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남
[image]
安昌男
1901년 3월 19일 - 1930년 4월 2일
1901년 오늘날의 서울 종로구 평동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에 미동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차례로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915년에 그만두었다. 그러던 중 1917년에 당시 식민지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파일럿 아서 로이 스미스(Arthur Roy Smith 1890-1926)가 용산에서 선보인 곡예 비행을 보고 비행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로 결혼과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자동차 학교에서 2개월간 자동차 운전을 배우고 아카바네 비행제작소에서 비행기 제조법을 익혔으며 오쿠리 비행학교에 진학하여 6개월간 비행기술수업을 이수하였다. 이수 과정을 모두 마치고 1920년 11월에 비행학교를 졸업하였지만 당시 일본 제국에는 민간 비행 자격 규정이 정해지지 않아서 바로 파일럿이 되지는 못하여 졸업 직후에는 오쿠리 비행학교에서 잠시 교수직을 맡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21년에 민간 비행 자격 규정이 제정되어 1921년 5월에 치러진 일본 최초의 비행 자격 시험에 합격하여 파일럿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시험에 총 17명이 응시하여 2명이 합격하였고 그중 수석이었다고 한다. 1922년에는 도쿄-오사카간 우편대회 비행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탔다고 한다.
고국인 식민지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졸업 직후 천도교 기관지인 <개벽>지에서 안창남에 관한 기사를 실으면서부터이다. 이제 막 무단통치시기가 끝난 식민지 조선에서 당시로서는 꽤 신기술직인 비행사를 조선인이 하고있다는 소식은 꿈도 희망도 없이 패배의식과 열등감만 가득하던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그리고 1922년 12월 5일, 안창남은 5만여명의 인파[1] 가 지켜보는 가운데 여의도 백사장에 착륙하며 파일럿으로서 고국에 돌아왔다. 같은 달 10일에는 동아일보 주최로 한반도 모양을 그려넣은 애기(愛機)인 금강호를 타고 모국 방문 비행을 하였다. 이 당시 안창남의 인기는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라는 가사의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래가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
모국 방문을 마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안창남은 1923년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조선으로 돌아온다. 1924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는 등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나중에는 여운형의 소개로 산시성 군벌 옌시산의 군대에 항공중장으로 근무하였으며, 국민당의 2차 북벌에 참여하여 소장 계급을 부여받았다. 북벌 이후 산시비행학교의 교장직을 맡아 비행사를 양성하였다. 1928년에는 대한독립공명단이라는 비밀 항일조직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중원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0년 4월에 산시비행학교에서 비행 교육을 하던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아마 살았다면 불과 3일 후 옌시산이 장제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상태이니, 장제스의 중앙군과 교전해야 했을 듯.
시신은 산시성의 성도 타이위안시에 묻혔고, 중화민국 제3집단군 항공학교 특별비행교관 안군창남지묘(安君昌男之墓)라는 비석까지 세워져 있었다. 1965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홍위병의 공격으로 산산이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일단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인''' 최초의 파일럿은 아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사료에 따르면 '''한국인 최초''' 기록으로는 서왈보[2] 의 기록이 1919년으로 가장 앞선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백린 등이 추진한 비행사 양성 사업을 미주에서 추진한 바가 있기 때문에 안창남을 한국인 최초의 파일럿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 서왈보나 임정[3] 의 비행사들은 해외 독립운동가들로서 각각 중국과 미국에서 비행한 기록만 있지 한반도 상공에서 비행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안창남이 '''한국에서 최초로 비행한 한국인'''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01년에 독립 운동에 참가한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후손이 없기 때문에 현재 정부에서 보관중이다.
安昌男
1901년 3월 19일 - 1930년 4월 2일
경성의 한울[1]
! 경성의 한울! 내가 어떠케 몹시 그리워 햇는지 모르는 경성의 한울! 이 한울에 내 몸을 날리울 때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엇습니다. - 1923년 1월 1일 <개벽>지, 공중에서 본 경성 中
1. 초기 생애
1901년 오늘날의 서울 종로구 평동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에 미동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차례로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915년에 그만두었다. 그러던 중 1917년에 당시 식민지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파일럿 아서 로이 스미스(Arthur Roy Smith 1890-1926)가 용산에서 선보인 곡예 비행을 보고 비행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로 결혼과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자동차 학교에서 2개월간 자동차 운전을 배우고 아카바네 비행제작소에서 비행기 제조법을 익혔으며 오쿠리 비행학교에 진학하여 6개월간 비행기술수업을 이수하였다. 이수 과정을 모두 마치고 1920년 11월에 비행학교를 졸업하였지만 당시 일본 제국에는 민간 비행 자격 규정이 정해지지 않아서 바로 파일럿이 되지는 못하여 졸업 직후에는 오쿠리 비행학교에서 잠시 교수직을 맡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21년에 민간 비행 자격 규정이 제정되어 1921년 5월에 치러진 일본 최초의 비행 자격 시험에 합격하여 파일럿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시험에 총 17명이 응시하여 2명이 합격하였고 그중 수석이었다고 한다. 1922년에는 도쿄-오사카간 우편대회 비행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탔다고 한다.
2. 조선의 비행사
고국인 식민지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졸업 직후 천도교 기관지인 <개벽>지에서 안창남에 관한 기사를 실으면서부터이다. 이제 막 무단통치시기가 끝난 식민지 조선에서 당시로서는 꽤 신기술직인 비행사를 조선인이 하고있다는 소식은 꿈도 희망도 없이 패배의식과 열등감만 가득하던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그리고 1922년 12월 5일, 안창남은 5만여명의 인파[1] 가 지켜보는 가운데 여의도 백사장에 착륙하며 파일럿으로서 고국에 돌아왔다. 같은 달 10일에는 동아일보 주최로 한반도 모양을 그려넣은 애기(愛機)인 금강호를 타고 모국 방문 비행을 하였다. 이 당시 안창남의 인기는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라는 가사의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래가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
3. 독립운동 투신과 최후
모국 방문을 마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안창남은 1923년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조선으로 돌아온다. 1924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는 등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나중에는 여운형의 소개로 산시성 군벌 옌시산의 군대에 항공중장으로 근무하였으며, 국민당의 2차 북벌에 참여하여 소장 계급을 부여받았다. 북벌 이후 산시비행학교의 교장직을 맡아 비행사를 양성하였다. 1928년에는 대한독립공명단이라는 비밀 항일조직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중원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0년 4월에 산시비행학교에서 비행 교육을 하던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아마 살았다면 불과 3일 후 옌시산이 장제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상태이니, 장제스의 중앙군과 교전해야 했을 듯.
시신은 산시성의 성도 타이위안시에 묻혔고, 중화민국 제3집단군 항공학교 특별비행교관 안군창남지묘(安君昌男之墓)라는 비석까지 세워져 있었다. 1965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홍위병의 공격으로 산산이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4. 한국인 최초의 파일럿?
일단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인''' 최초의 파일럿은 아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사료에 따르면 '''한국인 최초''' 기록으로는 서왈보[2] 의 기록이 1919년으로 가장 앞선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백린 등이 추진한 비행사 양성 사업을 미주에서 추진한 바가 있기 때문에 안창남을 한국인 최초의 파일럿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 서왈보나 임정[3] 의 비행사들은 해외 독립운동가들로서 각각 중국과 미국에서 비행한 기록만 있지 한반도 상공에서 비행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안창남이 '''한국에서 최초로 비행한 한국인'''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5. 기타
2001년에 독립 운동에 참가한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후손이 없기 때문에 현재 정부에서 보관중이다.
[1] 하늘을 천도교에서 달리 이르는 말이다. 아마 <개벽>지가 천도교 기관지라 이렇게 이르는 듯하다.[1] 당시 경성의 인구가 30만이었다고 하니 전 경성인구의 6분의 1이 추운 겨울날에도 몰려나왔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서울 인구로 치면 170만여명이 나왔단거와 같은 이야기.[2] 1886년~1926년 6월 28일. 그도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는데 1919년에 중국의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하여 파일럿이 되었다. 그러나, 안창남처럼 1926년 6월 28일 중국 장가구(張家口) 공가장(孔家庄) 비행장에서 새로 수입된 이탈리아제 언살도 비행기를 시승해보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3] '임시정부'의 줄임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