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 개요
2. 학살의 원인
3. 아르메니아 학살의 시작
3.1. 오스만제국판 배후중상설
3.2. 러시아 제국의 개입: 독립단체의 등장
3.3. 오스만 제국의 가혹한 탄압 정책
3.4. 동부국경에 술탄의 친위대, 하미디예 투입 - 학살의 시작
3.5. 콘스탄티니예 시내에서 학살 시작: 10만 ~ 30만
4. 아다나 학살: 2만 ~ 3만
5. 1915년 대학살: 100만
6. 1915년 아르메니아인 강제이주 정책의 타임라인
7. 그 뒤에
8. 터키의 부정적인 태도
8.1. 터키 내 진보파 주장
9. 다른 나라들의 태도
9.1. 유럽
9.2. 이스라엘
9.3. 중동권
9.4. 미국
9.5. 한국
9.6. 기타 제3국
10. 가짜 자료
11. 기타


1. 개요


[image]
그리스어
Γενοκτονία των Αρμενίων
(Genoktonía ton Armeníon)
불가리아어
Арменски геноцид
(Armenski genotsid)
아람어
ܩܛܠܥܡܐ ܐܪܡܢܝܐ
(qtalʾam ʾarmēnyāʾ)
아랍어
مذابح الأرمن
(maḏābiḥ al-ʾarman)
아르메니아어
Հայոց ցեղասպանություն
(Hayocʿ cʿełaspanutʿyun, 하요츠 체가스파누튠[1])
Մեծ Եղեռն
(Mec Ełeṙn, 메츠 예게른)[2]
영어
Armenian Genocide
쿠르드어
Nîjadkujiya Ermeniyan
터키어
Ermeni Meselesi[3]
[image]
[4]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오스만 제국 내에서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일련의 집단학살사건을 말한다. 근대적 의미로써 최초의 '''제노사이드'''이자 나치 독일홀로코스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연구된 학살[5]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도 정치적인 이유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사건이기도 하다. 희생자 수는 주장하는 측마다 다르나 대략 100만에서 15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6]
후술하듯 아르메니아인들만 살해당한 게 아니라 오스만 제국 내의 타민족들이 서로 독립하려고 했기에 오스만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민족주의적으로 종교를 떠나 튀르크 민족주의에 대드는 민족은 싸그리 제거한다는 식으로 나와 아시리아인기독교 아랍인, 무슬림이라고 해도 아랍인아르메니아인보다 수가 적을지언정 수십여만 명 정도가 학살당했다. 그래서 아랍인들도 현재까지 터키에 대한 감정이 영 좋지 않다. 이 학살 이후 흑해 그리스인들도 수십여만 명이 학살당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 학살로만 알려졌고 이들은 아르메니아 측에서도 이 학살을 비난하는 측에서도 묻히고 만다. 그래서인지 아랍권 당시 피해를 입은 나라는 아르메니아 학살이나 대학살이라는 표현에 대해 '아르메니아인들만 피해자는 아니다.'면서 언짢게 여긴다. 영어판 위키백과만 해도 아랍·쿠르드인들에 대한 학살(아시리아인이나 그리스인 학살이라 별도로 상세히 분석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을 설명함에 있어서 고작 Massacres in the Çoruh River valley(초루흐 강 계곡 학살)이라고 두루뭉실하게 대충 언급하는 수준이다. 이 명칭에 대해서 아랍 측에서 무척 안 좋게 여기는데 일개 한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사건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강제로 이동하던 아랍 무슬림들을 초루흐 강 계곡에서 쏴죽이거나 밀어 강물에 떨어뜨려 죽인 학살 사건 하나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학살의 원인


아르메니아 학살을 다루기 전에, 우선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통치시스템에 대해 언급을 해야 한다.
사실 오스만 제국은 통치체계가 기본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아닌 지방자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인구의 통제가 용이한 도시는 오스만 제국이 직접 파견하는 태수와 지사들이 통치하고, 향촌은 현지의 유력 인사들이나 군벌, 부족들에 의한 자치를 허락받았다. 속주 지역(dependent State) 또한 현지의 왕이나 총독이 자치하고 단지 세금이나 조공을 제때 코스탄티니예에 보내고 술탄에게 기어오르지만 않는다면 중앙 정부에서는 현지 군벌, 자치세력이 무엇을 하든 신경쓰지 않았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워낙 넓었고, 그에 따라 다양한 민족, 문화, 언어가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일례로, 심지어 밀레트 제도 하에서는 세금 제도까지도 각 밀레트마다 달라서 기독교인들은 중앙에서 어느 정도의 세금을 거두라고 할당량이 떨어지면 신자들의 명부를 관리하는 교구가 세금을 할당량보다 많은 세금을 거둔 다음 남는 액수를 교회가 운용하기도 했다. 덕분에 파나리오테스의 시기에 이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자리는 그야말로 돈이 보이는 자리였기 때문에 온갖 대가문들이 돈을 대고 줄을 서는 등 도떼기 시장이 따로 없었다.
다만 이런 자치제는 광활한 지방을 통치하기에는 편리하지만, 일단 반란이 한번 터지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삽시간에 잃어버릴 수 있다는 치명적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번 반란이 일어나면, 오스만 제국은 지방의 독립을 막으려고 상당히 가혹하게 진압을 하여 학살과 강제이주까지 동원할 정도였다.[7] 아르메니아 학살의 원인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자치제의 단점에 기반하여, 중앙정부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과 군부에 대한 통제권을 거의 못 갖고 있었던 상황, 러시아의 반란 선동[8], 청년 튀르크당과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 운동의 충돌, 발칸 반도캅카스에서 영토를 상실하여 대규모 오스만계 난민들로 인해 기독교 이웃들에 대하여 악화 일변도를 겪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여론이 합쳐져 매우 복합적이었다.[9]
오스만 제국은 신민들이 믿는 종교에 따라 각각의 밀레트(Millet)를 조직시켜 각자의 종교법과 관습법대로 사법을 시행했다. 이를테면 발칸지역의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 등은 모두 '그리스 정교회 밀레트'로 묶어 정교회 교구제에 따라 판관을 배정하고 이들을 대표하고 책임지는 사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내정했으며, 튀르크인, 아랍인, 쿠르드족 가운데 수니파를 믿는 사람들은 각 지역의 이슬람 판관(Kadi)와 대율법학자(Ulama)들이 이들을 책임졌다.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들 또한 자체의 밀레트를 갖고 있었는데, 초기에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무슬림이냐, 그리스도인이냐, 유대인이냐가 중요했지 그가 사용하는 언어나 민족은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2.1. 아르메니아인



2.1.1. 독자적 밀레트(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압뒬하미트 2세의 반동개혁 이전에는 공식적인 국교가 정해져 있지 않았었다. 첨언으로 이 당시만 하더라도 아르메니아 측은 정치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에게 종속되어 있을지언정 동부 아나톨리아 일대에서 자리 잡은 그 오랜 역사와 문화적, 사회적 영향력을 인정 받아 정교회권과 다른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밀레트로 자치권을 인정 받았다.
19세기 들어서도 적어도 초중반에는 발칸 반도의 정교회권 민족주의 열풍이 불 때 아직 아르메니아 쪽은 조용히 당국에 적극 협조했던 편이라 '충성스러운 밀레트(millet-i sadıka)'라는 별명까지 있었을 만큼 돈독했었기까지 하다. 이렇게 19세기 이전까지 밀레트 제도는 무슬림에게나 기독교인에게나 각자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잘 돌아갔다.

2.1.2. 민족주의의 전파


그러나 민족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이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독립 이후, 오스만 제국 내의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을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인데,
  • 18세기 파나리오테스들이 해외무역과 권력층에 대한 줄대기로 부와 권력을 축적하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19세기에 이르면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열강들이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인들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내정간섭을 시도했다.
  • 그리고 탄지마트 이전 법으로는 무슬림은 인두세를 면하는 대신에 군대를 가고, 기독교인은 징집을 면하는 대신 인두세를 내는식으로 나름대로 공평한(?) 협의점이 있었지만 탄지마트 이후로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차이를 없앰에 따라 무슬림들은 "우리도 군대 안가겠다!" 고 반발하고, 기독교인들은 "군대를 가느니 차라리 내던 세금 계속 내겠다!" 면서 반발하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파들이 득세하면서 탄지마트 개혁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민족주의 운동이 더 넓게 퍼지는 와중에 보수파들이 강화한 것이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인들에 대한 차이를 규정한 옛 법률의 강화였다.
쉴레이만 1세의 법에 의하면,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거주지가 구분되며, 복장이 구분된다. 이를테면 예루살렘 구시가지처럼 무슬림 거주지와 기독교인 거주지, 유대인 거주지가 전부 구분되어 있다. 대체로 오스만 제국 시대에 발칸 반도 지역의 경우, 기독교인들은 농촌에 거주하고, 무슬림들은 도시에 거주했으며 각자 자신의 구역에서 교회 종을 울리거나 아잔을 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코스탄티니예처럼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함께 섞여 사는 지역의 경우 무슬림 지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교회들은 종을 울릴 수가 없었다. 현재 이스탄불에서도 대부분의 교회건물들이 '탁심', '갈라타', '페네르', '베이오을루' 쪽에 몰려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당시의 흔적이다. 이 지역은 유럽 대사관이 밀집해 있던 지역이고 기독교인들이 거주민의 다수를 차지했었다.
추가로 덧붙이자면, 본래 오스만 이전에도 사용되어 온 도구이기는 했지만 오스만 시대에 들어 수도원이나 일반 성당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악기인 시만드론(Σήμαντρον) - 현대 그리스어로는 시만드로(Σήμαντρο)라고 불리는 일종의 딱딱이를 쳤다. 기다란 나무판을 줄에 매달거나 (수도원의 경우) 수사가 어깨에 매고서 망치로 딱딱딱 두들겨서 소리를 내는데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도구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종 대신 이 시만드론을 기본적으로 쳤었다가 이것이 전통이 되어 오늘날에도 정교회 수도원에서는 시만드론을 평상시에도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무슬림들에 의해 '종을 못치게 하는' 그리스도교 박해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저항'이라 할 수 있다. 시만드론은 본래 사순시기에만 사용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소리가 커서 종소리만큼이나 잘 들린다.
하지만 이러한 법도 별로 의미가 없었던게, 오스만 제국 초창기에는 새로운 성당, 시나고그의 건립을 강력하게 통제했으나, 17세기 정도만 되어도 도시 내 기독교인, 유대인 유력자들이 도시 행정관에게 뇌물을 먹여 이런 규제를 묵인받은 상태로 새로운 성당이나 시나고그를 건설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문제는 이런 뇌물을 먹이거나, 어느정도 권력을 가진 기독교인 귀족, 상인집단, 영주가 없던 지역들인데, 코스탄티니예를 비롯한 '''도시'''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대인들보다도 더 강력한 부와 권력을 누리면서 번성하고 있었지만, 아나톨리아 동부 '''시골'''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런 특혜도 없이 척박한 땅이나 파먹으면서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부패한 법체계와 중앙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변방에서 반 기독교적인 관리나 현지 부족장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을 박해하고 괴롭혀도 딱히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훗날 민족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러시아가 이 지역에 손을 뻗치기 시작했을 때, 현지 아르메니아인들중 상당수가 러시아에 호응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불안불안한 체제 하에서 제국 내 소수파들은 조용히 참고 있었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전 유럽에 확산된 민족주의가 드디어 오스만 제국에도 들이닥치며 이들 차별받는 소수민족들이 민족 의식을 각성하기 시작한다.

3. 아르메니아 학살의 시작


1894년 오스만 제국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들어서 그리스 독립전쟁으로 그리스를 마지못해 독립시키고 유럽 열강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스만 제국에선 그리스 독립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이 더이상 그리스인을 요직에 기용하지 않으면서부터 드라고만(Dragoman - 서구와의 교섭을 위해 설치한 외교부) 같은 관료직에 '아르메니아인'을 대거 기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과 그리스인들이 민족 의식을 각성하고 자치 혹은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서도, 아르메니아인들은 대체로 수동적인 모습을 지켰고, 애초에 도시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정부 덕분에 자신들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동력이나 처지에 대한 불만이 아직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이라고 언제까지 2등 신민의 처지를 받아들일 것은 아니었고,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 교육 받은 지식인층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이들도 자신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1875년 경에는 아르메니아 총대주교까지 나서서 토지 몰수, 무슬림들에 의한 약탈과 강제 개종, 강간과 살인을 막아달라고 청원했지만 내부 문제가 심각했던 오스만이 그들의 청원대로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어도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한 경우는 전무했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를 믿는 열강들과 열강의 지원을 받는 자국내 민족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반기독교 감정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으며, 또한 수 차례에 걸쳐 유럽 쪽의 영토와 종주권을 상실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정체성 또한 좀 더 관용적이었고, 다양성을 인정하던 '''(동)로마의 계승자'''라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본격적인 '''이슬람 제국이자 수니파의 종주국'''이란 근본주의적인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3.1. 오스만제국판 배후중상설


이 와중에 제국이 1877~1878년에 벌어진 튀르크-러시아 전쟁에서 러시아에게 패해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 지배하던 동유럽 속령들을 독립시키고 허구한 날 털리기 시작했다. 낡고 비효율적인 내부 구조를 개선하지 못하고 골골거리며 유럽의 환자(sick man of Europe) 라는 소리를 듣던 것이 이 시대 제국이지만[10] 패전국이 겪는 전형적인 인지부조화 속에 이 모든 것을 동부지역 기독교인들이 러시아와 짜고 벌인 짓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이 밀려난 지역에서는 서구의 묵인 하에 이슬람교도들은 50여만명이 학살당하고 약탈당하고 강간을 당하는 만행이 저질러졌는데, 이때 고생깨나 하고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 처지가 된 사람들이 자신들이 정착한 곳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주도적으로 나서기도 한다. 결국 돌고 돌아와서 애꿎은 이들이 피해를 당하는 셈이 되었다.
하여튼 전반적으로 이 시기 오스만은 1차 대전 직후 독일이 '내부에서 찌르는 바람에 진 거다' 운운하는 것과 소름돋을 정도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캅카스 일대를 상실했던 시점에서 부터 발칸 전쟁에서 패하고 1차 대전이 터지는 시기 까지 1~2백만 사이의 발칸 반도, 캅카스에서 쫒겨난 무슬림 난민들이 코스탄티니예, 트라브존, 이즈미르 같은 도시들의 거리를 꽉 매웠고, 이들이 러시아나 다른 정교회 국가들에게 당한 수모와 핍박을 아나톨리아의 튀르크인들에게 전하면서 제국 내에서 기독교인들은 믿지 못할 내부의 적이라는 여론이 치솟기 시작했다.
문제는 나중에 같은 이슬람이라고 여겼던(물론 아랍 무슬림들은 오스만 치하에서 3등 신민으로 기독교인보다 밑으로 여겨져 같은 무슬림?이라고 반발했지만)아랍 쪽에서도 오스만에게 반발이 일어나면서 이젠 단순히 기독교 대 이슬람이 아닌 튀르크 민족주의로 종교적 정체성까지 무너져 아랍 무슬림들까지 견제하게 시작했다. 결국 이들이 기독교인 영국과 손잡고 오스만에 저항할 정도였으며 이는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도 나온다. 정작 독립하고 나자 영국이나 프랑스가 약속을 다 저버리고 이들을 강압으로 지배했지만 말이다.

3.2. 러시아 제국의 개입: 독립단체의 등장


한편 정교회의 수호자를 자칭하던 러시아 제국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 디야르바크르, 시바스 같은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인 권리 향상을 강제했다. 이 결과로 여태껏 제국에 눌려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게 되었고, 본격적인 아르메니아 독립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제국 밖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훈차크, 다슈나크 등 아르메니아인 독립을 목표로 삼은 정당이 결성됐다. 그들 중에서 일부는 제국에서 비밀 지부를 설립하고, 오스만 관리를 노린 폭탄 테러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의 여파는 거의 미미한 수준이었다.

3.3. 오스만 제국의 가혹한 탄압 정책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은 곳곳에서 붕괴 조짐이 보이고 있었고, 사회의 유지를 위해 오스만 당국이 선택한 방법은 인명 살상을 동반한 대대적이고 가혹한 탄압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문제에 봉착한 오스트리아가 제국 내 최대 소수민족인 헝가리인들과 대타협을 이뤄 오스트리아-헝가리 체제를 성립시켰던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물론 두 나라는 조건도 달랐고, 잠시나마 안정을 이뤘던 오스트리아도 결국에는 1차 대전에서 패전한 후 소수 민족들이 모조리 떨어져 나가며 붕괴했긴 하지만. 기독교 국가들에게 일방적으로 쳐발리기 시작하며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기독교에 맞선 범이슬람주의가 유행한 것도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악재였다. 현대 중동에서도 흔히 보이듯, 기독교 외세에 맞서자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주 먹잇감은 막강한 서양 외세보다는 옆 동네에 사는 만만한 힘 없는 현지 기독교인들인 경우가 잦기 때문.

3.4. 동부국경에 술탄의 친위대, 하미디예 투입 - 학살의 시작


긴장감이 높아만 가던 가운데, 1894년 압뒬하미트 2세는 자신의 이름을 따 '하미디예'라고 이름 붙인 친위부대를 동부 국경에 투입했는데, 이들은 러시아를 상대하는 것이 창설 목적이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자신들이 배치된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는데 동원됐다. 한때는 하미디예가 모든 학살의 행동 대장이었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에는 이들의 역할을 낮춰 잡는 시각도 등장하고는 있다.
물론 이들이 주범이 아니란 뜻은 아니고 기여율을 이전에는 90~100%로 봤는데 요즘은 7~80% 정도로 낮춰 본다는 이야기. 이 시기 동부에서 제국은 가뜩이나 반란 분위기가 무르익은 지역에서 징세율을 두배로 올리는 등 일부러 반란을 유도한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기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당연하다시피 반란은 일어났고 곧 무자비한 학살이 뒤따랐다. 코스탄티니예에서 하미디예의 잔혹 행위를 막아달라고 술탄에게 청원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나, 오스만은 이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3.5. 콘스탄티니예 시내에서 학살 시작: 10만 ~ 30만


이 사건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정부의 비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눈에 보이자 무슬림들은 코스탄티니예 시내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고, 이는 곧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던 지역 전체로 퍼져나가 10만에서 30만에 가까운 인원이 학살당했다. 민간인과 군인 모두 학살에 참여했고, 살해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됐다. 당시 유럽 외교관들이 목격한 것들 중에는 총상은 양반이고 가죽을 벗겨 놓은 시신들도 흔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도와줄 것처럼 해놓고는 막상 학살당할 때는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서구 국가들에 항의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운영하던 오스만 은행을 점거하는 무력 시위까지 했지만, 결국 서방의 도움은 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금도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놈들도 나빴지만 결국 아르메니아를 돕는 척하곤 나몰라라하던 서구권도 그에 못지않게 나빴다.' 는 비난이 많다. 사실 아르메니아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강대국들은 어디까지나 아르메니아를 이득에 따라 이용했을 뿐이니. 그 예로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독립한 루마니아를 비롯한 나라들에 대하여 러시아는 "늬들이 누구 덕분에 자유를 찾았냐? 그러니까 조공을 바쳐라." 라는 식으로 간섭하고, 나아가 러시아인 주교를 통한 러시아 정교회를 강요하는 등, 말이 좋아 독립이지 오스만과 러시아가 뭐가 다르냐는 반발도 일어났다.
한때는 이것을 '1차 학살'로 분류했으나, 제국 통치에 반발하는 집단을 찍어누른 전근대적 진압에 가깝고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학살로 분류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최근의 정설이다. 터키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이들에게 같은 튀르크라는 명목으로 밥 빌어먹고 사는 투르크메니스탄 같은 몇몇 국가들이 외롭게 2만명 피해 설을 주장하고 학계에서는 10만-30만을 정설로 친다. 여하튼 이래서 근현대 최초 학살이라는 정의가 탄자니아 및 나미비아 학살이 먼저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어디까지가 전근대적 학살이고 어디서부터 근대적 학살인지 그 기준점부터가 불분명해 따지는게 의미가 없으며[11] 오스만 제국의 학살은 민족주의 갈등,내부중상론,정부가 직접 은근히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나치나 일제의 그것과 핵심적인 공통분모를 많이 가지고 있다. 위에서 이미 서술되어 있지만 오스만의 학살 분위기 조성과정은 독일에서 1차 대전 패전이후 유대인 학살 떡밥이 깔리기 시작하는 과정과 판박이다.

4. 아다나 학살: 2만 ~ 3만


Adana massacre
1909년 4월 오스만 제국 아다나 주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이다. 오스만 측 주장으론 독립을 요구하며 아르메니아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 오스만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들의 무력 충돌로 782명 무슬림이 죽자 이에 대한 보복이 벌어졌다는 거였다. 오스만 측 발표로는 5천여명 아르메니아인이 죽었다고 발표하는데 아르메니아 주장으론 2만에서 3만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아시리아인들까지 이 와중에 3~5천여명이 덩달아 학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학살에 대하여 미국과 영국 언론 일부가 비난한 정도 외에는 국제적으로 묻혀지고 말았다.
한편, 이 학살을 비난하던 오스만 언론인 하산 페흐미(Hasan Fehmi,1874~1909)는 얼마 뒤에 총에 맞아 살해당하고 만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경찰도 대충 수사를 끝내버려 이후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하여 부정적이던 오스만 언론들마저 겁먹고 입다물거나 친정부로 돌아서게 된다.

5. 1915년 대학살: 100만


오스만은 이후로도 발칸 전쟁, 리비아 전쟁, 1차 대전을 겪으며 나라가 기울어 간다. 오스만 제국은 결국 1914년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에게 오스만 제국의 '성전'에 참여하여 외세와 함께 싸울 것을 요구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과 연합해서 러시아를 공격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 정보를 입수한 러시아는 즉시 대응하여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오스만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달라는 요청을 한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에르주룸 회담이 아르메니아인 대표와 오스만 대표 사이에 열리고,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과 러시아 어느 쪽에도 참가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를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 위협으로 판단한 오스만 제국은 1915년, 캅카스에서 오스만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충돌하자 수백만 명의(약 300만 정도로 추산되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시리아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강요했다. 반면 러시아의 차르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의 자치를 보장하면서 오스만 내부의 아르메니아인도 회유하는 정책을 폈다. 오스만 제국의 무능한 정치에 당연히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에 회유되거나 독립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2차 아르메니아 학살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연합진보위원회(İttihat ve Terakki Cemiyeti, 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를 빼놓을 수가 없다. 복잡한 풀네임보다 당시 서구 언론의 애칭이었던 청년 튀르크당으로 더 잘 알려진 이들은 개혁파 군사집단으로, 자유주의적, 국가주의적, 법치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 CUP는 민족주의적인 색체가 옅어서 초기까지만 해도 불가리아인, 아르메니아인, 튀르크인, 그리스인 등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며 헌법을 제정하고 오스만 제국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런데 이 쿠데타가 수도에서 벌어진 반쿠데타에 의해 주춤하자,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살던 아다나에서 이 기회를 틈타 현지의 반동주의적 무슬림들이 쿠데타 지지세력 중 하나였던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압뒬하미트 2세의 반동 쿠데타 자체는 고작 11일만에 제압되고 헌법이 부활했지만, 이미 아다나에서는 1만 5천에서 3만 사이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살해된 이후였다. 현대까지도 터키에서는 이 사건이 아르메니아인들이 먼저 벌인 폭동이었다던가 단순히 정치적 보복에 불과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며 이 사건의 인종주의적 성향을 애써 부정하고 있다.
이전부터 계속 이어져오던 일련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의 일환인 (Van) 사건이 뒤이어 터지고 1915년, 아나톨리아 동부에서는 러시아와 오스만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시대가 바뀌어 오스만은 CUP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지만 딱히 그렇다고 피지배민족의 권리나 인도주의 같은 것을 함양한 세력은 아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서구 열강의 오스만 침탈을 겪으며 이런 관념들에 매우 냉소적인 감정을 갖게 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이건 그리고 이 전이나 현대에 들어와서 보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한 반인륜적 행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당장 학살을 주도한 당시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이었던 탈라트 파샤나 해군 장관 제말 파샤, 오스만 제국의 첩보 부대인 테슈킬렛 마흐수사의 수장이었던 베하에딘 샤키르 박사 같은 사람들은 전형적인 '무늬만 무슬림'이지, 실질적으로는 무신론자에 가까운 종교에 냉소적인 인간들이었고[12], 이는 이들이 외국의 저널리스트나 평소의 발언과 행동, 훗날 회고록 등에서도 잘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오히려 전통적인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무슬림적 관점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열등하긴 하지만 그래도 보호해 주어야 하고, 이슬람 국가 내에서 살 자리가 있는''' 복속과 지배의 대상이지[13], '''박멸과 절멸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탈라트 파샤를 비롯한 CUP 지도부는 아르메니아인 문제를 철저하게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대적 의미로 민족적인 문제로 보았고, 튀르크인들이 지배하고 영유해야 할 땅인 아나톨리아를 두고 경쟁해야하는 '''박멸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이렇게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시선 자체가 '''단순한 징벌, 차별의 대상에서 근대적 민족주의적 의미에서 절멸해야 할 열등 인종'''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전과 달리 1915년에 벌어진 대학살에서는 추방과 학살을 피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여도''' 박해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추방, 학살하였다. ''''흔히 터키 측 친정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사건이 단순한 정치적, 지정학적 갈등에 의해 터진 게 아니라 조직적이고, 인종적 논리에 따라 자행된 근대적 제노사이드라는 걸 입장하는 사실이 이것이다.''' 아르메니아인들 입장에선 전근대적인 술탄 정부보다 더 잔혹한, 근대적 민족주의로 무장했으며 이 시기 서양 제국주의 열강, 혹은 나치 독일 등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적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오스만 정부는 현지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인들에게 협조하려 들 것이라 의심했는데, 누가 그런 상황을 자초했는지를 찾아내야한다는 판단 자체는 상식적이었다. 반 일대의 총독으로 부임해온 제브뎃 베이(Cevdet bey)는 매우 강경한 반아르메니아주의자였는데, 그는 반 일대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촌락을 수색하여 수상한 무기들을 잔뜩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의 20년째 겪고 있던 학살과 약탈을 생각해보면 이들이 어느 정도 무장을 갖추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또 반대로 오스만군이 자신들의 무기를 사진 찍어 놓고 증거라고 주장했다는 증언까지 나오고 있어 구체적인 사실은 미궁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제브뎃 베이가 반 일대의 촌락에서 수색과 학살을 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학살의 대부분은 쿠르드족과 체르케스계 보조병들이 벌인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군인들도 학살에 참여한 정황이 많으며, 제브뎃 베이 본인도 아르메니아인들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거기에 발칸 전쟁 당시 벌어진 학살도 문제였다. 당시 불가리아는 포마크인들과 튀르크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는데 학살을 피하여 몸만 겨우 빠져나온 수십여만 난민들을 바로 오스만에서 받아들였다. 이 학살 여파로 정교회나 기독교에 대한 증오로 이를 갈던 이들 난민들은 민병대를 이뤄 기독교인들에게 보복하겠다고 이를 갈았는데 이런 분위기를 읽은 오스만 측이 이들을 정규군으로 받아들여서 아르메니아 기독교 세력 척결에 사용했으니 그 결과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불가리아놈이나 아르메니아놈들이나 똑같다고 여기던 이들은 증오심으로 닥치는 대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게 된다.[14]
이러던 와중에, 반 시에 도착한 제브뎃 베이는 도시의 아르메니아 대표들에게 젊은이 4천명을 징집하겠다고 통보한다. 하지만 제브뎃 베이는 이미 반 일대에서 숱하게 학살을 벌인 전과가 있었고, 아르메니아인들은 제브뎃 베이가 먼저 도시의 가용 병력을 제거한 뒤 쳐들어오려는 심산이라 판단하고 징집령을 거부했다. 반 공방전의 시작으로 알려진 1915년 4월 20일 직전인 4월 19일 하루에만 2500여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된 상황이었으니 아르메니아인들의 판단이 정확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들은 이에 맞설 힘이 없었다.
결국 4월 20일, 명령에 저항하는 도시를 봉쇄하고 있던 튀르크군이 도시에 들어가려던 아르메니아 여성을 붙잡아 희롱하자 이를 막기 위해 도시에서 아르메니아 남성 둘이 뛰쳐 나왔고, 튀르크 군인들이 이들을 사살하자 분노한 아르메니아인들이 튀르크 순찰대를 공격했다. 이에 제브뎃 베이는 도시의 아르메니아 구역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며 반 공방전이 시작됐다. 도시 내부에서도 아르메니아인들과 무슬림들의 전투가 벌어졌고, 도시 외곽에서는 진입하려는 오스만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교전을 벌였다. 한때 러시아군이 동부 아나톨리아로 깊숙히 진격해오고 튀르크군이 후퇴하며 포위가 풀린 적이 있었지만 러시아군이 패배하고 밀려나기 시작하자 반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도 대부분 피난을 갔다. 이 피난 과정에서 쿠르드족의 공격으로 막대한 희생이 발생했다. 반 시에 거주했거나 반으로 피난했던 인원 중에서만 보통 5만에서 6만 정도가 사망했다고 추산된다.
오스만 제국은 곧이어 벌어진 비틀리스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크게 물리치고 시간을 벌자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모두 살던 곳을 떠나 시리아 사막 등으로 강제 이주 당했는데, 오스만은 이주 중에도, 이주 후에도 제대로 된 생필품을 제공한 적이 없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을 의도적으로 아사시켰다. 오스만군은 이주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학살을 자행하기도 하고, 야외에 노출된 아르메니아인들이 쿠르드족을 비롯한 적대 세력들에게 공격 받는 것도 사실상 수수방관하며 오히려 이를 조장했다.
터키는 지금까지도 이 학살을 은폐 축소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터키의 입장을 무분별하게 대변하는 자들은 저 학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노선 갈등으로 자기들끼리도 죽이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싫어한 쿠르드족들도 학살에 나섰고, 많은 수가 직접적으로 살해되지는 않고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서 참 복잡한 사건이라고 애써 오스만의 책임을 희석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누구도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대인이 대부분 기아와 질병으로 죽었으니 추위와 세균을 탓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지원도 보호도 하지 않으면서 가혹한 환경으로 내몬 것은 직접 죽이지만 않았다 뿐이지 사실상 학살의 의도를 갖고 자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을 저런 오지로 보낸 당사자들은 명백한 살해의 의도를 갖고 있었고, 단지 그들이 선택한 수단이 자연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학살한 숫자도 매우 많다.
이렇듯 00년대 초반 유행했던 반미,반서방 분위기에 의한 무분별한 이슬람주의 띄워주기로 인해 오스만의 대학살을 옹호하거나 물타기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리 국제 사회에서 터키가 아르메니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굳이 터키의 극우 민족주의자나 이슬람주의자들의 주장까지 답습할 필요는 없다. '''같은 논리를 적용하자면''' 일제시대도 같은 조선인 친일파에 의한 탄압과 고문이 횡횡했고 독립운동가들끼리 이념차이로 싸우는 일이 있었으며, 조선을 떠나 만주에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일본군의 총칼이 아닌 기아와 질병과 마적떼에 죽는 조선인이 허다했다.
이 당시 오스만 제국은 여성과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집단으로 불태워 죽이거나, 발에 편자를 박고 춤을 추라며 채찍으로 때리거나, 볼수 없다며 얼굴을 돌린 신부의 을 뽑아버리거나, 참수한 머리를 들고 의사에게 붙여보라고 하거나, 치아를 모조리 뽑은뒤 이마에 박아버리거나, 참수한 머리로 때리거나, 남자들을 모아둔뒤 총살한 다음 총알이 아깝다며 총검으로 확인사살을 하거나, 여인들을 성노예로 인신매매하고, 아이들을 배에 태우고 나가 물에 던져 죽이는 등 참으로 잔혹하기 그지없는 엽기적인 방법들까지 동원해가며 숱한 아르메니아인들이나 아시리아인, 아랍 무슬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통계상 감소한 인구가 100만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15] 물론 100만여 명이 다 직접 총칼에 찔려 죽은 게 아니므로 오스만 군이 저지른 학살 규모 자체는 100만여 명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죽어간 이들도 많았을테니까. 다만 이런 사망자들도 오스만 측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렵기에 오히려 계산에 포함되어 있었다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것도 직접 학살이 아니라도 의도된 학살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이렇게라도 국제적으로 인정받지만 덩달아 학살당한 쿠르드족이나 아시리아인, 그리스인, 아랍계 기독교인들은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쿠르드족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살았기에 서로 동족으로 여기지 않아 서로가 죽이고 학살하면서 가해자이자 학살자가 되었던 씁쓸한 결과가 되었다.
더불어 당연하지만 튀르크인이라고 해서 닥치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죽인 것도 아니며 목숨 걸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지켜준 튀르크인들도 있었다. 2001년 당시 98살이던 바살프 아티람치안이라는 아르메니아인은 어릴 적 자신이나 가족들과 이웃, 수백여명 아르메니아인들을 오스만군이 죽이려 추격할 당시, 이제 우린 죽었구나라고 생각하며 다 포기했었는데, 지나가던 튀르크인 양치기가 대충 보더니 나를 따라오면 목숨이라도 일단 구할 수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일단 따라가니 작은 변두리 마을로 간 양치기가 대충 설명하고 마을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지하라든지 헛간에 아르메니아인들을 숨겨주고 물건은 대충 창고에 넣고 일상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추격하던 오스만 군인들이 와서 아르메니아인들 행방을 묻자 누군지 모를 이들이 무더기로 저 쪽으로 가는 걸 잠깐 보았을 뿐이라고 거짓말하고 며칠이나 숨겨줬다고 한다. 이 마을로 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도중에 병으로 죽은 한두명 빼고 모두 아르메니아로 무사히 달아났다고 한다. 90년대 들어서야 이 증언을 토대로 아르메니아 측에서 이 마을로 와 보았지만 마을은 흔적도 없어진 다음이었다고 한다.
일부라고 해도 오스만 정계나 언론도 '이건 학살이다! 범죄를 왜 저지르는가?' 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이들은 매국노로 몰려 같이 학살 당하거나 암살, 테러에 시달려 침묵하던가 해외로 달아나야 했다. 정치인이자 언론인 알리 케말 베이(Ali Kemal bey, 1867~1922) 가 바로 이 학살을 반대했었다. 케말 베이는 정계, 언론으로 이 학살을 반발하며 비난하다가 누레딘 이브라힘이 이끄는 오스만 군에게 잡혀 이즈미르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죽은 후에도 매달린 시체가 돌을 맞는 등 린치를 당했다.
[image]
알리 케말 베이 사진
알리 케말 베이는 튀르크인이 아니라고 하여 당시 오스만 측은 엉터리 아르메니아 이름을 붙여서 매국노는 이름도 아르메니아놈처럼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을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2번 죽인 셈이다.
[image]
케말 베이와 아내인 마거릿 사진.
케말 베이는 영국 런던에서 영국 여성 마거릿 윌프레드 존슨과 결혼했었는데 아들인 오스만을 비롯하여 아내인 마거릿은 영국에서 살면서 베이라는 성을 버리고 외가인 존슨이란 성으로 살아갔다. 오스만도 아버지처럼 영국 여성과 결혼하여 스탠리 패트릭 존슨을 낳았으며 스탠리는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스탠리 아들이 바로 터키계 영국인 정치인인 보리스 존슨 총리. 반대로 케말 베이의 딸인 셀마는 나중에 터키 공화국으로 돌아와 터키 국적을 얻어 조용히 살다가 갔다. 그런데 그녀도 배터스비라는 영국 남성이랑 결혼해 혼혈 아들을 낳았다.
2016년 4월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에서도 이걸 다루고 있는데 이 당시 튀르크인 농부가 도와줘 목숨을 구해 무사히 아르메니아로 간 아르메니아인 증손자들이 목숨을 구해준 튀르크인 무슬림 증손자랑 지금도 종종 만나며 친하게 지내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오스만에서는 당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반감도 컸지만 아르메니아인을 도우면 매국노로 몰려 같이 처형당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학살을 어쩔 수 없었다고 넘어갈 순 없지만 말이다. 자꾸 극소수사례 들고와서 강조해봐야 근현대 오스만 제국의 학살 규모는 거대하고 잔인해서 물타기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6. 1915년 아르메니아인 강제이주 정책의 타임라인


1915년 5월 27일 오스만 제국의회는 "재배치 법" (Tehcir kanunu)를 임시법(Kanun-ı Muvakkat)으로 제정해 각 지방의 행정관 및 지방사령부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임시로 다른 주(vilayet)로 이동시키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5월 30일에 장관회의(Meclis-i Vükelâ)의 결정으로 이 법을 적용받아 이주된 자는 무제한의 기한동안 그 지역에 머무르도록 하였다.
6월 10일, "아르메니아인이 보유한 동산, 부동산, 토지의 관리에 대한 결정" 명령과 더불어 이주된 자의 부동산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제정되었다. 이주조치된 아르메니아인들이 떠난 장소는 무하지르(발칸 전쟁 난민)들에게 제공되며, 이주된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써 이주지 내의 토지를 제공할 것이라는 방침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전후의 혼란과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죽었기 때문에 보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이 남기고 간 연고 없는 토지 및 주택 등의 부동산들은 1930년대에 터키 공화국 정부에 의해 국고로 귀속되었다.
이 이주조치는 이스탄불, 이즈미르, 퀴타햐, 발르케시르 등의 치안적으로 문제가 없는 지역들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정부에 의해 안전하다고 간주되는 이, 예술가, 무역업자, 여성, 고아 어린이, 노인은 제외되었다. 또한 이 법에 반발하는 무슬림들도 있었는데, 현재의 콘야도에 속하는 에레일리(Ereğli)에서는 그로인해 해당 지역 내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주조치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당국에 의해 계속 거주할 수 있었다. 에레일리 군 행정부는 이 법을 '차별주의적'이라며 집행하기를 거부했다. 또한 강제이주법은 이주조치의 대상이 된 아르메니아인들을 색출, 검거할 권한도 주어졌으나 무슬림의 집을 가택수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슬림 이웃들 사이에 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강제이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이주조치가 내려온 이후 자발적으로 이주를 결정한 사람들은 자유롭게 활동이 가능했는데, 대략 15000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아나돌루에서 이스탄불로 이주했다. 아르샤비르 시라지얀은 이스탄불로 자발적으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부분 젊은 남성이었으며,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서술했다.
마르딘 및 디야르바크르에 거주하던 시리아 정교도들과 학캬리의 네스토리우스 교도들 중 일부가 해당 이주법을 위반한 형태로 이주법 대상으로 포함되었다. 디야르바크르에서 아르메니아인과 기타 그리스도교도 약 2천명이 죽었으며, 오스만 제국 정부는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격리조치는 다른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해당 법이 제정된 뒤 수개월간 아나돌루 내의 아르메니아 인의 상당수가 '호송'의 형태로 길을 나서 시리아의 데이르에조르와 레술라인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그 중 상당수가 사망했다. 8월 4일에 오스만 중앙정부는 가톨릭 및 개신교 아르메니아인의 강제이주를 중단한다는 명령을 발송했으나 현지 당국과의 연락문제 혹은 현지 당국의 의도적인 무시로 인해 이 명령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 정부는 아르메니아인 이주조치에 있어 강제이주대상의 설정에서의 비리, 이주기간동안의 가혹행위, 직권남용 등의 이유로 현지 군,행정당국에 대한 조사 및 재판을 열어 처벌했다. 1915년 9월부터 1916년 6월 사이에 지방법원에서는 총 1,673명이 기소되고 65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그 중 67명이 처형되고 524명은 징역형, 68명은 벌금, 강제노동, 추방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1918년에 열린 재판에서도 1,397명이 유죄선고를 받고 처벌되었다.[16] 이는 당시 중앙정부와 지방당국들 간의 의사소통과 판단에 문제가 있었으며,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강제이주조치가 전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강제이주조치되어 데이르에조르와 레술라인에 수용된 아르메니아인들은 전후 1919년에 오스만 제국 의회 결정에 의해 풀려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하지만 해당 지역은 1차 세계대전 종전후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아나돌루에서의 혼란과 터키 독립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시리아, 레바논 일대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아르메니아 인구가 많은 이유이다.

7. 그 뒤에


'''아르메니아 대학살로 고대 이래의 역사적 아르메니아는 완전히 파괴되어 소멸되었다.''' 전통적인 범위의 아르메니아 고원, 즉 서아르메니아는 20세기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 투르크 제국과 그 후신 터키 공화국으로 인하여 아르메니아의 흔적이 지워져 전통적으로 아르메니아 영역에 속한 역사적 아르메니아에서 터키인이 지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해 터키인 거주 지역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은 마침내 1918년 5월 28일, 독립국가인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나라를 가진 기쁨도 오래가질 못했다. 아직도 터키의 지배를 받는 아르메니아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며 터키를 침공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으며 소련에 강점당하고 말았다.
아르메니아는 전체 사상자가 2만 정도로 다른 나라에서 보면 적은 편이었지만 이 당시 아르메니아 공화국 인구가 200만도 안되었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피해였다. 게다가 아르메니아 건국 이후로 분열된 문제가 있었다. 이 학살에서 살아남고자 개종한 아르메니아인들의 반역자 여부와 이들을 같은 아르메니아인으로 받아줘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당연하지만 현재 아르메니아에선 이들을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개종하고 학살을 도운 것뿐, 이들도 피해자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배신자라느니 매국노라느니 비난을 받아야 했고 일부는 그 동족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도 억울한 게 살고자 그랬고 이슬람으로 개종해도 학살(상술하듯이 종교 땜에 학살이 일어난 게 아니라 무슬림 아르메니아인들도 학살되었다.)당한 피해자도 있기 때문에 무조건 이렇게 비난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논란과 갈등도 빚어지던 와중에 결국 소련에게 흡수당하고 만다.
그래도 아르메니아로서는 학살에 기여한 오스만 제국의 장군 및 일부 책임자들이 1920년 초반에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암살당하며 조금이라도 원한을 풀긴 했다. 1921년 아르메니아인 소그호몬 테흘리안(1896~1960)이 학살에 참여한 내무장관 마흐메드 탈라트 파샤(1874~1921)를 암살하던 게 유명한 사례다. 테흘리안은 몇 년 복역하다가 풀려나 미국에서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 또 학살의 주범 중 하나인 제말 파샤도 아르메니아인 손에 암살된다. 다만 이 인물들은 아타튀르크에 반발하여 축출되어 권력을 잃었기에 죽이기 쉬웠던 점이 있었고 아타튀르크를 따르던 학살 관련 장군들은 암살이 불가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써 암살한다고 쳐도 아직도 터키에 남은 아르메니아인들을 보복살해할 가능성을 걱정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위에 열거한 반 학살을 비롯한 학살을 저지른 제브뎃 베이는 이후 은퇴하여 천수를 누렸듯이 학살자 상당수는 천수를 누렸다.
터키는 냉전기에는 소련을 상대하는 최전선이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서방 국가들이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논평을 내기를 꺼려 왔었다. 일부 개인들의 비난과 고발이 있긴 했지만 '''묻혀졌다.''' 참고로 터키 내에서는 50년대에 작가이자 본인이 쿠르드인인 아샤르 케말이 쿠르드인 및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한 과거를 거론했다가 교도소에 수감되고 온갖 구타와 고문을 당하며 무지 고생해야 했었다. 그래도 이후 풀려나서도 케말은 아르메니아 및 쿠르드, 아시리아인 학살을 고발하며 온갖 글을 쓰고 학살에 대한 증거를 찾고자 노력했다.
이 문제를 국가 차원에서 학살로 인정한 것은 1965년 우루과이가 최초이다.[17] 하지만 소련의 붕괴 이후 터키의 가치가 하락하자 이제 더 이상 터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느낀 서방 국가들 대부분이 터키의 아르메니아 학살과 이에 대한 부정을 규탄하고 있으며,[18] 프랑스는 아르메니아 학살을 부정하면 처벌하는 법안까지 제정하기도 했었다.그러나, 이 법은 2012년 2월 프랑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내려졌다. # [19]
하지만, 터키의 가치는 아직도 여전하다. 소련이 무너져도 러시아가 여전히 유럽에서 행패부리고 무엇보다 보스포루스를 통하여 터키에서 친러시아로 가면 미국도 골머리를 앓을 수 밖에 없다. 결국 상술한대로 프랑스조차도 아르메니아 학살 부정 처벌 법안을 위헌으로 처리했듯이 미국도 터키에 대한 학살 결의안을 끝끝내 상원에서 통과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2015년 3월 기준으로 유럽인권재판소에서는 아르메니아 학살을 부정하는 것이 금지되어야 하는가, 표현의 자유로서 보장할 것인가에 대해 심리하고 있는데, 만약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한 부정이 금지될 경우 유럽 연합 소속 전 국가가 아르메니아 학살이 사실이라는 증언을 채택하게 되는 것이라 귀추가 주목된다. 하지만 4년 넘도록 이에 대하여 자세한 결론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에 한해서만 학살이라는 걸 부정하는 걸 금지하고 기독교 열강이 비기독교권에 저지른 학살에 대한 부정은 넘어갈 것이냐?" 라는 반발까지 나오기 때문. 이는 터키의 물귀신 작전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그렇게 치자면 그 시대, 유럽 열강이 여러 식민지에서 저지른 학살을 부정하고 있는 상황에 해당 피해국가들의 반발을 염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5년 4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학살을 '''20세기 최초의 학살'''이라고 발언하여 터키에서는 분노하고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벨기에가 저지른 (레오폴드 2세 참고) 학살은 거들떠도 안 본다고 분노하고 있다. 터키도 이걸 들먹이며 최근 유럽 난민 사태로 무슬림 인구가 급증하고 무종교인의 증가로 종교세가 약화되었지만 가톨릭이 대다수인 벨기에가 콩고에서 저지른 20세기초 학살을 외면하는 교황이라고 분노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모스크로 되돌리자는 움직임까지 부채질하고 있다.
하지만 서구권이나 교황이 말한 학살은 영어로 genocide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 genocide라는 단어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된 단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단어는 경제적 착취, 강압적 통치를 유지할 목적으로 수단으로서 혹은, 부수적 피해로서 대량살상이 이루어져도 이를 그냥 무시하고 목적을 관철시키는 경우를 묘사하려고 만든 단어가 아니다. 접두사 geno-가 의미하듯 그저 피해자가 특정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량 살해를 자행하는 것을 말한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비난하는 측의 주장과 교황의 발언에서 "학살"을 "인종청소"로 바꾸어 읽어보자.
하지만 그에 앞선 20세기 초에 독일나미비아에서 행한 헤레로족 학살이 있기 때문에 최초의 학살은 아닌데 터키 측에서 분노할 만하다. 게다가 헤레로 족을 학살하며 벌인 짓이나 변명도 독일은 터키랑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 "잡아다가 사막에 놔두었는데 지들끼리 싸우다 죽었으니 우린 모르는 일이다." 라고 하다가 나미비아에서 "유대인도 독일이 아닌 폴란드 아우슈비츠로 보내 죽였으니 우린 모른다고 하는 거랑 차이가 있냐?" 라며 까이고 위에 서술하듯이 터키가 나몰랑하며 말하는 근거도 "우리가 직접 안 죽였다... 그냥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 이주하니까 지들끼리 싸우다 죽었지...." 이런 거랑 차이가 없다. 나미비아에서도 교황에게 우리(당시 헤레로족은 나미비아에서 상당한 인구를 차지)가 당한 학살은 외면하냐며 무척 안 좋게 대하는 반응이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2016년 사상 처음으로 나미비아 대학살을 인정했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752391.html
그나마 2019년 12월 와서야 미국 상원결의안으로 아르메니아인 학살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결의안 통과를 주도한 미 민주당 로버트 메넨데즈 상원의원은 "상원이 역사의 바른길을 선택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며 "아직도 학살의 생존자가 있는 상황에서 결의안을 통과시킨 데 대해 사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인 터키와 관계를 고려해 수차례 결의안 통과를 저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결의안이라고 해봐야 이런 게 있었다는 것일뿐.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나 강제적인 배상이라든지 여러가지는 없었다. 터키가 계속 이러면 보스포루스에 러시아 해군을 통과하게 하겠다고 분노하니 트럼프조차도 난 저 결의안 지지하지 않는다라고 선을 그어버렸고, 2020년 들어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잊혀질 정도가 되어버렸다....
저것을 따지자면 상술한 바와 같이 수백년간 비교적 안정적으로 공존하던 동부와 내륙 아나톨리아의 튀르크와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제노사이드 수준으로 미워하게 된건 대학살 바로 이전 오스만 제국의 축소와 함께 터키어로 무하지르라고 하는 발칸 반도 출신 무슬림 난민과 재정착 문제가 짙게 깔려있다. 그러나 발칸반도 오스만인에 대한 학살과 인종청소 문제는 현대까지도 당사자인 신생 발칸 독립국들, 오스만의 후신인 터키, 서방의 학계를 포함하여 조명은 커녕 제대로된 연구도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다. 이는 단순히 터키측의 피해자 행세와 물타기가 아니라 어떻게 인종적 증오가 되풀이 되었는지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임에도 아무도 역사적 책임, 관심을 안 가지는 문제이니 서구권의 아르메니아 학살 담론 자체가 편향적으로 보이기 딱 좋다.
앞서 서술했듯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큰 원인중 하나는 발칸 전쟁당시 벌어진 튀르크인 학살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의 증오심이 크게 차지한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대학살로 인해 그 불똥이 이번에는 아제르바이잔인에게 튀게 된다.''' 본래 현재의 아르메니아 영토는 중세 이후 아제르바이잔인과 타트인, 페르시아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러시아 지배기 이후 러시아의 인위적인 이주정책으로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늘어나고 아제르바이잔인 인구가 줄어드는 와중에 이 사건으로 대략 35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예레반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이주하고, 볼셰비키 혁명으로 캅카스 지방의 러시아군이 철수함에 따라 발생한 대규모 안보공백을 틈타 이번에는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선동으로 아제르바이잔인에 대한 대학살이 벌어지게 된다. 1918년 3월에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반제국주의 운동을 한다며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반동들을 처단한다는 미명하에 1918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바쿠를 포함한 나고르노카라바흐, 잔게주르, 나히체반, 예레반 일대에서 최소 3만 이상의 아제르바이잔인을 살해하고 구바 지역에서 122개,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150개, 잔게주르에서 115개, 예레반 근교에서 115개, 카르스에서 92개의 마을을 파괴했다. 예레반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발행하던 1919년 11월 2일자 아슈하다보르(Aşxadavor, 노동자) 신문에 의하면 예레반 인근에서 순식간에 88개의 마을이 파괴되고, 1920채의 집이 불타고, 13만 970명의 아제르바이잔인이 남녀노소 안 가리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20] 그리고 이것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간의 오래묵은 적대관계의 원인이기도 하다.

8. 터키의 부정적인 태도


게다가 21세기 들어서 터키의 에르도안 정권은 오스만 제국을 영광의 시대라고 찬양하고 있다. 그래도 터키 공화국을 건국한 국부 아타튀르크는 아무래도 자신이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에 대해 정당성을 내세울 점도 있긴 하지만 전통적인 세속주의+튀르크 민족주의 역사관에 의하면 터키와 오스만 제국은 다른 나라이다.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에게 농락당하고 근대화에 뒤쳐진 무능한 나라로 터키에서 인식하고 교육시켰다. 이러다 보니, 과거에는 터키에선 "우리도 오스만 제국 같은 한심한 색히들을 선조로 안 여겨, 그놈들 패거리에게 보상이던지 사죄좀 알아봐!"이란 태도를 취해왔다.
그러던 터키가 오스만 제국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극히 최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의 집권 이후다. 2016년만 해도 유독 터키 서점가에 오스만 제국에 대한 서적이 많이 출간되는 것도 이러한 전통적인 케말주의적 역사관을 바꾸려는 이슬람주의자+튀르크주의자들이 역사전쟁이 학계에서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젠 터키의 이중성이 되어버렸다. 다른 면에서는 '''틈만나면 '오오 영광스러운 오스만 제국의 후손 오오'''' 거리면서 오스만 제국의 직계 후손임을 자처하며 자뻑하기 바쁜 터키가[21] 이 피비린내나는 현대 중동사의 심연에서 스타트를 끊은 이 사건만 두고는 '''"우린 오스만 제국이 아니다. 책임 따지고 싶으면 타임슬립이라도 하든가."''' 따위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에 터키는 바로 위에 서술한 것처럼 위대한 오스만 제국 운운하다 이런 학살 논쟁에 대해 그럼 오스만 제국에게 따져라, 현 터키 공화국은 그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지 않았느냐?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저런 유럽 연합 측에게 코웃음으로 대하며 프랑스에겐 알제리인 학살, 영국에겐 인도인,아일랜드인,케냐인 학살, 독일에겐 나미비아인,탄자니아인 학살, 네덜란드에게는 인도네시아인 학살 등 서방 열강이 제국주의 시절 아프리카 및 아시아 식민지였던 국가들에서 자행한 학살들을 거론하며 그러는 네놈들은 사과 및 보상을 제대로 했냐? 라고 반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하여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거론하는 서방권 나라들도..... 터키랑 정확히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니 터키 극우들은 "너희들이 똑같이 보상하고 사죄하고 인정하면야 우리도 그래야지~ 하지만 안 그러잖아?" 라고 비웃는다... 그리고 이 논리는 서양 극우들도 간혹 거론하긴 하지만 여긴 워낙 저질러놓은 일이 많아서 터키랑 다르게 국제적으로 더 까인다(...). 이렇게 되니 미국도 상원 결의안이 통과되지 못하였고 유럽 인권 결의안도 마찬가지다. 만일 통과된다면 다른 학살사건에 대해서 무수한 반발이 터질 테고 본인들이 가해자였던 사건들의 결의안도 상정되는 꼴이 터질 테니까 결국 이들도 강력한 각오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꼬리 자르기는 쌔고 쌨다. 독일은 독일제국의 만행을 프로이센에게 따지라 개드립치며 사죄 배상을 거부하며 러시아도 우크라이나의 대기근 사죄/보상요구에 '소련과 러시아는 다름ㅇㅇ'이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고 일본극우의 태도도 터키랑 매우 흡사하다. 피장파장의 오류를 활용해 빠져나가려 한다. 제국주의를 그리워하고 찬양하면서도 필요할땐 꼬리 자르기를 시전하는 것까지 아주 똑같다.
2015년 4월 24일 아르메니아 학살 100주년을 추모하는 의식이 터키에서도 아흐메트 다우트오울루 총리가 이스탄불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총대주교좌 성당에 방문한 가운데 치러졌다. 이 자리에서 다우트오울루 총리는 아르메니아인이 다수지만, 이 당시에 전쟁과 학살로 희생된 아나톨리아의 모든 민족들,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시리아인[22], 터키인[23]을 추모하고 이러한 비극적인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염원하며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연설했다. 하지만 다른 자리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1915년의 비극은 인류적인 비극이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되며 특히 아르메니아가 제시하는 학살자 수, 근거자료들은 사실과 달리 매우 부풀려져 있다." 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이 일로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갈등은 아주 거세지고 있지만 터키가 어느 정도는 학살을 인정하긴 하고 우호적인 행동을 하면서 조금씩은 반터키 감정이 줄어들긴 했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성지와 같은 터키 악다마르 성당을 2010년 터키가 95년 만에 재건하여 십자가도 세워주고 예배를 허용했을 당시 아르메니아에서는 수만여명이 서로 오고자 할 정도로 난리였다. 그리고 2013년부터는 매해 아르메니아 대주교의 방문 및 예배와 같이 청소년 세례식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아르메니아에서는 엄청 기뻐하고 환영했지만 그 대신에 터키는 아르메니아와 사이가 나쁜 우방 아제르바이잔의 반발과 자국 극우파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때문에 이들 예배에 중무장한 터키군이 배치되어 경호를 서줘야 했다. 그러나, 2016년 집권한 이슬람 극우 정당인 에르도안 정권이 이러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세례식을 금지하면서 아르메니아에서 강력하게 반발하여 다시 터키와 아르메니아 사이가 나빠지고 있다. 게다가 2020년 치뤄지고 있는 아르메니아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터키와 이스라엘이 강력하게 도우면서 패배하여 아르차흐(나고르노카라바흐) 대다수 땅을 잃어버린 아르메니아와 두 나라와 사이가 엄청 나빠졌다.

8.1. 터키 내 진보파 주장


참고로 터키 안에서도 분명히 학살이다. 오스만 제국 탓이라고 해도 과거에 학살이 벌어진 건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진보파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엄청난 비난을 감안하거나 심지어 살해협박도 각오해야하는 판국이기에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오르한 파묵이 "오스만 제국은 100만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이나 10만이 넘는 쿠르드인들을 학살한 게 맞다. 지금 터키가 오스만 제국이랑 상관없다고 부정만 하지 말고 적어도 사죄라도 하며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라고 외신 인터뷰하다가 엄청난 비난과 협박에 시달렸었다. 이래서 터키 역사상 첫 노벨문학상 수상조차도 저런 소신발언을 했다가 터키 극우 및 정부적인 협박을 받을 정도였다.
게다가 2007년 아르메니아계 터키인 언론인 흐란트 딩크(Hrant Dink, 1954~2007)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해 여럿 보도하다가 극우파인 오귄 사마스트(Ogün Samast)가 쏜 총에 살해당했다. 경악스럽게도 오귄 사마스트는 1990년생으로 당시 나이가 17살이었다. 그리고, 범인인 오귄은 잡힌 다음 인터뷰하는 기자들에게 "다음은 오르한 파묵 차례다! 내가 잡혔다고 기뻐하지 마라. 파묵을 죽이려 드는 이들은 얼마든지 많다!" 라고 말했던 바 있다. 이러니 오르한 파묵이 과연 마음 편하게 터키에서 살 수나 있을까? 이때, 파묵은 딩크의 죽음을 추모하며 장례식에도 참여했기에 터키 극우들에게 아르메니아랑 손잡은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결국 그는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컬럼비아 대학교 비교문학과 글쓰기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에르도안을 독재자라고 비난하며 터키 인권침해를 비난하고 고발하는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당시 터키 문학의 양심이라고 불리우던 야샤르 케말(Yaşar Kemal, 1923~2015)도 오르한 파묵을 옹호하며 틀림없는 학살이라고 터키 정부에 맞섰었다. 다만 케말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틀림없는 학살이고 비난받을 일이지만, 터키를 욕하는 강대국들이 같은 시대 벌인 학살은 대체 왜 은폐하고 터키랑 똑같이 굴면서 터키만 욕하느냐 양비론적으로 비난하고 맞섰다. 하지만 케말을 두고 단순히 물귀신 언동을 한다고 비난할 수 없다. 우선 케말은 틀림없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저질렀다고 인정했다. 위에 서술한 대로 터키 극우들은 학살이라는 걸 되도록이며 피한다든지 수를 줄이지만, 케말은 100만 이상 학살이라고 인정하였다. 게다가 그는 쿠르드족이기에 인종적으로도 차별받아 왔고 이미 국제적으로 아르메니아 학살은 묻혀져 있던 1950년대부터 아르메니아 유적 파괴 및 학살 은폐에 대한 걸 비판하여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고생한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악다마르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대성당 철거를 사생결단으로 반대하며 국제적으로 알리다가 군부에 끌려가 엄청 고생했던 터라 이 대성당을 역사적인 보물로 중요하게 여기는 아르메니아에서도 케말에 대한 평가는 무척 좋기에 그의 양비론적인 비난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사실 오르한 파묵도 케말과 같은 "우리가 학살자가 맞지만 우릴 욕하는 너희 강대국들은? 너희도 사죄하고 보상해야지!"라고 비슷한 의견을 말했고 터키 진보파들도 거의 이런 의견과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은 우리도 분명히 잘못이고 학살이라고 인정하기에 뭐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이들이 말한 양비론 비난에서 터키를 그리도 비난하는 강대국들은 위에 길게 서술하듯이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이런 터키 진보파들 주장은 터키 극우처럼 자신들의 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열강을 학살자로 비난하기만 하고 자신들이 전쟁 피해자라고 조작하고 항변하는 거랑 차원이 다르다.

9. 다른 나라들의 태도



9.1. 유럽


아르메니아 학살을 깊이 공감하며 터키를 비난하는 나라인 그리스는 영토 문제나 다른 문제로도 터키랑 으르렁거리는 점도 있지만 그리스도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해선 이해한다고 이를 가는데 비슷한 시기인 1913~1922년 오스만 전역에서 그리스인들이 마구잡이로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주장으로는 아르메니아 학살 못지않게 사망자가 25만(터키 주장)에서 90만명(그리스 주장)에 이른다! 이 학살에 큰 기여를 한 누레딘 이브라힘(1873~1932)은 이즈미르 화재 당시 그리스인은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던 인물이며 아르메니아 학살을 비난한 알리 케말 베이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인물[24]이다. 하지만 아타튀르크는 그를 우대했고 그가 병으로 죽자 국장으로 장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오스만 제국 영내에서 살던 그리스인들 또한 아르메니아 학살을 저질렀는데 터키인들과 같이 트라브존 등지에서 학살을 자행하였다.
마찬가지로 터키와 사이가 나쁜 불가리아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문제와 관련해 아르메니아를 편들고 터키를 비난하는데 불가리아도 발칸 전쟁 당시 에디르네를 비롯한 오스만 제국 곳곳에서 남아 있던 5만에서 8만 정도의 불가리아인들이 마구잡이로 학살당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이제이가 된 문제로 불가리아는 터키랑 그리스를 같이 욕하기도 한다. 일부 오스만 제국 지배에 협조하던 그리스인 민병대에 불가리아인 학살을 맡겼기 때문. 그리스야 살고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지만 불가리아는 그리스도 학살자로서 같이 욕먹을 문제가 있다고 받아친다. 하긴 오스만 제국 지배 이전부터 둘이 으르렁 싸워오고 서로 마구 죽이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가리아도 피해자만이라고 할 수도 없는게 당시 불가리아군이 발칸 전쟁 당시 불가리아 남부에 거주하던 튀르크계+포마크계 무슬림 거의 3~50만을 마구 학살했기 때문. 덤으로 위에 상술한 이 전쟁 와중에 난민이 된 무슬림이 100만명이 넘는데 재산을 잃고 가족이 학살당한 이들은 기독교에 대한 증오로 아르메니아 학살에 열심히 동조했던 돌고 도는 비극이 벌어졌다.
당연히 터키도 으르렁거리며 너희들이 자국에서 벌인 더한 학살은 거론 안 하냐면서 따지고 불가리아도 터키와 그리스처럼 그 와중에 어쩔 수 없다라고 하며 자기들이 당한 피해만 외치고 있다.
영국도 비슷한 시기 쿠르드족에 대하여 학살을 벌이던 일(윈스턴 처칠 항목에서도 나올 만큼 처칠이 그 학살자가 되었다...)처럼 제국주의 시절 여기저기서 벌여놓은 일이 워낙 많은지라 터키에서는 '''"너희들부터 사과, 보상하시지?"'''라고 맞서거나 그 피해자 국가들에게 아르메니아처럼 따지라고 권유하고 있다. 특히 아일랜드 대기근 역시도 영국을 데꿀멍하게 만드는 주 소재이다.
프랑스는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고 사과, 보상을 요구하지만 '''자기들도 한 짓이 있어서...''' 심지어 인정하지 않거나 애써 정당화하려는 태도도 판박이라 터키로부터 이걸 놓고 두고두고 역공당하고 있다.
벨기에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 학살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는데 터키는 콩고민주공화국에게 쟤들 좀 봐라, 지들 죄악은 아예 감추는 주제에 누굴 탓하는 거냐며, 너희들은 보고 화 안 나냐며 약올리고 콩고민주공화국은 누가 할 소리냐며 벨기에를 비난하고 있다(...).
독일도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하여 터키를 비난했다가 터키에게도 역반격을 당했는데 바로 독일이 20세기 초반, 나미비아,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저지른 헤레로 족, 무분가 족, 응긴도 족 등을 비롯한 여러 아프리카 식민지 토착민들에 대한 독일군의 학살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미비아의 헤레로 족만 해도 이 당시, 전 인구 80% 이상이 노약자건 아이건 무차별로 마구 학살당했다. 그럼에도 독일은 이스라엘과 유태인에 대한 배상과 사죄와 정반대로 "이건 독일 제국 책임이니 우리 탓 아니다. 우리가 직접 안 죽이고 칼라하리 사막에서 굶어 죽었다." 라고 모른 척했기에 터키로부터 "우리가 하던 소리 똑같이 하네?" 라고 비웃음을 신나게 들었다. 당연하지만 피지배국이었던 나미비아에서는 분노했고 이 여파로 나미비아나 탄자니아 등은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선정을 결사반대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도 이 발언에 대하여 무척 기분나빠했는데 유대인들도 일군이 직접 안 죽이고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 알아서 죽었냐며 독일 정치인들의 헤레로족 학살에 대한 망언을 비난하기도 했다.
이러한 터키의 유럽에 대한 반격은 확실히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아주 교과서적인 '''피장파장의 오류'''에 불과하다.
또한 터키는 덴마크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데 1783년 라카기가르 화산이 폭발하면서 가축의 80%가 죽고 이 여파로 기근이 오면서 아이슬란드 인구의 4분의 1 가량이 사망했던 일을 가지고 당시 아이슬란드를 지배하던 덴마크를 비난하다가 오히려 역관광(사실 덴마크도 '''이 기근으로 약 8만에서 20만 명이 사망했다.''')당한 전례가 있기 때문.[25] 터키가 이걸 거론한 게 영국이 터키를 비난하다가 터키는 아일랜드 대기근을 들먹여 영국을 엿먹인 적이 있었기에 비슷하게 들먹인 것이었다. 확실히 아일랜드 대기근은 항목을 봐도 확실히 영국이 벌인 짓이었고 그 대기근 와중에 굶어 죽어가던 아일랜드를 영국이 지원도 외면해 그야말로 아르메니아 학살이랑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수도 있는 200만 이상이 죽어나가고 사람들이 아일랜드를 떠나게 만들어 850만 인구가 400만 이하로 줄어들게 한 인재(200년 가까이 지난 2010년대 지금까지도 아일랜드 인구는 이 기근 전 인구 수를 회복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이다. 그러니 지금도 아일랜드가 이를 갈며 학살이라고 영국을 비난하고 있으며 터키의 이런 지적에 동감하며 영국에게 맞섰다.[26] 그러다 보니 덴마크에게도 비슷한 걸로 꺼내들던 게 이 기근이었지만 아일랜드와 달리 덴마크 본토까지 피해를 입었기에 이건 자폭이었다.[27]
일단 현대에 와서 세계적으로 대학살이라고 인정하지만 터키의 끈질긴 피장파장식 물귀신 작전과 같이 아르메니아가 소련에 강제 합병된 이후 70년이 넘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냉전시대 터키를 더 중요하게 본 미국이 이를 덮어버렸던 역사가 있다. 이러다보니 냉전 시대에는 듣보잡으로 묻혀졌다. 오죽하면 냉전 시대 전에도 소련에게 강제로 통합되면서 잊혀졌기에,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연설 중 바로 아르메니아 학살을 지금 거론하는 나라가 얼마나 있느냐며 유대인 및 비독일인과 자신의 사상을 따르지 않은 독일인까지 학살하는 것을 얼마든지 문제없이 덮을 수 있다고 큰소리 쳤을 정도로 당시에는 묻혔음을 알 수 있다.

9.2. 이스라엘


유대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28] 그리고 오늘날의 정치외교적인 이유로 '''이스라엘은 자신들도 홀로코스트 피해자였음에도 불구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심지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여러 경제적, 군사적 우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아르메니아가 숙적으로 여기는 아제르바이잔과 나날이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2016년에는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아제르바이잔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하기도 하였으며,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은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해 상당히 좋은 관계임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아제르바이잔의 공군기지를 임대해 쓰고 있다. 이는 이슬람 나라인 터키, 이집트, 요르단, 과거 팔라비 왕조 시절 이란조차도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고(단 모로코같은 경우는 아랍동맹의 압력으로 이스라엘과 국교를 끊었으나 비외교적으로 친하게 지낸다. 모로코는 독립하기전부터 이스라엘을 인정하던 유일한 이슬람 나라이다.) 터키군처럼 이스라엘과 같이 훈련도 하는 경우도 있을지언정 자국 군기지를 이스라엘에게 빌려주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유일무이하게 군기지를 이스라엘에게 빌려줄 정도이다. 이러다보니 미국도 아제르바이잔을 더 신경쓰게 되었다. 게다가, 유사시 아제르바이잔에 배치된 이스라엘 무인기가 이란 작전에 투입될 거라는 보도가 나왔다.기사
사실 이스라엘로서도 견제하는 이란과 친하게 지내는 아르메니아가 껄끄러운 터라 이렇게 직접적으로 군사적 협력이 강화된 아제르바이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의 귀중한 석유 에너지를 엄청 수출하는 나라이다. 이스라엘 군의 연료 절반 가까이가 아제르바이잔에서 나오는 석유다. 즉 미국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연료를 책임지는 막강한 우방 수준이 되어버린 상황에 과거에 당한 학살 동조만 외치며 현재 우방을 적대시할 수 없기에 친아제르바이잔 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아제르바이잔으로서도 이스라엘과 깊은 관계인 미국과 우호도 있기에 친이스라엘 정책을 취한다. 덕분에 1990년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전쟁 당시 미국이 아르메니아를 편들어주던 일은 과거가 되어가고 있다. 아르메니아계 미국 정치인들도 곤란해하고 있는 현실이다. 서술하듯이 아르메니아는 친러 국가에 친이란 국가가 되면서 이란산 석유로 군대가 돌아가는 와중이니 이란에 대해 옹호하고, 이스라엘과 이란의 충돌에서도 이란을 두둔하고 이스라엘을 비난하기 일쑤다. 게다가, 아르메니아는 팔레스타인이 핍박받는 역사가 자신들의 과거랑 비슷하다고 동병상련을 느끼는 이들도 많고, 친터키국가인 이스라엘을 학살자로서 비난하는 이들도 많다보니 이스라엘로서도 아르메니아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아제르바이잔 군 훈련을 돕는다는 분석도 나온다.
결국 2020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은 아제르바이잔을 강력하게 지원해 아르메니아 패배에 기여했다. 승리가 확신된 2020년 11월 10일, 바쿠 시 곳곳에 혈맹급인 터키 월성기가 많이 휘날렸지만 곳곳에서 이스라엘 국기도 같이 휘날려 아제르바이잔에서 적어도 이스라엘에 대한 인식이 크게 좋아짐을 입증했다. 더불어, 더더욱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 편들어주고 아르메니아를 더 외면하게 되었는데 이 전쟁 와중에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이스라엘 무기 수출 금지를 촉구하라고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9.3. 중동권


반대로 미국, 이스라엘과 사이가 나쁘다고 봐야 할 이란이나 시리아는 아르메니아와 매우 우호적이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에 석유를 수출한다면 이란이 주로 아르메니아에 석유를 많이 수출하고 있다. 역사적, 경제적으로도 이란과 아르메니아가 우호적이다보니 이란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강력하게 따져들며 터키를 비난한다. 그 이란에서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비가 만들어졌다. 정작 이란도 자국 영토에서 근세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 이주 과정에서 떼죽음을 당하게 만들거나 근대 노예 인신매매 희생자로 만든 경우가 많았다.[29]
시리아도 이 당시 터키 지배를 받던 지역에서 학살을 당한 시리아 정교회인들이 많았기에 동병상련 피해자로서 아르메니아와 이 학살을 서로 추모하고 서로 추모비에 추모 성당까지 세웠다. 즉 시리아에 아르메니아인 학살자 추모 성당을, 아르메니아에 시리아인 학살자 추모 성당이 있다. 하지만 데이르에조르에 있던 이 추모 성당이 2014년 ISIL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터키랑 역사적으로 앙금이 있는 아랍이슬람 국가들도 이 학살도 인정하고 터키를 비난한다. 상술하듯이 이들은 터키,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전혀 좋게 여기지 않는다.[30] 굴욕으로 여기고 심지어 기독교도 놈들이 오스만 놈들보다야 더 낫다라고 이를 벅벅 간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만 제국 지배 하에서 아랍인들은 그리스 및 기독교계보다는 더 밑바닥인 3류 백성으로 무시당했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은 아랍인을 더 밑으로 보고 재상같은 최고위직을 비롯하여 정계 요직이나 멀리 지배지 총독을 튀르크인 아니면 충성을 인정받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그리스인이라든지 꼭 개종하지 않았다고 해도 충성을 인정받은 각 지역 기독교인 위주로 임명해 다스렸고 아랍인은 등용한 게 훨씬 적었다. 오스만 제국이 명목상으로나마 유럽 국가로 대접받았고 현대 터키 또한 무슬림이 대다수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의미에서의 유럽 국가로 분류되기도 하는 게 이해가 될 정도다. 심지어 일부 지역이나 요직에서는 유태인보다도 밑으로 대우받거나 등용될 지경. 그래서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1차 대전 당시 연합군이 우리 도우면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시켜준다고 하자 군말없이 오스만에 저항했다. 지금까지도 이 앙금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수 있는 게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이 터키군 참전을 요청하자 친미 정부 수반들도 결사반대했다. '만약에 오스만 놈들의 후예인 터키놈들이 또 이라크 땅으로 들어온다면 우린 반미 저항세력과 손잡아서라도 터키놈들부터 요절내겠다! 그놈들은 반드시 이라크를 욕심낼 게 뻔하니까!' [31]라고 으르렁거려 미국도 없었던 일로 하자고 물러날 정도였다.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지하는 이라크인들만 그런 게 아니라 사담 후세인 정권의 폭정으로 피해를 입어서 미군을 환영하던 이라크인들조차 터키의 참전만큼은 강하게 반대했다. 이처럼 세속적이고 이슬람 극단적이고 간에 이라크인들에게 오스만 지배에 대하여 지옥 같은 굴욕의 시절이라고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할 정도이다. 오죽하면, 같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은 그리스와 이라크는 사이가 좋은 편이다. 일례로 이라크 중고교 역사교과서를 봐도 그리스 독립전쟁에 대해 억압받고 학살되었던 그리스인들의 정당한 투쟁이자 자랑스러운 봉기로 이라크에게도 동질감이 가는 역사라고 서술되었다.
뿐만 아니라 위에 먼저 서술했듯이 아르메니아인들이 집중 학살당하던 같은 시절 아르메니아인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불온하다고 판단 된 현대 이라크-터키-시리아 일대의 아랍 부족들도 집중 학살, 혹은 강제 이주 당한 전적이 있다. 상술되어 있지만 당시 오스만 정국을 주도하던 군부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과 전혀 거리가 먼 뒤틀린 의미에서 근대적인 민족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집중 타겟이긴 했지만 종교와 상관 없이 정치적으로 불온하다고 판단 된 집단이면 쿠르드족, 아랍인 가리지 않고 다 조져버렸기 때문이다. 25만~75만 정도 학살되었다는 아시리아인, 4만(터키 주장)~최대 50만 정도 학살되었다는 무슬림 아랍인, 5만~20만 정도로 추정되는 다른 무슬림(알레비) 및 쿠르드인들도 이 당시 같이 학살당했다. 그럼에도 위에 서술한 대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엄청 길게, 상세하게 사진 자료랑 같이 기재하고 시리아 기독교인 학살도 크게 다루는 것과는 달리 오스만 제국이 당시 저지른 코루흐 강 계곡 학살 사건을 비롯하여 아랍인 무슬림들도 분명히 학살당했거늘,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짧게 다루는(글로만 2줄 정도) 수준이다.
그러니 이런 동병상련을 겪은 아랍국가들도 당연히 터키를 욕하고 학살이라며 아르메니아에 사죄나 배상을 해야한다고 공감을 하면서도 이 학살을 두고 밑에 서술한 추모비라든지 미국이나 유럽이 나서는 걸 두고 '''"아르메니아가 기독교 다수 나라라 더더욱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일 터키가 기독교 국가이고 아르메니아가 이슬람 국가였다면 미국도 유럽도 지금처럼 끈질기게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터키 편을 들어주고 묻어버렸을 것이다."''' 라며 비난하고 있다 . 이라크나 시리아에서도 "우리도 숫자가 적다고 해도 아르메니아나 시리아 기독교인들이랑 같이 학살당한 피해자들인데? 우리는 나몰라라 하면서 뭐가 어째?" 라고 미국 상원결의안에 대해서도 불쾌하게 대응하는데 어쨌든 나머지 이슬람권에서는 차라리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으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이 많이 설치면 설쳤지, 종교적으로 터키 편 들어주고 그딴거 없다. 오히려 이란 측에서는 자국 내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역사도 터키 못지 않게 깊고, 터키와는 반대로 딱히 아르메니아와 원수 질 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대학살 당시 난민들을 받아주고, 관련 아르메니아 역사학자들의 편의를 봐주는 등 지역 열강 중에 그나마 아르메니아인들을 잘 돌봐준 편에 속한다.
그러나 시리아,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권에서는 반 터키 감정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에 학계나 정치외교 차원에서 대학살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많지만, 아랍권 대중 내 만연한 이슬람주의 반기독교 감정 때문에 해당 학살에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말 이전에는 아랍인보다 아르메니아인들을 더 우대했고,(다시 말해서 아랍인들은 같은 무슬림인 경우에도 더 무시당하고 차별당했으며)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일어나던 오스만 제국 말엽에는 아랍인들이 기독교인 무슬림 막론하고 학살당했기 때문에 굳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열심히 가르치고 국민적으로 같이 추모해 줄 이유가 부족하다.
아제르바이잔 같은 경우에는 터키 일각에서처럼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아르메니아와 서구의 역사 왜곡으로 치부하며 부인한다. 아제르바이잔은 터키랑 같은 투르크족인데다가 아르차흐(나고르노카라바흐) 영토분쟁으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을 치르기까지도 했으며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아르메니아인들이 저지른 호잘르 대학살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대거 희생당한 슬픈 역사 때문에 더더욱 아르메니아인들을 동정하기 힘들다. "그런 슬픈 역사(아르메니아인 대학살)를 가진 주제에 똑같은 짓(호잘르 대학살)[32]을 저지르냐?" 라는 비판도 가능하기 때문이다.[33]

9.4. 미국


미국으로서도 아르메니아가 독립하고 나서 지리적으로 러시아 입김에서 나오지 못한 상황이라 강력한 친러국가가 되었으니 아르메니아 편들어주기가 껄끄럽다. 90년대 초반에 아르메니아계 정계 미국인 의원들 주도로 미국은 아르메니아를 지지했다가 아르메니아와 전쟁을 치룬 아제르바이잔반미 감정이 강해져 2대 대통령이자 친미 및 서구정책을 취하던 애뷜패즈 엘치배이 정권이 여론 비난 속에 쿠데타까지 당해 붕괴되었다. 정권을 차지한 헤이대르 앨리예프는 강력한 반미 정책을 취하고 친러 정책을 굳혀 지금까지도 대를 이어 정권을 장악 중이다. 다만 아제르바이잔은 당시 러시아도 아르메니아를 편들어준 것 때문에 친러정책은 이후 수그러들면서 미국이나 서구에 중립적으로 대하고 있다. 덤으로 아제르바이잔은 오랫동안 쓰던 러시아어를 배제하고 아제르바이잔어나 터키어를 더 집중으로 가르치며 영어도 비중을 높히며 러시아와 거리를 두고 있다. 이러니 미국으로서도 알아서 러시아를 배제하고 조금씩 미국에게 우호를 보이려는 아제르바이잔을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조지아남오세티야 전쟁을 당할 당시, 아르메니아 정계는 입다물고 외면했지만(다만 여론에선 러시아를 욕하고 비난했으며 일부 시위도 있었다. 그리고 일부 정치인들도 러시아를 비난했었다.)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를 비난했던 걸 봐도 아제르바이잔도 이젠 친러 정책만 취하지 않는다.
하여튼 아르메니아에게 1992년 102억 달러나 되는 돈을 지원한 미국은 덕분에 아제르바이잔을 한동안 반미 친러국가로 만들었고 돈을 들이고 외교적으로 지지해주던 아르메니아는 정작 친러국가이기에 미국으로서는 난감한 결과를 만들었다. 이렇게 여러 외교 이득적으로 따져야 하는 점도 있기에 미국도 결의안을 지지하면서도 터키가 주장하는 동시대 기독교 열강이 벌인 학살에 대한 결의안도 같이 나서봐라는 비난에 막히고 있다. 그 예로 2016년에 벌어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국경 분쟁 때에도 아르메니아 편들던 20여년전과 달리 중립을 지켰지만 외교적으로 아르메니아와 거리를 두고 있다. 이젠 거꾸로 아르메니아가 친러시아 국가로 유러시아 연합에 가입하고 아제르바이잔이 친미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상술하던 대로 이스라엘이 아제르바이잔과 군사적 우방이 된 상황도 있으니 미국으로선 나날이 아제르바이잔 편들어주던 정계 입김(공화당 중심)이 커지고 있고 반대로 아르메니아는 아오안이 되어가고 있다.
일단 미국은 상원 결의안까지 나섰지만 그렇다고 위에 서술한 유럽인권재판소처럼 논란을 빚으며 국가적으로 나서지도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물론 학살은 맞지만 왜 아르메니아 대학살만 그렇게 상원결의안으로 나서고 있느냐?"''' 는 반론도 많다. 이는 터키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그 시대 미국도, 다른 유럽 열강도, 소련도 식민지에서 저지른 무수한 학살이 많음에도 오로지 아르메니아 학살만 결의안으로 나선다면야 다른 학살은?"''' 서구권이 나서서 다른 서구권이 저지른 학살을 덮어버리곤 결의안을 나선다고 반발만 거세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동시대 그리스도 일부라고 해도 역시 무시못할 수십만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싸그리 죽여버리고 당당하게 당시 이걸 사진도 찍으며 증거까지 남긴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유럽인권재판소나 미국 상원결의안도 '''터키만이 저지른 학살이 아닌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한 결의안'''이라고 이야기하며 그리스건 다른 지역이건 당시 저지른 학살에 대한 부정을 금지할 것이라고 중립적인(?) 태도로 내세우곤 한다.
하지만 그래서 오로지 아르메니아인들만 죽었나? 비난이나 반발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위에 상술한 대로 벨기에나 무수한 유럽 및 미국이 저지른 학살 피해자에 대한 것이 있고 해당 피해 국가들도 "맞아, 터키가 학살을 저지르긴 했다!" 라고 비난하면서도 "그런데, 터키 욕하는 너희들은 같은 시대에 우리에게 뭐 했냐? 그런 학살에 대해 어디 미국 상원 결의안 통과해 봐라!" 라고 터키랑 같이 이를 갈며 분노하고 이런 비난에 해당 국가들은 터키처럼 축소하거나 부정하는 내로남불적 추태를 똑같이 저지르고 있다.
이러니 미국도 안하무인으로 결의안 통과한다고 하면 다른 나라들에게 어느 나라 학살만 봐주고 결의안 통과하고 너희들이나 다른 나라가 저지른 건 넘어가고 모른 척하냐는 비난에 시달리고 외교나 여러 모로 골치 아파질 문제를 무시할 수가 없다. 당장 중국 네티즌만 해도 미국의 이 결의안을 두고 "미국놈들이 아르메니아만 오냐오냐하곤 어디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는 결의안을 두는지 봐라!" 라고 비난할 정도이다.
결정적으로 미국은 보스포루스 해협 때문에 터키를 버릴 수도 없고, 등질 수도 없다. 터키가 정말로 빡돌아서 러시아에게 이 해협에 해군함을 마음껏 오고가게 하도록 하면 크나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랬다간 중국, 북한군까지 개입할 소지가 높다.
그러나, 나날이 반미적으로 친러 행보를 보이는 에르도안에 짜증난 미국 상원은 2019년 12월 13일에 난데없이 미국 상원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물론 터키는 강력반발하고 어디 제대로 러시아 쪽으로 붙어본다고 으르렁거리고 있다.[34]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미국이 아르메니아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간주한다면 우리도 북미 원주민에 대한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는데,[35] 미국 측은 그나마 터키에 비해선 원주민 학살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편이기에 "어... 맞는 말 아님?"이라며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위에 서술되었듯이 정작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동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인 터키와 관계를 고려해 수차례 결의안 통과를 저지해왔다. 트럼프가 그동안 에르도안에 대해 비난하고 경제제재를 한다 뭐다 이런 말 하면서도 정작 상원결의안을 안 좋게 본 게 이게 결의안이 된다면 다른 나라들이 근현대 겪은 학살사건에 대한 결의안도 똑같이 따라오기 때문이었다고 분석되고 있다. 정작 통과되었지만 전혀 달라진 게 없다는 현실을 봐도...
결국 2020년 후반기 벌어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전쟁에 미국은 그 어떤 도움도 주지않았고 아르메니아가 패배하여 아르차흐 지역 70% 가까운 땅을 아제르바이잔이 도로 차지하는 것을 인정해버렸다. 물론 터키랑 전쟁이 아닌 아제르바이잔이 벌인 전쟁이지만 터키군이 강력한 지원을 하던 전쟁이었기에 아르메니아에선 이 전쟁 패하면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또 벌어지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미국 논객 토머스 프리드먼도 아르메니아는 이스라엘, 아제르바이잔이나 터키는 아랍 이슬람권을 두는 반응이랑 똑같다고 했는데[36] 그만큼 아르메니아에 대하여 종교적으로 보고 옹호한다는 주장도 미국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은 정치적으로 얼마나 이해관계가 얽혀서 복잡해지는가 보여주는 단면이지, 학자적 관점에서는 헛소리에 무의미한 행위일 뿐이다. 제노사이드는 어디 누가 더 심하게 당했나 경쟁하는 훈장이나 올림픽이 아니고, 절대적인 숫자만으로 따지면 나치 독일이 말기 오스만 제국보다 훨씬 더 역량이 강했고, 깽판친 범위도 넒어서 희생자 수가 더 많은 게 당연하지만, 인구 대비 비율로 보면 당장 역사적 서부 아르메니아가 아예 소멸해 버린 메츠 예게른도 홀로코스트 못지 않다. 그리고 상술된 토머스 프리드먼의 발언도 나무위키로 옮기면서 뭔가 와전된 것 같은데,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 동부 지방의 아르메니아인'''이라 하면 학살이 집중 된 지역이고, '''역사적 동-서 아르메니아 입장에서 동부 지방''', 즉 예레반과 에치미아진 일대, 즉 현대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강역인 지방이라 하면 애초에 1차 대전 시점에서 오스만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영유하고 있었던 땅이니 학살 자체가 불가능했다. 프리드먼의 발언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서부 지방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 한데, 이 또한 현대 와서 논파된 낭설이다. 당장 총력전을 치루는 나라의 수도 민심을 뒤흔들지 않기 위해 코스탄티니예의 아르메니아 공동체를 내버려두었을 뿐이지, 이즈미르, 마니사, 아다나 같은 전선과 멀리 떨어진 서부, 남부 지방의 아르메니아인들도 모두 끌려갔다. 심지어 수도에서도 민족주의를 더 조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된 사도교회 사제, 아르메니아계 지식인, 학자, 언론인들은 모두 골라서 죽였다. 결론은 도덕적인 관점에서는 그 시절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를 자처하고 그 연속성이 대내외적으로 인정 받는 터키는 뒤늦게라도 이 사건을 인정하며, 급진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옛 영토 반납은 헛소리로 일축해도[37], 지금도 제대로 관리를 못 받고 있는 현지의 수백개는 족히 넘는 아르메니아 관련 사적들을 돌보며 과거사 정리를 하고, 다른 제국주의 시절 열강들도 저런 자기 나라의 어두운 과거사를 자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직면하는게 바람직하겠지만, 언제 국제 정치와 특히 과거사 둘러 싼 역학 관계가 그리 도덕적으로 돌아갔는가...

9.5. 한국


한국도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학살이자 제노사이드로 인정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학살에 대하여 대충 터키군이 전쟁 와중에 저지른 학살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언급하는 수준이다. 걸어서 세계속으로에서 2016년 10월 29일에 방영한 아르메니아 편을 봐도 그냥 1915년에 150만 아르메니아인을 터키군이 학살했다라고 가볍게 언급할 뿐...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터키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이 늘어나자 한겨레에서 이 학살을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진상을 아는 한국 민간에서 아르메니아를 동정하는 여론들이 있다.
2015년 5월,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 새삼 한국인들의 주목을 이끈 사건이 발생했다. 2015년 5월 14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공연에서, 협연자로 출연한 아르메니아 출신 첼리스트인 나레크 하크나자리안이 본 공연을 마친 후, 앙코르 곡을 준비하던 중 작은 소동이 있었던 것. 하크나자리안은 앙코르 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올해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일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아르메니아인으로서 오늘 앙코르 곡은 이 사건에 바치고 싶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에 터키인으로 추정되는 객석의 누군가가 '정치적인 발언은 삼가라'며 야유했으나 하크나자리안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어떤 사건인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38] 그가 앙코르로 선보인 곡은 조반니 솔리마의 '라멘타치오(애통)'. 2013년 6월에 있었던 서울시향과의 첫 협연 때에도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바 있는 곡이다.

9.6. 기타 제3국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서구의 역사 왜곡 조작이라며 인정하지 않는다.
파키스탄은 아르메니아랑 사이가 나빠서 이 학살이 조작이라며 터키를 편든다. 파키스탄이야 아르메니아와 특별한 충돌이 없었던 만큼 정부의 입장과 별개로 개인 차원에서 아르메니아에 비적대적인 경우도 존재하지만. 그래서 파키스탄과 원수지간인 인도는 아르메니아를 편들며 밑에 서술한 대로 1960년대에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비를 세우며 터키를 비난하고 있는데 이처럼 국제적 이득이나 여러 종교적 갈등까지 얽혀 있기에 아르메니아로서도 섣불리 뭐라고 할 수 없어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한편 방글라데시는 터키와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와 모두 외교를 맺었다보니 아르메니아를 동정하지만, 1992년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국경지역에서 저지른 학살도 비판하며 아제르바이잔, 터키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보니 아르메니아 학살이 잘못된 사건이라는 건 알지만 대놓고 비판하지는 못한다.
콜롬비아의 경우 안티오키아 주의 한 도시에 아르메니아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학살을 비난하며 기리고 있다.

10. 가짜 자료


[image]
한국 인터넷상에서도 이 학살 당시 사진이라고 흔히 잘못 알려진 사진. 외국도 마찬가지라 ABC방송에서도 2015년 이 학살 100주기를 다룬 기사에서 이걸 오스만 공무원이 벌인 짓이라고 보도하고 있다.ABC 당시 기사.
무엇보다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관 관련 사진에서도 이 사진이 있으나 파일 제목이 Fake image claiming to be Ottoman official teasing Armenian starved children by showing bread, 1915.jpg 이다. 즉, 이 사진 파일 영어 제목부터도 가짜라고 나와있다. 편집한 이들도 아르메니아인들임에도 이 사진이 페이크 Fake라고 올라와 있는 걸 봐도 그들도 이 자료에 대해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삐쩍 말라있는 것처럼 조작이 아님에도 사진에 대하여 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데 정말 뼈가 보일 정도로 굶주린 사람들이 있기에 이런 학살 와중 벌어진 사건으로 보기 쉽다. 이러다보니,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 아르메니아 학살이라고 여기는 것도 있다. 해당 사진은 아시아에서 벌어진 식민지 대기근 때 사진으로 추정하고 있다. 벵골 대기근같은 나중에 벌어진 일 말고도 식민지에서 이렇게 굶주려 죽어가는 기근은 매우 흔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현장을 가본 미국 사진작가가 남긴 기록에서도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선 여러번 흔히 본 굶주린 사람들인데 백인이 굶주린 건 처음이라고 하듯이...다만 저렇게 약올리는 게 대체 왜 그런지 모를 일이다.
저게 오스만이랑 무관한 증거로 복장이 당시 관복이 아니고 당시에는 실외에서는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관료든 평민이든 무조건 페스를 썼기 때문이다.[39] 무엇보다 터키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모자를 쓰지 않는 것이 수치로 여겨지던 시절[40]이었기 때문에 더욱 말이 안된다. 결정적으로 아르메니아 대학살 구글 검색만 해도 뜨는 당시 학살 사진에 나온 오스만인들이나 군인들은 정말로 페스를 쓰고 있는데 왜 이 사진은 보란듯이 페스 자체를 안 쓰고 있는 것일까? 저 사람이 오스만인이 아닌 다른 나라 기근 현장이니 이러한 엉터리 자료에 속지 말아야 한다.

11. 기타


세계 각지에 이 학살에 대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미국, 캐나다, 우루과이, 남키프로스, 프랑스, 본국인 아르메니아 같은 나라 같이 기독교 다수인 나라에 주로 있다.
하지만 그밖에도 시리아[* 사실 시리아는 강력하게 이 학살을 비난하며 아르메니아를 편드는데 이 학살 와중에 현대 터키~시리아~이라크 국경 지대에 살던 아랍인들도 대거 학살당하고, 현대 시리아 지방으로 강제 이주 당한 비극이 있기 때문이다. 추모비도 여럿 되고 아예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 교회까지 따로 세웠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아르메니아에는 시리아 기독교인 학살 추모비도 세워져 있다.], 레바논, 인도, 이란 등에도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로 이들 이슬람 다수 및 비기독교권 나라들에서 아르메니아 학살을 이전부터 성토해오고 아르메니아를 편들어왔기에 저런 게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말이다.
[image]
1919년 터키에서도 추모비가 세워졌으나 3년 만에 파괴되어 이젠 사진으로만 남은 바 있다. 일부 터키인 & 아르메니아인들이 만들었지만... 당시 그리스와 전쟁 중이라 이걸 누가 부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알려지지 않은 점이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소녀 에우로라 마르디가니안(1901~1994)이 쓴 책 <유린당한 아르메니아>(Ravished Armenia)이다. 1918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어 1919년 미국에서 무성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흥행은 망했고, 잔인도 때문에 여러 나라 개봉도 취소되었다. 게다가, 원작자 마르디가니안과 저작권 문제로 고소 소송까지 벌어지며 시끄러운 모습을 보였고 냉전 시대에 영화는 찾아보기 어렵다가 2009년에 아르메니아에서 돈을 대줘 복원되어 DVD가 나왔다. 아르메니아는 에우로라 이름을 따라 에우로라 프라이즈라는 평화상을 2016년에 제정했으나 국제적 인지도는 그야말로 듣보잡.
아르메니아-이집트계 캐나다 감독인 아톰 에고이얀은 이 사건을 소재로 아라라트라는 영화를 찍은 적이 있다. 에고이얀은 영화 공개 당시, 칸 경쟁에 출품하지 않고 비경쟁에 출품했는데 경쟁 부문에서 상을 받지 못하면 사건이 묻혀질 것을 우려했다는 뉘앙스로 발언한 바 있다. 대학살 이후 현대를 살아가는 아르메니아인이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며, 에고이얀 특유의 군상극적인 성향이 강하다. 다만 에고이얀 최고 걸작까지는 아니라는 게 중론.
터키 드라마아르헨티나나 남미 각지에서 인기를 끌자 아르메니아계들이 조상 모독이라고 반대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터키 드라마랑 아르메니아의 조상이랑 무슨 관련이 있냐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터키 독립전쟁 이후 체결된 로잔 조약으로 터키 공화국 영토에서 거의 추방된 그리스인과 달리, 아르메니아인들은 여전히 터키에 남아 있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20-50만 정도로 추산된다. 이스탄불에서는 아르메니아어 신문도 발행될 정도로 꽤 큰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학살 당시 강제 이주지로 설정된 터키 남동부 지방과 시리아에도 많은 수가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는 자신이 아르메니아인임을 숨기는 경우가 있어 간혹 시골에서 누군가 죽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당연히 무슬림이거니 하고 이슬람식 장례식을 준비하다가 알고 보니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라는 걸 알고 당황했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나오곤 한다. 물론 현지 문화에 동화되어 이슬람교로 개종한 아르메니아인도 적지 않았지만...
아르메니아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보라색의 꽃 모양 스티커를 붙여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꽃의 정체는 물망초라고 한다.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말아주세요'라는 뜻으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뜻이다.

[1] '멸문(滅門)'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터키어로는 'Soykırım'으로 옮긴다.[2] 아르메니아어로 '대재앙'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탈리아인 만화가 파올로 코시가 그린 《메즈 예게른(Medz Yeghern: il grande male, 2007)》이라는 작품 역시 아르메니아 학살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 밖에도 '학살들'을 의미하는 'Կոտորածներ(Kotoracner, 코토라츠네르)'라는 표현도 사용된다.[3] 영어의 Armenian Genocide의 표현을 직역해 Ermeni Soykırımı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터키어로 soykırım은 하나의 일족이나 가문을 말살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때문에 학살보다는 "멸문"에 더 가까운 의미이다. 학살을 의미하는 표현은 아랍어에서 유래한 "Katliam"이며 아시리아인 학살에 대해서는 "Süryani Katliamı"라는 표기를 사용한다. 터키에서 공식적인 아르메니아 학살 관련 문건 표기는 '아르메니아 문제'라는 뜻의 "Ermeni Meselesi"이며, 이를 완곡·소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1915 olayı(1915년 사건)" 같은 말을 쓴다. 그 외에도 아르메니아인 강제추방을 의미하는 "Ermeni Tehciri"라는 표현도 사용한다.[4] 강제이주 경로 및 주요거주지역. 다만 출처가 미국내 아르메니아인 단체라는게 말해주듯 학살 자체에 대해서는 교차 검증이 되는 자료지만 '역사적 아르메니아 강역'이라 어둡게 표시해 놓은건 대아르메니아 민족주의적 입장만 반영한 것임을 고려해야 한다. 당장 흑해의 주요 거점 도시인 트라브존만 하더라도 아르메니아 강토 운운하기엔 역사적으로 차라리 폰토스 그리스인들 영향력이 더 크면 컸지 '아르메니아의 고유 강역'이라 주장하기엔 어려운데도 아르메니아 혁명 동맹 같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 단체들은 줄기차게 '역사적 아르메니아'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는 지방이다.[5] 하지만 홀로코스트와 달리 1980년대만 해도 묻혀지던 감이 있었다. 후술하듯이 여러 문제로.[6] 터키 역사 위원회장 유수프 할라츠오울루(Yusuf Halaçoğlu)의 2008년 공식 통계는 413,067명이며, 아놀드 토인비는 100-120만, 미국정부의 통계로는 약 48만6000명, 가톨릭 대백과사전은 약 60만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렇게 수가 엇갈리는 이유는 오스만 당국의 행정문서들이 전후 테슈킬라트 마흐수사(Teşkilât-ı Mahsusa)의 문서고가 전후 소실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행정내용이 보존되어 있지 않고, 당시의 인구통계도 그렇고 오스만 제국의 부실한 지방행정력 때문에 제대로 파악이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오스만 제국 중앙정부는 전쟁 직전까지 지방 인구과 징병 가능한 청년인구의 파악조차도 프랑스, 영국 통계기관의 도움을 받던 현실이었다.[7] 사실 이는 이 당시 오스만 제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러시아도 식민지 주민들의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중국과 로마도 식민지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8] 이는 오스만의 힘을 약화시키고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9] 여담이지만, 공화국 시기 초기에 이러한 약한 지방 장악력 때문에 피봤다는 것을 깨달은 터키 공화국 정부는 국토를 67의 도(현재는 81개)로 세분화하고 도지사부터 말단 군수, 이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방관을 중앙에서 통제하는 중앙집권제를 시도했다. 다만 이건 또 이것대로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동안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적어도 자기 땅, 부족에선 왕이나 다름없었던 쿠르드, 아랍 부족들이 중앙정부가 자꾸만 자신들의 이권(오스만 제국 시기에 쿠르드족, 향촌 구성원들에 대한 조세, 군사, 사법권은 모두 부족장의 손에 달려있었다.)을 침해하려 하니 반발하게 된 것. 2017년 현재도 진행중인 PKK의 반란과 쿠르드족 문제도 이와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10] 최근 유럽 연합 경제 위기 등에서도 사용되며 약간 보통 명사 느낌이 드는 단어지만, 이 단어의 기원은 이 시대 오스만을 칭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러시아 황제가 최초로 사용했다.[11] 피해자인 입장에서는 전근대적이니 근대적이니 따질 필요도 없이 둘다 이가 갈리듯이 말이다 게다가 오스만의 학살은 근대 민족주의 확산 이후의 일이다[12]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치하의 터키계 불가리아인들 중에서도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이들과 달리 대체로 불가리아 공산당의 통치에 순응하는 편이었으며, 그에 따라 터키계 불가리아인들이 터키 본토로 대거 망명할 때도 이들은 끝까지 불가리아에 남는 경우가 대다수였다.[13] 정치적 대립과는 별개로 신학적으로 이슬람교가 아브라함교 3대 종교의 마지막 후발 주자로서 기독교과 유대교에서 계승한게 하도 많아 종교적 관점 자체로만 보면 무슬림들이 질색하는건 가장 먼저 공산주의무신론 세속주의고, 그 다음으로 토착 다신교 신앙들이지 기독교, 유대교는 오히려 '유일신을 믿지만 '''틀린 방식이 문제'''라 하며 유하게 대한다. 이런 문맥이 있기 때문에 이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과 그리 살벌한 대립각을 새우면서도 막상 자국 내 유대인 커뮤니티들에겐 의석 보장, 호메이니의 "시오니스트와 유대인은 다르다"라는 발언 등으로 나름 유화책을 쓰는거고, 심지어 그 다에시도 막상 기독교인들을 처죽이면서도 가식적이지만 '기독교 부서'라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했던 형식적인 개별 부서는 만들었던 것이다. 야지디교 같은 아예 기원 자체가 아브라함교가 아닌 다른 종교인들은 이런 서류상 분류도 안하고 그냥 제노사이드적 학살을 한 걸 보면 나름 유의미한 차이이다.[14] 비슷한 경우로 19세기에는 러시아 제국의 침략을 피해 오스만 제국으로 피난한 체르케스인들이 불가리아로 파견되어 불가리아인들의 봉기를 진압할 당시 체르케스 출신 비정규군들의 잔학행위와 약탈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한다.[15] 아르메니아/역사 문서의 1911년 인구 통계와 1920년대 인구 통계 비교 및 참조[16] 출처: Şafak Ural, Kâzım Yetiş, Feridun Mustafa Emecen, Çeşitli yönlerden Türk-Ermeni ilişkileri, İstanbul Üniversitesi, 2006, s.196.[17] 우루과이는 근본부터가 브라질의 지방 중 하나인 '시스플라티나 주'였다가 아르헨티나의 도움으로 독립에 성공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루과이의 입장에서 본 터키는 과거 자국을 지배했다가 아르헨티나의 도움으로 해방된 압제자인 '브라질'로 보였다.[18] 어떤 나라이든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짓을 하면 전세계적으로 필히 비난한다.[19] 프랑스 극우들은 알제리인들도 일부 프랑스인 학살을 저질렀으니 같다라고 주장하다가 더더욱 욕처먹었다. "그렇게 치자면 유대인들도 폭탄 테러라든지 일부 저항으로 나치에 저항하다가 일부 독일 민간인을 죽였다면서 유태인도 학살을 조금이라도 한 셈이라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이랑 차이가 없으며, 아르메니아도 일부 저항하여 오스만 민간인을 조금이라도 죽였으니 같이 오스만 측이 학살을 벌인 게 정당방위라고 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면 뭐라고 할거냐?" 라는 비웃음과 비난에 대하여 입다물 수 밖에(...).[20] 일련의 사건들을 1998년 3월 31일부터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인 대학살의 날(Azərbaycanlıların Soyqırımı Günü)로써 추모하고 있다.[21] 오스만 제국 항목에 나와 있지만 사실 엄밀하게 역사적 관점에서 따지면 적어도 19세기 이전 오스만 제국은 '''터키인의 제국'''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배 계급은 근본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짙게 받았으며 정교회권 유럽 출신의 개종자들이 주도했었고, 그 이하로는 그냥 다 신민이었으며, 제국이 쇠퇴한 이후에도 차라리 수니파 이슬람의 종주국이란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했지, 딱히 튀르크인이라고 우대하며 중심 민족으로 삼은 건 유럽쪽 속주를 전부 다 빼앗기고, 아랍인들의 충성도 또한 심각하게 뒤흔들린 19세기 후반 제국 역사의 끝자락이 되어서야 '''튀르크인의 제국'''이란 정체성을 강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대 터키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후예가 아닌건 아니지만, 오스만 제국을 튀르크인, 무슬림만의 제국으로 인식하는 건 명백한 역사학적 오류다. 근데 이건 결국 귀걸이 코걸이식 논리로 오스만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터키가 회피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애당초 전근대 제국 모두가 가진 보편성 얘기가 생뚱맞게 왜 나오는지도 의문이다. 이런 식이면 몽골제국도 몽골인만의 제국이 아니니 대몽항쟁이라는 말도 고쳐야 한다. 실제 몽골인은 숫자 자체가 워낙 적어서 고려를 침략한 군대의 대다수는 한족이나 여진,거란족 등이었다.[22] 터키어로 Süryani, 쉬리야니라고 부르며 주로 마르딘 일대에 거주하고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시리아 정교를 믿는 소수민족이다.[23]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로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을 지켜주다가 희생된 터키인, 아르메니아인의 피가 흐르지 않는데도 억울하게 아르메니아계로 몰려 죽임을 당한 터키인, 알레비파 박해로 희생된 알레비파 터키인, 단지 아르메니아인의 피가 흐르기만 할 뿐 정체성은 터키인에 가까운데도 그저 아르메니아계라는 이유만으로 희생된 경우 등[24] 다만 아르메니아 학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25] 참고로 라카기가르 화산이 폭발은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지적 잘못해도 한참을 잘못한 것. [26] 실제로 터키는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에 자국도 어려운 판국에 술탄 압뒬메지트 1세가 구호를 위해 1만 파운드를 보내려 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자기는 2천 파운드만 보냈다며 대영 제국 위신이 떨어지니 1천 파운드만 기부해 달라고 요구했다. 술탄은 이 요구에 응했지만 그 대신 식료품을 가득 채운 배 3척을 몰래 보냈고, 터키 선원들은 영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에 이를 전달했는데 아일랜드에서는 무척 고마워했고 감사장도 보내주고 일부 지역에서는 오스만 제국 상징이던 초승달을 지역 문장에 넣어가며 고마움을 표하던 일이 있었던 만큼 아일랜드 대기근에 대해서 영국과 반대로 터키가 은혜를 베풀었다. 아일랜드가 쌍수를 들고 바로 맞선 데에는 이유가 있다.[27] 자폭도 그냥 자폭이 아니었는데, 저 화산 분화로 당시 덴마크 국왕이었던 크리스티안 7세가 '''끼니를 걱정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한 나라의 군주가 말이다.''' 한 나라의 군주마저 이랬으니 나머지 사람들은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덴마크는 17세기까지 3백여년 정도는 아이슬란드나 페로 제도에 대하여 차별 없이 잘 지내왔으나 18세기 덴마크가 강압적으로 아이슬란드 의회를 없앤다든지 하는 등 점차 선민적으로 변해 아이슬란드와 갈등을 빚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아이슬란드의 의회는 이후 다시 원상 복귀되었고 오히려 덴마크는 이후 아이슬란드에 자치권을 더 부여하는 등 여타 식민제국들에 비하면 상당히 관대한 정책을 폈고 딱히 핍박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그 흔한 무장투쟁도 별로 일어나지 않았고 현재도 딱히 서로간의 악감정은 없다. 직접적인 학살을 한 타국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28]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이 노아의 후손이라고 여긴다. 노아의 후손 하야크(Hayak)가 BC 2,492년에 바빌로니아왕을 물리치고 하야스탄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역사를 내밀기에 당연히 유태인 후예 격이라고 외치면서 대다수 인구가 기독교인이니 이스라엘로서는 노아의 후손을 들먹인다고 아득한 옛날부터 무지 사이 나뻤다. 페르시아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상업적으로 대박을 거두자 유태인들을 밀어냈고 이들 중 일부는 바로 산악 유대인으로 남았는데 이들 가운데 러시아나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스와 석유 재벌로 성공한 이들이 철저하게 아르메니아에 대한 고립, 아제르바이잔과 이스라엘 우호에 거액을 투자했다....이스라엘 건국 이후 예루살렘의 아르메니아인 거주구역의 아르메니아인 대부분이 박해와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사실상 강제이주 당했다.[29] 물론 이란 내에서 벌어진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오늘날 이란과 아르메니아 모두 외교적으로 고립된 나라이자 이웃나라 중 몇 안되는 우방국이라는 절박한 이유로 어물쩡 묻혀가는 추세이다. 하긴 오스만 내 벌어진 학살 규모가 워낙 컸으니....[30] 한중일 3국이 종교적, 문화적으로 공통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영 좋지 않은 이유를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31] 그런데 이 주장은 들어맞았다...이라크 쿠르디스탄에 대하여 에르도안 정권이 터키 영토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32] 해당 지역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현 아르차흐 공화국)에 속한 구(rayon)로 아제르바이잔어로 Xocalı 이다. 러시아어로 Ходжалы 라고 쓰지만, 튀르크어계 단어들을 키릴문자로 옮길때에는 ы를 ı(으)의 대응자로 여기기 때문에 본토 러시아어(호잘르이)와는 달리 여기서도 ㅡ발음이 난다.[33] 그러나 호잘르 대학살은 사망자가 고작 600명 남짓으로 150만 명이 학살당한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비교했을 때 정말 대학살이라는 명칭이 과할 만큼 보잘것 없는 수준이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이 사건을 심각한 학살로 보고 아르메니아를 증오하는 이유 중 하나로 만들었다. 아르메니아에선 숨가이트 학살로 아제르바이잔 인들도 아르메니아인 학살했다고 맞붙지만 여기서 죽은 아르메니아인들은 고작 200명 정도...이마저도 아르메니아 주장대로 최대치가 이 정도라서 3배로 복수한 셈이며 아제르바이잔에선 당시 1000명 이상이 호잘르에서 학살당했다는 최대치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 호잘르 학살은 변명할 거 없이 아르메니아군들이 호찰르 마을로 아침에 쳐들어와 총으로 아이건 여자건 마구 학살한 학살 사건이라 당시에도 아르메니아 지원하던 서방도 학살이라고 인정한 사건이기에.... 1993년 이 학살을 저지르며 호잘르는 아르메니아가 차지했지만 2020년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으로 되찾아가서 호잘르라는 옛 아제르바이잔 이름을 회복했고 바쿠에 세워진 이 학살로 죽은 사망자 목록이 적혀진 추모비를 호잘르에도 또 짓기로 했다.[34] 그러나 러시아는 크림 반도 영유권 문제로 우크라이나하고만 대립하는 게 아니라 터키하고도 대립하기 때문에(크림 칸국오스만 제국의 번국이었던 역사와 크림 타타르인들이 튀르크 제민족이라는 것 때문에 터키의 극우민족주의자들이 크림 반도를 자국이 수복해야 할 영토로 여기고 있음) 터키가 러시아 쪽으로 붙는다고 해서 터키와 러시아가 완전히 화해할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고 둘이 미국 견제를 위하여 크림 지역 문제를 일단 보류하고 서로 손잡는다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상황도 아니다.[35] 비교적 평화적으로 미국령이 되었던 알래스카 주의 틀링깃 족이나 하이다 족 같은 일부 원주민 부족들은 제외. 하루가 멀다하고 미군과 백인 개척민, 원주민의 충돌이 찾았던 본토와 달리 그런데로 백인계에 의한 학살피해를 입지 않았거나 적었다.[36] 하지만 유대인인 프리드먼은 아르메니아 학살을 두고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보단 낫다고 하여 아르메니아계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나치처럼 개종하든 말든 유대인을 마구잡이로 죽이던 것과는 달리 적어도 오스만 제국은 동부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은 놔뒀다고 다르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스라엘은 학살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터키를 좀 생각하여 홀로코스트보단 낫다고 하는 시각을 보인다.[37] 역사적 서부 아르메니아를 구성하는 지방이자 학살이 집중적으로 벌어졌던 오스만 제국 당시 아르메니아 6개주 (vilayet)은 현대 터키 영토의 1/3쯤 되는 거대한 땅이다. 아무리 아르메니아 측이 과거사에 피가 맺혀도 사실 학살 시점에서도 오스만 제국이 다스린 지 족히 500년이 넘었던 이 지방을 근대적, 정치적 의미에서 '''아르메니아 땅'''이라 주장하며 양도 받는 건 현실성이 없는 소리다. (이스라엘이야 알다시피 유태인들의 경제적 인맥을 통해 미국을 쥐어잡았고 세계 경제계에 무시못할 힘을 가지고 있기에 팔레스타인을 뭉개고 2천여년전 땅이니 뭐니 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팔레스타인 지역일뿐이다. 하레디를 비롯한 극단 세력은 이스라엘 영토에 대해 시오니즘 항목에 나오듯이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골란고원도 가까스로 미국이 인정한 수준일뿐. 하지만, 아르메니아가 요구하는 땅부터도 그렇지만 도저히 아르메니아로선 이스라엘이나 유태인들 경제력에 상대가 되지 않으니...) 게다가 그 일부는 시리아에도 있기에 시리아도 우리 보고 땅 내놓으라고 하는 거냐며 당연히 화낸다.[38] 위에 링크된 기사에는 이때 또다시 'You shut up'이라고 야유가 나왔다고 씌어있다. 그런데 당시 현장에 있던 관객들 중에는, 두 번째 야유가 하크나자리안에 대한 아유가 아니라 정치적 발언을 삼가라고 했던 관객을 향한 것이었다고 증언하는 사람도 꽤 있다. 1, 2. 하크나자리안을 비난했던 관객은 터키인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39] 다만,오늘날에도 크레타 섬의 남성들은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의상을 입을 때 페스를 쓴다. 하지만, 수백여년 오스만 지배로 오스만풍 옷차림도 깊숙이 뿌리박힌 점도 있긴 하다.[40] 터키는 터키공화국 수립 이후 페스를 금기시하면서 서구풍 모자를 쓰는 것도 많았다. 1950년대 사진만 봐도 플랫 캡을 터키인 남성들이 바깥에서 많이 쓰고 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