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랑제브

 


[image]
'''이름'''
'''무휴딘 무하마드
(محي الدين محمد)'''
'''생애'''
1618년 6월 13일 ~ 1707년 3월 4일[나이]
'''재위'''
1658년 7월 31일 ~ 1707년 3월 4일[재위기간]
'''출생지'''
무굴 제국
다호드
'''사망지'''
무굴 제국
아마드나가르
1. 개요
2. 행적
2.1. 불행한 가정사
2.2. 평가
3. 기타
4. 관련문서


1. 개요


무굴 제국의 6대 황제. 풀네임은 '''알 술탄 알 아잠 왈 카칸 알 카람 아불 무자파르 무휴딘 무하마드 아우랑제브 바하두르 알람기르 1세'''.
무굴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인 황제로 세계사에서도 언급되는 인물이다. 정복 군주로서 고평가되기도 하나, 잦은 전쟁과 과도한 확장 및 제국 내 이교도들에 대한 철저한 불관용 정책을 펼쳐 제국의 쇠퇴를 초래한 암군이라는 평 또한 공존한다.

2. 행적


황제 즉위 전부터 군사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1636년부터 황자 신분으로 데칸 지역의 부왕 및 기타 중역에 임명되어 비자푸르, 콜콘다 왕조를 정벌하였다. 1646~7년에는 우즈베크-페르시아 정복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하여 맏형인 다라 시코(1615. 10. 16~1659. 9. 9)와[1] 후계자 자리를 놓고 분쟁을 겪었다.
이후 아버지 샤 자한이 다라 시코와 아우랑제브의 어머니이기도 한 뭄타즈 마할의 무덤 타지마할을 건설하기 위해 국고를 탕진하자 무덤 건설 반대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샤 자한을 폐위하고 유폐시켰다. 이때 샤 자한은 알코올 중독으로 병에 걸려 죽어가던 노인이었으나, 아우랑제브는 철저히 무시하여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1658년 5월에는 이를 반대해 봉기한 맏형 다라 시코의 군대를 격퇴[2]하고, 도주하는 다라 시코를 붙잡아 참수하였다. 사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시체는 조상 후마윤의 묘 근처에 버려졌고, 목은 감금 중이던 샤 자한에게 보내졌다고. 다라 시코의 장남 슐레이만에게도 지속적으로 마약을 투여하여 중독사시켰다. 같은 해 40세의 나이로 황제로 즉위했고 1661년 둘째 형인 샤 슈자(1616. 6. 23.~1661. 2. 7.)와 막내 동생인 무라드 바크시(1624. 10. 8.~1661. 12. 14.)를 차례로 제거하면서 무굴의 유일한 황제가 된다.
[image]
즉위 후 아우랑제브는 아버지 샤 자한 때부터 계획되었던 아그라에서 델리로 수도를 천도하는 작업을 완료한 후 바로 정복 전쟁에 착수하였고, 이는 매우 성공적이어서[3] 명목상으로는 다나자라(Dinajara) 왕조가 지배하던 스리랑카를 제외한 남인도 전체를 정복하여 '무굴의 영역은 카불에서 코모린 [4]까지'라는 말이 있었다.[5]
그러나 1679년, 악바르 대제 대에 폐지된, 종교의 자유를 대가로 비무슬림에게 받는 인두세지즈야를 부활시키고, 비 무슬림들에 대한 강력한 불관용 정책을 펼쳐 제국 대다수를 구성하는 비 무슬림 백성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맞게 된다.[6] 이런 지즈야 징세에 대한 비무슬림 백성들의 반발로는 아우랑제브의 삼남인 악바르가 지즈야 징세 거부를 명분으로 일으킨 반란을 시작으로 연쇄 작용하여 벌어진 '라지푸트 반란'이 있다.
또한 악바르 대제가 내세운 종교적 관용 이후 샤 자한 때부터 시작된 급격한 이슬람화는 아우랑제브 시기에 절정을 이루어 1658년~1659년의 기간에 제국법을 이슬람 율법화시키면서 음악, 춤, 음주를 규제하는 법을 제정하고, 악바르 대제가 종교적 화합을 위해 도입한 힌두 관습을 궁중 의례에서 폐지하기도 했다.
이후 아우랑제브의 폭정에 반대하는 힌두교도들이 결성한 마라타 동맹과 이슬람 개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구루[7] '테그 바하두르'가 생매장당한 시크교도들, 펀자브의 사트남 파, 자트족 그외에도 수많은 소수 민족과 종교계의 반란이 일었고, 이에 아우랑제브는 강경책으로만 일관하여 막대한 재정 소모를 일으켰다. 특히 마라타 동맹과의 끝없는 전쟁은 제국을 파탄 직전까지 내몰았다. 아우랑제브의 폭정이 비 무슬림에게 큰 증오를 불러와 아우랑제브 사후 제국 남부의 요충지인 비자푸르골콘다의 요새가 파괴되자 남인도에 존재했던 이슬람 문화는 순식간에 소멸하고 만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한 채 처음으로 부왕을 지냈던 봉지인 데칸 고원의 전장에서 쓸쓸히 사망했다. 그의 광적인 이슬람주의가 제국의 쇠퇴를 가져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죽기 직전 후계자들에게 자신의 행위를 따라하지 말고 선제들의 종교 관용책을 따르라고 충고했다. 그 후 아우랑제브의 세 아들들이 서로 제위를 놓고 내전을 벌이다 차남이 형제들을 몰아내고 바하두르 샤 1세(Bahadur shah I)로 즉위한다. 그러나 아우랑제브가 너무 오래 살았던 탓에 바하두르 샤도 즉위 당시 63세로 환갑을 훌쩍 뛰어 넘었기에 일찍 사망하면서 무굴 제국은 급속도로 쇠퇴힌다.

2.1. 불행한 가정사


아버지 샤 자한을 폐위시키고 유폐한 후 형제들을 죽인 업보 탓인지 그의 자녀들은 아우랑제브를 향해 칼 끝을 겨누었다. 특히 차남 무아잠은 1670년 첫 반란을 모의했다가 들통난 후 아버지에게 용서를 받았지만 그 뒤에도 세 번이나 반란을 모의해 네 번째 반란 때에는 아우랑제브도 참지 못하고 그를 감옥에 가둔 후 더울 때라도 냉수를 제공하지 말고, 좋은 식사도 제공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7년여 간을 감옥에서 죄수로 복역하던 무아잠은 아버지에게 또다시 용서를 받고 1695년 풀려나 아버지의 감시가 있긴 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그 후 그는 제국의 서북 변경지대 카불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재임 중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은 후 무아잠은 할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남은 형제들을 모두 죽인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다섯번째 아들인 악바르는 1681년 라지푸트와 손을 잡고 반란을 기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난 후 데칸으로 도주해 마라타 왕국의 왕 샴바지와 손을 잡고 대항했다. 아우랑제브는 '최악의 악바르'라 그를 부르며 군사를 모아 마라타 왕국의 군대를 박살내 버리고 샴바지 왕을 포로로 잡아 잔인하게 고문한 끝에 죽였으나 악바르는 페르시아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던 중 사망했다.
장녀인 제브니사 공주는 동복동생인 악바르를 지지했는데 아우랑제브 황제는 반역자인 악바르와 제브니사가 연락했다는 것에 분노했고 그녀의 재산을 몰수하고 델리 외곽의 감옥에 가두었다. 그녀는 20여 년간 세상과 격리된 채 지내면서 마크피(숨겨진 자)란 필명으로 수백 편의 수피 전통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기 5년 전에 감옥에서 사망했고 그녀의 시는 1929년 델리에서 출간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사망하기 전 아들 세 명에게 제국을 삼등분해서 다스리라고 유언을 남겼고 파디샤(황제) 자리는 장남 아잠 샤에게 넘겼으나 앞서 말했던 차남 무아잠이 모든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나마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생전에 안 본 게 위안거리인 셈.

2.2. 평가


[image]
아우랑제브의 검. 아우랑제브는 선왕들과 다르게 칼 이외엔 다른 장신구가 없었다.
아우랑제브 개인은 독실한 무슬림[8]이자 뛰어난 학식과 군사적 재능을 지닌 영웅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치세 후반기에 들어가며 국가경영과 자신의 종교관을 분리시키지 못한 것이 최대 실책이라 평해진다. 인도는 힌두교, 이슬람,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 등 주요 종교들 외에도 지역별로 군소 종교와 기독교,[9] 심지어 소수의 유대인들까지 온갖 종교와 문화가 난립한 땅이다. 그러나 아우랑제브는 제위 후반기의 벌인 지나친 이슬람 우위 정책으로 제국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선제들의 노력을 무너뜨려버렸다.
그리고 이런 이슬람 강요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경하게 탄압하는 폭정을 저질렀다. 이외에도 궁정 내에서 '무타시브(이슬람 율법)' 강요 및 힌두교식 인사법 금지와 제국 각지의 비 이슬람 종교 시설의 파괴, 비 무슬림 관료들에대한 차별과 이유 없는 해고를 일삼았다. 이에 이슬람 학자들과 신자들은 '이슬람 성군이 탄생했다'며 칭송했지만, 아우랑제브 사후 제국은 끝없는 반란과 재정 파탄으로 멸망 직전에 몰려있었다. 이를 아우랑제브의 차남 바하두르 샤 1세가 어느 정도 수습했으나 즉위 5년만에 급사하여 이후 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껍데기만 남아 사실상 멸망하게 된다.
또한 아우랑제브의 즉위 명분이었던 '선제의 폭정으로 인한 재정 파탄'은 아우랑제브 본인의 실책으로 인해 들고 일어난 반 무굴 세력과 제위 초부터 끝없이 이어져 오던 전쟁 및 해이해진 관료 기강으로 인한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수 배는 더 심하게 답습하였다. 그럼에도 당대 무굴 제국의 역량 자체는 훌륭하여 아우랑제브 치세에는 연 세입이 약 3억 900만 루피에 달했고, 사망시 아그라의 중앙 은행에는 2억 4천만 루피의 돈이 남아있었다.
[image]
이외에도 위에서도 잦게 언급되는 군사적 재능은 매우 뛰어났다고 평가된다. 개인의 무력 면으로는 황자 시절 아버지와 함께 머물던 군영에 대형 전투 코끼리 하나가 난입해오자 혈혈단신으로 말에 올라타 장창으로 코끼리를 죽여 '용사'라는 뜻을 가진 '바하두르(Bahadur)'[10] 칭호를 하사 받았으며, 전술•전략가로서의 능력은 물론 군행정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나 화약 무기 도입,[11] 군 조직 체계화, 병과의 유기적 연계 등의 개혁을 단행하여 아우랑제브 시기 무굴 제국의 군사력은 정점에 달했다고 평해진다. 다만 무굴 제국군이 정점에 달하는 이 시기에도 연간 1백만 루피의 세금을 창출하던 무굴 제국의 대표적인 무역항인 수라트가 마라타 동맹의 지도자인 시바지에게 함락되어 6일 동안 계속된 약탈은 무굴 제국의 세금 수입에 치명타를 입혔다. 대대적인 약탈의 와중에 멀쩡했던 이들은 영국인과 포르투갈인들이었는데 시바지는 이들에게 무리하게 공세를 가하지 않았다.
당시 인도의 군사 기술력과 인프라는 유럽 문명과의 활발한 인도양 무역과 교류를 통해 상당한 발전을 이루면서 유럽의 성형 요새와 유사한 구조의 대포병 요새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군대들이 겪었듯이 이런 포격에 강한 낮고 두꺼운 방벽에 사각이 안 생기는 공간 디자인, 대규모 요새포 운용이 가능한 본격적인 요새 하나에 걸리면 무굴 제국의 군대도 몇개월이고 빌빌거리며 피똥싸는 공성전 상황이 연출되는게 일반적이었는데, 아우랑제브는 비자푸르, 골콘다 같은 이런 장기전으로 질질 늘어지는 대규모 공성전에 몇차례나 직접 개입하면서 전황을 타개하고 무굴 제국의 승리를 이끌었다. 군사 기술이란 측면에서도 동시대 유럽, 오스만 제국과 교류하며 지속적으로 기술자, 고문들을 초빙하고, 당시 기술로서 최첨단인 조병창, 탄약 공장을 짓고 여전히 기마 귀족층의 기마 궁시가 중요했던 무굴 제국의 군대에 화약 전담 보병들을 집중적으로 육성, 배치하는 등 세계적 트렌드를 잘 인지하고 있는 유능한 군사행정가였다. 개인의 무력으로나, 장군으로나, 군주로나 군사적인 능력에서는 인도사 전체에서도 역대급인데 정치, 종교적 문제에서 오히려 스스로 점수 다 까먹어버린 인상이 강하다.
오늘날 인도 역사에서 아우랑제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2015년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아우랑제브의 이름을 딴 '아우랑제브 로'가 많은 사람들의 비판으로 인해 지워지고 그 자리엔 인도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압둘 칼림의 이름이 붙었다. 2014년 인도 공화국의 다수 여당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온 인도 인민당은 아예 아우랑제브에 이어 무굴 제국 자체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런 악평은 19세기 인도에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예를 들어 19세기 후반의 인도 작가 반킴 찬드라는 자신의 소설 『라즈싱하』에서 아우랑제브 황제가 힌두를 증오하려고 태어난 인물로 묘사하였다. 영국 지배자들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의 통치와 비교하며 힌두를 차별한 아우랑제브는 폭군이었다고 평가했고 이 평가는 후대로 그대로 이어졌다. # ##
아우랑제브가 조상인 악바르 대제처럼 포용력이나 정치적 유연성을 가지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냥 비관용적인 것은 아니었다. 힌두 귀족의 수는 그의 치세에 오히려 증가하였는데 아우랑제브 이전엔 힌두교도가 귀족의 20%를 차지했지만 그의 재위 시절엔 그 비율이 30%에서 절반 가까이로 늘었다. 무슬림 귀족들은 이런 힌두교도 우대에 아우랑제브에게 따졌으나 그는 "그대들의 종교는 그대들의 것이고, 내 종교는 나의 것"이란 말로 듣지 않았다.
사실 아우랑제브의 '불관용'이란 측면도 시크교 구루 살해, 바라나시 강제 개명 시도 같이 해당 종교의 지도자급 인물이나 성지에 대한 정치적 박해 중심이지, 아예 사회적 차원에서 이슬람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 신도들을 강제 개종, 박멸하려고 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악명 높은 힌두교 사원 파괴 사건들도 주로 정치적 반란이나 불온함에 대한 징벌적 성격이 강했고, 반대로 아우랑제브 치세의 후원으로 인해 융성해진 힌두교 사원들도 있다. 게다가 독실한 무슬림을 표방한 것치고 그가 상대한 적들 중 많은 수가 데칸 술탄국의 같은 무슬림 군주들이었고, '아우랑제브의 악행'으로 기억되는 큰 사건들 중 하나인 골콘다 약탈과 모스크 파괴도 같은 무슬림 상대로 저지른 것이다. 즉, 아우랑제브가 종교 불문한 정치적 독단성과 무자비함으로 적을 많이 만든 건 사실이라도, 특별히 종교적으로 불관용과 독선의 화신이었다는건 후대 19세기 인도 자체와 영국의 자유주의 역사학계가 만들어낸 과장된 인식이 20세기들어와 힌두교 다수 인도 vs 무슬림 파키스탄이라는 정치적 구도 속에 재생산되면서 생긴 왜곡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무슬림이었는데다가,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온 강직하고 엄격한 무골이기도 했던 아우랑제브는 샤리아에 기반한 이슬람 민법 강화와 민간에서의 혼합종교적(syncretic) 풍습에 대한 탄압 등으로 기본적으로 전임자들보다 종교적으로 더 엄격한 사회를 지향했던건 사실이나, 힌두교 음악과 제례에 대한 전면적 탄압 같은 에피소드는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게 현대 무굴 제국 사학계의 평가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는 완고해졌는데 힌두교에게 관세를 무슬림들에 비해 두 배나 올렸고 1679년에는 이슬람을 믿지 않는 모든 타 종교인에게 인두세를 징수했다. 하지만 이렇게 거둔 세금의 대부분이 국고에 보태지기보다는 세금 징수인들의 잇속을 채우거나 아우랑제브가 벌이는 전쟁 비용으로 소모되는데 그쳤다. 급기야 델리의 힌두교도들이 금요 사원으로 행차하는 아우랑제브의 행진을 가로막았는데 이들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코끼리에게 사람이 짓밟혀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아우랑제브도 인두세를 축소해야 했다.


3. 기타


한때 아우랑제브는 바미안 석불이 우상이라며 파괴하려 했으나, 당대 기술력 부족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그리고 2001년에...
조부 셀림은 '자한기르', 아버지 후람은 '샤 자한'이라는 페르시아식 왕호로 불리는 데에 비해 아우랑제브는 '알람기르 1세'라는 왕호가 있음에도 주로 본명으로 불린다.
아버지에게 엄청나게 학을 뗐던 모양. 쿠데타로 아버지를 끌어내린 선에서 그치지 않고 최소한의 생필품조차 안 주는 식으로 학대한 것에 더해,[12] 아버지를 가여이 여긴 큰누나 자하나라 공주가 아우랑제브에게 그만하라고 항의까지 했지만 죄다 씹고 최후까지 박대했다. 물론 아버지 샤 자한이 어머니의 사후 나라 재정을 휘청이게 하면서까지도 무리하게 어머니 무덤 짓는 데만 매달려서 망가진 걸 고려해보면 학을 뗄만도 하지만.[13]
1961년 아서 C. 클라크가 그레이트베이시스리프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침몰선을 보고, 거기에서 은주화를 발견하는데, 이 배가 샤 자한의 전설의 보물선이라는 소문이 퍼진다. 이 배는 타지마할을 장식하기 위해 수많은 보석을 옮기게 했는데, 침몰해렸다고 사람들이 추측했다. 그의 친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이 샤 자한의 보물선을 찾았지만 보석에 손을 대지 않았다며 이 배가 샤 자한의 보물선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3년 동안 발굴한 후 1964년에 자신이 발견한 배가 무굴 제국의 배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배 안에는 100개의 주화만 있었지 보석이나 금괴는 없었고, 자신이 발견한 배가 샤 자한이 아니고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 1세의 배였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은 2015년 9월 2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아우랑제브의 첫째 황후의 무덤은 아우랑가바드에 있는 비비 까 마끄바라(Bibi Ka Maqbara)이다.
그외에도 해적인 헨리 에이버리가 그의 제위 시기에 무굴 제국 소속인 메카 순례선을 털어 대박을 쳤다(2010년 기준 5,200만 파운드에 해당). 이에 아우랑제브가 분노하여 영국과 무굴 제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엠파이어 토탈 워에서 무굴 제국의 군주로 등장한다. 다만 시대가 그가 한창 제국 말아먹던 시대라서 인지 능력치는 좋지 않은 편. 무굴 제국은 논플레이어블이라 올팩션 모드를 깔아야 할 수 있다. 난이도는 그리 어렵지는 않은 편.

4. 관련문서



[나이] 89세[재위기간] 49년[1] 수피교도로서 (정확히는 수피교의 종단 중 하나인 카다리야파였던) 다라 시코는 뛰어난 문인이기도 해서 힌두교수피교를 비교하는 글도 쓰고 산스크리트어로 된 "우파니샤드"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하는데 정열을 퍼붓는 등, 아우랑제브와는 달리 개방적 종교관을 가졌기에 지배층인 무슬림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무슬림 신학자인 울레마는 다라 시코의 덜 무슬림스러운 면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다라 시코의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그 까다로운 성격이 파멸을 불렀다. 샤 자한이 골골댈 당시 다라 시코는 펀자브 지역의 통치자였으며, 펀자브인들은 다라 시코를 좋아했다.[2] 다라 시코는 뛰어난 문학적 업적과 다르게 군사적 재능은 꽝이었는데 샤 자한의 칸다하르 원정 중 다라 시코가 이끈 3차 칸다하르 공방전은 7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고도 실패했다. 1658년 5월 29일 사무가르 평원의 전투에서 잘 준비된 아우랑제브의 군대와 다르게 다라 시코의 군대는 오합지졸이었고, 다라 시코가 몰던 코끼리가 부상당해서 말로 갈아타자 부하들이 다라 시코가 전사한 줄 알고 도망쳤다.[3] 아우랑제브의 정복은 현지 세력을 몰아낸 뒤 중앙 정부의 직접 통치보다는 현지 세력을 제압하고, 명목상의 종주권을 얻는 방식이었다.[4]타밀나두 주 카니아쿠마리[5] 실제로는 코모린 곶까지 미치지 못했다.[6] 그러나 자이나교도들은 그 수가 수백만에 불과했으나 제국 재계를 사실상 지배하였기에 대놓고 건드리지 못했다.[7] 시크교의 종교 지도자.[8] 보석상인이자 여행가인 장 바티스트 타베르니에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호랑이 가죽을 덮고 땅바닥에서 잘 정도로 고행에 열중했다고 하며, 일과가 단순하고 경건하며 엄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화려한 무굴의 궁중생활보단 반복적인 군사원정의 삶을 좋아했다고 한다. 실제로 황제 자신은 장신구가 칼 밖에 없을 정도로 검소했다.[9] 중세 초기 인도로 이주해 독자적 종파를 세운 네스토리우스 계열 사도 토마스 교회 및 고아 지역을 비롯한 유럽 식민 제국들의 정복을 통해 가톨릭 포교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10] 몽골어 '바아투르(Baghatur)'에서 유래한 단어.[11] 후일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의 군사 기술자들을 초청해 지속적으로 개량한 결과 로켓 무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12] 물건 안 주는걸 넘어서서 물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고 한다. 샤 자한이 지급되는 물이 너무 짜서 강물이라도 달라고 했지만 그마저도 들어주지 않았을 정도.[13] 게다가 아버지의 타지마할 건설 때문에 아우랑제브는 즉위 후 재정 충당을 위해 결국 인두세까지 부활시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