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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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출생'''
1503년 3월 10일
스페인 카스티야 알칼라 데 에나레스
'''사망'''
1564년 7월 25일 (61세)
오스트리아
'''재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1558년 2월 24일 ~ 1564년 7월 25일
'''배우자'''
보헤미아헝가리의 안나 (1521년 결혼 / 1547년 사망)
'''자녀'''
엘리자베트, 막시밀리안 2세, 안나, 페르디난트 2세, 마리아, 막달레나, 카타리나, 엘레오노라, 마르가레테, 바르바라, 카를 2세, 헬레나, 요하나
'''아버지'''
펠리페 1세
'''어머니'''
후아나
'''형제'''
레오노르, 카를 5세, 이사벨, 마리아, 카탈리나
1. 개요
2. 소개
3. 유년시절
4. 로마왕(독일왕) - 신성 로마 제국 대리 통치
7. 황제 즉위
8. 가족
8.1. 아내,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안나(Anna von Böhmen und Ungarn)[1]
8.2. 자녀들


1. 개요


신성 로마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왕, 헝가리 왕, 크로아티아 왕.
합스부르크 황실의 후계자 필리프 대공(펠리페 1세)과 스페인의 카스티야 연합 왕국후아나 여왕의 차남이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친동생이다. 카를 5세의 뒤를 이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는데, 사실 카를 5세 재위 기간 동안부터 독일 지역은 페르디난트 1세가 황제를 대리하여 통치하였다.
페르디난트 1세는 근세 이후 1차 세계대전 때까지 중부 유럽을 호령한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그의 재위 기간 중 오스트리아 동방의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가 합스부르크 가에 병합되었다. 이로서 스페인계 합스부르크가 떨어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중앙 유럽과 신성 로마 제국에서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황제직을 세습하게 되었다.
친형인 희대의 금수저 카를 5세에 크게 가려 존재감이 없지만, 사실 근대 유럽 판도 형성에 형 못지 않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특히 형의 실정으로 분열 위기에 처한 신성 로마 제국합스부르크 가문을 잘 추스려 재건하고 유지한 것만 해도 잘 드러나지 않는 그의 커다란 업적이다.

2. 소개


유럽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인 카를 5세에 가려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황제다. 특히 페르디난트 1세의 치적의 대부분이 기나긴 세월 동안 그가 황제의 대리인 또는 독일왕으로 있던 시절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형 카를 5세의 업적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빈 포위를 비롯하여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와의 전쟁은 카를 5세가 아닌 거의 전적으로 페르디난트 1세에 의해 수행되었다. 카를 5세는 1530년 빈 포위 당시 볼로냐로 황제 대관식을 하러 가던 도중 돌아가봤자 늦는다며 가던 길을 계속 가버렸고, 상황이 종료되고서야 지원병력을 보내 준 것을 제외하면 이쪽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페르디난트는 아내 안나의 가문이 보유한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를 물려받았는데[2], 카를 5세가 이 영토를 획득한 것으로 서술한 경우도 적지 않다.
심지어 독일에서 종교 전쟁을 종식시킨 파사우 조약(1552)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는 카를 5세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페르디난트 1세의 결단과 의지로 이루어낸 업적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많은 서적은 카를 5세의 업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파사우 조약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최종적으로 황제 카를 5세의 서명으로 체결되기 때문이다. 사실 카를 5세 본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사탄을 따르는 신교도들와 타협할 뜻이 전혀 없었고, 신교도라면 마지막 1인까지 지구상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기에 파사우 조약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명백히 반대했지만, 구교파와 신교파 제후들 모두 지긋지긋한 종교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루는데 뜻을 모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명을 했던 것이다. 파사우 조약으로 황제로서의 권력을 사실상 상실한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자 극도의 분노감과 무력감을 표출한 후 몇개월 후에 자진 퇴위하고 수도원에 은거하고 만다.
모든 것을 다 가진 형 카를 5세의 존재로 인해 역사 속에서 잊혀진 존재가 될 뻔 했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과 상황을 최대한 잘 활용하는 능력, 타고난 친화력과 유화적인 성격을 이용한 원만한 통치술과 인맥 관리 등으로 마침내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형이 죽을 때까지 거의 평생을 철저히 2인자로서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았는데, 이후 신성로마제국 제위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권은 카를 5세의 자손이 아닌 페르디난트의 자손에게 대대로 전해지게 되었으니 어찌보면 드러나지 않은 역사의 진정한 승리자라 할 수 있다. 성공한 2인자로서의 전형이라 할만한 인물이다.
페르디난트는 금수저 형과 대비되는 면이 적지 않았는데, 형 카를 5세는 자신이 신의 축복을 받아 이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 여기고 스스로 자신감과 오만함이 가득했다. 반면 페르디난트는 형과 달리 겸손하며 훨씬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다. 처음에는 본의 아니게 형의 스페인 왕위를 위협하는 강력한 정적으로서 형의 강한 의심과 견제를 받는 처지였으나 이에 슬기롭게 대처하여 형의 신뢰를 받는데 성공했다.
이후 황제인 형의 대리자로서 신성로마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처음에는 완전한 스페인 사람이었지만, 독일을 다스리게 된 이후 빠른 속도로 독일어와 독일 문화를 습득하고 받아들였다. 카를 5세가 스페인 왕이 되고 나서 남은 평생을 스페인 경영에 몰두했지만 죽을 때까지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는 대비된다.[3]
독일을 통치하면서 그는 황제의 대리자로서 권위를 내세우기 보다 독일 내에서 독자적인 실권을 가진 제후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형의 의중을 따라 제국을 다스렸고 마침내 형에 의해 제국의 후계자로 지명받았다. 한편 그는 아내를 통해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영토를 물려받게 되자 적극적인 정복 전쟁에 나서 황제의 통치에 반항하는 현지 세력들을 직접 굴복시켰다.
오스만 제국이 이에 개입했으나 치열한 전쟁 끝에 오스만을 물리치고 마침내 합스부르크 가문의 확고한 영토로 만들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형의 의중에 따라 제국을 통치했지만, 제국 내의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던 종교 문제에 있어서는 강경론자인 형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치루기 위해 현실적으로 제국 내 신교도 제후들의 협력도 이끌어내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555년 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체결한 것에서도 현실주의자로서 그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카를 5세가 말년에 황제 제위를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려는 시도를 했지만, 페르디난트는 이미 30년 가까이 성공적으로 독일을 통치해 오면서 독일 제후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신교, 구교 가릴 것 없이 모든 제후들이 페르디난트를 지지하고 나서자 카를 5세는 결국 1553년 아들의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선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3. 유년시절


형인 카를이 부친의 영지인 플랑드르에서 나고 자란 반면, 페르난도는 스페인의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태어나 외가집인 스페인 왕실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와 생일이 같아서 페르난도 2세의 이름을 물려받았고 그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는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첫째 외손주 카를보다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성장한데다가 자신의 이름을 딴 외손주인 페르난도를 더 좋아해 페르난도에게 아라곤 왕위를 물려주려 했고 스페인의 귀족들 또한 페르난도를 지지했다.
한편 형제의 친할아버지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결혼을 통한 영토 확장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추진했던 결혼 정책은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 국왕을 겸직하고 있던 야기에우워 왕가와의 혼사를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막시밀리안 1세는 한때 무력으로 헝가리를 병합하려 했는데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화정책으로 전환하여 양 왕가의 혼사를 추진하게 된다. 막시밀리안의 노력은 1506년부터 시작되어 근10년 동안 공을 들인 끝에 손자들이 어느정도 장성한 1515년에 결실을 맺었다. 막시밀리안은 거의 마지막까지도 두 손자 중 누구를 보헤미아·헝가리 왕녀와 혼인시킬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했는데 최종적으로 그가 선택한 손자는 카를이 아닌 페르난도였다. 할아버지의 이 선택은 하마터면 역사에서 완전히 존재감을 상실할 뻔한 페르난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결혼을 두고 막시밀리안 1세가 광대하게 퍼져 있는 영토를 한 사람이 통치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미리 제국을 분할할 계획을 세웠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스페인은 첫째 손자인 카를이,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둘째 손자인 페르난도가 물려 받도록 미리 계획을 세웠다는 것. 이러한 견해가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혼 당시 상황에서 볼 때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영토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가 물려받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4]
한편 1516년 페르디난트의 외할아버지인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가 죽자 후계자를 두고 스페인 현지에서는 페르난도를 지지하는 상황이었으나, 친가인 합스부르크 황실이 나서 교통정리를 하여 형 카를이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당시 페르난도는 아직 13세로 성년(15세)이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카를은 장남인데다가 나이도 이미 성년을 넘겨 이미 부르고뉴(부르군트) 공국을 직접 다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카를 본인도 스페인 토착 세력이 이방인 자신보다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동생 페르난도에게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카를은 스페인 왕에 즉위하고 나서도 1년 반이 지나도록 스페인 땅을 밟지 않고 플랑드르에 머물고 있었다. 카를은 자신의 스승인 아드리안 데달 주교를 먼저 스페인에 보내 현지 상황이 어느정도 안정된 후에야 스페인 땅을 밟았다. 모친인 후아나는 명목상 스페인 공동왕이었지만 정신병 때문에 오래전부터 유폐된 상황이었다. 공동왕인 어머니가 동생 페르난도를 지지하여 왕으로 옹립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한 카를은 스페인에 도착하자마자 유폐된 어머니부터 찾아가 페르난도가 아닌 자신이 스페인의 국왕임을 확인하는 서명부터 받아냈다. 그리고 고생해가며 스페인 전국을 순방하며 지방세력으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았다.
한편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카를을 스페인의 왕위에 앉힌 뒤 1518년 페르난도를 플랑드르에 있는 고모 마르가레테(독일명 Margarete von Österreich, 네덜란드명 Margaretha van Oostenrijk)에게로 보냈다. 플랑드르는 막시밀리안 1세 본인이 젊은 시절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한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될 때까지 살았던 곳이며 또 그곳에서 페르디난트의 아버지인 필리프 대공(펠리페 1세)와 친형 카를이 나고 자랐던 곳이었다. 이를 두고 막시밀리안이 이미 독일쪽을 페르난도에게 물려주려고 조치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보다는 당시 스페인 귀족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던 페르난도가 카를의 스페인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일단 페르난도를 그의 아버지(이자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의 영지로 보낸다는 명목하에 스페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려는 의도가 주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4. 로마왕(독일왕) - 신성 로마 제국 대리 통치


1519년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페르디난트의 형 카를 5세는 할아버지 영지인 오스트리아와 할머니 영지인 베네룩스, 프랑슈콩테 등을 물려받고, 할아버지의 후계자를 뽑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스페인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그러나 카를이 선거를 치루기 위해 독일에 머무는 사이 스페인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카를 5세는 황제 선거와 대관식, 루터의 종교개혁 문제, 제국 회의, 프랑스와의 전쟁 등의 잇따른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2년 동안이나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스페인의 반란은 진압되기는 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1521년 보름스 국회가 끝나고서야 카를 5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서둘러 돌아가게 되었는데, 카를은 자신이 스페인으로 가 있는 동안 독일에서 마찬가지로 권력 공백으로 인한 변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통치를 대신 맡기게 된다. 카를은 동생 페르디난트를 제국통치평의회 의장으로 임명하였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이자, 제국 황제위의 근거인 오스트리아 대공위까지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주어 사실상 분가하게 된다.[7]
스페인으로 돌아간 카를은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한 후 스페인을 근거지로 하여 이탈리아 등지에서 프랑스, 교황청 등과의 전쟁에 집중했고, 신성 로마 제국 통치는 페르디난트가 전담하게 된다. 카를 5세는 평생 거의 스페인이나 네덜란드에 머물렀고 독일에 머문 기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수개월 이상 독일에서 머물렀던 경우는 황제 선거와 대관식, 보름스회의가 있었던 1519년~1521년, 오스만 제국의 침공, 차기 황제 선거, 슈말칼덴 동맹 성립 등의 사건이 있었던 1530년 전후, 슈말칼덴 전쟁기인 1546년~1548년 정도였다. 신성 로마 제국 회의에도 카를 5세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페르디난트 1세가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회의를 주관했다.
1520년대에 걸쳐 카를 5세는 매우 긴박한 상황에 연이어 직면했다. 스페인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야 했으며, 동시에 합스부르크령 이탈리아 영토를 노리는 프랑스와 싸워야 했다. 1524년에는 독일에서 루터의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아 독일 농민 전쟁이 일어났는데, 황제는 여기에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에 승리를 거두며 이탈리아에서 한숨돌리는가 했더니 1526년에는 갑자기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침공하여 개발살내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전운에 휩싸이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간신히 프랑스를 제압했으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프랑스와 비밀리에 코냑 동맹을 맺었고, 이를 알게 된 카를 5세는 격분하여 교황을 응징하기 위한 군대를 이탈리아로 급파하여 이에 로마 대약탈 등의 사건이 벌어진 끝에 교황을 굴복시켰다. 그러는 사이 헝가리의 지배권을 두고 페르디난트가 있는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1529년 오스만군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포위하는 사태(1차 빈 포위)가 벌어졌다. 이때 카를 5세는 지원군만 보내줬다. 오스만과의 전쟁 와중에도 독일에서는 신교가 급속도로 확산되며 제국의 분열이 가중되고 있었다. 1529년 2차 슈파이어 제국 회의에서 황제는 개신교 인정을 철회했고, 이에 신교도측이 황제에게 슈파이어 항의(프로테스트)를 했지만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황제는 가톨릭의 일방적인 수용을 강요했다. 이에 분개한 신교도측은 1531년 군사 동맹인 슈말칼덴 동맹을 맺었고 카를 5세가 진압에 나서 슈말칼덴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제 종교 개혁은 종교 전쟁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카를 5세는 종교 개혁의 확산을 저지하여 제국의 분열을 막고 아울러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서 자신을 대리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보다 확실한 힘을 실어줄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카를 5세는 조기에 차기 황제 선거를 실시하여 페르디난트를 독일왕(로마왕) 지위에 올리기로 결심한다. 카를 5세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1519년 황제 선거 당시 프랑수아 1세와 경쟁하면서 제위 세습을 포기한다고 공약했고, 1520년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루면서도 재차 공약 준수를 선언했는데 이것 때문에 페르디난트를 바로 후계자로 지명하기에 명분이 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가 1526년 보헤미아, 서부헝가리, 크로아티아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1526년부터 지속된 지속된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에서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특히 1529년 1차 빈 포위를 방어내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기독교 세계를 수호한 공을 세웠다. 이를 바탕으로 1531년 1월 차기 황제 선거를 실시되었고 페르디난트가 단독출마로 당선되면서 독일왕(로마왕)위에 오르게 되었다.[8] 페르디난트 1세는 이미 1521년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물려받으면서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쭉 독일을 다스려 왔는데다가, 1531년에 독일왕으로 선출되어 사실상 독일의 군주로 봐도 무리가 없었다. 형 카를 5세는 10년씩 15년씩 독일 자리를 비웠고 1547년 이후에는 독일에 온 적이 없다.

5.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지배


1526년 헝가리, 보헤미아, 슐레지엔, 크로아티아 등 중동 유럽에서 막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던 러요시 2세가 쉴레이만 대제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의 침공을 맞아 헝가리를 방어하기 위해 싸우다가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한다. 페르디난트 1세는 자신의 아내 안나가 러요시 2세의 누나인데다 러요시가 생전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면 자신에게 왕위를 넘기겠노라고 약속했다는 사실을 내세워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러요시 2세의 왕위는 헝가리 왕국, 보헤미아 왕국(슐레지엔 포함), 크로아티아 왕국에서 별도로 계승된 동군연합 군주의 성격이었다. 때문에 러요시 2세의 여러 왕위는 왕국 별로 별도의 절차를 걸쳐 페르디난트 1세에게 계승되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동유럽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를 제외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페르디난트가 왕위를 승계하게 되었다.
헝가리 왕이 다스려온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페르디난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보헤미아의 왕이 된다. 또한 1527년에 세틴 성에 있는 크로아티아의 귀족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크로아티아의 왕(역시 헝가리 왕이 겸임해 왔다)이 되었으며 확고부동한 승계권을 확립하였다. 세틴 의회에서 페르디난트는 크로아티아를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지키고 크로아티아 인들의 역사적인 권리, 자유, 법, 풍습을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
한편 헝가리에서는 러요시 2세의 비서인 니콜라우스 올라우스가 스스로 페르디난트 1세의 편에 가담했다. 그리하여 1526년 브라티슬라바에서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다만 러요시 2세의 아내이자 페르디난트와 카를 5세의 여동생인 마리아가 헝가리 여왕이 되어 페르디난트와 함께 왕위를 보유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의 헝가리 왕위 계승은 헝가리 귀족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는 못했고, 당시 헝가리 귀족 대다수는 트란실바니아의 귀족으로 중앙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야노슈 자포야를 국왕 야노슈 1세로 옹립했다.
야노슈 1세의 즉위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페르디난트는 헝가리를 침공했고, 1527년의 타르칼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야노슈를 헝가리 전역에서 몰아냈다. 하지만 야노슈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가 되는 조건으로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쉴레이만 1세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빈을 포위(1차 빈 포위)하였으나 실패하고 물러났다.
1532년에 쉴레이만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향하여 헝가리 동부와 중부에서 합스부르크군을 몰아내고 다시 빈으로 진군했으나 도중에 쾨세그(독일에서는 귄스라고 불렀다)라는 마을에서 발목이 잡혀 퇴각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황가와 오스만 제국은 1533년에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하여 야노슈를 헝가리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고 헝가리 중부 및 동부를 그가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며 페르디난트는 헝가리 서부만을 통치하기로 했다.[9] 단, 그나마도 오스만 제국에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페르디난트 1세가 차지한 헝가리의 서부는 로얄 헝가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로얄 헝가리군주로서 그는 중앙 집권 정책을 펼쳤으며, 이 시대의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절대 군주정을 추진했다. 1527년 헝가리 왕위에 오른 뒤에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영토에 헌법을 발표하고, 헝가리의 브라티슬라바, 보헤미아의 프라하, 슐레지엔의 브레슬라우에 오스트리아 스타일의 기관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 영역에서 일어난 귀족들의 반발로 인해 페르디난트가 추진한 중앙 집권은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고 페르디난트에게 1559년에 오스트리아의 감독으로부터 기관들이 독립하는 것을 인정하게 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는 헝가리 왕위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않았고, 1538년에 너지바러드 조약을 체결. 아들이 없는 야노슈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 뒤를 잇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1540년 7월 7일에 야노슈의 아들인 야노슈 지그몬드 자포야가 태어났고, 야노슈 자포야는 그로부터 보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야노슈 지그몬드 자포야가 야노슈 2세로서 즉위하게 되었지만, 눈 뜨고 왕관을 도둑맞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페르디난트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헝가리를 침공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쉴레이만 대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달려오는 바람에 충공깽. 결국 합스부르크 황가와 오스만 제국은 1545년에 강화를 맺었고, 2년 뒤에 체결된 에디르네 조약으로 야노슈 2세가 헝가리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1547년 보헤미아가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의 신교도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 군을 보낸 다음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카를 5세로부터 스페인 군을 불러 진압한 다음에 보헤미아 도시들의 특권을 제한했고 도시의 권한을 제어하기 위해 새로운 관료 체제를 도입했다.
1554년에는 사절인 오기에르 기셀린 드 뷰스벡이 페르디난트의 사절로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니예에 파견되어 헝가리 영토에 대한 국경 조약에 대해 상의하기도 했다[10].

6. 종교전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루터파 독일 제후들과 분쟁이 벌어진지 10년째인 1530년, 제국내 루터파인 5개 영방의 제후와 14개 제국도시들은 루터파 교리 선언에 해당하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제출하며 자신들의 신앙이 이단이 아니라는 점을 설득했고 각 제후들이 영지내에서 종교를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cuius regio, eius religio '')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건의했다. 그러나 가톨릭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제국의회에선 이를 거부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기본적으로 루터파와 맞서는 입장이었지만, 1531년 로마왕 선출시에 신교도 제후들에게 지지를 얻은 바 있었고,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극심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탄압책은 펴기 어려웠다. 그는 1534년에 신교도 제후였던 뷔르템베르크 공작과 화해하여 몰수한 영지를 돌려주고 공작위 복위를 허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제후와 제국도시에도 카를 5세가 내린 루터파 제국 추방령을 유보해주었다. 사실 당시 신교도 제후들의 세력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비하면 보잘것 없었다. 작센 선제후와 헤센 방백령을 제외하면 나머지 신교도 제후들은 듣보잡이었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위해 과세 협조를 얻어야 할 제국 도시들 중에 신교도 도시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원만한 성격의 페르디난트 1세는 신교도 제후들과도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1546년 형인 황제 카를 5세가 16년만에 독일로 돌아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황제 카를 5세는 트리엔트에서 열리고 있던 공의회가 대책없이 길어지는데 실망을 느끼며 자신만의 구상대로 제국 내 종교 일원화 정책을 강요했고 루터파 제후와 제국도시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맺어 황제에 대항했다. 페르디난트는 작센 선제후 가문의 방계집안인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와 동맹을 맺어서 합류했고 신교도 동맹은 세부족이라 박살이 나서 미리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와 제국추방령을 받은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헤센방백 필리프 1세의 항복을 받았다. 이에 전 독일은 일시적으로 통일 되는듯 싶었다. 그러나 카를 황제의 종교 강압책은 일시적으로나 통했다. 프랑스의 비밀 지원과 원래 신교도였던 작센- 마이센 공작 모리츠는 신교도 동맹을 복구하여 인스부르크에 있던 황제를 공격했고 카를 황제는 패하여 이탈리아를 통해 도망쳤으며 트리엔트에 있던 공의회도 아작이 났다. 결국 카를 5세는 1547년 이후 독일에 다시 오지 않았고 페르디난트가 형의 뒷수습을 하게된다.
애초에 형인 카를 5세는 황제이긴 하나 1521년 이후 독일의 일은 페르디난트 1세에게 일임했고 1531년 독일왕(로마왕)으로 선출 된 후에 실질적인 독일 통치자는 페르디난트였다. 카를 5세는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제국내 신교도들에게 전혀 관용적이지 않았으며 가톨릭 위주의 제국 종교 일원화 정책을 강요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카를 5세의 종교 일원화 정책을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고 페르디난트 1세를 인정치 않는 야노슈파 헝가리 제후들과도 싸워기 위해서는 신교도 제후와 제국 도시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교도 세력과 타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구교파 제후였던 바이에른 공작도 제국내 종교 통일 문제는 실행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보았다.[11]
결국 신교도 대표인 모리츠와 [12]와 파사우에서 1552년에 강화했고 제국회의를 열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파 신앙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허가되었으며 루터파 제후와 제후령에 한하여 영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한편 황제 카를 5세는 스페인에서 이런 합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1556년 퇴위를 선언한다. 결국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카를 5세의 임기때 나온 것이지만 페르디난트가 로마왕이자 독일왕의 자격으로 체결한 조약이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당사자들은 3가지의 중요한 원칙을 합의했다. 각 제후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 자신이 믿는 종교를 영지의 공식적인 종교로 지정할 수 있으며, 다른 교파를 따르는 신도들은 재산을 처분하고 다른 영지로 옮길 수 있었다. 세 번째는 기사와 자유도시들은 이 결정에서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페르디난트의 선언이라 불린다.
1555년 이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조약은 제국 내에서 루터파와 가톨릭의 공존을 관리하는 정당한 법률 문서가 되었으며 가톨릭 교도와 루터 교 신도간의 많은 갈등을 해소했지만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우선 페르디난트 1세는 토론을 통해 종교상의 예외를 성급하게 결정지었다. 철저하게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논의가 널리 받아들여지지도 못했고, “영주가 믿는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를 결정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 )'' ”는 원칙을 지원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잠재적인 법률 문제마저도 그러했다. 또 루터파 처우는 일견 해결되었지만 제국에서 신교도 탄압은 여전했고, 새롭게 칼뱅파로 개종한 신교도 지역[13]의 법적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또한 제국 내 제국 도시들의 문제였다. 1560년대 이후 제국 내 60여개 제국 도시중 50여개는 완전히 루터파나 칼뱅파로 돌아섰고, 나머지 도시중에서도 레겐스부르크등 2개 도시를 제외하면 신교도가 우세했는데 신교도가 우세한 도시에서는 가톨릭 교도들은 공존할수 있었으나 가톨릭 도시에서 신교도들은 도시를 떠나야 했다. 여러 복잡한 문제는 결국 1618년 30년 전쟁이 터지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마무리된다.

7. 황제 즉위


페르디난트는 1547년까진 카를 5세와 거의 트러블이 없었는데, 그때까지는 형의 의중을 전적으로 따랐다. 그런데 1546~1547년에 카를과 협력해 프로테스탄트 세력인 슈말칼덴 동맹을 무찔러 뷔르템베르크를 탈환한 뒤 문제가 발생했다. 이후 카를 5세는 뷔르템베르크에서 페르디난트 1세가 갖고 있던 권리를 회복시키지 않았다. 머지않아 황제의 의도가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페르디난트를 토사구팽하고 자신의 장남인 필리프(뒤의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에게 황제위를 비롯한 모든 영지를 물려주려는 시도였다.
이때부터 형제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카를 5세는 애초에 넓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으로 동생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통치를 위임했지만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그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전까지 형에게 고분고분하는 순둥이로만 보였던 페르디난트는 그러나 카를 5세가 생각했던 것만큼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지난 30년간 독일을 통치하며 쌓아온 페르디난트의 덕이 이때부터 빛을 발휘했다. 성공한 2인자의 전형이라 할 만한 인생을 살았던 페르디난트는 상사인 자신의 형 뿐만 아니라 명목상 자신의 하급자인 독일 제후들에게도 권위를 내세우는 방식 대신 그들과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들에게 협력을 구하는 방식을 택했다. 황제의 권위를 내세우며 제후들을 강압적으로 복종시키려고 했던 카를 5세에 비해[14] 그 사이에서 대리인이자 중재자로서 페르디난트는 형의 의지를 수행하면서도 독일의 현실을 직시하고 형의 강경책을 완충해주는 역할을 했다. 황제는 신교도에 대해 자비없는 탄압을 명했지만, 페르디난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등을 위해 신교도 제후들에게 결코 적극적인 탄압을 실행하지 않았고, 그들에게도 협력을 구했다. 이러한 덕을 쌓은 덕분에 황제가 자신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독일의 제후들은 신교, 구교 가릴 것 없이 모두 펠리페 2세를 반대하고 페르디난트 1세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미 오래 전에 페르디난트가 선거에서 차기 황제로 선출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카를 5세가 황제의 권위로 구실을 갖다 붙여 페르디난트로마왕에서 폐위시키고 다시 선거를 실시한다 하더라도 결국 황제 투표권을 지닌 것은 선제후들이었으므로 이미 제후들의 여론이 돌아선 상황에서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카를 5세는 1553년 펠리페의 황위 계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황제로서 사실상 실권을 모두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카를 5세는 1556년 1월 황제위에서 퇴위를 선언하고 동생에게 직위를 넘겨줬다. 이어 8월에는 스페인 국왕직을 아들에게 물려줬고 그의 아들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로 즉위한다. 네덜란드 지방은 명목상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지만 카를 5세의 마지막 강력한 의지에 의해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가 스페인 영토가 된다. 이로써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이는 단순히 스페인계와 분가한 수준이 아니라, 페르디난트 1세를 통해 보헤미아, 슐레지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광대한 영토가 새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제국이 분단되며 가문의 재출발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 이후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는 영토를 통칭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페르디난트는 퇴위한 형 카를이 에스파냐에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선제인 형을 존중하여 대관식을 미루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 의회도 카를 5세의 퇴위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 역시 페르디난트 1세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카를 5세의 퇴위 승인은 2년 넘게 미루어지다가 1558년 초에야 이루어졌다. 1558년에 형 카를이 에스파냐의 은둔지에서 사망하자 비로소 황제 대관식을 치뤘다. 그러나 카를 5세가 양위를 선언한 시점부터 페르디난트의 제위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황제로서의 공식 통치 기간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8년 남짓 이어졌다.
재위 기간에 페르디난트는 조카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나갔다. 특히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은 가톨릭의 수호와 재건에서 서로 우호적이며 협력하는 긴밀한 관계였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는 황제가 된지 10년도 안된 1560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기침과 고열에 시달렸다. 나중에는 누워지낼 정도로 악화되자 장남인 막시밀리안이 섭정으로 아버지의 업무를 대신해야 했다. 결국 페르디난트 1세는 1564년에 빈의 궁전에서 사망했다. 사후 시신이 체코 프라하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에 먼저 사망한 황후 안나의 곁에 매장되었다.

8. 가족



8.1. 아내,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안나(Anna von Böhmen und Ungar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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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년 7월 23일 ~ 1547년 1월 27일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인 블라디슬라브2세와 그의 세번째 아내인 브와-켄달의 안나 사이에서 태어난 2명의 자녀 중 장녀이다. 동복 남동생인 러요시 2세로 남편의 여동생인 여대공 마리와 결혼함.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이차가 28살이나 났고 앞선 2번의 결혼에서 후계자를 얻지못한 아버지는 세번째 결혼에서 겨우 안나와 후계자 러요시를 얻었다. 어머니는 남동생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함. 아버지마저 13살때 사망하자 10살의 어린동생과 함께 신성로마제국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에서 자라게 된다. 마리는 막시밀리안의 손자들중 하나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고, 러요시 역시 손녀중 하나인 마리 여대공과 결혼하기로 되었다. 마리는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지냈다. 마리의 남편은 황제의 둘째 손자인 페르디난트 1세로 결정났고, ​18살의 나이로 페르디난트 1세와 결혼을 하게 된다. 마리의 남동생인 러요시가 정식 남자 후계자가 없는 경우, 마리를 통해 페르디난트에게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계승권이 간다는 협약이 맺어진다. 부부는 정략결혼으로 혼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좋았다. 자녀가 무려 4남 11녀이다. 당시로는 드물게도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아기를 지나서까지 성장한다.
1547년 안나가 사망했으나 페르디난트는 끝까지 재혼하지 않고 홀로 남은 여생을 보냈다. [16] 안나는 남편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기 9년전에 사망한다.

8.2. 자녀들


1녀. 엘리자베트 (1526년 7월 9일 ~ 1545년 6월 15일) : 폴란드지그문트 2세[17]와 결혼. 어려부터 간질로 고생함. 외가쪽으로 5촌아저씨인 지그문트와 결혼했으나 시월드[18]와 남편의 냉대속에 19살의 나이로 사망함. 남편에게는 바르바라 리지비우라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 엘리자베트를 냉대했다. 남편이 엘리자베트의 지참금을 받으러 떠난 사이 간질발작으로 기력을 다해서 사망. 이후 남편은 바르바라 리지비우와 결혼을 하지만 후계자를 얻지못하고 바르바라가 사망. 결국 그 싫어하는 합스부르크의 딸인 엘리자베트의 여동생 카타리나와 결혼. 역시 후계자 못남기고 이후 바사왕조로 넘어감.

1남. 막시밀리안 2세 (1527년 7월 31일 ~ 1576년 10월 12일)
2녀. 안나 (1528년 7월 7일 ~ 1590년 10월 16일) : 바이에른 공비. 바이에른의 공작 알프레드5세[19]와 결혼하여 남편과의 사이에 7명의 자녀를 낳음. 그중 하나는 페르디난트 2세의 어머니가 되는 마리아 안나이다.
2남. 페르디난트 (1529년 6월 14일 ~ 1595년 1월 24일) : 오스트리아 대공.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후가 되는 티롤의 안나의 아버지.
3녀. 마리아 (1531년 5월 15일 ~ 1581년 12월 11일) : 윌리히클레브스베르크 공비
4녀. 막달레나 : 1532년 8월 14일 ~ 1590년 9월 10일
5녀. 폴란드 왕비 카타리나 : 1533년 9월 15일 ~ 1572년 2월 28일
6녀. 만투바 공비 엘레오노라 : 1534년 11월 2일 ~ 1594년 8월 5일
7녀. 마르가레테 : 1536년 2월 16일 ~ 1567년 3월 12일
3남. 요한 : 1538년 4월 10일 ~ 1539년 3월 20일
8녀. 페라라 공비 바르바라 : 1539년 4월 30일 ~ 1572년 9월 19일
4남.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 1540년 6월 3일 ~ 1590년 7월 10일
9녀. 우르줄라 : 1541년 7월 24일 ~ 1543년 4월 30일
10녀. 헬레나 : 1543년 1월 7일 ~ 1574년 3월 5일
11녀. 토스카나 대공비 요한나 : 1547년 1월 24일 ~ 1578년 4월 10일

[1] 안나 야겔로니카라고도 함[2] 페르디난트와 그 여동생 마리아는 보헤미아-헝가리 왕가와 겹사돈이었다. 보헤미아-헝가리 왕인 러요시 2세와 마리아 사이에 후사가 없자, 페르디난트-안나 부부가 왕위를 물려받았던 것.[3] 우습게도, 그럼 독일어는 유창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카를이 모국어로 사용한 언어는 모순적이게도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싸웠던 프랑스어였다. 이는 카를의 고향이 현재의 벨기에 즉, 저지대였기 때문.[4] 1526년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 러요시 2세(로오슈 2세)가 쉴레이만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젊은 나이에 후사없이 요절한 것이었다.[5]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 전하.[6] 오스트리아 대공 전하.[7] 물론 이 전에도 페르디난트는 His Highness Archduke Ferdinand of Austria[5]로 불렸으나 이 후 '''His Highness The Archduke of Austria'''[6]로 불리게 되어 예우상의 대공이 아닌, 국가원수로서의 대공이 되었다.[8] 신성로마제국 군주는 대관식 이전 로마왕(독일왕)으로 불렸는데 차기 주자라는 뜻이 있고 독일왕으로 군주라는 직위 뜻도 있다.[9] 오스만 제국은 이후 야노슈 2세가 즉위한 이후 헝가리로 출병한 1541년에 헝가리를 삼분하여, 서부는 합스부르크 황가, 동부(트란실바니아)는 야노슈 2세, 중부는 자신이 직접지배하게 된다.[10] 여담으로 이때 오기에르는 오스만빠가 되어 돌아온다. 오늘날까지도 그가 남긴 기록이 전해지는데, 오스만에 대한 그의 평가를 한두 문장으로 정리하면 '완전 킹왕짱. 왜 우리는 저렇게 못하지?' 정도.[11] 바이에른 공작이 가톨릭으로 남은 건 신앙심이라기보단 같은 가문이던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이 선제후직을 차지하고 있어서 선제후직에 목말라 있었는데 성직 선제후 자리인 쾰른,트리어 대주교 자리 둘 중에 하나를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끊이지 않게 계속해서 배출할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카를 5세의 회유책에 넘어갔기 때문이었다.[12] 슈말칼덴 전쟁 후 종가 대신 작센 선제후가 되었다.[13] 대표적으로 팔츠 선제후령은 페르디난트 시절 가톨릭이었다가 1560년대 루터파로 개종했다가 다시 수십년후 칼뱅파로 개종한다.[14] 황제의 직속 군사력이 압도적이였다면 가능했겠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강압적으로 나가려 했던것이 카를 5세의 큰 실수였다.[15] 안나 야겔로니카라고도 함[16] 사실 후계자가 있으니 더이상 결혼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고, 추가적인 지지세력이 더이상은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17] 엄마인 안나와 사촌관계[18] 시어머니 보나 스포르차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싫어하여 며느리를 냉대했다. 엘리자베트가 죽은이후 시어머니가 죽였다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19] 남편과는 6촌사이인데 안나의 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의 여동생 쿠니쿤데 여대공의 아들인 빌헬름의 아들로 여대공의 손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