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야누스

 



[image]
'''휘'''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Marcus Ulpius Traianus)
'''출생지'''
로마 제국, 히스파니아 속주, 이탈리'''카'''[1]
'''생몰년도'''
53년 9월 18일 ~ 117년 8월 9일
'''재위 기간'''
98년 1월 27일 ~ 117년 8월 9일
1. 소개
2.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
3. 즉위 이전
4. 즉위 이후
5. 성격 및 기행
6. 기타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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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의 황제 (Optimus Princeps)'''[2]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황제'''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이며 '''최초의 속주 출신 로마 황제'''다. 로마인들이 미덕으로 여긴 '실질강건'을 완벽하게 보여준 황제.
정식 명칭은 '''카이사르 디비 네르바이 필리우스 네르바 트라야누스(Caesar Divi Nervae Filius Nerva Traianus)'''

2.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


트라야누스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는 평범한 속주민이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라야누스는 속주민도 아니었고 평범한 신분도 아니었다.
트라야누스가 태어나고 자란 이탈리'''카'''는 서기 전 2세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건설한 식민도시로 히스파니아 최초의 로마인 식민도시였으며, 그의 선조는 이탈리아 태생의 로마 시민권자고 모계 역시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로마시민권자였다. 이전의 내용은 모계가 속주민 출신이라 되어있는데 그렇지 않다. 트라야누스 이모가 티투스 황제의 두번째 아내이다....
그의 아버지는 집정관과 시리아 총독을 역임한 적이 있었으며 트라야누스 가문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귀족 칭호를 부여받았던 가문이었다. 결론적으로 트라야누스의 출신성분이 일개 평민이었던 것은 아니다.[3][4]
트라야누스는 출신부터 로마의 상층부에 들어가 있었던 셈이다. 어머니도 낮은 계급은 아니고 평민 중에 명문가 출신이었다. 어머니의 자매인 마르시아 퍼니리아는 티투스 황제의 두 번째 아내였다. 애초부터 범상치 않은 가문이랑 엮여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인 평민으로 황제로 올랐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사실이긴 하지만 로마에서는 평민(Plebs)도 상당히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여유가 있을 수 있는 계층이었다. 애초에 로마의 황제는 특권을 가진 시민이었으며 그 특권을 전 황제에게 정당하게 상속받고 원로원에서 크게 태클걸지 않는 이상, 이론상 모든 로마 시민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다만 이전까지의 황제는 로마의 명문 귀족, 적어도 최소한 이탈리아 출신들이 독점해 왔다. 속주 출신인 로마인은 출세에 한계가 있었다. 이 점에서 트라야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들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의의가 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절 활약한 뛰어난 인물들은 대부분 속주 출신 로마 시민권자들이었다. 속주 출신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면서 이들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커졌고,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이들의 것이었다. 속주 출신의 평범한 시민이 입신양명해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는 '성공 신화'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물론 모든 제도엔 명암이 있기에, 군인 황제 시대에는 과거라면 황제 자리는 아예 꿈도 못꿨을 속주 출신 장병들이 너도나도 황제를 노리게 되지만, 그건 이 항목에서 다룰 문제는 아니니 생략.[5]

3. 즉위 이전


본명은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고대 라틴어로는 MARCVS VLPIVS TRAIANVS)다. 속주 히스파니아[6]의 도시 이탈리카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년도는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대략 서기 53년생인 듯 하다.
하지만 트라야누스 가문이 로마 중앙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지방 소도시의 유력 가문이긴 했으나 중앙 정계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가문이었다. 트라야누스 아버지 대에 이르러 트라야누스라는 이름이 중앙 정계에 처음 나타나게 되는데, 베스파시아누스가 트라야누스의 아버지에게 귀족 칭호를 부여했던 것이다.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직속 부하였는데, 네로 사후 혼란기의 로마를 수습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따라 전공을 세웠다.[7] 베스파시아누스 황제[8]는 권력 기반을 확대하고, 유능한 인재를 선발한다는 차원에서 속주 출신 로마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했는데,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도 그런 정책에 힘입어 귀족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는 이후 집정관 직과 시리아 총독직[9]을 거쳤다. 트라야누스 역시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중앙 정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여러 차례의 군 복무를 거쳐[10] 서기 89년 히스파니아에서 제7군단 사령관을 맡는다. 이 해에 라인 강 연안에서 상(上)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이 당시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에게 반란을 일으키는데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트라야누스에게 진압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트라야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라인 강 연안에 도착해 있을 때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고 트라야누스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경호를 맡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트라야누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고 공석이 되어버린 상(上)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에 그를 임명한다.
서기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 당한 이후 원로원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오른 네르바는 군대 내의 거부감을 사게 된다. 이는 인기가 좋았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사후 처리를 네르바가 등한시 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네르바의 일천한 군대 경력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근위대가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 네르바를 협박하여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실행범들인 궁정 관리들을 끌어내 참살했다. 추가적인 쿠데타를 우려한 네르바는 다음 해인 서기 97년 군대 내의 신망이 높던 트라야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다.[11] 트라야누스는 서기 98년 초 네르바가 사망하자 제위에 오르게 된다.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였다.

4. 즉위 이후


즉위 직후 그가 가장 우선시 한 것은 도미티아누스가 중단한 다키아 원정이었다. 그가 다키아 원정에 주력한 이유는 첫째, 도미티아누스 암살의 간접적 원인이 다키아 원정 실패에 있었다는 점. 둘째, 로마제국의 중요한 북방 경계선인 도나우 강 하류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상(上)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에 있는 상태에서 황제 등극을 통고 받았는데 원로원으로부터 황제의 권력을 넘겨받기 위해 즉각 로마로 돌아오는 대신 거의 1년 가까이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지역에 머물렀다. 그리고 서기 99년에 로마로 돌아간 뒤 서기 101년 그는 다키아 전쟁을 시작한다. 다키아 지역 주민들의 주무기인 팔크스, 롬파이아와 투척 도끼 때문에 제법 피해를 본 로마군은 정강이 받이와 검을 드는 오른팔을 보호하는 찰갑, 안면 가리개를 도입하는 식의 중무장화를 통해 다키아를 정복하기 시작한다.
2차례의 원정(101~102, 105~106)에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완전 정복했으며 새로 다키아 속주를 창설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유언한 제국 확장 정책의 금지 원칙을 어긴 첫 번째이자 마지막 사례가 된다. 또한 다키아 원정 과정에서 이전의 로마 정책과는 달리 피정복민들에 대한 잔인하고 단호한 말살정책을 펴 다키아 지역을 초토화시켜버렸다.
다키아 원정 이후 줄어든 군비, 다키아의 풍부한 금, 은광으로 인한 예산의 증가, 그리고 다키아로부터 철저히 약탈해온 풍부한 전리품 등으로 인해 엄청난 추가예산이 확보되자[12] 트라야누스는 속주들과 이탈리아, 로마 등지에서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실시하고 장려했다. 도로·교량·수로의 건설, 황무지 개간, 항구 건물의 건축이 이루어졌고 오늘날 스페인, 북아프리카, 발칸 반도, 이탈리아 등지에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로마는 트라야누스의 토목공사로 풍요롭게 변모했다. 이때의 트라야누스의 건축 목록 중 예로 들 수 있는 건 로마 시내의 트라야누스 포룸[13] 도나우 강 중반에 있는 트라야누스 다리[14] 정도를 들 수 있다.
한편 서기 110년 트라야누스는 기독교도들의 행방을 굳이 밝히지도 캐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종교 조직으로서의 기독교는 탄압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공공연하게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는 개인의 행동만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당시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고 트라야누스 재위 기간에는 기독교 교세가 약했으나 콘스탄티누스 이전까지 황제들은 로마 제국의 국가 제례를 거부하던 기독교를 사회 불안요소로 보았기에 이전에는 탄압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 연간에도 기독교인임이 드러나면 처벌을 받았다. 대표적인 순교자가 110년경 처형당한 안티오키아 주교 성 이냐시오(이그나티우스)를 들 수 있다.
어느 정도 행정적 정비와 개혁이 이루어지자 트라야누스는 자신의 장기인 군사 원정을 다시 계획하고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였다. 로마는 네로 황제 이후로 아르메니아의 왕 자리에 파르티아의 뜻에 맞는 인사를 앉히고 이를 로마가 승인하는 형태로 양보해서 파르티아와의 관계를 봉합하고 있었는데, 서기 110년 파르티아 왕국은 트라야누스의 의도를 눈치채고 로마에 우호적인 아르메니아의 왕을 폐위시켰다. 그러자 트라야누스는 서기 113년에서 114년 사이에 직접 동방에 출정했다. 그는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합병하고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점령했다. 크테시폰의 점령 이후 그는 페르시아 만에 당도하게 되는데, 이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유럽 대륙의 군주로서 정복 활동을 통해 가장 동쪽으로 먼 곳에 도달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나바테아 왕국[15]을 굴복시켜 아라비아의 속주로 편입시킨다.
하지만 눈부신 군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다키아 원정 때의 초토화된 다키아 사회를 생각한 파르티아 군소 영주들의 게릴라 활동과 보급선의 장기화, 보급기지였던 안티오크의 지진등으로 말미암아 파르티아 전쟁은 점차 소득은 없고 비용만 많아지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거기에 유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16] 트라야누스는 점차 파르티아 전쟁에 대한 실망감이 커지게 된다. 거기에 건강 악화로 인해 결국 로마로의 귀환을 결정한다. 하지만 귀환 도중 소아시아 지방의 작은 섬 셀레누스에서 향년 64세로 죽음을 맞았고 관례에 따라 신격화되었다. 죽기 직전에 그는 5촌 조카이자 시리아 속주 총독이었던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하여 후임 황제가 되게끔 했는데, 이를 두고 하드리아누스 재위 초반에 논란이 있었다.

5. 성격 및 기행


그는 제국의 영역을 최대로 넓히는 군사적 업적을 이뤘을 뿐 아니라 건실한 내치로 제국의 번영을 이끈 전성기를 연 현제로 평가받지만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너무 심심한 그의 성격에 있었는데 천성이 군인이었던지라 별다른 성격상의 특징점을 보여주지 않았다. 화려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전공을 뽐내는 것에도 서툴렀다. 이를테면 '홍보'에 약했던 셈이다. 실질강건이 그의 성격을 지배하는 중대한 요소였을 것이다.
반면 그가 지은 유명한 건축물들은 대부분 웅장한 크기를 자랑한다. 사실 트라야누스의 정복 군주로서의 성격을 보면 통큰 건축 공사가 꼭 그와 어울리지 않는 사업은 아니다. 게다가 그가 한 공사는 광장, 다리, 목욕탕 등으로 공공시설의 성격이 강했다. 황제 자신을 위해 한 공사는 그다지 없다.[17] 영토를 넓히는 것, 커다란 건축물이 올라가면서 나라가 강건해지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 이 둘은 모두 '실질강건'이라는 그의 성격에 딱 들어맞는 사업이다.
그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것이라고 해봐야 포도주를 스트레이트로 마셨다든지[18] 젊은 남자들을 특히 좋아했다는 건데 저녁 식사 때마다 젊은 남자들과 같이 먹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군인으로서 뭔가 이상해 보이지만 그냥 젊은이들의 싱그러움을 좋아한 것 같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서술한 내용도 딱 이러한데, 대기업 임원이 신입사원들을 늘 회식에 데려가는 것 정도로 보면 해석하면 이상하지 않다.
Optimus Princeps라는 칭호가 지고의 황제라고 번역되었는데 Optimus라는 단어는 '완벽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트라야누스를 이미 동시대의 사람들이 완벽한 황제라고 여겼다는 것. 트라야누스 때 로마의 경제는 풍요로웠고 군사적으로도 트라야누스의 지휘로 적대국을 모두 격파한 데다 성격까지 모나지 않아 로마 원로원과의 사이도 좋았다.[19] 또한 생활에서 구설수에 오른 적도 없으니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로 완벽한 황제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결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다키아 전쟁이라면 몰라도 파르티아 전쟁은 그다지 후속 결과가 좋지 못했고, 체제 개편 역량이나 장래 야만족 문제가 제국 전체의 방어선에 큰 부담을 주게 될 것이란 선견지명은 하드리아누스만 못하다.[20] 물론 하드리아누스는 확실히 성격적인 문제가 있었던 데다 자기 절제 능력이 트라야누스만 못했으나,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웬만하면 전후임 중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모든 지표에서 앞서는 건 불가능하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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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명 6에서 로마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시리즈 역사상 이전까지는 주로 카이사르가 지도자로 나오고 아우구스투스가 문명 4부터 등장했는데, 6에서 제작진이 트라야누스를 지도자로 채택했다.
  • 신곡 천국편에서는 림보도 아닌 천국에 있는 얼마 안 되는 선한 이교도 중 한 명으로, 목성천 독수리의 일부분을 맡고 있다. 원래 림보에 있었지만 누군가의 기도로 구원받고 천국에 왔다. 실제 트라야누스는 재위 당시 기독교도들을 박해하지 말라고 지시한 황제였기에 이런 대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 오늘날 스페인 세비야 근처의 도시인 산티폰세(Santiponce).[2] 다키아를 정복한 후 처음 주어진 호칭이었으나 이때는 트라야누스 스스로가 거부했다가 파르티아 전쟁을 시작한 후 받았다.[3] 물론 공화정 시대의 그 귀족과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지만... 일종의 "신흥귀족으로 받아들였다"라는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사실 제정으로 이행된 뒤 공화정 시대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귀족가문은 계속 줄어들어서 이 당시에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4] 한편으로는 흥미롭게도 로마는 '귀족' 신분도 능력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사회였다.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 귀족 칭호를 부여받은 가문들 중에는 트라야누스가 속한 울피우스 씨족 이외에 '''갈리아전쟁 때 카이사르에게 율리우스라는 씨족이름을 부여받은 갈리아의 부족장의 가문'''도 상당수였다고 한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율리우스 아그리콜라'''.[5]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적당히 늘어났던 제정 중기에는 제국 전체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능력에 의해 출세해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다. 차별받는 계층의 인력 낭비를 생각하면 로마는 인재를 가장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활용할 수 있는 구조를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6] 스페인[7] 이 점에서 네르바와 배경이 비슷하다.[8] 그 역시 이탈리아의 소도시 출신이었다. 그 점에서 그의 배경이 그다지 배타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측근이었던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더 - 다양한 출신 배경을 말해준다 - 는 유대인이었다. 속주민을 중앙 정계로 적극적으로 진출시켜 씨를 뿌렸다는 점에서, 베스파시아누스의 선견지명은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물론 어느 정도 시대의 필연적인 요청이기도 했겠지만 말이다.[9] 로마 제국 동방의 최고책임자로, 총독들의 총독이었다. 유사시 동방의 속주 총독들은 전부 시리아 총독의 명령을 받았다. 다시 말해 정말로 중용되었다.[10] 트라야누스가 몇 살때부터 군 복무를 했는지는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가 군 사령관이었고 전선의 긴장도가 높은 시리아 등지에서 복무한 것에 미루어 보아 트라야누스도 어렸을 때부터 군 생활에 익숙했을 확률은 높다. 그리고 참모진으로서 그가 시리아에 근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만큼 적어도 10년 이상의 군 복무를 했을 것이다.[11] 농담으로 네르바가 오현제에 포함된 이유는 그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골랐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트라야누스의 후계자 지명 자체가 근위대가 결정하고 실권을 뺏긴 네르바는 추인만 해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12] 이 시기 트라야누스를 가리켜 로마 제국 역사상 어느 황제보다도 풍부한 자금을 확보했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이집트라는 부유한 지역을 새로 합병한 아우구스투스를 제외하곤 대적이 불가능한 수준이었고,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에서 약탈해온 자금을 보유한 하드리아누스 황제 또한 풍부한 자금을 보유했다.[13] 현대에는 지금 정중앙의 트라야누스 원기둥을 제외하고 유적이 많이 파괴된 상태다. 무솔리니가 한 짓이 원인이다.[14] 이 다리는 당시 로마의 기술력을 상징하는 웅장한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8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이 도나우 강에 기선이 다니게 하기 위해 '''폭파했다.'''[15] 아랍인의 직계조상인 나바테아 인들이 요르단에 세운 왕국이다.[16] 이 반란을 가리켜 키토스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파르티아로 출정을 나가 있던 로마군의 후방인 키레나키아와 이집트와 키프로스와 유대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수십만 명의 로마인 민간인들과 후방에 남겨진 소규모의 로마군 수비대를 마구 학살했다. 특히 로마군에게 식량을 공급하던 곡창지대인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로마군의 식량 보급이 위태로워졌고 이 때문에 결국 트라야누스 황제는 파르티아 원정을 도중에 포기하고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이때 유대인들의 반란이 없어서 로마군의 후방과 식량 보급이 안정되었다면, 아마 트라야누스 황제는 계속 파르티아를 밀어붙였을 것이고 어쩌면 파르티아가 완전히 멸망했을 수도 있었기에, 로마인들로서는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옆의 링크를 참조 바람.#[17] 다키아 정복 기념으로 세운 트라야누스 원주는 황제 본인이 아닌 원로원이 지시한 공사다. 황제가 공사를 지시하고 겉으로는 원로원이 지시한 것처럼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가 원로원과 사이가 좋았던 몇 안 되는 황제라는 걸 생각하면 굳이 원로원과 사이가 나빠질 이런 일을 벌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18] 당시 포도주는 물에 희석해서 마시는 게 정석이었다. 당시의 포도주 원액은 말 그대로 시럽같이 걸쭉한 물건이었기 때문.[19] 트라야누스는 황제가 되어 로마에 입성했을 때 성문에서 말에서 내려 원로원 의원과 함께 걸어갔다. 또한 지고의 황제라는 칭호도 일찌감치 받았으나 그는 이 칭호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파르티아를 격파하고 나서야 받기로 하였으니 이러한 태도들은 원로원 의원들이 트라야누스에 호감을 갖도록 하였다.[20] 하드리아누스가 군사, 국경 정책에서 큰 업적을 남긴 건 사실이나 모든 걸 혼자 한 것은 아니었다. 카타프락토이의 도입은 다키아 전쟁의 후속조치 중 하나였으며(파르티아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다키아 전쟁 때 다키아 편에서 참가했던 사마르티아인들의 중장기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하드리아누스 성벽같은 경우, 이미 트라야누스가 그 근처에 나무 방벽을 세운 흔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