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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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시절의 사진. 나치당의 고위관료들은 공무원 제복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나치당원 제복 혹은 슈츠슈타펠 제복을 입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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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시에도 전쟁을 치른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외교 정책도 수행할 수 없다.

내가 체결한 강화 조약은 구닥다리 스타일의 모든 외교 정책을 불필요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리벤트로프의 이름은 제국 외교장관으로서 독일인과 독일 민족을 고양시킨 인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울리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1]
Ulrich Friedrich Wilhelm Joachim von Ribbentrop
1893년 4월 30일 ~ 1946년 10월 16일
1. 개요
2. 생애
2.1. 나치당 입당 이전
2.2. 나치당 입당
2.3. 외교계의 거물이 되다
2.4. 2차 대전 말기와 최후
3. 기타


1. 개요


나치 독일외교관으로, 제국외무장관(Reichsaußenminister)으로 유명했던 인물.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외교 수완을 발휘해 독소 불가침조약, 삼국 동맹 조약 등 제3제국의 중요 조약을 체결하는 데 공헌하여 거물 외교관으로서 활동했지만,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나치당에 충성한 죄목이 입증되어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2. 생애



2.1. 나치당 입당 이전


1893년 4월 30일, 독일 제국 라인란트 주의 베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프로이센 보병 연대육군 중령이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유럽의 여러 나라를 전전했고, 후에 캐나다퀘벡 지역에서 일했기 때문에 프랑스어영어에 유창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나중에 리벤트로프의 출세길을 열어 준다. 리벤트로프는 독일과 스위스의 사립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불어, 영어에도 능통했기에 1910년부터 1914년에 걸쳐서는 독일 와인의 무역상으로서 캐나다에서 일하기도 했다. 주류 산업의 성공에 힘입어 몬트리올오타와에서 캐나다 상류층의 일원이 된 그는 영국 총독부의 초대를 받기도 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독일과 영국이 서로 적이 되자 리벤트로프는 영국군에게 신병을 구류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급히 뉴욕을 경유하여 독일로 귀국했다. 리벤트로프는 당시 폐결핵을 앓고 있던 동생 로터에게 캐나다의 주류업을 맡겼었지만 동생은 영국군에게 체포당했고 1918년에 사망했다.
독일로 돌아간 뒤에는 독일 제국군 장교로 종군하였고, 동부전선에서 근무한 리벤트로프는 중위까지 승진해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18년 4월에 부상을 입고 난 후 코스탄티니예의 독일 대사관에서 일한 리벤트로프는 여기서 한스 폰 젝트 장군과 프란츠 폰 파펜을 알게 되었다. 그는 열심히 싸웠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은 독일의 패배로 전쟁이 끝났고, 독일이 패전했을 때 젝트 장군의 부관으로 베르사유 조약에도 참가한 리벤트로프는 참가 당시에 큰 굴욕을 받았다고 한다.
1920년 7월에 리벤트로프는 장사를 위해 유럽 각지를 떠돌았다가 운이 좋아 샴페인왕(王)이라고 불린 헨켈[2]의 딸과 결혼하여[3] 베를린의 수출입 상인으로 재산을 모았다. 리벤트로프 부부는 총 5명의 자녀들을 두었는데 리벤트로프는 큰어머니[4]에게 자신을 양자로 넣어 달라고 해 이를 승낙받아 결과적으로 리벤트로프는 귀족의 칭호인 (von)을 이름 앞에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지만 반유대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2.2. 나치당 입당


아돌프 히틀러와는 1928년에 알게 되었고 1932년 초반에 '''나치당에 입당했다.'''
그는 귀족 출신인 데다 외교관 경험도 있었기에 히틀러에게 호감을 샀다. 리벤트로프는 사업가로서의 사업 수완과 외국어 습득 능력을 바탕으로 당의 비공식 외교관[5]으로 활동했다. 리벤트로프는 전문적인 외교 업무에 무지했고, 어릴 적부터 외국에 살았으며 독일어 철자법에 서투른 데다가 가끔 헛소리를 하는 습관이 있어서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를 비롯한 독일의 정통 외교 관료들은 리벤트로프를 무시했으나 히틀러가 절대 권력으로 떠오르자 리벤트로프는 독일의 외교를 실질적으로 관장했다.

2.3. 외교계의 거물이 되다


리벤트로프는 나치당에 입당해 1933년에는 히틀러가 수상으로 지목되기 전까지 프란츠 폰 파펜과 히틀러 사이에 비밀 회담을 맺어 주는 등 베를린의 자택에서 정치 공작을 담당했다. 히틀러는 이런 그를 높이 평가했지만 리벤트로프 자신은 나치당 내에선 신참이었고 간부들은 그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특히 귀족이 아니면서도 귀족적인 취미를 즐겼던 열등감 많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귀족 작위를 가진 리벤트로프에게 비판적인 생각을 가져서 그를 매우 싫어했다.[6] 괴링 역시 이 전직 와인장수[7]의 외교적 무지를 혐오하였다.[8] 그러나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의 신임을 바탕으로 독일의 외교 정책을 뒤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독일 외무성의 엘리트 관료들은 국외 정세를 히틀러에게 보고했지만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에게 아첨하며 히틀러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전했다. 1933년에는 무장친위대 명예 대령이 되어 잠시 친위대 전국 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와 우호 관계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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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불가침조약 체결 당시 크렘린에서 이오시프 스탈린과 악수하는 리벤트로프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뒤에는 영국 대사[9]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히틀러의 뜻에 부합해 오스트리아 병합, 수데텐란트 획득,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독소 불가침조약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 맺어진 각종 중요 조약들의 협상과 조인을 담당했다.
대전 초기에 독일이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였을 때, 해군·외무 관료·경제계와 결탁하여 소련과는 공존 관계에 있으면서 영국을 공격하여 아프리카 등을 손에 넣을 계획을 세우고, 일본 제국을 설득하여 독일-이탈리아 왕국-일본 제국추축국 라인을 구축하고 영국의 분할을 꾀하였으며 동맹국이나 점령국의 괴뢰 정부에 대한 외교 활동도 맡았다.

2.4. 2차 대전 말기와 최후


하지만 전쟁이 심화되고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리벤트로프가 지녔던 정치적인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어 갔고,1941년 히틀러가 불가침 조약을 위반하고 소련을 불시에 침공하자 자신이 맺은 불가침 조약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소련 외교관을 불러 선전포고를 한 후, 리벤트로프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모스크바에 전해주시오. 그래도 나는 대소 전쟁을 반대했다고.[10]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보였던 독소전쟁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등을 겪으면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으며, 베를린 공방전이 벌어지던 1945년 4월 20일,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의 56세 생일 파티에 참석했고 이것이 히틀러와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파티 후에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11] 종전 후 리벤트로프는 카를 되니츠에 의해 해고되었는데 그 후에 6월 14일에 함부르크에서 숨어 지내던 리벤트로프는 영국 점령군에게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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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나치당 고위급 인사들.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 리벤트로프, 빌헬름 카이텔, 뒷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카를 되니츠, 에리히 레더, 발두어 폰 시라흐[12], 프리츠 자우켈[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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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벤트로프의 머그샷과 관리 기록 카드.
리벤트로프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피고로 호출됐고 감금되었다. 그러나 감금된 후에도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재판 당시 자신의 행위를 모두 부정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하인리히 힘러, 헤르만 괴링보다 절대 영향력이 못하지 않았던 거물 인사이자 외교 실력자, 그리고 전쟁의 책임자이며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의 주범'''으로 죄가 인정되었고 결국 교수형이 언도되었다.
사형 선고를 들은 직후 반응이 걸작이다.

'''죽음, 죽는다라... 이제 내 아름다운 회고록을 못 쓰게 되는 건가.'''

(Death, death. Now I won't be able to write my beautiful memoirs.)

본래 괴링이 먼저 교수대에 올라야 했으나 그가 자살해 버리는 바람에 처음으로 교수대에 오른 리벤트로프는 사형 직전 유언으로

'''신이시여, 독일을 지켜 주소서!'''

'''Gott schützt Deutschland!'''

라고 외친 뒤에는

'''나의 마지막 소원은 독일인이 자신의 실체를 깨닫는 것과 동서양이 서로 이해하는 것이오. 마지막으로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My last wish is that Germany realize its entity and that an understanding be reached between East and West. I wish peace to the world.)

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사형이 집행되면서 줄길이를 소련의 요구로 전 사형수 교수형 집행을 고통스럽게 집행하도록 요구함에 따라 이에 맞춰 조절하면서 고통스럽게 질식사했다. [14]
처형된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리벤트로프의 유해는 자살한 괴링을 포함한 11명의 핵심 전범들과 함께 뮌헨 근교의 화장장으로 옮겨져 소각되었고, 유골은 이자르 강의 지류인 콘벤츠 강에 뿌려졌다.

3. 기타


  • 엉뚱한 성격으로 영국 대사 재임시 당시 영국 국왕 조지 6세 앞에서 나치식 경례를 하는 등 과도한 돌출 행동으로 물의를 빚었으며, 영국 첩보부에 의해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극렬 나치빠인 윈저 공 에드워드의 아내 심프슨 부인과 내연의 관계에 있어 그녀를 이용해 영국의 정보를 빼냈다고 한다.
  •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귀족을 나타내는 '(von)'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으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리벤트로프의 집안은 원래 귀족 집안이 아니었으며, 리벤트로프는 귀족 칭호인 von을 얻기 위해 귀족이었던 고모부의 양자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신의 고모에서 청을 하여 귀족 칭호를 얻게 된 것이었다.
  •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받던 도중인 1946년 1월 돌연 자기 변호사를 해고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일이기에 다른 재소자들이나 법정은 의문을 표했고 리벤트로프는 그들에게 대답했다.
>"그 자식, 나한테만 새해 인사를 안 보냈어!"
  • 과거 주류상으로 일했을 때 사업이 1920년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었는데, 리벤트로프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통해 이를 타개하려고 했다. 그가 선택한 아이템은 위스키였다. 그는 우연찮게 조니 워커 위스키가 독일 내 판매를 기획하고 있으며, 판매 대행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영국으로 급하게 달려갔다. 그러나 리벤트로프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경쟁자가 열차를 타고 먼저 출발했다는 소식이었다. 리벤트로프는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가는 늦을 게 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급하게 비행기를 수소문해 스코틀랜드로 날아가 킬마너크 시(Kilmarnock)에 있는 알렉산더 워커 경의 잔디밭에 착륙해 워커 경을 찾아갔다. 건방지게 남의 장원을 비행기 착륙으로 훼손시킨 것에 대해 워커 경은 분노할 수도 있었지만, 리벤트로프의 사업에 대한 열정에 감명받았고, 리벤트로프와 계약을 맺었다. 위 두 글의 출처는 여기.
  •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일으킬 당시 리벤트로프는 일본이 직접 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독일이 나서서 일본을 도울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알프레드 요들빌헬름 카이텔에게 달려가서 그 소식을 말하고는 환호작약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이제 우리에겐 3,000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동맹국이 생겼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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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폰 리벤트로프(Rudolf von Ribbentrop)
1921년 5월 11일 ~ 2019년 5월 20일
  • 루돌프 폰 리벤트로프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장남이다. 뷔스바덴에서 태어난 루돌프는 아버지가 주 영국 대사로 있었기에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스쿨에서 공부했다.[16] 그도 역시 독일 국방군에 입대, 슈츠슈타펠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무장친위대에 배치되어 독소전쟁 중에서는 바르바로사 작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에 참전하였고, 서부전선에서는 프랑스 침공, 노르망디 상륙 작전, 아르덴 대공세 등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5번이나 입었다. 1943년 8월부터는 제12 SS 장갑사단 히틀러 유겐트에 배속되어 나치 독일의 패망 때까지 싸우다가 1945년 5월 8일에 미군에 투항했다. 루돌프 폰 리벤트로프는 최종적으로 SS 대위 계급과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독일의 패전 후, 아버지 리벤트로프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루돌프는 무죄방면되었다. 2019년 5월 20일 향년 98세로 사망하였다.
    • 장남인 루돌프 외에도 아들인 아돌프(1935년 출생), 바트홀드 헨겔(1940년 출생, 2018년 사망), 딸인 베티나(1922년 출생)와 우르슐라(1932년 출생) 모두 현재까지 생존 중이다. 어째 자식들이 죄다 장수 유전자를 타고났나 보다. 바트홀드는 아버지를 닮아 다소 엉뚱한 짓을 좋아했는데, 런던을 가끔씩 방문해 영국의 파시스트들한테 환영을 받는가 하면, 속도위반으로 법정에 선 적이 있는데, 판사가 대놓고 판결문에서 "피고는 전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피를 이어받은 자이다."라고 말했다고.
    • 사실 아버지만 해도 나치당 고위관료 중에서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루돌프 헤스, 빌헬름 카이텔과 함께 그나마 괜찮게 생겼다는 평가를 듣는다.
  • 동시기에 활동했던 소련의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와 이름이 비슷해 혼동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 리트비노프에 관해 첨언하자면, 리트비노프는 1938년 9월 뮌헨 협정 이후, 팽창 야욕을 버리지 않는 제3제국을 저지하고자 영국-프랑스-폴란드-소련으로 이어지는 4자 안보 체제를 실현하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폴란드-러시아 관계는 항상 최악이었고, 영-프도 소련과의 회담에서 굉장히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 안보 체제 구축이 실패해 버려 1939년 5월 결국 외무위원에서 해임되었다. 그 후 외무위원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로 교체되어,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폴란드-러시아 관계, 그리고 동시기 유럽의 상황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독소 불가침조약 항목을 참조하길 바람.
  • 헤르만 괴링이나 하인리히 힘러처럼, 제복에는 독자적인 계급장만 썼다. 그것도 괴링이나 힘러는 독자계급을 가졌다는 특이사항이 있지만, 리벤트로프는 규정과 별개로 자신만의 장관 계급장을 만들어 썼다. 이것은 빌헬름 프리크,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같은 관료들과 차별적인 부분.
  • 상술했듯 '근본 없는' 얼치기 외교관 출신인 데다 빌헬름 카이텔 못지않은 '히틀러의 딸랑이'였던 인물이었던지라 동시대인들의 악평이 많이 남아 있다. 아래는 그 일부.[17]
> 리벤트로프는 나무 같은 놈이다.[18]
> - 카를 되니츠
> 외무장관이라면서 외무나 외교 정책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인물
> - 로버트 H. 잭슨
> 그 얼간이한테 뭐 한 마디라도 필요한가? 그딴 놈이 무슨 외무장관이야, 그냥 히틀러를 무작정 따르는 장님 같은 놈이지. 재미도 없고, 욕심만 많은 놈.
> - 에르하르트 밀히
> 리벤트로프가 가진 능력 따위에 대해선 생각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어. 외무장관이라면서 이해력도 떨어지고 경험도 없지. 처음에 히틀러가 저놈을 외무장관으로 뽑을 때 난 반대했어. 노이라트[19]가 계속하길 바랐지. 노이라트가 딱히 강한 사람은 아니고, 그냥 히틀러가 시키는 일을 하면 되긴 하는데, 아마 리벤트로프보다는 더 똑똑하고 능숙하게 처리할걸?
> - 헤르만 괴링
  • 교도소 심리학자 구스타프 길버트가 시행한 IQ 테스트 결과 129로 또라이라는 주변인들의 평에 비해선 높게 나온 편이다.
  • 영국 대사 시절 행적으로 인해 당시 시대상을 다룬 소설 남아있는 나날에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리벤트로프'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헨켈 트로켄(Henkell Trocken). 한국에서도 대형 마트나 백화점에서 독일산 샴페인으로 팔리고 있다.[3] 그의 아내이던 안나 엘리자베스는 거만하고 자존심이 강한 여자라서 남편을 좌지우지했다고 한다.[4] 백부가 귀족이었다.[5] 공식 직함은 총통 외교 보좌관이다.[6] 리벤트로프에 대한 괴벨스의 혐오감은 그의 일기에도 나타나 있는데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돈을 목적으로 결혼해 그대로 관직에 올랐다"라고 적혀 있다.[7] 그의 이전 경력을 두고 비웃는 말.[8] 헤르만 괴링은 리벤트로프가 영국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그가 바보임에 틀림없다고 지적하였고, 이 말을 들은 히틀러가 "그래도 그는 많은 영국 측 중요 인물들을 잘 알고 있지 않소."라고 하자, 괴링이 대답하기를, "총통 각하, 올바른 지적이십니다. 하지만 나쁜 일은, 그들이 그를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9] 영국 대사로 재임시 에드워드 8세의 연인인 심슨 부인과도 관계를 맺었다.[10] 그는 외무장관이기 때문에 전쟁을 벌여봤자 공을 세울 기회가 없다. 더욱이 대소전은 자기 성과인 불가침 조약을 갈아엎는 짓이다.[11] 10일 후인 4월 30일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살했다.[12] 그 유명한 히틀러 유겐트의 총책임자. 재판에서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이 남자가 젊은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리라고 믿었다."'''라고 했다고 한다.[13] 제3제국의 외국인 노동력 징발 총책임자. 자신이 노동력 동원을 주도한 점은 인정했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이 당한 가혹 행위나 부당한 처우, 살해 등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14] 독소전쟁으로 인해 2000만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자국민이 고통스럽게 사망한 소련 입장에서는 나치 전범 사형수들이 롱 드롭으로 편하게 사형당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치 전범들 중 사형수들은 전부 추가적인 고통을 주면서 집행하라고 강하게 요구한 것이다.[15] 윈스턴 처칠은 진주만 공습을 전해 듣고 동일하지만 상반된 결론에 도달해서, "그렇다면 우리가 이겼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16] 이 사실은 당시 영국인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신문에서는 "독일 대사는 아들을 영국식으로 교육시킨다.", "꼬마 리벤트로프는 독일로 돌아가면 나치 인사를 기억이나 할까?" 이런 식으로 썼을 정도. 리벤트로프와 동시기에 영국 주재 이탈리아 대사를 지낸 디노 그란디는 친구인 외무부 장관 갈레아초 치아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일화와 리벤트로프의 실언을 언급하며 무능한데다 영국인들에게 얕잡아보였다고 까댔다.[17] 출처: 위키소스[18] 나무같다는 말은 유럽권에선 허우대만 대충 멀쩡하고 내실은 없다는 소리이다. 반의 표현은 '강철 같은, 화강암 같은' 정도.[19]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