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치볼드 프림로즈
[clearfix]
1. 개요
빅토리아 여왕 시기 재임한 영국의 제 48대 수상. 자유당 소속이면서도 제국주의를 옹호한 인물로, 재임 시기에는 영국의 군비 확장과 대외 팽창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산업혁명 이후 점점 가속화됐던 영국 국내 사회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다.[4] 다만 이 시기 영국의 수상을 지낸 인물들이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턴, 솔즈베리와 같은 역대급 굇수들이라서 총리로의 점수는 상당히 박한 편.
2. 생애
2.1. 초기
1847년 유서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그 시절 귀족들이 으레 그랬듯이 이튼 - 옥스퍼드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간다. 1868년 그의 할아버지이자 4대 로즈베리 백작이 사망함에 따라 백작직을 계승한 뒤 본격적으로 정계에서 투신하기 시작한다.[5] 이튼 시절부터 토론 능력 하나는 끝내주는 것으로 영국 상류층에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에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턴이 이 촉망받는 젊은이를 서로 자기 당에 끌어들이려고 경쟁을 펼쳤다. 그리고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것은 글래드스턴. 1880년 총선에서 프림로즈는 글래드스턴이 총리직으로 복귀하는 데 힘을 보탰고, 그 공을 인정받아 외무장관으로 임명된다.
2.2. 총리 재임기
외무장관으로 재임하면서 프림로즈는 아프리카 내 영국 세력을 확장하는데 총력을 동원했고[6] 글래드스턴 내각 평생의 숙원이었던 아일랜드 자치권 부여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도록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이는 끝끝내 부결되고 만다. 이후 1894년 그의 정치적 대부였던 글래드스턴이 정계 은퇴를 선언함에 따라 공석이 된 총리자리에 프림로즈가 지명된다.[7] 그렇지만 프림로즈 내각은 재임기간 내내 엉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이 자행하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수수방관하면서 야당의 거센 비판을 받았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해군을 증강시키려는 계획은 프랑스, 러시아와 같은 라이벌들의 심기는 심기대로 불편하게 한 채 여당 자유당의 반발로 무산되고 만다. 여기에 빅토리아 여왕 때문에 억지로 수상 자리에서 밀려났던 당 내 라이벌들 역시 신나게 뒤에서 프림로즈의 정책을 방해하고 다니는 판국이었다. 이런 총체적 난국의 상황 속에서 1895년 6월 21일 군 예산안이 의회에서 부결됐고,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던 프림로즈는 이 부결안을 자신에 대한 불신임안이라고 판단하여 사임하고 만다. 그의 후임으로 빅토리아 여왕에게 지명된 인물은 솔즈베리 후작.
2.3. 여생
이후로도 아주 정계에서 은퇴했던 것은 아니지만 프림로즈는 보어전쟁을 옹호하는 것과 같이 당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기 때문에 자유당 내부에서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고 만다. 그 덕분에 1905년 자유당이 다시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그는 입각조차 하지 못하는 굴욕을 겪고 만다. 본인도 더 이상 중앙정계에는 관심이 없었던지 경마, 고서 수집, 저술 등에 열중하다가 1929년 세상을 떠난다.
3. 여담
- 이튼 시절부터 굉장히 야심만만했다고 전해지는데, 10대의 나이에 이미 인생의 삼대목표로 더비 경마 대회 우승, 부잣집 상속녀와 결혼, 총리 취임을 꼽았다고 한다. 흠좀무한 것은 실제로 이 세가지를 다 이뤘다는 것(...)
- 10대에 이미 더비 경마 대회 우승을 꿈꾸었던 것에서 보이듯이 승마광이었다고 한다. 어느정도였느냐 하면 대학교 시절 학생은 말을 소유하는 것이 금지됐음에도 쿨하게 무시하고 말 한 필을 구입해버렸다. 이게 들통난 이후 학교 측에서 '말을 다시 되팔래? 아니면 자퇴할래?'라고 하자 쿨하게 자퇴해 버릴 정도...
- 이미 귀족 출신이라서 꽤나 부자였음에도 '부잣집 상속녀[8] 와 결혼 + 훌륭한 재테크' 덕분에 죽을 무렵에는 더더욱 부자여서 가진 집이 12채였다고 한다.
- 게이였다는 의혹도 살아생전에 파다했지만, 뭐 진실은 저 너머에....
[1] 아치볼드 프림로즈의 장남으로 크리켓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윈스턴 처칠 내각에서 1945년 5월 스코틀랜드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그러나 취임 두 달 만에 처칠 내각은 실각하고 말았다.[2] 백작 본인에 대한 경칭[3] 5th Earl of Rosebery[4] 다만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개혁을 시도했던 거지 오늘날의 실업 급여나 산재보험과 같은 사회복지는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다. 그런 생각은 사회주의자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했고..[5] 백작직을 승계했기 때문에 하원에서의 정치활동은 원천봉쇄당했지만, 이 시점만 하더라도 아직 상원이 하원 못지 않은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정계에서 활동하는데 큰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 상원이 정치력이 없는 명예직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부터.[6] 그가 평소 가장 즐겨하던 말이 '이집트의 주인이 인도의 주인이 된다.'였다. 여담으로 이 말을 한 당사자는 영국에게서 이집트를 뺏으려고 시도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리고 이 이집트를 지키기 위해 프림로즈는 여타 유럽 강대국 들과의 충돌도 불사하지 않았다.[7] 이 당시 자유당에는 그보다 더 노련하고 경력이 많은 지도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프림로즈의 총리 등극에 격렬히 반발했지만 자유당을 끔찍이도 싫어하셨던 우리의 빅토리아 여왕께서 '그래도 프림로즈는 백작이니까 좀 낫겠지'라는 심정으로 프림로즈의 임명을 강행하셨다고 전해진다.[8] 로스차일드가의 딸 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