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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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연방공화국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주 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 네덜란드, 벨기에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4] , 세 나라의 국경이 만나는 삼합점 (Dreiländerecke)이 시 경계에 있다. 독일 내 공과 대학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아헨공대(RWTH Aachen University), 그외 여러 과학기술 분야 연구소가 위치해 있어 학계에서는 이름을 알리고 있다.
2. 역사
아헨의 역사는 기원 전 약 2,500~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현재 시내의 북서쪽에 위치한 루스베르크 (Lousberg)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었고, 기원후 약 1세기까지 켈트족의 터전이었다.[5] 그 후 근처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인들이 점령하였는데, 이 지역에 온천이 나오는 터라 로마인들은 이곳을 군용 온천 마을로 조성하였다. 아헨 중앙역 근처에 있는 부어트샤이트(Burtscheid) 지역은 이 시기부터 사용된 로마식 온천이 있는 곳이다. 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에도 꾸준히 온천이 성행하였으며, 시내 중앙에는 이 동네에서 온천을 즐겼던 수많은 귀족 및 역사적 위인들의 이름이 벽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6]
로마 제국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이곳은 프랑크족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로마 제국의 멸망 후 온전히 프랑크 왕국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서기 768년에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가 아헨을 자신의 거주지로 삼았으며, 814년에 사망할 때까지 현재도 남아있는 아헨 대성당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아헨은 당시 프랑크 왕국의 수도 역할을 하였으며, 카롤루스 대제 역시 아헨 대성당에 묻혔다. 936년에 오토 1세가 아헨 대성당에서 독일왕 대관식을 치룬 것을 시작으로 그 후 약 600년 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아헨 돔에서 대관식을 치뤘으며 아헨은 명실공히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하였다.
서기 1165년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1세는 수도 아헨에 장이 설 수 있는 권리와 더불어 조폐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1248년에는 약 6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네덜란드의 윌리엄 2세에 의해 점령되었고 그 역시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즉위 후 1257년부터 약 100년간에 걸쳐 도시의 외성벽이 축조됐으며, 이 벽은 19세기까지 도시의 영역을 결정하였다.
한때 신성 로마 제국의 대관식이 열리는 도시로서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던 아헨이었지만, 16세기가 지나면서 서서히 쇠락해 간다. 1531년에 아헨에서의 마지막 대관식 (페르디난트 1세)이 열렸으며, 그 후 제국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656년에는 아헨 대화재가 나면서 도시의 대부분을 불태웠고, 1794년부터 20년간은 프랑스 혁명군의 통치하에 루르 지방의 중심지로 기능했으나 동시에 수많은 문화재가 프랑스로 반출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후 1815년의 빈 협약에 의해 아헨은 프로이센으로 넘어갔으며 1830년에는 산업혁명의 여파로 인해 아헨의 대표 산업 중 하나였던 직물산업에서 실업자가 증가하고 근무 여건이 악화되자 파업이 일어났으며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세계대전 시기에는 여타 독일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수난을 겪었는데, 1차 세계대전 후에는 1929년까지 벨기에의 점령하에 넘어갔으며, 당시 넘어갔던 지역의 일부 (Eupen 등 현재 벨기에의 독일어 사용 지역)는 여전히 벨기에의 땅으로 남아있다. 1933년에는 시의회가 강제해산당하고 시의 행정과 의회는 모조리 나치당에 의해 점거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도 독일의 서쪽 끝에 위치한 중요한 지리적 특성 상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1941년 7월부터 시작된 연합군의 공습에 의해 도시는 철저히 파괴됐으며 1944년 10월 21일 미국군에 의해서 나치의 손아귀로부터 해방되었다. 이때 전체 건물의 65% 정도가 파괴되었으며, 1897년에 부어트샤이드와의 합병으로 인해 13만 명에 육박하던 인구는 겨우 11,139명만 남아있었다. 종전 후에는 잠시 영국군의 치하에 있다가 1946년에 다시 벨기에군의 점령 하에 있었다. 이때 피난 갔던 인구가 복귀하면서 다시 인구는 10만 명 정도에 육박하게 된다. 1972년에는 주변의 지역들과의 통합을 통해 현재의 인구와 비슷한 24만 명 정도를 기록하게 된다. 1978년에는 아헨 대성당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이는 처음으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독일의 건물이 되었다. 왠지 모르지만 아헨 대성당 내에서 사진촬영을 하려면 직원들이 가로막으며, 이들에게 1유로를 지불하면 놀이동산 자유이용권과 흡사한 테이프를 팔에 감아주며, 이 테이프를 감은 인원에 한해서만 사진촬영이 허가된다. 당연하지만 후레쉬는 꺼야한다.
3. 문화
독일 3대 공과대학 중 하나인 아헨공과대학교(RWTH Aachen University)*가 이곳에 위치해있다. 아헨공대는 1865년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에 의해 설립된 곳으로, 아헨 인구 25만 중 1/5에 달하는 약 5만 명이 연관되어있을 정도로 지역 주민들의 삶에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말 그대로 대학 그 자체가 도시인 셈. 기계공학과 컴퓨터 공학 분야에서 독일 내 톱을 달리고 있으며, 학생과 연구생들을 위한 식당, 문화공간, 연구실 등이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다. 오죽하면 현지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아헨 = 공돌이들의 세상'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 재학생의 15% 내외가 외국인일 정도로 수많은 해외 유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으며, 덕분에 아헨은 대학도시이자 온천으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졸업 후 뒤셀도르프, 쾰른, 프랑크푸르트 등 주변 대도시로 많이 취업을 하나, 아헨 주변에도 과학기술 연구 산업체와 회사도 많아 이곳에서 대학을 나와 그대로 눌러앉는 경우도 있다. 또한 쾰른 국립 음악-무용대학(Hochschule für Musik und Tanz Köln)의 아헨 캠퍼스도 있다. 이 학교의 학사 과정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수업 때문에 아헨과 쾰른과 부퍼탈 캠퍼스를 왔다갔다거려야 한다...
다른 대도시들과는 달리 이 도시를 연고로 한 축구팀들이 전부 하부리그 팀에 있다. 알레마니아 아헨이 제일 큰 클럽인데도 현재 4부 지역리그인 레기오날리가 베스트에 소속되어있다.
4. 여담
아헨은 문명의 시대 2에서 코드로 따지면 aac로 맨 첫번째이다. 정확히는 자유제국도시 시절 아헨.
1992년 루르몬트 지진당시 유서깊은 건축물이 무너지는 피해가 있었다.
문명 6 독일 문명의 수도로 나오는 도시다.
[1] '아흔'에 가까운 발음이다.[2] 엑스라샤펠[3] 아컨[4] 차로 15분(!) 정도면 네덜란드 국경을 넘을 수 있다. 장을 보러 혹은 외식을 하러 국경을 넘는 것이 일상일 정도라고. 거기다 아헨 중앙역에는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로 가는 arriva 열차가 자주 다닌다.[5] 현재도 아헨과 그 주변의 일부 지명은 고대 켈트식 지명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6] 유럽 중세 시대 귀족들의 위생 관념에 의해, 이들 중 일부는 아헨에서의 목욕이 거의 생애 첫(!) 목욕이기도 했다는 도시 전설이 내려오지만 웹상에 만연한 중세유럽 폄하에 기반한 헛소리다. 중세 유럽인들은 고대 로마인들과 별 다를것 없이 목욕을 좋아했다는 게 최근 역사학계의 연구결과다. 근거없는 뇌피셜 말고 전문 중세사학자의 관련 강의를 한번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bTh2O5jYmF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