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토
이탈리아어 Taranto
그리스어 Τάραντας / Tarantas
영어 Taranto
라틴어 Tarentum
고대 그리스어 Τάρᾱς / Tarās
1. 개요
이탈리아 남부 타란토의 도시. 아풀리아 지방의 항구 도시이며, 타란토 만을 접하고 있다. 이탈리아 반도를 장화 모양으로 생겼다고 했을 때 발바닥의 오목한 부분이 바로 타란토 만이며, 타란토는 만의 맨 위에 위치한다. 십자군 전쟁기에 동 지중해를 누볐던 노르만 인 군웅 보에몽 1세의 영지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시에는 타란토 공습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인구 21만의 국제항이며, 아직까지도 이탈리아의 주요 해군 기지가 위치할 만큼 천혜의 항구를 자랑한다.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큰 축에 드는 도시이지만 나폴리나 팔레르모에는 많이 밀리며, 아풀리아 지방에서도 바리보다 작다.
2. 역사
2.1. 그리스 시대 (대 그리스)
도시는 기원전 706년에 스파르타 출신의 도리아계 이주민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초기 이름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 중 한명의 이름을 본뜬 타라스 (Taras)였다. 도시는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문명권인 '''마그나 그라키아''' 중에서 맏형 역할을 하였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타란토는 본래 왕정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472년, 타란토는 인근의 폴리스인 레기온과 연합하여 내륙의 원주민인 야피기아 인들과 싸웠으나 패하였고 1만여 명의 그리스 인 포로들이 붙잡혀 참수되었다고 한다. 이에 기원전 466년에 2차 원정이 이루어졌으나 저번보다 더 크게 패하였고 너무도 많은 귀족들이 전사하여 민회가 득세, 왕정에서 민주정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헬레니즘 시기 여러 그리스 폴리스들이 기용한 경무장 투창 기병대 또는 그 전술을 뜻하는 타란틴 기병대라는 말이 폴리스 타란토에서 유래했다. 원래 타란토 군의 기병대에서 유래했으나 여러 헬레니즘 국가들로 퍼져나가면서 타란토와의 지리적 관련성은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2.1.1. 민주정과 전성기
기원전 432년에 타란토는 기존의 대립 도시이던 투릴과 화해, 공동으로 헤라클레아를 세웠다. 그리고 재빠르게 집어삼킨건 덤. 한편, 그해에 발발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타란토는 신중한 입장을 취하여 모국인 스파르타[1] 편에 서서 아테네 함대의 정박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시칠리아에서 아테네가 대패하며 추가 기울자 기원전 415년에 스파르타에게 함대를 보내주어 승전국의 반열에 올랐다. 스파르타 패권은 기원전 371년의 레욱트라 전투로 무너졌지만 그에 관계없이 타란토는 번영하였다.
타란토의 '페리클레스'로 평가받는 아르키테스의 집권기간 동안 타란토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한 육군과 해군을 소유하였고 지중해 각지의 물산을 그리스 본국과 거래하며 번영하였다. 남부 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한 타란토를 경계하기 위해 반도 중부의 에트루리아 인들과 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동맹을 맺을 정도였다. (기원전 367년) 하지만 유능했던 아르키테스가 기원전 347년에 사망한 이후로는 기나긴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2.1.2. 용병에 대한 의존
타란토의 안위를 가장 위협하던 세력은 다름 아닌 북쪽의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을 막기 위해서는 막강한 해군이 아닌 육군이 필요했는데, 시민들은 무역에 치중하여 점차 병사 자원이 떨어졌고, 결국 타란토는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끌어들인 용병은 모국인 스파르타였다. 기원전 343년, 타란토는 스파르타에 용병을 제안했고 이듬해에 아르키다무스 3세의 군대가 도착하여 루카니아 인들과 싸웠으나 패하고 국왕 본인마저 전사하였다. (기원전 338년)
기원전 333년, 타란토 인들은 아드리아 해 건너편 에피로스의 국왕이던 알렉산드로스 1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삼촌이자 피로스 대왕의 숙부)를 다음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하지만 그의 군대 역시 삼니움 족에게 패하였고 알렉산드로스는 코센차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타란토는 결국 이탈리아 인들과 평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320년)
기원전 304년, 루카니아 인들은 타란토를 공격하였고 이에 시민들은 바다 건너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 국왕인 아가토클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는 칼라브리아 일대를 석권하였으나 곧 회군하였다. 다음으로 용병이 된 스파르타의 국왕 클레오메네스 (클레오메네스 전쟁의 그 왕은 아니다)는 기원전 303 ~ 302년간 타란토 인들과 함께 싸운 후 회군하였다. 위의 두 원정으로 타란토의 북쪽 국경은 안정된 듯했다.
2.1.3. 로마와의 대립 (피로스 전쟁)
기원전 290년, 로마는 기나긴 전쟁 끝에 삼니움족을 굴복시켰고,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폴리스들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레기온, 로크리, 크로토네 등이 로마에 자발적으로 보호를 요청하였고 기원전 282년에는 타란토의 지배 하에 있던 타란토 만의 도시 투릴이 루카니아인의 위협을 덜고자 로마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루키우스 발레리우스가 이끄는 로마 함대가 타란토 만을 가로질러 투릴에 정박하였고, 타란토인들은 마그나 그라키아의 패권을 행사하던 자신들에 대한 도전이라 여겼다. 타란토 함대는 즉각 출동하여 10척 중 4척의 로마 함선을 침몰시켰고 5척을 나포하였다. 이후 타란토 함대는 투릴로 진격하여 로마군과 그에 협조하던 귀족들을 추방하였다. (구 기득권 층의 귀족들은 민주정을 주도하는 민중당에 맞서 친로마적 태도를 보였다.)
이후, 로마는 집정관 포스투미우스을 포함한 사절단을 파견하였으나 타란토 대표들에게 모욕을 당한 후 돌아왔고, 이에 로마는 타란토에 선전포고 하였다. (기원전 281년) 그러자 타란토는 명성이 자자하던 명장인 에페이로스 국왕 피로스 1세에게 지원을 부탁하였다. 피로스군이 도착하기 전,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가 이끄는 로마군은 타란토를 함락, 약탈하였고 타란토-삼니움 연합군도 로마군에 패하였다. 이후 타란토는 로마와 휴전 협상을 하였는데, 그 사이에 3천 명의 에페이로스 선발대가 타란토에 입항하였고 이에 로마 군은 후퇴하였는데, 중간에 그리스 전함들의 공격으로 손실을 입었다.
피로스 1세는 타란토 해군이 자신의 코르키라 (코르푸 섬) 정복에 도움을 주었기에 타란토를 돕기로 하였다. 그는 이후 시칠리아, 카르타고까지 정벌하여 마케도니아를 통일할 군자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그는 당시 마케도니아 왕이던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팔랑크스를,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1세와 테살리아에서 기회를 노리던 안티고노스 2세에게 해군과 자금을 빌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9천 명의 병력과 5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보낼 것을 약속하였다. 그 병력은 피로스의 원정 기간에 에페이로스를 지킬 것이다. 기원전 280년 봄, 피로스는 2만 명의 팔랑크스 보병대와 3천 기병대, 2천 궁병, 250명의 투석병, 20마리의 코끼리를 대동하고 이탈리아에 상륙하였다. 피로스 전쟁(BC 280 - 275년)의 시작이었다.
피로스의 상륙 이후 로마군은 8만 병력 중 4만 명을 남하시켰고 피로스의 3만 대군과 타란토에서 서쪽 50여km 떨어진 헤라클레아에서 싸웠다. 비록 피로스는 승리하였지만 4천 명이 전사하여 (로마는 7천 전사) 이전까지 과소평가하던 로마군에게 놀라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피로스는 카푸아와 베네벤툼 등 로마의 동맹시들을 포섭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아풀리아로 돌아왔다. 기원전 279년, 아스쿨룸 전투에서 피로스는 재차 승리하였으나 3500명의 병사를 잃었다. (로마군은 6천 전사) 베테랑 정예병들이 죽는 것을 보고 회의감을 느낀 피로스는 시라쿠사, 아그리겐툼 등 시칠리아의 도시들이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도움을 요청하자 타란토에 수비대를 남기고 시칠리아로 가서 싸웠다. (기원전 278 ~ 276년, 277년의 에릭스 전투)
기원전 276년, 타란토인들은 피로스를 재차 소환하였고 이듬해인 기원전 275년에 베네벤툼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그는 로마군과 같은 피해를 보았고,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사수 켈트족을 격퇴하고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안티고노스 2세가 원군 파병을 거절하자 피로스는 더이상 전쟁을 치를 수 없다고 판단, 수비대를 남기고 에페이로스로 돌아갔다. 이후 피로스는 아오스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을 격파하고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기원전 272년, 그는 스파르타에서 쫓겨난 왕 클레오메네스의 복위를 도와 스파르타를 포위하였으나 저항이 심하여 애를 먹었고, 퇴각 중 장남 프톨레마이오스를 잃었다. 상심한 그는 아르고스의 내전에 개입, 시가전을 벌이다가 아르고스인들의 저항이 심해 퇴각하려고 했는데 전령이 삼남 헬레누스에게 명령을 잘못 전해 피로스는 퇴각하고 헬레누스는 진군하면서 부대가 뒤엉키자 혼란속에 헬레누스와 함께 죽었다. 한 마케도니아 병사가 그를 효수하였고 시신은 복위한 안티고노스 2세에 의해 화장되었다. 피로스의 사망 소식에 타란토의 그리스 병사들은 로마에 항복하였다. 도시에 입성한 로마군은 성벽을 허물고 시민 3만 명을 노예, 예술품들을 전리품으로 로마에 가져갔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빛나던 항구 도시의 몰락이었다.
2.2. 로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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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토 점령 이후 로마는 아피아 가도를 타란토까지 연장시켰지만 로마의 동방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한 것은 유서깊은 그리스 개척지 타란토가 아닌 로마인들이 직접 세운 식민도시인 브린디시였다. 흰 선 (가도)가 움푹 파인 타란토 만과 만나는 곳이 타렌툼, 아드리아 해와 만나는 끝지점이 바로 브린디시. 다만 로마 시대에도 타란토는 좋은 기후로 유명하였고 귀족들이 별장을 두기 즐겨하였다.
2차 포에니 전쟁 시에 칸나이 전투 (기원전 216년)로 전세가 카르타고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로마는 타란토가 한니발에 항복할 것이 두려워졌다. 기원전 212년에는 타란토의 친카르타고 시민들이 붙잡혀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끔살 (높은 곳에서 바위 위로 떨어뜨렸다...) 당하였고 타란토 주둔군도 증원되었지만, 결국 그해 말에 한니발은 도시에 입성하였다. 다만 아크로폴리스 (시타델)의 로마군은 저항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209년, 전세가 로마 측에 유리해지자 카르타고의 동맹군이었던 한 이탈리아 부대가 로마 군에게 항복하였다. 로마는 재차 타란토 시민 3만 명을 노예로 팔아버렸고 니케 상을 포함한 귀중품을 가져갔다.
기원전 122년, 로마인들은 타란토 인근에 넵투니아 라는 식민 도시를 만들었는데, 결국 그리스 도시인 타란토의 시가지에 흡수되었다. 동맹시 전쟁 이후인 기원전 89년에 타란토는 시민권이 주어진 무니키피움이 되었다. 기원전 37년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만나 2차 삼두정치를 기원전 33년까지 연장한다는 타렌툼 협약을 맺었다. 한편, 청동판에 세겨진 타렌툼의 시 헌장이 1894년에 발굴되었다.[2] 2세기부터 타란토의 인구는 줄기 시작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퇴역 군인들의 은퇴를 장려하여 도시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3. 동로마 vs 랑고바르드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에 따라 타렌툼은 서로마 제국에 속하였으나 5세기 초에 서고트 족에게 약탈을 당하였고 오도아케르 왕국을 거쳐 동고트 왕국의 영토가 되어서야 안정을 찾았다. 540년, 고트 전쟁에서 타란토는 동로마 제국에게 수복되었다. 6세기 말부터 이탈리아로 침투한 랑고바르드 족은 7세기 초에 벌써 남부 이탈리아에 도달하였다. 다만 그들은 왕권이 미약하였고 중남부에 세워진 베네벤토 공국은 사실산 독립 왕국이었다. 타란토는 662년에 베네벤토의 랑고바르드 군에게 점령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동로마 제국이 아니었다. 아랍 무슬림 세력이 1차 피트나로 분열되어 싸우며 동방이 안정되자 콘스탄스 2세는 이탈리아 문제에 대응하기로 하였다. 660년, 그는 궁정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로 옮겨 사실상 천도하였고 베네벤토의 군주 그리모알드 1세가 프랑크 왕국의 내전에 개입해 있는 틈을 타서 타란토에 상륙, 도시를 수복하였다. (663년) 동로마 군대는 랑고바르드 군을 격파하고 아풀리아 지방을 회복하였다. (다만 이후에 카푸아와 살레르노에서 패하여 나폴리 일대의 수복은 실패한다. 이후 콘스탄스는 로마를 방문한다. 콘스탄스 2세 참고)
황제가 시라쿠사로 돌아가자 랑고바르드 인들은 재차 남부 이탈리아를 노렸다. 그리모알드는 아풀리아 북부를 정복하였고 그의 아들이자 다음 공작인 로말두스는 686년에 기어코 브린디시와 타란토를 함락하였다. 8세기에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사라센 해적들이 타란토를 포함한 남부 이탈리아를 약탈하였다. 이는 11세기 초까지 지속되었고, 9세기에는 점령을 당하기까지 한다.
2.4. 아랍 vs 동로마
롬바르드 세력은 8세기 후반에 프랑크 왕국의 침공을 받아 약화되었고, 9세기 초반부터는 영주들끼리 내전이 벌어졌다. 840년에는 타란토에 갇혀있던 베네벤토 공국의 후계자가 탈출하여, 아말피 공화국의 도움으로 베네벤토를 점령했는데, 같은 해에 아랍 무슬림 군대가 도시에 입성하였다. 동로마 황제 테오필로스는 배네치아 함대 60여 척을 파견하여 해적들을 몰아내게 하였지만 한 번의 승리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40년간 타란토는 사라센 해적의 무역 거점이자 이탈리아 연안의 약탈에 대한 전초 기지가 되었다. 850년, 바리와 타란토에서 출항한 해적 함대는 칼라브리아, 캄파니아 (나폴리) 지방을 유린하여 동로마 제국에게 충격을 주었다. 854년에는 압바스 이븐 파이드가 이끈 해적단이 타란토에서 출항하여 랑고바르드 영주가 지배하던 살레르노를 습격하였다. 871년과 875년에도 동로마령 이탈리아는 공격을 받았다. 이에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를 이끌던 바실리우스 1세는 아랍인들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어 제국 서부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880년, 프로코피오스와 레오 아포스티페스가 이끄는 육군, 나사르가 이끄는 해군은 아랍인들로부터 타란토를 되찾았다. 다시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타란토 인 들은 충격을 받았는데, 황제의 명으로 주민 중 비그리스계 (라틴/랑고바르드) 인들이 노예가 되거나 추방되고 그리스와 소아시아 출신의 이주민들로 빈자리가 채워진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도시의 충성심과 수비력을 강화한 제국은 타란토를 랑고바르드 테마의 치소로 삼았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882년에 공작이 사라센과 내통하여 도시는 다시 아랍 지배 하에 들어갔다.
다만 몇년 못 가 도시는 동로마 제국에게 회복된 듯하다.[3] 하지만 927년, 슬라브 인으로서 아랍 해적의 우두머리가 된 사비르가 이끄는 사라센 함대는 다시 타란토를 점령하였다. 90년간 벌써 3번째로 아랍인이 도시를 점령한 것이다. 공성전 이후로도 살이남은 시민들은 전부 마그레브의 노예 시장으로 보내졌다. 그러고 40년이 지난 967년, 동로마 황제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는 남부 이탈리아에 강력한 해군 기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폐허로 방치되던 타란토에 90년간 벌써 3번째로 동로마 군대가 진주하였고 항구와 시가지가 재건되었다. 하지만 977년에 시칠리아 토후국의 에미르 아불 카심[4] 이 이끄는 선단이 도시를 접수하며 타란토는 '''4번째로 아랍인에게 점령'''되었다.
카심은 도시를 약탈하였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그리스 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 과정에서 시가지 일부가 전소되었다. 982년 7월, 동로마 측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2세는 친히 남하하여 베네벤토 공국의 랑고바르드 군주인 란둘프 4세와 사라센 소탕에 나섰다. 크로토네 인근에서 벌어진 스틸로 (콜로나 곶) 전투에서 독일 중기병대는 아랍 보병대를 무너뜨리고 카심을 전사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이에 오히려 분발한 무슬림 군은 매복시켜 놓은 5천의 기병대의 도움으로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며 승리하였다. 란둘프 공작과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 등 많은 고관들을 포함한 4천 명의 독일군이 전사하였다. 황제 본인마저 헤엄쳐 도망갔으며, 동로마 선박에게 구조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는 멀리 잉글랜드까지 속보로 전해질 만큼 파격적이었다고 한다.
[1] 민주정이 되었지만 여전히 양 폴리스 간의 관계는 좋았다고.[2] 현재 나폴리의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3] 연도 미상[4] 947년에 파티마 왕조는 섬의 반란 진압을 위해 알 하산 이븐 알리 알 칼비를 파견하였는데, 반란 진압 이후 그는 사실상 독립하였다. (칼브 왕조, 948-1053년) 954년에 그가 사망하자 장남인 아흐마드 이븐 알 하산 알 칼비가 이어 받았는데, 그는 969년에 북아프리카 반란 진압을 위해 파티마 조에게 불려갔다. 이후 아흐마드의 해방 노예인 야이스가 통치하다가 970년에 아흐마드의 동생이자 하산의 차남인 아불 카심이 시칠리아의 에미르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