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2세

 



[image]
(1670 - 1733)
폴란드의 국왕 겸 작센 선제후로, 강건왕 아우구스트(der Starke, the Strong)라고 불렸다.
본래 신성로마제국작센 선제후였으며 후에 러시아오스트리아의 후원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본래 루터파 신교도였으나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 왕이 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개종과정에서 호엔촐레른 가문의 아내가 별거를 선언하고 신하들이 퇴위하라고 반발한 흑역사도 있었다. 아내인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는 형식상 여왕이 되었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남편의 권유를 거절하고 평생 폴란드 땅에 발을 딛지 않았으며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거기다 당시 작센은 독일 개신교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작센 선제후는 개신교 선제후들 중 상석으로 제국의회에서 개신교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이 개종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가톨릭 신자가 제국의 개신교도를 대표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아우구스트 2세의 개종 때문에 작센의 왕조는 다른 베틴 가문들과 달리 2020년 현재까지 가톨릭을 믿고 있다.
이명인 강건왕에 알맞게 힘이 장사였으며 동물 던지기[1]가 취미였다. 그리고 여자를 밝히고 정력도 장사여서(...) 수많은 사생아들을 두었다. 어떤 말에 따르면 무려 365명이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 자신이 정식 자식으로 인정한 수는 11명 뿐이었다. 얼마나 여색을 밝히고 자식이 많았는지 자신이 하룻밤을 보낸 여성이 알고 보니 '''자기 자식'''이었다는 악소문도 있다.
강건왕이라는 별명과 달리 아우구스트 2세의 치세는 불안정했으며 러시아에 의존하여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였다. 오스만 제국타타르족과의 전쟁에서는 연승했으나 대북방전쟁 때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러시아가 나르바 전투에서 스웨덴에게 패하면서 스웨덴군이 폴란드로 쳐들어오는 일이 일어난다. 이 때 스웨덴군에게 연전연패하면서 크라쿠프까지 함락되었고 이에 의회가 그를 폐위시키고 친 스웨덴파인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를 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후일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대승을 거두자 그에 힘입어 스타니스와프에게서 다시 양위받아 폴란드 국왕에 복위했다. 이때 표트르 대제한테 '''포르노 그림'''을 선물로 보내는 기행을 벌였으나, 표트르도 성격이 별난 인물이어서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좋아했다고.
치적은 외치보다는 내치에 집중되었는데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로 드레스덴을 북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육성하였다. 오늘날 드레스덴의 관광지 대부분이 아우구스트 2세가 조성한 것들이고 1727년에 세계 최초의 공공 박물관[2]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 전까지의 박물관은 소수의 초청자들에게만 공개되는 개념이었기에 의의가 크다. 그리고 아우구스트 2세의 가장 큰 업적은 유럽의 도자기 기술의 발달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일본과 중국산 도자기에 심취하였으며,[3] 그가 수집한 컬렉션이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 주최 '왕이 사랑한 보물' 특별전으로 대한민국에서 공개된 바 있다. 또한 수입 도자기를 모방하여 백자의 자체 생산에도 노력하여 유명한 마이센 자기의 기틀을 닦았다.
참고로 그의 사생아 중 한 명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활약한 삭스 백작 모리스이다.[4]

[1] 축제에서 여우 647마리, 토끼 533마리, 오소리 34마리, 살쾡이 21마리를 던졌다고 한다.[2] 유명한 대영박물관은 1759년 개장했다. 다만 '공공 전시'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세계 두 번째인데, 바티칸에서는 1506년부터 라오콘 상을 대중에 개방하였기 때문이다.[3] 특히 중국산 청화백자에 환장하여 근위용기병 1개중대와 청화백자를 바꿀 정도였다.[4] 삭스는 프랑스어로 작센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