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트 로젠베르크
1. 생애
독일 본토인이 아니라 발트 독일인이다. 러시아 제국의 에스토니아 레발[1] 에서 구두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로젠베르크는 모스크바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지만 러시아 혁명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다. 로젠베르크라는 성이 유대인 성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는 에스토니아계였다고 한다. 1918년에 나치당에 입당한 로젠베르크는 툴레 협회의 회원이었으며 디트리히 에커트의 친구였던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이기도 했다. 히틀러는 로젠베르크가 건축학과 역사를 잘 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발탁했다. 1921년에는 나치의 기관지인 <민중의 관찰자>의 편집책임자가 되었고, 1923년 11월 8일의 맥주홀 쿠데타에서 실패해 히틀러가 투옥되었을 때에는 당의 총재대리로 취임했고 1924년에 독일 민족자유당과의 선거에서 협력하여 5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200만표 가까운 표를 모으는데 성공했지만, 그는 결단력이 부족했고 결국 당원들을 제어하지 못하여 민족자유당과의 합의도 이끌어 내지 못해서 나치당의 의석을 줄어들게 하고 말았다. 또 히틀러로부터 확실한 지지를 받지 못해서 로젠베르크는 총재대리를 사퇴하게 되었다.
나치 집권 후에 대외정책 전국지도자로 취임한 로젠베르크는 1934년부터 나치즘의 선전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유럽, 발칸 반도의 파시스트와 연계했는데 외무장관 자리를 놓고서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경쟁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점령지의 미술품 등을 독일로 빼돌리는 작전을 주도적으로 했고 1941년에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히틀러의 명령으로 새로운 점령지에 만들어진 동부점령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동부지역에서 힘러와 괴링의 권력투쟁에 의해 장관 자리는 껍데기에 불과하였다. 이후 유대인 학살을 맡게 되었으나 이미 아인자츠그루펜을 동원하여 학살하고 있던 하인리히 힘러 휘하의 무장친위대와 세력 다툼 끝에 밀려났다. 로젠베르크는 1941년 7월 16일에 열린 총통관저 회의에서 점령지인 우크라이나 주민들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펼쳐야한다고 이야기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다.
2. 최후
1945년 5월 9일에 영국군에 의해 체포된 로젠베르크는 점령지에서의 학살과 약탈, 전쟁범죄 행위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기소된 모든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고 1946년 10월 16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때 유언은 '''No(없다.)'''로 매우 간단했다. 상당히 장문의 유언을 남긴 다른 나치 전범들과는 좀 다른 최후. 유해는 다른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이자르 강의 한 곳에 익명으로 뿌려졌다.
3. 기타
<20세기의 신화>라는 유명한 책을 썼는데 이는 나치즘을 이론적 체계화한 것이며 나의 투쟁과 함께 나치즘의 주요 책이다.
전후에 딸인 이렌느는 1930년생으로, 어머니와 함께 작은 아파트의 방 한칸에서 어렵게 산 적이 있으며, 비서 일을 하고 받는 봉급으로 생활을 꾸렸다. 이렌느는 보관해 두었던 보석을 팔아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도 익힐 수 있었다. 어머니는 웬 쓸데없는 자존심, 그러니까 전 각료의 부인이라는 자존심 때문인지 취직을 하려고를 안해서 모녀가 엄청 싸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나는 나치스라고 비난받아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한 적도 있으며, 그녀는 자신이, 유대인이 꾀한 세계적인 계획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에 아버지의 친구가 이렌느에게 취직처를 마련해 주었으나 동료들과의 정치적 논쟁으로 인해 영 매끄럽지 않은 직장생활이었다고.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