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엔촐레른 왕조

 

[image]
호엔촐레른 가문의 흑백 방형 분할 문장(紋章)[1]
1. 개요
2. 슈바벤계 (호엔촐레른 공가)
2.1. 루마니아 왕가
3. 프랑켄계 (프로이센 왕가)
3.1. 뒷이야기
4. 보유 작위

[clearfix]

1. 개요


독일어: Haus Hohenzollern
루마니아어: Casa de Hohenzollern
영어: House of Hohenzollern
호엔촐레른 가문은 프로이센독일 제국[2]의 왕조로 유명하다. 본래 독일 남서부 슈바벤 지방의 귀족가문 출신.
호엔촐레른 가문의 종가인 호엔촐레른 성은 프로이센이나 프랑켄 지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금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슈바벤 지방에 있으며 지금도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은 호엔촐레른 성을 소유하고 있다. 이 성은 정확히는 2/3는 프로이센 왕가 수장, 1/3은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가 수장의 소유.
1191년에 촐레른의 백작인 프리드리히 3세가 프랑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뉘른베르크 변경백 작위도 얻었는데, 이후 그의 영지는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장남 콘라트에게 뉘른베르크 변경백을, 차남 프리드리히 4세에게 촐레른 백작을 물려주는데, 콘라트의 후손이 프랑켄계(프로이센 왕가), 프리드리히 4세의 후손이 슈바벤계(지크마링겐 공가)다. 덤으로 촐레른 백작령은 이 분할과 함께 1218년 호엔촐레른 백작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참고로 호엔(hohen)은 독일어 고어로 "높이다, 올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대(大) 촐레른 백작령 정도의 의미이다.

2. 슈바벤계 (호엔촐레른 공가)


[image]
호엔촐레른 공국들의 군주 및 루마니아의 국왕을 배출한 가계. 가톨릭이다.
슈바벤계가 통치하는 독일 남서부의 공국들은 그저그런 작은 영방(領邦) 국가들로 존재하였다. 1576년에 호엔촐레른 백작령은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과 호엔촐레른헤힝겐 백작령으로 분할되었고, 1623년에 이들 백작령은 공국으로 승격된다. 그러다가 1850년에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과 호엔촐레른헤힝겐 두 공국은 프로이센에 흡수된다. 여기에 약간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자면, 프랑스의 2월 혁명 이후 1848년에 유럽 전역에서 시민혁명이 휩쓸면서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호엔촐레른 공화국이 선포되고 자신들의 지위가 매우 위험해지자, 1849년에 호엔촐레른-헤칭겐 공국의 마지막 군주 콘스탄틴[3]과 즉위한 지 1년 정도 되었던 카를 안톤은 스스로 군주위를 포기하고 영토를 먼 친척인 프로이센 왕에게 넘긴다. 그리고 1862년까지 프로이센 의회의 수상직을 하다가, 말년에는 그 자리에서도 물러나서 호엔촐레른 가의 가톨릭 군주로써 의무를 수행하였다. 호엔촐레른헤힝겐 공국의 마지막 군주였던 콘스탄틴이 가계가 절손된 이후 '''슈바벤계는 전부 이 사람의 후손'''. 카를 안톤의 큰아들인 레오폴트[4]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원인이 되는 스페인 왕위계승의 논란인물이었고, 둘째아들 카를은 밑에서 언급되다시피 루마니아 왕을 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공국도 없어지고 프로이센(프랑켄계 호엔촐레른가)에게 합병당했으면서도, 마구 귀천상혼을 한 프랑켄계 호엔촐레른 친척들에 비해 슈바벤가의 가주 일족은 의외로 귀천상혼이 적은 편이다.

2.1. 루마니아 왕가


[image]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국의 마지막 군주 카를 안톤의 차남 카를은 1866년에 루마니아 공국 공작(1881년에 루마니아 왕국)이 되어 루마니아 정교로 개종[5]하고 '카롤 1세'로 즉위한다. 근대 루마니아 왕조는 4대 81년 만인 1947년에 루마니아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 국왕 미하이 1세는 1921년생으로 2017년에 붕어하였다.
다만 미하이 1세는 딸만 5명인데, 1948년에 사라진 루마니아 왕 계승법에 따르면 루마니아 왕가는 살리카 법이 적용되므로 딸들은 왕가를 물려받을 수 없다. 이걸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루마니아 왕 계승법은 귀천상혼도 금지하는데 큰 딸인 마르가레타 왕세녀는 왕족/귀족이 아닌 라두 두다와 결혼함으로써 정통성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 이전 가주였던 프리드리히 공이 작위(타이틀)가 아니라 이름으로써 호엔촐레른베링겐[6] 왕자를 줬는데[7], 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가의 현 가주인 카를 프리드리히 공이 이에 반발하여 라두 두다는 호엔촐레른 왕자로 지칭할 수 없다는 요지의 소송을 걸었고, 이에 미하이 1세는 형식상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모든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의 작위들을 포기하고 성을 로므니에로 갈았다. 그리고 루마니아 왕가는 오직 미하이 1세 본인의 직계손만 물려받을 수 있다, 여성이든 상관없이 큰딸인 마르가레타 왕세녀[8]가 루마니아 왕가를 물려받을 것이라는 요지의 문서를 공식으로 발표함으로서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고 실제로도 미하이 1세 사후 마르가레타 왕세녀가 명목상의 여왕으로 즉위했다.[9]
마르가레타와 앞서 언급한 라두 두다 사이에는 자식이 없기 때문에 다음 계승권은 차녀 엘레나와 그녀의 아들 니콜라에에게로 가게 되었으나, 2015년에 미하이 1세가 니콜라에의 계승권을 박탈해버렸다. [10] 루마니아 왕국 헌법상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사람들에게도 계승권이 있는 모양이지만 정작 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가의 수장은 관심없다고 대놓고 말한 바 있다. 물론 그 외의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의 구성원들은 서서히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루마니아가 유럽 국가들 중 왕정 복고에 가장 가깝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1]

3. 프랑켄계 (프로이센 왕가)


[image]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 프로이센 공국, 프로이센 왕국의 군주 및 독일 제국의 황제를 배출한 가계. 프로테스탄트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호엔촐레른 왕조는 프랑켄계를 말한다.
프랑켄계의 콘라트는 프랑켄 지역을 중심으로 뉘른베르크와 바이로이트, 안스바흐 등의 지역을 통치하였다. 1415년에는 프리드리히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지기스문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오스만 제국을 격파한 공으로 새로운 영지인 브란덴부르크를 상속받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되었다.
이러던 중 서기 1525년에 튜튼기사단의 기사단장(Hochmeister)이었던 호엔촐레른안스바흐 가문의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이 마르틴 루터의 권유에 따라 신교로 개종하고[12] 기사단의 영지를 세속화, 폴란드의 봉신국인 프로이센 공국의 초대 프로이센 공작이 됨으로써 가문의 영지를 넓히게 된다. 안스바흐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1460~1536)의 3남으로 본디 영지 없는 귀족이었던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은 이로서 하루아침에 프로이센 공국의 지배자로 벼락출세하게 되었다. 참고로 알브레히트 직전의 가사단장은 바로 작센베틴 가문이었다. 이렇게 성립된 프로이센계 호엔촐레른 가문은 1618년에 단절되었고, 공작위는 맏사위이자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의 외증손이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공국의 공작으로서 폴란드 왕을 계속해서 섬긴다는 조건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성립된다.[13]
이후 30년 전쟁에서 신교 측에 가담, 신교 측에 유리하게 진행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후포메른과 마그데부르크, 뮌덴 등을 확보하였으며 대홍수로 정신 못차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선전포고,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 프리드리히 1세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군대를 지원해준 공으로 정식으로 프로이센 국왕으로 승인받음에 따라 북독일의 신흥 강자로 기존의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러시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라는 이름의 군주가 매우 많으며, 18세기 내내 꾸준히 군국주의 정책에 따라 영토를 확장하였다. 대표적으로 대북방전쟁 당시 그동안 탐을 내던 오데르 강 하구의 슈테틴을 확보하였으며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1740~1748), 7년 전쟁(1756~1763) 등을 일으켰으며, 앞의 전쟁으로는 슐레지엔을 합병하고 뒤의 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압박을 물리쳐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특히 1740~1786년을 재위한 프리드리히 2세(대왕) 시대에 이러한 확장주의가 절정에 달하여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함께 1차 폴란드 분할에 가담하여 동쪽으로 영토를 크게 늘리는 데 성공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시절에는 프랑켄 지방에 남아있던 안스바흐계가 바이로이트와 안스바흐 통치를 포기하고 프로이센에 영지를 갖다 바치고, 2, 3차 폴란드 분할에 참가하여 폴란드를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같이 완전히 갈라 먹었으며 프랑스에 일찍 굴복한 대가로 라인강 우안의 넓은 영토를 확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재위 1797~1840)는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에 빈번히 패배, 특히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와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 잇따라 완패한 뒤 굴욕적인 틸지트 조약을 조인한 뒤 급속히 자각한 민족의식을 이용하여 성공적인 국가 개혁을 달성하였고 최종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 빈 회의를 통해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포젠 및 기타 군소 공국의 영토를 합병하면서 크게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이때 합병한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일대에서 발견된 막대한 양의 철광석과 석탄은 프로이센이 공업화를 추진하게 되는 기반이 된다.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재위 1840~1861) 시대에는 3월 혁명(1848)과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1848~1849)의 영향으로 독일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가운데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대 몰트케의 주도하에 철저한 군국주의 정책으로 군비를 강화하여 강력한 육군국가로 성장했다.[14] 뒤를 이은 빌헬름 1세(재위 1861~1888, 독일 카이저 1871~1888) 시대에 호엔촐레른 왕조는 전성기에 이르러 홀슈타인 전쟁에서 덴마크의 남쪽 요충지를 빼앗고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사도바 전투에서 압승, 하노버 왕국을 비롯한 여러 공국들을 합병하여 소(小)독일주의에 입각한 독일 통일의 기초를 다졌으며 오스트리아를 독일 통일 문제에서 배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어 1870~7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두어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을 붕괴시키고 파리를 점령, 프랑스에 초유의 굴욕을 안겨다 주며 빌헬름 1세가 카이저(황제)로 즉위하여 독일 제2제국(1871~1918)의 막을 열었다.
신생 독일 제국은 비스마르크의 외교적 역량을 잘 발휘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과 삼국동맹(1882)을 체결하고 비밀리에 삼제동맹(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을 체결하며, 영국과도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 대독일 복수를 내세운 프랑스의 고립을 유도하려고 애썼다. 또 국내에서 급속한 산업화와 중공업을 일으켜세워 순식간에 독일은 유럽 최대의 공업국으로 성장하였다. 독일의 이러한 급속한 성장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국에게도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비스마르크 치하에서 1878년 베를린 회의를 통한 발칸 문제의 조정, 1884~1885년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 조정 등이 이루어졌으며 대체로 평화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유지했다.
1888년 빌헬름 1세가 고령으로 사망하고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3세도 갑자기 죽자 빌헬름 2세(재위 1888~1918)가 즉위하였다. 빌헬름 2세는 무력을 이용한 팽창주의를 내세워 비스마르크에 대립, 1890년 그를 은퇴시켰으며 3B 정책(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잇는 경로를 통해 중동과 인도양에 진출하겠다는 독일의 세계 정책)을 내세워 3C 정책(카이로-케이프타운-캘커타를 이어 환(環)인도양 및 아프리카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영국의 세계 정책)과 충돌하였고 모로코 사건(1905, 1911)을 두 차례나 일으켜 프랑스-영국의 관계가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식민지 확보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놓고 유럽 열강과 점점 마찰이 커져감에 따라 영국은 독일의 팽창을 저지할 목적으로 여러 나라와 협정을 체결, 3국 협상(1907)을 완성함에 따라 3국 동맹의 맹주인 독일을 포위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빌헬름 2세는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한 일련의 사태에 오스트리아 제국에 강경 대응을 주문하여 전쟁 발발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그 결과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쟁 중 빌헬름 2세는 점차 영향권을 상실해 군부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리히 루덴도르프가 강력한 권한을 쥐게 되었으며, 결국 1918년 11월 일어난 폭동의 결과 호엔촐레른 왕조는 급속히 대중의 지지를 상실하여 빌헬름 2세는 퇴위, 네덜란드로 망명함에 따라 수백 년을 이어온 호엔촐레른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동시에 독일 제2제국도 멸망하였다.
빌헬름 2세는 망명국 네덜란드에서 고국 독일의 혼란의 20년대, 나치의 30년대, 전쟁의 40년대를 두루 목격한 뒤 천수를 누리고 1941년에 사망했다.
독일 제국 수립 후 호엔촐레른 왕조 카이저.
1. 빌헬름 1세(1871~1888)
2. 프리드리히 3세(1888)
3. 빌헬름 2세(1888~1918)

3.1. 뒷이야기


패전 후 프로이센 왕가는 공산화를 피해 브레멘 근교로 이주했다.
오늘날의 프로이센 왕가는 많은 왕자들이 귀천상혼을 해버리는 바람에 1918년 당시보다 규모가 줄었다. 그냥 귀족 타이틀만 가지고 있는 여성과 결혼하기만 해도 동등결혼으로 인정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랬다(...).[15] 그래서 빌헬름 황태자의 뒤를 이어 가문의 수장이 된 루이스 페르디난트(1907~1994)는 차남이었다. 그리고 루이스 페르디난트의 네 아들 중 장남과 차남은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포기했고, 같은 이름을 가진 3남은 군 복무 중 사고로 요절했는데, 3남의 아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1976년생)[16]가 현 수장이다. 여담이지만 게오르크는 빌헬름 2세와 상당부분, 코와 눈매를 비롯한 얼굴의 외모가 닮았다.
전술한 대로 루이스 페르디난트의 장남과 차남은 귀천상혼을 해서 수장 자리에 대한 계승자격이 없었는데, 결혼 당시에는 자신들의 계승자격이 박탈되는 걸 인정했다가 조카가 수장 자리에 오르고 난 뒤에 귀천상혼이 인간평등에 어긋나는 위헌이라며 독일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 대법원까지 간 끝에 대법원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프로이센 왕가의 적법한 수장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으나, 재산은 그의 삼촌들에게도 분배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이젠부르크의 조피 요한나(Sophie Johanna von Isenburg)와 결혼하여, 현재 후계자 카를 프리드리히를 비롯한 3남 1녀를 두고 있다.
한편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현 가문의 수장(논란 있음) 마리야 여대공의 외아들 게오르기[17]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와 8촌간으로, 그가 수장이 되면 가문 이름이 호엔촐레른로마노프 가문으로 바뀔 예정이라고 한다.
참고로 호엔촐레른 가문 대표들과 독일의 문화 재단 등은 왕실 유산 문제에 관해 2013년부터 비밀리에 과거 빼앗긴 자신들의 보물과 재산을 되돌려줄 것을 프로이센문화유산재단 등에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4. 보유 작위



[1] 정확히는 호엔촐레른 백작의 문장이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가, 루마니아 왕실, 독일 제국의 황실 문장에는 이 문장이 방패 중앙에 그려져 있지만 호엔촐레른헤힝겐 가문은 문장이 방패 오른쪽 위에 그려져 있다.[2] 엄밀히 말하면 호엔촐레른 왕가는 "프로이센 왕실"이었을 뿐, "독일 황실"은 아니었다. 황제, 황후, 황태후, 황태자, 황태자비 개인에게만 "독일의 황~~"이라는 칭호로 불릴 수 있었고, 나머지 왕족들의 칭호는 "프로이센 왕자", "프로이센 공주"였다.[3] 첫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남자 후손은 있었으나 귀천상혼인 까닭에 그가 1869년에 죽자 가계는 절손된다. '''그러나''', 호엔촐레른 가문 수장 타이틀은 먼친척이자 옆동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국의 공작이였던 카를 안톤이 가져간다.[4] 루마니아 왕 타이틀은 동생이 가져갔지만, 자녀가 없어서 동생 사후 루마니아 왕가 타이틀은 이 사람의 둘째아들인 페르디난드 1세가 가져가게 된다. [5] 없어진 루마니아 헌법에 따르면 오로지 루마니아 정교인만 루마니아 왕을 할 수가 있다.[6] 베링겐 백작위는 호엔촐레른 가주들이 대대로 물려받는 작위들 중 하나다[7] 어차피 독일이나 루마니아나 공화국이므로 왕족/귀족 타이틀은 이름에 불과하다.[8] 이미 1997년에 후계자로 정했다.[9] 혈통상으로 보면 마르가레타 왕세녀가 꿀릴게 없다. 아버지는 루마니아 국왕이고 어머니는 부르봉파름 가문의 공녀로, 룩셈부르크 앙리 대공과 친척 관계다.[10] 일설에 따르면 그 이유는 원나잇으로 사생아 딸을 낳았기 때문이라는데, 아버지의 불륜 행각과 사생아 후손 때문에 지금도 골치를 앓고 있는 미하이 1세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니콜라에가 미하이 1세의 유일한 외손자고 나머지 외손녀들은 루마니아에 별로 관심없는 듯하다.[11] 루마니아의 많은 국민들은 구 왕실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다. 현재 루마니아가 왕정 복고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루마니아의 경제 상황이 왕정 복고보다 급할 정도로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12] 독일 외부 지역에서 신교로 개종한 최초의 사례였다.[13] 원칙상으론 봉신국의 대가 끊기면 종주국의 국왕이 영지를 회수하는 게 옳으나 대가 끊긴다고 해서 무조건 회수되는건 아니었고 대부분 프로이센의 경우처럼 군주와 타협을 보았다. 폴란드 종주권은 명목상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홍수'로 인해 폴란드 국내 사정도 어지러워 지는 바람에 이 틈을 타 명목상 주종관계를 청산하게 된다.[14] 이때 위에서 언급된 슈바벤계 공국들을 흡수했다.[15] 그나마 이 집안이 아들부자라서 지금까지 버틴 것이다. 빌헬름 2세는 6남 1녀, 빌헬름 황태자는 4남 2녀, 루이스 페르디난트는 4남 3녀를 두었다.[16] 이 분의 어머니(카스텔뤼덴하우젠의 도나타, 1950~2015)는 남편이 사망하고 세월이 흘러 올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1936~2017)와 재혼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시누이 마리체칠레의 전 남편이었다는 거(...) 한국이었다면 이런 관계는 결혼이 불가능했다.[17] 빌헬름 2세의 막내아들 요아힘의 증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