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라킨
1. 개요
신시내티 레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빅 레드 머신 시대 이후의 신시내티 레즈를 대표하는 선수. 그리고 現 브라질 야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다.
19년의 선수 생활을 오직 신시내티에서만 보냈으며, 1990년대를 풍미한 유격수. 다만 그가 뛴 말년에 이른바 3대 유격수(알렉스 로드리게스, 노마 가르시아파라, 데릭 지터)로 불리는 공격형 유격수의 시대가 도래하는 바람에 살짝 묻혔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임에는 분명하다.
2. 선수 생활
출신지에서 알 수 있듯이 고향이 신시내티다. 야구를 좋아했다면 설사 팀이 약해도 고향팀을 보면서 꿈을 키웠을텐데, 배리 라킨이 어린 시절을 보내던 때의 신시내티 레즈는 "빅 레드 머신(Big Red Machine)"이라 불리며 1970년대를 지배하던 초 강팀 중 하나였다. 자연히 고향 팀의 입단이 그의 꿈이 되었다. 특히 같은 포지션이자 팀의 주장이었던 데이브 콘셉시온의 뒤를 잇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고.
1982년에도 신시내티의 지명을 받았지만 낮은 순위에 실망해서 미시간 대학교에 진학하여 여기서 두 차례 MVP에 오르고, 1984 LA 올림픽에 출전해서 은메달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1985년 드래프트에 나와 1라운드 4번으로 마침내 꿈에 그리던 고향팀 신시내티 레즈 입단에 성공했다. 짧은 마이너 생활을 마친 후, 1986년 메이저리그에 입성해 그 뒤로 은퇴할 때까지 신시내티의 주전 유격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1990년 신시내티가 갑툭튀 돌풍을 일으키면서 당대 최강이었던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를 4:0으로 완파하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때 일조했다. 아울러 1995년 신시내티의 중부지구 우승을 이끈 공로로 마이크 피아자, 그렉 매덕스를 제치고 내셔널리그 MVP에 올랐다. 성적은 사실 이 두 선수에 비해서 보잘것 없었지만[1] 팀의 주전 유격수로서 보여준 투지와 다재다능함, 팀을 이끄는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 결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미 팀 내 클럽하우스 리더로 떠오른 상황에서 마침내 1997년부터 팀의 공식 주장이 되어 유니폼에 주장을 상징하는 C자를 달고 뛰게 되었다.
하지만 선수 생활 말년에는 투자를 꺼리는 구단주 마치 쇼트와 불화를 일으켜 트레이드를 요청하기도 했었다. 비록 트레이드 자체는 성립되지 않았지만, 말년에는 다소 평범한 성적이었다. 결국 2004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를 찾는 구단이 없자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2010년부터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로 올랐다. 꾸준히 득표율이 오른 끝에 2012년 86%의 지지율로 3년 만에 HOF에 입성했다. 그리고 2012년 8월 25일에 그의 등번호인 11번이 레즈의 영구결번이 됐다. 이는 1970년대 '빅 레드 머신' 시대 이후 첫번째 영구결번이기도 하다.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브라질 야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16강 라운드까지 이끌며 신선한 충격을 줬다. 브라질이 세계 야구계에서는 변방이나 다름없는 팀인데 그 팀을 이끌고 대륙별 예선을 거쳐 본선에 진출시켰다. 비록 16강 라운드 조별리그에서 쿠바, 일본 등 쟁쟁한 팀들에게 밀려 3전전패를 기록했지만, 단 2~3점 차로 석패했으니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2013년 11월에 짐 릴랜드 감독의 은퇴로 공석이 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직 공개 모집에 응할 것으로 보였지만, 현재 맡고 있는 브라질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전념할 것이라고 밝혔다.
3.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Shortstop (13th)
4. 스타일
선수 시절을 요약하면 굉장히 다재다능한 타입이었다. 통산 0.295의 타율과 198홈런, 2,340안타, 960타점, 379도루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현역 시절 유격수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유격수 30홈런-30도루를 기록한 적도 있었고[2] , 전성기에는 늘 3할의 고타율을 유지했었으며, 도루 실력도 빼어난 편이었다.[3] 수비력도 준수해서 세 차례 골드글러브를 차지한 적도 있었다.[4] 물론 공격력도 좋아서 내셔널리그에서 9차례 실버슬러거를 차지했을 정도로 당대 유격수들에 비해 더 뛰어난 공격력을 과시했다.
특히 PO에 상당히 강했는데 통산 PO 타율이 0.338이었고, 애틀랜타의 전설적인 사이영 3인방 상대로도 0.389의 타율을 기록할 정도로 PO에서 강력했다. 한 가지 불운이라면 그가 활약하는 동안 팀 전력은 '빅 레드머신' 시절처럼 그리 강하지 않아서 플레이오프에 오른 시즌이 우승을 차지한 1990년과 본인이 NL MVP에 오른 1995년이 전부라는 점. 그래도 우승 반지를 하나 차지했다는 점에서 아주 불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5]
5. 기타
- 모범적인 선수 생활로 1993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상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이 있다. 미국 국무부 스포츠 특사 자격을 가지고 있으며 2011년 한국에도 방문했다.
- 스포츠 가족이다. 동생인 스티븐은 1루수로 신시내티 레즈에서 딱 한 달 배리와 같이 뛴 적이 있다.[6] 나머지는 모두 마이너리그 생활. 큰형 마이크는 노터데임(Notre-Dame) 미식축구팀 주장 출신, 작은형 바이런은 자비어 대학 농구부의 스타이자 현재 자비어 대학 농구부의 캐스터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는데, 딸은 라크로스를 하고 있으며, 아들인 셰인은 마이애미 대학교(Univ. of Miami)의 주전 가드로 2013년 NBA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18순위로 댈러스 매버릭스에 지명됐다.[7] 그러나 아버지의 후광을 뛰어넘기는 힘든지 NBA에서 2~3옵션 포인트가드로 그럭저럭 활약했다. 2017년 스페인 리그 사스키 바스코니아에서 뛰고, 2018년 현재는 NBA에 다시 입성해서 보스턴 셀틱스에서 2~3옵션으로 좋은 활약을 하고있다. 점점 출전시간이 늘고 있다.
-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이 은퇴하면 그렇듯 자연스럽게 운동과 멀어지게 돼 역변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라킨은 은퇴 뒤에 격투기(주로 킥복싱류)를 연마하면서 선수시절의 몸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브라질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어 브라질 야구 국가대표팀을 16강 라운드까지 올려놓았다.
- 라킨의 영구결번식 날은 사실 신시내티에게 경사스럽지만은 않은 날이었다. 이 날 아폴로 11호의 레전드이자 신시내티의 자랑이었던 닐 암스트롱이 사망하여 라킨의 영구결번을 축하하던 팬들은 큰 슬픔에 빠졌고, 전미의 야구장에서는 이닝 중간마다 Fly Me to the Moon 등의 우주스러운 노래들이 흘러나오며 암스트롱을 애도했다.
[1] 라킨: 0.319 15홈런 66타점 51도루, 피아자 : 0.346 32홈런 93타점, 매덕스 : 202.2이닝 19승 2패 1.63[2] 여담으로 1998년 A-Rod가 내야수(유격수) 최초의 40-40을 기록하게 된다. [3] 라킨의 통산 도루성공률은 무려 83%다.[4] 당시 라킨의 골드글러브 경쟁자로 1980년대에는 1980 시즌부터 13시즌 연속으로 골드글러브를 탄 '오즈의 마법사' '''아지 스미스'''가, 90년대에는 원조 '쿠바 미사일' 레이 오도네즈가 있었다.[5] 멀리는 타이 콥, 어니 뱅크스, 루크 애플링,테드 윌리엄스, 칼 야스트렘스키 같은 레전드에서부터 가까이에는 약먹고 날라다니던 배리 본즈나 킬러 B의 일원이었던 크레이그 비지오, 현역 최고 누적 기록을 가진 3루수인 아드리안 벨트레같은 선수도 반지가 없다. 즉,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월드시리즈를 제패할 수 없다는 것. 팀원들과 적당한 운까지 합쳐져야 가능하므로 오히려 강하지 않은 전력이라고 평가받으면서도 반지를 가져간 건 큰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다.[6] 1998년이었는데, 그 한 달 중 시즌 최종전에서는 브렛 분과 애런 분 형제가 2, 3루, 배리와 스티븐 라킨이 유격, 1루를 보는 기이한 라인업이 나온 바 있다.[7] 원래 애틀랜타 호크스 픽이었으나 트레이드로 댈러스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