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성(산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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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시성(산서성, 山西省)은 중화인민공화국 성급 행정구역이다. 약칭은 '''진(晋)'''. 진문공이 춘추전국시대의 진에서 유래했다. 헌데 흔히 한국어와 영문표기로 헛갈리는 섬서성 역시 약칭이 진(秦).[1] 산시는 태항산 서쪽 지역이라는 뜻으로 태항산 동쪽 산둥성에 대응한다. 서쪽은 친진대협곡을 사이에 두고 섬서성이 있고 남쪽에는 허난성, 북쪽에는 내몽골자치구가 있다.
면적은 156,000km², 인구는 2010년 기준 3,571만 2,111명이며, 인구의 99.7%가 한족이다. 성도는 타이위안(太原).
2. 지리
타이항산맥(太行山)과 뤼량산맥(呂梁山脈 / 吕梁山脉)이 지나가며, 그 사이로 펀허 강(汾河)이 흘러간다. 타이위안도 펀허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산악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높은 우타이산(五台山)의 경우 해발 3,061m에 달한다. 그 외에 전통적으로 오악(五岳)의 하나 북악으로 유명한 항산(恆山 / 恒山; 2,017m)도 산시성에 위치해 있다.
3. 행정구역
4. 역사
오악 중 북악이 위치해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전통적인 의미의 초기 중국의 북쪽 경계선상에 위치했으며, 만리장성이 지나가고 북방 초원 유목민들을 방어하고 때로는 영향을 주고받는 지역이었다.
초기에는 중원 화하족과 구분되는 융적이 살았고 화하족과 섞여 동화, 춘추전국시대에는 진(晉)나라의 중심이 되는 지역이었다. 이후 진나라가 공중분해되어 삼진(전국시대) 세 나라로 나뉘었고 한나라 때에는 병주(幷州)였으며 흉노가 분열하자 북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남흉노를 이곳에 정착시키기도 했다. 삼국시대에는 원소, 조조의 강대한 육군력을 책임졌지만 유목민의 고삐가 풀린 오호십육국 시대에는 평양(平陽)이 흉노 전조의 초기 수도였으며, 남북조시대에는 북위의 수도 평성(平城),[2] 부수도 평안(平安)[3] 으로 역시 중추지였고 당나라 때에는 하동도(河東道)였다.
오대십국시대 때에는 북한(北漢)의 본거지였다. 이후 북부가 연운 십육주로 송나라에서 벗어났다가 명나라 때 산서성이 설치되었다.
청나라 말기에는 영국 웨일스 출신의 티모시 리처드(중국 이름: 리티모타이=李提摩太)가 선교사업을 벌인 곳으로 잘 알려졌다. 티모시 리처드는 1877∼1879년 산시성의 대기근 때에는 구조에 힘 썼고, 이후 8년간 산시성 각지에서 전도하였다. 단순히 전도만 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학문 ·지식을 중국인에게 소개하는 단체인 광학회(廣學會)를 주재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고, 캉유웨이 등 변법파와 이홍장 ·장즈둥(張之洞) 등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의화단의 난이 있었을 때에는 그 배상금을 중국의 문화사업에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 돈으로 1902년 산시대학(山西大學)을 건립하고 총장을 지냈다.[4]
중화민국 시기에는 군벌 옌시산이 이곳을 기반으로 1912년부터 1949년까지 38년 간 사실상의 독립왕국을 경영했다. 그러나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패퇴하면서 중일전쟁이 끝날때까지 이곳은 일본군의 점령지였다. 이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하고 옌시산도 쫓겨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5. 문화
산서 성 중심 방언 지역 언어로 진어(晉語)를 사용하는데. 사용지역은 내몽골자치구서부 후허하오터지역과 산서성 북부, 하북성 서부지역에서 쓰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방 방언의 일부로 봤는데, 자세히 뜯어보니 북방 방언과는 좀 달라서 20여 년 전부터는 따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진 방언을 북방 관화와 나눠서 따로 설명하는 것에 이견이 존재하며 따라서 아직 그 자체만의 로마자 표기법도 정립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중국 학계는 대체적으로 관화와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북방 방언으로 보는 경우가 우세하다. 따라서 북방 방언은 관화 하나뿐만 아니라 진 방언까지 포함해 총 두 개라고 볼 수도 있다. 화자 수는 6,000만 명이다.
식초로 매우 유명하고, 현지 출신들 역시 식초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거나 식초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산서인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식초에 대한 사랑이 매우 대단하다. 게다가 도삭면의 원조 동네로도 잘 알려져있어서, 흔히 산서성은 도삭면과 식초로 통한다.
예로부터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진상(晉商), 산시 상인들은 신용을 으뜸으로 여겼는데, 삼국지의 관우가 중국에서 재물신으로 숭상받는 것도 이들 덕분이었다. 산시 상인들은 관우가 신의, 의리와 충실함을 대변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관우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삼았고 이후 이들이 전 중국에 퍼져 장사하면서 관우는 상인들의 재물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한다. 정작 실제 관우의 생애 자체는 부귀영화를 마다하는 등 장사꾼과는 별 관련 없어보이는 듯 해서 한국인들은 관우가 중국에서 재물신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는데, 관우를 숭상한 관우 고향지역 출신 상인들이 중국 전국에서 활동하면서 그렇게 퍼진 것이다. 사원의 관우상을 보면 보통 오른손에는 청룡언월도, 왼손에는 은자를 들고 있다. 진상은 금융업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해 중국 최초의 표호 일승창이 산시 핑야오에 있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핑야오 고대도시는 산시의 자랑이다.
6. 출신인물
7. 기타
신 중화일미의 주역 레귤려인 쉐르의 출신지가 바로 이 산시성이라고 한다.
[1] 그래도 晉과 秦은 각각 중국어 한어병음으로 Jìn, Qín으로 현지에서는 구분된다.[2] 다퉁(大同).[3] 타이위안.[4] 그러나 점진적 개혁을 주창함으로써 혁명파인 쑨원 등의 지지를 못 받자 1916년 중국을 떠나 귀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