜 분쟁을 무마시키곤 안달루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과도한 세금과 이교도들에 대한 차별로 명망을 잃어가던 무라비트 조의 권위는 빠른 속도로 무너져내렸다. 1145년 1월 코르도바의 카디 이븐 함딘이 무라비트 총독을 축출하고 스스로를 아미르 알 무슬림으로 선포하였다. 두달 후 무라비트 술탄 타쉬핀이 1145년 비명횡사하자 안달루스는 2차 타이파 시대로 이어졌다. 이틈에 포르투갈의 아폰수가 무슬림 측에 빼앗겼던 레이리아를 수복하였다. 한편 무라비트 정권으로부터 자립한 토후들은 바다호스 토후국이 메르톨라 토후국을 정복하는 등 서로 다툼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 틈에 알폰소 7세의 진영에 망명해 있던 사라고사의 마지막 왕자 자파돌라가 남하하여 그라나다를 장악하고 코르도바와 대립하였다. 그러자 세비야의 무라비트 총독 이븐 가니야는 반격에 나서 그라나다의 자파돌라와 코르도바의 이븐 함딘 모두를 축출하고 안달루스 남부를 장악하였다. 이에 둘은 알폰소 7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2.3.1. 1차 안달루스 원정 : 대리전
1146년 5월, 안달루스의 내전에 개입한 알폰소 7세는 코르도바 외곽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달 마라케쉬를 포위하던 무와히드 군대가 (마흐디 칭호를 버리고 알 무민의 칼리파위를 인정한) 이븐 카시[12] 의 요청에 응답하여 안달루스에 상륙하였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알헤시라스와 타리파 등을 장악하였고 이내 메르톨라, 제레즈, 니에블라, 실베스, 바다호스 등 안달루스 서부 전체가 항복해왔다. 무와히드 '반란군'의 진격에 당황한 이븐 가니야는 협상을 통해 연공 납부 및 우베다, 바에자[13] 할양을 조건으로 알폰소 7세의 봉신이 되었다. (1146년 5월) 이에 알폰소 7세는 코르도바에서 회군하였고 톨레도와 안달루시아 사이의 요충지인 칼라트라바 요새를 점령하였다. (1147년 1월) 그리고 같은 달 무와히드 군대는 세비야와 하엔에 진주하였고 이븐 가니야는 백기를 들고 그라나다에 은퇴하여 이듬해 사망하였다.
2.3.2. 리스본, 알메리야, 토르토사
안달루스가 혼란에 휩쌓이자 포르투갈의 아폰수 1세는 타호 강 하류의 리스본 점령을 목표로 진격하였다. 1147년 3월 15일, '리스본의 관문' 산타렘[14] 이 함락되었고 포르투갈 군대는 리스본 포위에 나섰다. 한편 그해 5월, 2차 십자군에 합류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다트머스에서 출항한 독일-플랑드르-노르망디-잉글랜드의 십자군은 중간 기착지를 모색하던 중 포르토를 거쳐 6월 28일 리스본을 포위하던 아폰수와 합류하였다. 아폰수는 그들에게 약탈 및 포로들의 몸값을 챙길 권리를 주었고 리스본에 정착할 의향이 있다면 땅과 그들의 관습 및 자유에 대한 존중, 그리고 후손들에 대한 왕국내 통행비 납부 면제를 약속하였다. 리스본의 수비대는 영웅적으로 저항하였으나 다른 무슬림 세력들에 대한 구원 요청이 묵살되자 결국 협상을 통해 10월 24일 항복하였다. 협상에 의하면 무슬림들은 거취의 자유가 주어졌으나 십자군은 시내의 모사라베 주교를 포함한 시민 상당수를 학살하였다. [15] 이후 신트라, 팔멜라 등도 점령되었다.
포르투갈 군대가 리스본을 포위하는 동안 알폰소 7세는 아라곤-바르셀로나, 나바라, 몽펠리에 등의 제후국들을 모아 말라가와 무르시아 사이의 항구 도시 알 메리아를 포위하였다. (1147년 8월 1일) 이탈리아의 피사와 제노바의 함대가 해상 봉쇄에 참여하여 도시는 완벽히 포위되었고 10월 17일 항복하였다. 안달루스의 주요 항구 중 하나가 레온-카스티야의 수중에 넘어간 것이다. 이후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라몬 베렝게르는 루트비히 1세 때부터 수십 차례에 걸친 기독교 군대의 공격을 버텨낸 에브로 강 하류의 도시 토르토사 공격에 나섰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십자군 및 사면령에 힙입어 1148년 12월 31일, 6개월간의 포위 끝에 토르토사는 함락되었다. 이후 라몬 베렝게르는 에브로강 북안의 나머지 무슬림 도시들의 정복에 나섰고 그 대표격인 레리다를 정복, 동시에 나머지 도시들의 항복을 받으며 알폰소 1세의 염원을 달성하였다. (1149년 10월 24일)[16]
한편 연이은 승리에 레콘키스타 완수가 임박했다고 믿은 알폰소 7세와 라몬 베렝게르는 투델렌 협정을 맺어 향후 영토 분할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1151년 1월 27일) 무르시아와 발렌시아가 라몬에게 주어졌고, 그는 사라고사의 경우처럼 '히스파니아의 황제' 알폰소의 봉신으로서 그곳을 영유하기로 하였다. 세비야, 코르도바, 하엔, 그라나다 등의 나머지 지역들은 레온-카스티야에 할당되었다. 무르시아의 아미르 이븐 마르다니쉬는 라몬 베렝게르에게 조공을 바치고 알폰소 7세의 봉신을 자처하며 또 피사 및 제노바 상인들에게 특혜를 부여하는 등의 저자세 외교로 살아남고 무와히드 측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길 희망하였다. 1147년 무라비트 조를 멸한 무와히드 왕조는 내부를 안정시킨 후 이프리키야의 적들과 상대하느라 1153년에야 안달루스 전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2.3.3. 1차 이프리키야 원정 : 알제리 정복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로 옮긴 후 이프리키야를 통치하던 지리 왕조는 11세기 후반 들어 분열하였다. 알제리 지방엔 함마드 왕조, 튀니지 북부엔 후라산 왕조 등 공국들이 세워졌고 지리 왕조는 수도 알 마디야 일대만 유지하다가 그마저도 1148년 시칠리아 왕국에 의해 정복되었다. 지리 왕조의 군주 알 하산은 알 무민의 궁정으로 망명해왔다. 따라서 무와히드 왕조의 이프리키야 원정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1151년 오랑과 틀렘센을 접수한 알 무민은 알제리의 베두인 부족들을 패배시킨 후 자신의 친위대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1152년 알제를 점령한 후 함마드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야흐야를 그 수도인 베자이아를 앞에서 격파하였다. 베자이아는 순순히 항복하여 약탈을 피하였고, 패전 후 콩스탕틴으로 도주한 야흐야도 그해 말엽 항복하였다.
2.3.4. 2차 안달루스 원정 : 알메리야 수복
북아프리카의 패권을 공고히 한 무와히드 왕조는 1153년 말라가, 1154년 그라나다를 접수하며 안달루스에 대한 군사 개입을 재개하였다. 1157년, 무와히드 군대는 알메리야를 포위하였다. 수비대는 시타델에서 항전했지만 기독교 측이나 무르시아로부터의 지원군을 받지 못한채 괴멸되었다. 알폰소 7세의 구원 시도는 무와히드 군대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레콘키스타의 전초기지였던 알메리야가 함락되며 안달루스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알메리야 구원에 실패하고 회군하던 알폰소 7세는 도중에 병사하였다. (1157년 8월 21일) 그의 장남 산초 3세가 카스티야, 차남 페르난도 2세가 레온 왕국을 계승하였다. [17] 한편 1156년부터 시칠리아령 아프리카에서 반노르만 봉기가 일어나자 무와히드 조의 관심은 재차 이프리키아로 향하였다.
2.3.5. 2차 이프리키야 원정 : 튀니지 정복
1159년 7월 12일, 70척의 무와히드 함대는 굴레타 호수를 가로질러 튀니스를 점령하였다. 후라산 왕조의 아미르 압둘라는 축출되었고 도시 원로들의 간청에 따라 아만이 주어졌으나 그 대가로 주민들의 재산 절반을 취하였다. 그해 말엽 트리폴리까지 점령한 무와히드 왕조는 알 마디야를 양면에서 포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1159년 9월 마침내 알 마디야에 대한 포위가 시작되었다. 무와히드 군대를 피해 마디야로 피신한 기독교도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고 따라서 포위는 반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그동안 튀니지의 다른 도시들인 가베스가 점령되었고 스팍스가 항복해왔다. 알 무민은 지리 왕조의 마지막 군주 알 하산의 조언대로 식량을 충분히 비축한채 포위를 지속하였고 결국 1160년 1월 알 마디야는 함락되었다. 알 무민은 성안의 기독교도들에게 이슬람 혹은 죽음을 택하도록 하였다.
2.3.6. 미완의 3차 안달루스 원정
1158년 2월, 카스티야의 산초 3세는 라몬 베렝게르와 회동하여 투델렌 조약을 갱신하였고 이후 동생 페르난도 2세와 만나 포르투갈 분할을 합의하였다. [18] 또한 안달루스 정복에 있어 리스본, 이보라, 메르톨라, 바다호스, 메리다 등과 세비야 세금의 절반은 레온 국왕 페르난도에게 할양되었고 아라곤 할당지를 제외한 나머지가 산초에게 돌아가도록 합의되었다. (사하군 조약) 하지만 세비야를 경계로 안달루스 및 포르투갈을 분할한다는 예상 은 포르투갈의 잠재력과 무와히드 왕조의 반격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1158년 8월 31일 산초 3세는 두살배기 아들 알폰소[19] 만을 남긴채 사망하였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에선 알폰소 8세의 섭정권을 두고 라라 가문과 카스트로 가문 간의 대립이 발생하며 수년간 내분에 시달렸다.[20] 한편 1158년 포르투갈의 아폰수 1세는 타호 강을 넘어 알카세르를 점령하였다. 같은해 칼라트라바 기사단이 세워져 톨레도 남쪽을 지켰다.
알 무민이 이프리키야를 평정하는 동안 1159년 안달루스에선 무르시아 토후국이 하엔, 카르모나 등을 병합하였고 카스티야가 혼란에 빠진 틈에 우베다와 바에자를 수복하였다. 이로써 안달루스는 무와히드, 무르시아, 발렌시아의 삼파전을 띄게 되었다. 알 무민은 후계자로 선포된 장남 아부 야쿠브 유수프에게 안달루스 원정에 쓰일 함대를 위해 대서양의 항구도시 살레의 강 건너편에 새로운 요새인 리바트 엘 파스를 건설하게 하였다. 리바트 엘 파스는 후에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로 발전하게 되었다. 1160년, 알 무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달루스에 상륙하였지만 지브롤터 요새 건립만을 명하곤 아들 유수프를 남긴채 마그립으로 돌아갔다. 1162년, 유수프는 그라나다에서 이븐 마르다니쉬를 패배시키고 하엔, 카르모나, 우베다, 바에자 등을 점령하였다. 그해 라몬 베렝게르가 죽고 알폰소 2세가 아라곤-바르셀로나를 계승하였다. 알 무민은 1163년 안달루스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한편 1162년 알 무민은 안달루스의 중심지를 세비야에서 다시 코르도바로 옮겼는데 그의 죽음과 함께 무산되었다.
3. 평가
아브드 알 무민은 뛰어난 전략가이자 정치가로 평가받으며, 난세의 영웅이라 불릴만 하다. 그는 부족 중심 사회였던 마그레브에 토지 등록제를 실시하는 등 중앙집권적 정부 모델을 제시하였다. 알 무민은 마그렙 지역 최초의 칼리파 국가를 세우며 변방으로 치부되었던 지역의 발전을 선포하였다. 또한 이프리키야 해안을 장악하고 있던 노르만 인들을 몰아냄으로서 그는 독실한 무슬림들에게 성전을 수행한 위대한 전사로 평가받으며 알제리 독립 운동 당시 추앙의 대상이었다. 알제리 출신의 칼리파라는 점에서 그는 지금까지도 알제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 중 한명이다. 다만 십자군 시대의 영향인지 지나친 이슬람 중심주의로 인해 기타 종교를 배격하였고 이로써 마그레브 지역의 종교적 다양성은 파괴되고 말았다. 파키스탄에서 존경하는 아우랑제브와 비슷한 유형. 그밖에 예술을 후원하였지만 독실한 무슬림으로서 모스크 건축은 단순함을 추구하였다. 다만 마그렙에서의 활약과 달리 안달루스에서는 소극적 자세를 취하여 기독교 세력들이 리스본 등 여러 거점들을 장악하게 방치했다는 점에서 안달루스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모습도 보였다. 특히 1158년 산초 3세 사후의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였다. 다만 지브롤터, 라바트 등의 안달루스 원정의 거점들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후대의 대반격을 준비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1] 영어 Abd al-Mu'min[2] 무함마드가 히라 산의 동굴에서 은둔한 것의 오마쥬[3] 무와히둔의 초창기 멤버들의 회의기구. 그중 바쉬르를 포함한 4명은 마라케쉬에서 전사, 1명 (압둘라 이븐 야알라)은 1132년 알 무민에 의해 처형됨. 다른 한명인 아부 하프스 우마르는 미래의 하프스 왕조의 시조.[4] 제나타, 산하자 (무라비트 왕조), 마스무다 부족[5] 그게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6] 또한 베르베르 부족장들의 모임인 50인 위원회에서도 내분이 많았는데, 이에 외부인이었던 알 무민이 공정한 결정을 내려 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고. 다만 하스쿠라, 하르자자 등의 마스무다 부족들이 이탈하는 일도 있었다[7] 이때 레베르테르의 아들이 안전을 대가로 성문을 열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그는 알리 라는 아랍 이름을 취하고 이슬람으로 개종, 무와히드 왕조 하에서 기독교 용병대를 이끌게 된다[8] 이후 그는 새로 지어진 쿠투비아 마스지드를 이용했는데 그마저도 1157년 같은 이유로 철거하였고 1197년에야 중건되었다[9] 비록 사라고사와 바르셀로나의 각자의 정부는 유지되었다. 일종의 동군연합[10] 이때 카리용 조약을 체결하여 나바라 왕국에 대한 분할에 합의[11] 이듬해 교황 루시우스는 아폰수의 교황청에 대한 신속을 승인하였지만 렉스 대신 둑스 (군사령관) 칭호만 주었다. 1179년에야 교황청은 포르투갈 왕국을 승인한다[12] 당시 바다호스 토후국에게 메르톨라를 뺏긴 상태라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13] 하엔의 동북쪽에 위치[14] '코임브라의 관문' 레이리아를 공격하는 무슬림 군대의 거점[15] 리스본 함락 이후 많은 십자군이 정착하였고 그들 중 한명이 주교로 선출되었다.[16] 한편 1149년 무르시아의 아미르 이븐 마르다니쉬 (기독교측에 '레이 로보'로 알려진)는 데니아를 병합하며 안달루스 동부에 세력을 형성하였다. [17] 기존 히스파니아 제국의 본거지인 레온 대신 카스티야가 장남에게 주어진 것은 레온과 카스티야의 관계가 역전되었음을 보여준다. 레온 제국의 무산[18] 페르난도가 분할하고 산초가 먼저 영토 택하는 형식.[19] 산모 역시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한 상태[20] 후자의 요청으로 레온의 페르난도 2세가 개입하여 톨레도를 장악하기도 했지만 곧 회군하였다. 이후 1169년 알폰소 8세가 성년이 될때까지 라라 가문이 카스티야를 주도하였다. 내분을 틈타 나바라 왕국의 산초 6세가 카스티야 북부를 점령하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