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하킴

 




[image]
아랍어
الحاكم بأمر الله
아부 알리 만수르 알 하킴 비 아므르 알라
영어
Al Hakim bi Amr Allah
재위 996년 10월 14일 ~ 1021년 2월 13일
생몰 985년 8월 13일 ~ 1021년 ?
1. 개요
2. 치세
2.1. 기행을 일삼다


1. 개요


파티마 왕조의 6대 칼리파. 선대의 관용 정책을 뒤엎고 이슬람 중심의 강압적인 통치를 행하여 많은 반란을 야기하였다. 대표적으로 1009년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를 파괴하여 동로마 제국과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모계가 기독교도인 영향인지[1] 기존 이슬람 교리와 다른 교리 해석을 주장하였고 급기야 스스로 알라의 화신임을 주장하였다. 비록 1020년 앗 다라지가 살해되고 이듬해 알 하킴 역시 '실종'되었지만 그 추종자 중 한명인 하므드 이븐 알리가 시리아에 정착, 알 하킴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은둔한 것이고 언젠가 마흐디로 재림할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이는 후에 드루즈 교로 발전하게 된다.
강압적인 통치 외에 알 하킴은 여러 사원과 학교를 세우고 군사적으로도 시리아를 마침내 재패하는 등 성군의 자질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사상에 집중하고 개인의 취향을 국가적으로 강제시키는 공포 정치를 행하였다. 군사적 업적 역시 그의 사후 앗 자히르 시대에 붕괴되며 파티마 조는 기나긴 쇠퇴에 접어들었다. 특히 알 하킴의 기행적, 이단적 행보로 이맘 칼리파의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자 무오류적인 종교적 위상이 실추되었다.[2] 이는 그의 순조로운? 암살의 원인으로 여겨진다.

2. 치세


[image]
부왕 알 아지즈 대에 시작되어 1010년에 완공된 알 하킴 모스크. 그의 명령으로 미나렛은 모퉁이에 위치하게 되었다.
998년 수백명에 달하는 다마스쿠스의 반파티마 계열 지도자들이 총독 관저의 하맘 (목욕탕)에 초청되었다. 그들은 파티마 조를 신뢰하지 않았지만 응하지 않으면 처벌이 있을까 두려웠고 설마 목욕탕에서 큰 일이 벌어질까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베르베르 병사들 (마그리비야)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시리아 전체에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다. 다만 당시 알 하킴은 13세에 불과하였기에 이 학살은 섭정 바르자완의 지시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잠재적 반대파에 대한 숙청은 역사상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한편 같은 해 시리아의 아파메아 전투에서 파티마 군대는 동로마의 안티오크 총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남하하여 샤이자르를 점령하는 등 시리아를 두고 20년간 이어지던 양국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그러던 1000년 전횡을 일삼던 섭정 바르자완을 암살하고 군중 앞에 직접 나타나 민심을 안정시키는 등 알 하킴은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001년 알 하킴은 알레포의 함단 왕조의 복속을 대가로 바실리오스 2세와 휴전을 체결하며 외부 역시 안정시켰다. 다만 명목상 파티마 조의 속국이었지만 함단 왕조는 양측 모두에게 연공을 납부하였다.
1004년 알 하킴은 다르 알 히크마 (دار الحكمة‎) 혹은 다르 알 일름 (دار العلم)이라 불리는 이집트판 지혜의 집을 세워 문화 진흥에 나섰다. 그 도서관에는 각각 1만 8천권의 저서를 수용 가능한 40개의 서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 대기근이 닥치자 그는 적극적으로 구휼에 임하였고 1016년에는 마침내 알레포가 파티마 조의 직할령이 되었다. 알 하킴의 치세에 파티마 조는 영토적, 문화적 측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20년간 15명의 재상을 임명하는 등 (미래에 실현되는) 강력한 재상의 출현을 경계하였다. 하지만 성군의 모습 외에 알 하킴은 그에 못지 않은 폭군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2.1. 기행을 일삼다


알 하킴은 매우 예민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개 짖는 소리가 자신을 성가시게 한다며 모든 개를 죽이도록 하였다. 또한 별다른 이유도 없이 여인들의 외출 금지를 명하며 외출용 여성 신발의 제작까지 금지시켰다. 그는 식문화에도 개입하여 맥주와 포도주를 금하였고 쉬아 이슬람의 시조 알리를 괴롭혔던 무아위야 1세가 좋아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집트 인들이 즐겨먹던 무루키야 국마저 금지하였다. 종교적으로는 그의 모친이 기독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종 혹은 추방을 명하며 박해를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태도를 바꿔 기독교 신앙을 허가하고 교회 재건을 돕기도 하였다.
한편 위의 모든 기행들을 넘어 당대인들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바로 스스로 알라의 화신이라 주장한 것이었다. 이란 출신의 튀르크인 무함마드 앗 다라지가 알 하킴을 영접하곤 그가 알라의 화신의 관상을 지니고 있다고 고하자 이를 그대로 믿고 세계에 설파하도록 한 것인데, 바로 드루즈교의 시작이었다. 이맘과 마흐디 사상이 있던 시아파에게도 개인의 신격화는 수용하기 힘들었으며 오히려 이맘 칼리파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1020년의 폭동으로 앗 다라지는 살해되었고 초기 드루즈 교도들은 추방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알 하킴 역시 야간 산책 중 실종되었는데, 종교적 위협을 느낀 이스마일파의 암살로도 여겨진다. 최근에는 사후 섭정에 나선 시트 알 물크의 소행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1] 그의 모친은 콥트 기독교 신자였으며 외삼촌 두 명은 콥트 기독교 주교였다 한다.[2] 특히 소수의 이스마일파가 다수의 수니파 및 콥트교도를 통치하던 상황에서 이는 명분상 치명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