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 스미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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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고의 수비형 유격수'''이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영구결번 헌액자이다.[1] 별명은 '''오즈의 마법사(Wizard of Oz)'''.
2. 선수 경력
2.1.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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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러바마에서 태어난 스미스는 어렸을 적에 캘리포니아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야구 생활을 시작했다. 최초로 프로 지명을 받았던건 1976년이었으나 당시에 지명했던 디트로이트와 스미스간의 협상이 결렬되었고, 이듬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게 4라운드에서 지명받고 프로 생활을 시작한다.
마이너리그에서 반 시즌을 보내고 1978년에 데뷔한 그는 159경기에서 .258 1홈런 45타점에 그쳤지만 40개의 도루, 여기에 뛰어난 수비력에 힘입어 신인왕 투표에서 2위에 오른다.[2]
샌디에이고에서부터 그의 수비 범위, 어깨는 모두 완벽했다. 그러나 문제는 타격이었다. 샌디에이고는 보다 공격력이 강한 유격수를 원했고 연봉 협상에서 잡음을 일으킨 스미스를 카디널스로 트레이드한다. 이 때 세인트루이스에서 파드리스로 온 선수는 개리 템플턴. 당시에는 양쪽 모두의 의중이 잘 드러맞은 트레이드였지만 템플턴은 이 후 무릎 부상으로 인해 카디널스 시절만큼의 공격력을 선보이지 못한다.(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템플턴은 파드리스 역사에서 중요한 시대를 보낸 선수로 남아있다)
2.2.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화이티 허조그 감독의 세인트루이스는 부시 스타디움의 독특한 구조에 맞는 '화이티 볼'을 추구했는데, 아지 스미스는 여기에 최적화된 선수였다. 발이 빠르고 수비력이 좋았던 그는 여기서 야구 인생의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허조그 감독의 기대에 부응한 스미스는 1987년에는 .303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3할 시즌을 맞았고, 이 해 MVP 투표에서 2위에 올랐다. 게다가 스미스는 허조그 감독의 작전야구 수행 능력이 충실했던 선수였는데, 그의 도루 능력과 희생번트, Hit & Run 수행 능력은 매우 출중했다.
카디널스로 온 이후 1982년부터 1996년까지(1993년을 제외) 올스타전의 단골 손님이자 '''1980년부터 1992년까지 13년 연속 골드글러브'''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했다. 진정한 수비 머신이었고, 진정한 슈퍼 스타였다. 이 계보는 후에 오마 비즈켈이 이어받는다.
하지만 부시 스타디움의 인조잔디는 그의 무릎을 괴롭혔고 1993년 이후 연 100경기 출장을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1996년 .282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부활을 알렸지만, 이미 41살의 노장에 대해 새로운 카디널스의 감독 토니 라 루사는 냉혹하게도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결국 스미스는 1996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다. 이 때 스미스와 라 루사와의 앙금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았고, 스미스는 2011년까지 카디널스의 각종 행사에 소극적으로 응했다. 하지만 2012년부터는 라 루사도 은퇴했으니 다시 부시 스타디움에 얼굴을 자주 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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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기자단 투표에서 91.7%의 득표를 받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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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 하나로 명예의 전당까지 들어간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수비형 유격수였다. 수비능력만으로 따졌을 때 비교대상이 없는 역대 원탑. 타격은 통산 .262/.337/.328 타출장에 OPS+ 87에 100을 넘긴게 딱 4시즌 뿐으로 사실상 평균 이하의 타자였다고 봐야 한다.[3] 다만 포지션이 유격수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통산 OPS+가 90 정도만 돼도 준수한 수준이긴 하다. 레퍼런스 기준 통산 oWAR이 47.8에 카즈 입성후 전성기때는 꾸준히 oWAR 2.0 이상을 찍은 쓸만한 타자. 도루능력은 매우 높아서 통산 580개의 도루에 통산 성공률도 80%에 육박할만큼 좋았다.
19시즌 동안의 선수시절을 통틀어 타율 3할은 딱 한번 쳐봤고, 장타율 4할은 커녕 통산 28홈런, 시즌 최다홈런이 6개에 불과해 갭파워조차도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워낙 오래 뛰었기 때문에 통산 2,460안타를 쳐냈고 통산 BB:SO가 1072:589로 삼진을 잘 당하지 않고 출루능력이 어느정도는 되는 선수. 때문에 오히려 현시대에 나왔으면 출루율을 중시하는 현장과 세이버에서 평가가 더 올라갈 수도 있는 선수다. 세이버가 자리잡기도 전인 1987년에 선수로서 유일한 3할을 쳤을때 MVP 2위에 올랐을 정도니...
스미스의 통산 bWAR은 무려 76.5로 메이저리그 전체 역사상 70위인데[4] , 앞서 언급한 빈약한 타력으로 이정도의 WAR을 기록하기 위해서 얼마나 대단한 수비가 필요했는지는 대충 짐작이 될것이다. 실제로 레퍼런스의 통산dWAR(43.4)와 팬그래프의 통산 Def(375.3) 모두 역대 1위이다. 참고로 통산 3-4-5에 500홈런을 기록한 프랭크 토머스, 600홈런을 날린 짐 토미가 스미스보다 아래에 있다.[5] 심지어는 3,300안타를 넘긴 양키즈의 캡틴 데릭 지터도.
결국 타력으로는 리그 평균 이하의 선수가 '''역대 No.1급의 수비를 통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것.''' 그것도 첫턴에 90퍼센트를 넘겼다. 현장의 평가나 팬들에게 보여지는 수비, 기록상으로도 삼위일체라 할 수 있는 유격수 수비의 전설이다. 유격수 수비의 기본기나 타구에 대한 대처등 유격수 수비의 틀을 바꿔버린 야구 역사를 바꾼 인물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를 중용했던 화이티 허조그 감독은 그가 매 경기마다 안타를 2개씩 훔쳐내면서 1년에 막아내는 실점을 75점 정도로 추측했으며, 이 데이터를 토대로 하면 1985년 당시 그가 없었던 세인트루이스의 팀 평균자책점은 3.10에서 '''3.57'''로 오르게 된다. 물론 실제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팀 내에서 얼마나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Shortstop (8th)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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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력뿐만 아니라 쇼맨쉽도 뛰어났는데, 공수교대 타임에 팬들을 위해 '플립'이라는 덤블링 묘기를 선보이곤 했다.
- 더 자세한 내용은 김형준의 레전드 스토리 참조.
6. 관련 문서
[1] 등번호는 1번.[2] 당시 신인왕은 89경기만에 23홈런을 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밥 호너(Bob Horner)가 가져갔다. 신인 시절에는 3루수로 나왔고 이후 1루수를 겸직했는데 꽤 괜찮은 수비력과 30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장타력을 지닌 선수였다. 그러나 1986년에 2할 7푼대 타율과 27홈런을 쳤음에도 구단주들의 담합으로 인해 계약을 못하고 이도저도 못하다 일본의 야쿠르트로 가서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과도한 관심으로 인한 부담감에 1년만에 다시 돌아와서는 어깨 부상으로 인해 60경기 3홈런을 치고 그 다음해부터 선수생활을 못하고 은퇴했다. 빅리그 통산 OPS가 .830이 넘었고 일본에서도 OPS 1.100을 넘겼던 선수라 아쉬운 커리어다. 나중에 소송을 통해 담합으로 인해 손해 본 금액을 보상받기는 했다고 한다.[3] 레퍼런스 기준. 팬그래프에서는 통산 OPS+ 90에 100 넘긴게 7시즌이다. 레퍼런스에서는 97, 98 받은 시즌이 많다.[4] 투수도 포함한 전체 선수 중 70등이다!![5] 이 둘은 심각한 수비 때문에 지명타자로 갔지만 1루수로도 거의 1000경기씩 뛰어서 그것만으로도 -WAR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