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제후

 

선제후(選帝侯). 선거후(選擧侯)
라틴어: Princeps Elector
독일어: Kurfürst
영어: Prince-elector
[image]
(좌측부터) 쾰른 주교공, 마인츠 주교공, 트리어 주교공, 라인팔츠 궁중백,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1. 설명
2. 역사
2.1. 초기의 선제후
2.2. 선제후의 전성기
2.3. 금인칙서 (1356년)
2.4. 금인칙서 이후
3. 상세
4. 선제후국 목록
4.1. 기존의 7개 선제후
4.2. 17세기 이후 새로 추가된 선제후
4.3. 나폴레옹 전쟁 시기 새로 추가된 선제후
5. 창작물에서의 선제후


1. 설명


신성 로마 제국의 작위제도에서 으뜸가는 지위. 전통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선거로 뽑게 되어 있는데, 이 황제 선거의 선거권을 가진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영주들을 가리킨다.

2. 역사



2.1. 초기의 선제후


지도자를 선출하는 전통은 게르만족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게르만 전통상 원래 지도자 선출에는 모든 남성 구성원이 참여해야 하지만, 시간과 거리상의 제약에 의해 처음에 귀족 신분으로 한정되었다.
독일의 왕을 뽑는 선거의 기원은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후사 없이 사망(911년)하여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었을 때였다. 동프랑크의 5대 부족 공작[1]프랑켄, 슈바벤, 작센, 바이에른, 상/하 로트링겐 공작들은 회의를 열어 독일 부족 공작 중에서 다음 왕을 뽑기로 결의한다. 이들은 회의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서프랑크 국왕 샤를 3세의 왕위 계승권 주장을 거부하고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다음 왕으로 선출한다.(911년) 이로써 동프랑크 왕국이 소멸되고 독일 왕국이 시작되었다.
선출로 왕이 된 콘라트 1세 역시 후사 없이 사망하자 919년 5월 6일 프리츨라어에서 열린 회의에서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가 다음 왕으로 선출되었다.[2] 하인리히 1세 이후 오토 왕조독일 왕위를 세습하게 되지만 형식적으로 선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는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이 세워진 후에도 이어진다.
962년 독일 왕국의 국왕인 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에도 독일 왕국의 국왕 선출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즉 선제후들이 회의에서 독일 왕국 국왕인 독일왕을 뽑고 이 독일왕이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게 되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오토 왕조의 황제들은 제위를 아들에게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안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전에 선제후 선거를 실시해서 아들을 공동 독일왕에 앉히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오토 왕조는 제위를 세습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에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력이 강성하거나 권위가 안정적인 시절에는 주로 이런 방식으로 제위가 세습되었는데, 잘리어 왕조, 합스부르크 가문 등이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황권이 비교적 강했던 신성 로마 제국 초기에는 이렇게 세습을 위한 방책으로 부자 사이인 두 명의 공동 독일왕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실권은 현역 황제인 부왕이 장악하고 있었고, 아들은 명목상 공동 독일왕이지만 황태자의 역할에 제한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성 로마 제국 초기에는 황제들이 이탈리아 경략과 십자군 전쟁 등으로 해외로 출병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아들 공동왕이 해외로 출타 중인 부왕을 대신해 내정을 다스리기도 했다. 그러나 때때로 아버지가 해외로 출병한 틈을 타, 공동왕인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는데, 하인리히 4세, 프리드리히 2세 등이 그런 사례였다. 이런 아들들의 반란은 결국 황권의 약화와 가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하인리히 4세의 아들들의 반란은 결국 서임권 투쟁에서 황제가 패하는 결과(보름스 협약)에 영향을 미쳤으며,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들의 반란은 대공위 시대의 혼란을 야기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참고로 게르만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던 시절 9세기 프랑스(서프랑크)에서도 귀족들의 선출로 국왕을 뽑은 적이 있었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후 귀족들의 선출에 의해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오른 것이 그 사례다(987년). 왕위에 오른 위그 카페는 독일의 오토 왕조와 마찬가지로 선출제 속에서 아들에게 왕위를 세습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부왕제로, 신성 로마 제국의 공동 독일왕과 비슷한 제도였다. 즉 왕의 업무가 과중하다는 이유로 장남을 부왕으로 선출시켜 대관식까지 받게 한 후 권력의 일부분을 떼어주는 것이었다. 이후 카페 왕조는 무려 14세기까지 왕조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선출제가 사라지고 장자 세습제가 굳어지게 된다.

2.2. 선제후의 전성기


동프랑크 왕국 말기, 독일 왕국 성립기에 시작된 황제 선출 전통은 이후 기존 부족 공작들과 함께 오토 1세의 제국교회 정책으로 성장한 수좌주교[3]인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주교 등을 포함한 선거인단이 황제(독일왕)를 선출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4] 그러다가 12세기 말 호엔슈타우펜 왕조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 시절에 선제후 제도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그중에서도 특히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권을 행사했던 황제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시절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제위 세습은 큰 위협에 처해 있었다. 바이에른와 작센을 전부 손에 넣으며 호엔슈타우펜 가문보다 더욱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벨프 가문의 존재 때문이었다. 바르바로사 황제는 즉위 후 거의 평생 라이벌인 벨프 가문하인리히 사자공과 다툼을 벌였고 결국 승리해 그의 영지를 잘게 쪼개 5대 부족 공국 체제를 사실상 해체하게 된다.(1180년~1190년)
강력한 황권을 휘두르던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프리드리히 2세의 죽음 이후 몰락하고 그 과정에서 슈바벤 공작령마저 해체된다. 이후 1356년 금인칙서가 반포될 때까지 선제후 자리는 고정되지 못하고 유력 제후들이 돌아가면서 차지했다. 선제후 자리를 놓고 제후들 간의 다툼도 자주 발생했다.
선제후 제도는 세습화된 왕조의 후계자를 공인해주는 거수기 역할을 할 때가 많았지만, 왕조가 단절되었으나 황권이 약화되고 제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 선제후들은 막강한 실권을 발휘하기도 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 선제후들의 그런 실권을 실질적으로 발휘했던 시절이 있었다. 황권 강화를 위해 선제후들을 조져놓았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사망한 직후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세습하기 시작한 프리드리히 3세 때까지 약 250년간의 적지않은 기간 동안이었다.
바르바로사 황제는 황권 강화와 가문의 안정적인 제위 세습을 위해 선제후를 독점하고 있던 5대 공국을 해체했지만 그가 죽자 거수기였던 선제후들은 오히려 진정한 실권을 발휘하며 바르바로사의 후손들을 몰락시켰다. 바르바로사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하인리히 6세가 즉위하여 강력한 황권을 이어가려 했지만 하인리히 6세가 이른 나이에 죽자 제후들을 찍어 누르던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반감을 가진 제후들과 교황이 결탁하여 하인리히 6세의 아들이자 차기 황제(독일왕)으로 이미 선출된 프리드리히 2세를 거부하고 벨프 가문오토 4세를 황제로 옹립(1198년)한 것이었다. 그동안 독일 역사에서 가문이 단절된 경우가 아니라 왕조의 후계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제후들이 실권을 발휘해서 왕조를 갈아치운 것은 이때가 사실상 처음이었다. 때문에 위키피디아 등에서 1198년을 실질적으로 선제후 제도가 시작된 것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안정적으로 세습하게 되는 1452년까지 약 250년간 선제후들은 황제 선거에서 실력을 행사했고, 황제들과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이어진다.
13세기에는 당시 절정의 위세를 과시하던 교황의 입김도 선제후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대 교황 중 최절정의 위세를 과시한 인노첸시오 3세는 선제후 중 3명의 성직 선제후에 더해 세속 선제후 중 라인팔츠 궁중백을 포섭하여 황제 선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권력 다툼을 벌이던 호엔슈타우펜 가문[5]을 견제하기 위해 1198년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해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일시 단절시키고 벨프 가문오토 4세가 제위를 차지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오토 4세가 막상 제위에 올라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자 인노첸시오 3세는 황제를 압박하여 결국 제위에서 자진해서 물러나도록 하기까지 했다. 독일왕이 아닌 대관을 받은 황제 중에서 교황의 압력으로 퇴위한 것은 오토 4세가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 오토 4세 퇴위 후 인노첸시오 3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배후 지원하여 그를 황제에 앉혔지만 프리드리히 2세 역시 황제와 갈등을 벌이게 되었고 이에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3번이나 파문을 날리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크게 힘을 잃게 되었지만, 교황 역시 독일 제후들의 반감을 사게 된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 사후(1250년) 제국은 후계자를 두고 혼란에 빠졌고 대공위 시대(1254년 ~ 1273년)가 시작되었다. 결국 교황과 제후들은 혼란을 종식시키 위해 다시 정통성 있는 황제를 뽑아야겠다는데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1273년 대공위 시대를 종식하기 위한 선제후 선거가 열리기 된다. 제후들의 반감으로 교황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선제후들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황제를 뽑긴 뽑되, 특정 가문이 제위를 세습하며 강성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한미한 백작 가문을 황제로 선출한 후 왕조를 계속 교체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하여 스위스 산골짜기에 있는 합스부르크 백작인 루돌프 1세가 황제로 선출되었다. 당시 어수선한 상황과 교황 및 막강한 공작, 프랑스 국왕 등의 견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루돌프 1세는 교황 대관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교황은 그를 황제로 인정했고 이후 한동안 이처럼 대관을 받지 못하고 제위를 이어가는 시대가 지속된다.
대공위 시대가 끝나고 합스부르크 백작이 황제에 올랐지만, 선제후들은 한 가문이 제위를 세습하면서 강성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황제가 죽은 후 세습을 허용하지 않고 계속 왕조를 교체했다. 이에 합스부르크 백작, 나사우 백작, 룩셈부르크 백작, 비텔스바흐 백작 등이 돌아가면서 제위에 올랐고 어떤 가문도 3대 이상 장기적인 세습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각 가문은 후손들에게 제위를 세습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점차 세습 주기가 길어졌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제위 세습에 상당히 가까이 다가간 가문이었다. 1356년 카를 4세가 반포된 금인칙서룩셈부르크 가문이 안정적으로 제위를 세습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카를 4세 노력에도 불구하도 룩셈부르크 가문도 제위를 확실하게 세습하는데는 실패했고, 대가 끊기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1452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가 제위에 오른 후 마침내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점 세습하게 된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 역시 초기에는 세습을 이어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워낙 장수한 덕에 아들 막시밀리안 1세에게 제위를 세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카를 5세는 선제후 선거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쳐서야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게다가 카를 5세도 아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는데 실패했다. 사실 카를 5세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려 했지만 스페인 출신 황제에 대한 제후들의 거부감 때문에 아들이 선출될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고 1553년 자진해서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야만 했다. 물론 펠리페 2세가 제위를 물려받는데는 실패했지만,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이어가는데는 성공했다.

2.3. 금인칙서 (1356년)


그러다가 1356년 황제 카를 4세금인칙서를 공포하였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이 7명의 선제후를 명시했다.
금인칙서에서 확정된 선거제도와 선제후 특권을 살펴보면
  • 선제후는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 이상 성직제후 3명. 팔츠 궁중백, 작센 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왕 이상 세속제후 4명으로 확정.
  • 선거는 프랑크푸르트시에서 거행, 대관식은 아헨시에서 거행[6]
  • 선거는 단순 과반수. 선거 결과에 복종하지 않는 선제후는 자동적으로 선제후 지위를 박탈당한다.(이전 혼란기 대공위 시기와 대립왕을 예방하려는 의도이다.)
  • 선거 결과는 교황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선제후는 제후 중 최상위 직위로 인정되며 영지 내 완전한 재판권[7], 광산 채굴권, 관세 징수권, 화폐주조권[8], 유대인 보호권[9]을 갖는다.
  • 선제후 영지는 분할을 금지하고 장자 단일 상속제로 한다.[10]
  • 선제후는 '호출에 응하지 않을 권리와 소환되지 않을 권리'를 가지며 선제후에 대한 반역은 대역죄로 처벌한다.
  • 황제 자리가 공석일 경우 라인 궁중백이 슈바벤 지역과 프랑켄법이 미치는 지역을, 작센공이 작센법이 미치는 지역을 통치한다.
  • 제후 사이의 동맹, 도시 사이의 동맹은 금지한다.[11]
  • 제후 사이의 개인적 다툼을 금지한다.[12]
  • 선제후를 비롯한 제후의 영지 주권을 법적으로 확정한다.
결국 선제후 특권은 제국 내에서 선출로 뽑힌 황제에게도 권력을 제한 당하지 않으며 영지내에선 왕이나 다름 없는 권력을 누렸다. 다만 한 가지 제약이 있었는데 마음대로 작위를 퍼줄 수 없는 것. 이것은 황제의 고유 권한이었으나 문제는 이마저도 선제후들이 자신들에게 충성한 신하들을 추천하면 제국 의회에서 황제가 거의 들어주었기에 있으나 마나였다...
황제 선거권이 있기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출할 시에 각각 선제후 한 표씩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다수결에 의해 황제가 선출되었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들어선 이후로는 대부분의 황제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으나, 로마 이래 황제 직위와 게르만 귀족의 오랜 관행상 최고직위는 세습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황제 선거를 앞둔 때에는 출마를 앞에 둔 유력제후가 이 선제후들에게 굽신대며 돈과 각종 이권을 챙겨주었다. 대표적으로 벨프 가문오토 4세는 자기 자식에게 절대로 세습하지 않을 것을 공약으로 당선 되었을 정도... 사실 신성 로마 황제는 일단 선출되면 무를 수 없는 '''종신직'''이었기 때문에 경쟁 가문의 후보가 황제로 등극하면 무를 수가 없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격적 등극 이후로는 단 한 번(바이에른의 카를 7세)을 제외하면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의 구성원이 황제로 등극했지만 선출 전에 쉽게 승계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13] 중세시대 이후 교통과 통신의 안습함 때문에 유고시에 다시 모이기도 어려우니 미리 차기 황제를 뽑아두기도 했다. 차기 황제로 내정된 사람은 '로마왕'으로 불렸다.[14] 하지만 차기 황제는 대부분 현직 황제의 아들, 동생, 손자가 당선되었고 없다면 사위 등 친지들이 당선되었다.

2.4. 금인칙서 이후


그리고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절된 르네상스 시기 이후 실제적으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거의 독식했지만, 그렇다고 황제 선거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매번 무난하게 당선된것은 아니었다. 선제후들이라고 그저 거수기가 아니라서 그들은 항상 강력한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온 힘을 썼기 때문. 16세기 초에는 현직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장손 카를 5세[15]는 황제 선거 시 유럽 내 거대 자본인 푸거 가문과 베르트 가문을 동원해서[16] 돈을 뿌려 프랑스 프랑수아 1세를 제치고 당선되었을 정도다. 결과는 알려진 바 대로 카를 5세가 당선이었는데 이때 쓴 카를 5세의 선거자금이 거의 3배였다고 한다. 프랑수아 1세는 30만굴덴, 카를 5세는 푸거 가문을 동원하여 85만굴덴을 뿌렸다고 한다. 이때문에 돈질에 경악한 영국 헨리 8세는 출마를 고려하다 포기할 정도. 프랑수아 1세의 출마에서 보듯이 황제 출마, 즉 피선거권은 선제후 자격을 요하지 않기 때문에 외국 군주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도 출마가 가능했다.[17]
선제후는 독일 땅의 귀족 서열에서 으뜸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황제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보다 낮은 자리이긴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 안의 왕위는 모두 황제가 겸하는 명예직이거나 선제후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황제 다음가는 자리였다.[18] 또한 제국대법원의 관할에서 벗어나는 독자적인 법원을 가지며, 독자적인 화폐 주조권과 관세권 같은 자율성을 갖고 있었다. 선제후의 의무라고는 '''황제를 적대하고자 하는 동맹을 결성하지 않을 의무'''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조차 잘 지키지도 않았다. 명목상으로 신하이지만 황제를 뽑는 유권자이다보니 황제에게선 상전이 따로 없는 격.

3. 상세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와 합스부르크 세속령은 엄연히 구분되는 직위이나 사실상 오스트리아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식하다시피 했기에 한국 국내에서는 이로 인한 혼동이 자주 발생한다. 예컨대 카를 6세의 국사조칙을 신성 로마 제국 제위와 결부하여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국사조칙은 합스부르크 가문 세습령을 남자 상속자가 없으면 딸도 물려받을수 있다는 것이지 '''합스부르크 가문 상속과 관련 된 국사조칙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국회의원이 자기 재산은 물려줄 수 있지만 의원직은 못 물려주는 것처럼, 합스부르크 가문령은 세습 재산이지만 제국 황제는 선출직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바이에른 공작 카를 7세가 200년전 문서를 들고 나와서 합스부르크 가문 땅도 다 내꺼 드립 치고 그에 호응하여 벌어진 것이었다. 전쟁 중인 1742년에 있었던 황제 선거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인 로트링겐의 프란츠 슈테판을 당선시키기 위해[19] 트리어 주교공과 마인츠 주교공, 그리고 동맹 관계인 하노버 공작[20][21]의 지지를 받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세습해오던 선제후 직위인 보헤미아 왕위가 당시 카를 7세의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막상 자신은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카를 7세는 자신의 두 표와[22] 친척한테 표를 몰아준 다른 비텔스바흐 가문 구성원들(팔츠 궁중백, 쾰른 주교공)[23]의 두 표,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24]와 작센 공작[25]의 지지를 받아 황제에 당선되었다.[26] 이처럼 황제 출마와 선거는 합스부르크 가문은 물론 현직 황제라도 마음대로 배제할 수가 없는 고유의 제도였다.
이후의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가 카를 7세를 여러번 격파했지만 이미 카를 7세가 당선된 이상 오스트리아도 그가 사망할 때까지는 무를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카를 7세가 즉위 한지 3년만에 사망해서 다시 전쟁에서 타협이 벌어지고, 1745년에 황제 선거가 다시 열려서 프란츠 1세가 뽑힐 수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참패하여 그 대가로 합스부르크 가문 세습령 중 알짜 지역인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뜯겨야 했다. 당시 슐레지엔은 공업지대로 합스부르크 가문 세습령에서 세수 비중이 4분의 1을 차지했다고 한다.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엔 속하지 않으나 선제후급 대우를 받는 작위도 있었다. 오스트리아 대공이 그 예로 선제후는 아니나 제국 내에서 유일하게 공작(Duke, Herzog)이 아니라 대공(Archduke, Erzherzog)으로 불렸으며 대특권(Privilegium Maius)과 소특권(Privilegium Minus)을 보유하여 장자상속, 재판권과 같은 선제후 권리는 물론이요 선제후 회의에 속하지 않은 제후들 중 최선임 제후로 영방국의 제국회의를 주재할 권한 등이 부여되었다. 이 근거는 합스부르크 가에서 조작한 문서였으나 합스부르크 가가 황제가 되고나선 셀프 승인했다.
제국 말기에는 현직 오스트리아 대공이 아닌 후계자가 선제후 특권을 부여한다는 식의 명예직으로 부여되기도 했다. 그 예로 7년 전쟁이 끝나고 협상결과 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1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요제프 2세에게 선제후 특권이 부여된 일이 있다. 여기서 조건으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슐레지엔 점유를 인정하는 대가로 선거시에 오스트리아를 지지하도록 합의했고 오스트리아의 요제프는 1763년 차기 황제인 로마왕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그는 아버지 프란츠 1세가 사망하자 1765년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이후 선제후국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헤센-카셀 선제후국만은 선제후 직위를 계속 사용했다. 헤센-카셀은 1866년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을 들다가 프로이센에 강제 합병당해 멸망할 때까지 선제후 칭호를 유지한 유일한 국가였다.

4. 선제후국 목록



4.1. 기존의 7개 선제후


나폴레옹 전쟁 이전 선제후국들은 모두 제국 궁정의 직책을 겸하고 있었다. 물론 이 직책들은 명예직일 뿐이니 실질적인 타이틀은 아니다.
  • 성직 선제후 3명
    • 마인츠 대주교 - 독일 왕국령의 제국재상(Arch-chancellor). 선제후 중 최고서열로, 투표순서도 마지막이라 투표 전 동수일 경우 사실상 캐스팅보터 역할을 했다. 1802년 대주교령이 프랑스에 합병되면서 해체됐고, 나폴레옹을 지지했던 마지막 선제후는 라인강 동안에 남은 영지(아샤펜부르크 공국)와 주교로서 다스리던 레겐스부르크 지역을 받아 선제후 지위를 1806년까지 유지했다.
    • 쾰른 대주교 - 이탈리아 왕국령의 제국재상. 서열 2위. 1797년 라인강 서안의 영지가 프랑스에 점령된 후, 1803년 라인강 동안에 남은 영지도 주변 세속 군주들에게 분할되며 사라졌다. 마지막 선제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이라 주교직을 빼앗기고 나서도 튜튼 기사단장을 맡거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지역의 부왕직을 맡는 등 잘 나갔다(...).
    • 트리어 대주교 - 부르군트 왕국령의 제국재상. 역시 1795년과 1803년에 걸쳐 모든 영역을 상실하고 소멸하였다. 마지막 선제후는 아우크스부르크 주교[27]직으로 물러나 거기에서 죽었다.
  • 세속 선제후 4명
    • 작센 공작 - 제국 대장군(Marshal)이자, 황제 공위시 북독일[28] 지역의 제국섭정으로 세속제후 중 가장 서열이 높았다. 원래 기간 제후국이었던 작센 공국의 후계 격. 1356년의 금인칙서 이전에는 옛 작센의 양대 계승자인 작센-비텐베르크와 작센-라우엔베르크 사이에 다툼이 있었으나 금인칙서에서 비텐베르크 계열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다가 1547년 슈말칼덴 전쟁에서 신교도인 작센 선제후가 가톨릭과의 전쟁에서 카를 5세에 사로잡히자 폐위당하고 본가인 에른스트 계열의 선제후직을 방계인 알베르트 계열로 이전한다.
    • 라인팔츠 궁중백[29] - 제국 집사장(Arch-Steward, 1623년까지, 1706~1714년) 또는 제국 재무장(Arch-Treasurer, 1648~1706년, 1714년~1777년), 그리고 황제 공위시 남독일[30] 지역의 제국섭정. 영지는 옛 상 로트링겐 지역에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켄의 후계로 간주된다. 바이에른 공작령과 동군연합 관계이던 것이 1253년 분할상속되었기 때문에, 선거에 비텔스바흐 가문의 입김이 커질 것을 우려한 다른 제후들의 반대로 바이에른이 선제후 지위를 잃게 되었다. 1621년에는 궁중백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팔츠 전쟁에서 패배하여 제국법으로부터의 제외 선고를 받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선제후위를 바이에른에 빼앗겼다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다시 되찾았다. 1685년에는 직계가 끊긴 궁중백위를 가톨릭 신자인 노이부르크 궁중백 필립 빌헬름[31]이 계승하면서, 종교적 균형이 깨지는 것을 우려한 다른 선제후들의 견제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가 새로이 선제후로 격상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777년에 바이에른 공작위를 계승한 궁중백 카를 테오도르가 궁중백위와 영지를 바이에른 공작위에 통합함으로써 선제후 지위가 소멸했다.
    • 보헤미아 국왕 - 제국 연회장(Arch Cupbearer. 직역하자면 황제에게 술을 올리는 자리.). 원래는 독일이 아니기 때문에 선거권이 없었는데, 13세기 바이에른 공작위의 선거권이 없어질 때 제국 구성국으로서의 투표권을 요구한 게 인정되어 선거권을 얻었다. 즉, 실질적으로 옛 기간 선제후국인 바이에른의 후계.
    •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 제국 시종장(Arch-chamberlain). 위의 팔츠 문단에서 알 수 있듯이 선제후 자리를 2개 얻은 비텔스바흐 가문에 대한 견제 목적으로 13세기 바이에른 선제후를 대신하여 선제후 자격을 얻게 되었다. 옛 슈바벤의 후계. 1701년부터 1806년까지 프로이센 왕국 국왕 겸직[32]

4.2. 17세기 이후 새로 추가된 선제후


  • 바이에른 공작[34] - 팔츠의 자리를 대신해서 제국 집사장.
  • 하노버 공작[35] - 제국 기수(Bannerbearer). 1714년부터 1806년까지 영국 하노버 왕조 국왕[36]

4.3. 나폴레옹 전쟁 시기 새로 추가된 선제후


1777년 팔츠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가 같은 가문인 비텔스바흐 가문이 다스리는 바이에른 선제후국 영지를 상속받으면서 팔츠 선제후가 바이에른 선제후직에 통합됨에 따라 선제후가 8명으로 축소된 가운데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성직대주교 선제후 3곳의 영지가 프랑스로 합병되고 프로이센의 침공을 받은 하노버 선제후령이 소멸함에 따라 총 5개 선제후직이 공석 상태가 되었고 이에 나폴레옹이 1803년 레겐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나폴레옹과 프랑스 입맛에 맞는 위성국들을 선제후국으로 대거 임명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헤센-카셀 선제후국을 제외하고 모두 선제후 칭호를 버렸다.
  • 레겐스부르크 공(Prince): 사실상 레겐스부르크 주교령. 독일 침공시 나폴레옹을 지지한 마인츠 대주교공 카를 테오도르 폰 달베르크[37]에게 원래의 마인츠 대주교령 대신 원래의 레겐스부르크 주교령과 자유시, 그리고 주변의 몇개 수도원령을 합쳐 하나의 공국으로 만들어서 부여했다. 레겐스부르크는 원래 신성로마제국 제국도시였으나 빈 회의 이후 바이에른 왕국에 합병.
  • 잘츠부르크 대공 → 뷔르츠부르크 대공: 1801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침공에 휘말려 작위를 잃은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트 3세[38]에 대한 보상으로 기존의 잘츠부르크 주교령을 세속화시켜서 영지로 제공하고 선제후 자격을 부여해 주었다. 그러나 1805년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에 의해 페르디난트는 또다시 영지에서 쫓겨났고, 이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잘츠부르크 대공령이 오스트리아로 편입되면서 페르디난트는 뷔르츠부르크 지역을 영지로 받았다. 빈 회의 이후에 뷔르츠부르크는 바이에른이 가져가게 되었고, 페르디난트는 다시 원래 영지인 토스카나로 돌아갔다.
  • 뷔르템베르크 공작: 1805년 오스트리아 침공에서 나폴레옹을 도운 공으로 제국 해체 후 나폴레옹으로부터 왕위를 받았고, 이는 빈 회의에서도 그대로 인정되어 독일 제1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이어졌다.
  • 바덴 변경백: 1806년 제국이 해체된 후 대공위를 받았고, 빈 회의에서 그대로 인정됐다.
  • 헤센-카셀 방백 → 헤센 선제후: 1803년 이전에 프랑스가 합병했었던 마인츠 주변지역을 받고 크기를 키움과 동시에 선제후위를 받았다. 1807년 나폴레옹이 베스트팔렌 왕국을 만들어내면서 일시적으로 멸망했다가, 1813년 나폴레옹 실각 이후 다시 선제후령이 부활했다. 빈 회의 때 선제후 빌헬름 1세는 선제후령을 "카티 왕국"[39]으로 승격시켜주기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5. 창작물에서의 선제후


  • 워해머에서는 제국에서 선제후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선제후들은 지역을 통치하며 왕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데다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권도 가진다.
  • 룬의 아이들에 등장하는 트라바체스에서는 선제후가 통령을 뽑는 기형적인 공화제가 자리잡았다.

[1] 독일어로는 Stammesherzogtümer, 영어로는 Stem duchy, 한국어로는 주로 '부족 공국'으로 번역된다. 원래 수에비, 작센, 프랑크 등 각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게르만 부족들의 군주들로부터 기원하는 작위이기 때문. 10세기경에는 프랑켄, 슈바벤, 작센, 바이에른, 상/하 로트링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2] 하지만 하인리히는 작센과 프랑켄의 지지밖에 확보하지 못했고 곧바로 바이에른과 슈바벤 공작 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해야만 했다.[3]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세 교구 주교들. 이들은 로마시대부터 교구가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 지역의 다른 주교들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4] 이 시기의 선제후 명단은 정확하지 않은데, 1152년 기록에 의하면 교회의 대표들과 프랑켄, 슈바벤, 작센, 바이에른 네 명의 공작들이 언급된다.[5] 북이탈리아는 호엔슈타우펜 치하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남이탈리아 일대는 신성 로마 제국과 별도로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중부 이탈리아를 차지하던 교황령은 남북으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포위를 당하고 있던 상황있었고 이에 교황의 경계심은 극도로 높아졌다.[6] 대관식은 아헨보다 이탈리아에서 교황에게 직접 받는걸 선호하고 그렇게 한 황제들도 있었다. 그리고 마인츠 대주교가 선임 제후임을 들어 아헨에서 쾰른 선제후에게 대관받는 것에 대해 이견을 제기했고, 중세 후반부터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인츠 대주교가 대관하는 걸로 변경되었다.[7] 나중에 살인과 반역 같은 중죄까지 넘어간다.[8] 황제 공위시 대리로 황제명의 화폐도 주조 가능한 특권도 있다.[9] 중세시절 유대인은 교회에 속하지 않은 이교도였고, 이교도는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은 말 그대로 아무런 의무와 권리가 없는 존재여서 유대인의 생명과 재산은 원칙적으로 황제의 소유였다. 즉 유대인을 죽이거나 유대인의 재산을 빼았으면 살인이나 강도죄로 처벌하는게 아니라 황제 소유의 물건을 손상시킨 죄에 대한 판결을 받는 구조라 황제가 보호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말 그대로 죽은 목숨이였다.[10] 게르만 귀족들의 전통상속법은 분할 상속제 였으나 상속으로 선제후들의 직위 다툼과 영지분할로 세력이 약해지는걸 방지.[11] 그러나 실제론 지켜지지 않았다. 도시와의 동맹은 카를 4세가 아들의 선출 로비로 자신이 위배해서 제후들이 들고 일어난다.[12] Fhede라는 중세 관습이 있어서 개인적인 다툼이 있을 경우 가족이나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당사자들이 한판 붙는(?) 풍습이 있었다. 이 과정 중 제후 본인이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해 선제후 자리가 비는 사태를 막기 위한 것.[13] 레오폴트 1세 시절엔 루이 14세의 방해로, 카를 5세 때는 역시 프랑스 왕의 출마로.[14] 작위로써의 이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황태자에 해당한다. 정확하게는 '로마인의 왕'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서브타이틀인 '독일왕'도 정확하게는 '독일인의 왕'이다.[15] 카스티야 국왕인 아버지 필리프 1세는 일찍 죽었다.[16] 이 대가로 푸거 가문에 티롤 지방의 은광 채굴권을 하사했다.[17] 프랑수아 1세 이전의 필리프 3세, 이후의 앙리 3세, 이후의 루이 14세도 출마를 원했으나 교황과 독일 제후들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무산되었다.[18]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겸하는 독일, 이탈리아, 부르군트 왕위 각각의 재상직은 3주교가 나눠 가지고 있었으며, 보헤미아 왕(과 훗날 프로이센 국왕으로 승격되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은 선제후였고, 나머지 선제후들 또한 황제의 자문관 내지는 직속 가신으로부터 유래하는 궁정 명예직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19]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황제, 즉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은 북독일에서 거의 배제되었지만 제국 내 교회령(대주교구, 주교구)과 제국기사령, 기타 군소 제후들에게선 아직 황제의 영향력이 통하긴 했다.[20] 조지 2세는 당시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지지 했다. 그러나 나중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자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게 되고 결과는 7년 전쟁.[21] 사실 영국의 1701년 정착법(act of settlement in 1701)에 의하면 조지 2세가 영국이 아닌 자기 영지의 이익을 위해서 영국 군대를 동원하거나 하노버, 신성 로마 제국의 신하에게 작위를 내리거나 의회의 의원으로 임명하는 것, 영국 영토를 마음대로 떠난 것은 불법인데 첫 번째와 세 번째 조항이 거의 '''사문화'''되어 무시되었다.[22] 카를 7세는 선제후 자격을 가진 바이에른 공작이며, 체코 귀족들이 의회에서 합스부르크를 버리고 보헤미아 왕위를 들어다 바쳤다.[23] 카를 7세의 사촌이 팔츠 궁중백이며 카를 7세의 동생은 쾰른 선제후.[24] 프리드리히 대왕은 1740년 합스부르크 최대의 꿀땅인 슐레지엔을 뜯어먹기 위해 국사조칙을 파기,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비밀리에 오스트리아와 강화를 맺으면서 슐레지엔을 얻어 국력을 강화하는 기빈이 되었다.[25]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로 선거 전 카를 7세와 자신을 지지해주는 대가로 오스트리아를 반띵하기로 밀약을 맺어둔 상태였다.[26] 친 오스트리아 세력의 조지 2세는 어차피 표수로 절망적이기 때문에 투표에 참가하지도 않았고 대세인 카를을 보고 트리어랑 마인츠도 배신, 결국 만장일치로 카를이 당선되었다.[27] 역시 영지는 상실되어 바이에른에 넘어갔다.[28] 공식적으로는 작센, 베스트팔렌, 하노버외 북독일[29] 참고로 팔츠와 궁중백(궁정백)은 생각보다 많다. 선제후로 지명된 궁중백은 현재의 라인란트-팔츠 지역에 있던 팔츠를 관리하는 라인 팔츠 궁중백이었다. 따라서 흔히 우리가 아는 팔츠 선제후는 사실 라인팔츠 선제후이다.[30] 정식으로는 프랑켄, 슈바벤, 라인란트와 남독일[31] 레오폴트 1세의 세번째 부인과 카를로스 2세의 두번째 부인 마리아 안나의 아버지로 카를 6세의 외할아버지다. 참고로 이 사람의 외손녀인 이사벨 파르네제가 펠리페 5세의 두번째 부인이니 카를로스 3세에게는 먼 증조할아버지 뻘이다. 합스부르크와 의외로 많이 딸들을 결혼시켰는데 듣보잡에서 갑자가 선제후가 된지라, 당시 자신의 동생의 아내가 전 팔츠 선제후의 딸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팔츠계승전쟁을 일으켰던 루이 14세를 막기 위해서다.[32]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두 직책을 겸직했다.[33] 이 양반이 제임스 1세의 사위로 스튜어트 왕가의 앤 여왕이 죽고 권리장전으로 인해 카톨릭이 왕이 될 수 없게 되자 왕이 된 조지 1세의 외할아버지이다. 아울러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에게는 각각 외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이다. 둘은 사촌 관계이다.[34] 비텔스바흐 가문이 바이에른을 물려받으면서 같은 가문서 두 개 선거권 논란으로 바이에른은 박탈당했다가 1618년 팔츠 궁중백의 프리드리히 5세[33]가 합스부르크에 반란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왕이 되어 황제와 적대하면서 그 보복으로 팔츠의 선제후 자격을 박탈하여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인 바이에른에게 선제후 자격을 주었다. 그러나 1648년 30년 전쟁의 합스부르크의 사실상 패전과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팔츠의 선제후 권리가 부활한다.[35]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이었다가 하노버로 수도를 이전. 1692년 레오폴트 1세에게 선제후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 당시 족보 연구의 공로로 라이프니츠가 기사작위를 받는다. [36] 조지 1세, 조지 2세, 조지 3세가 여기에 해당한다.[37] 나폴레옹이 라인강 유역을 프랑스령으로 합친 이후라 대주교공임에도 불구하고 마인츠 주교직은 나폴레옹이 서임한 다른 주교에게 넘어갔고, 당시 주교로서는 보름스(1805년 폐지), 콘스탄츠, 레겐스부르크의 주교였다.[38]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2세의 동생이었는데, 프랑스 혁명에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유럽 군주 중 프랑스 혁명 정부를 제일 먼저 공식 승인한 군주였을 정도.[39] 이 지역에 거주하던 옛 프랑크계 게르만 민족의 이름을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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