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둘 라흐만 야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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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하신 동네 할아버지...?
Tun Datuk Patinggi Haji Abdul Rahman bin Ya'kub, 1928.1.3 ~ 2015.1.9
사라왁의 3대 총리이자 4대 총독을 지낸 정치인.
1928년 1월 3일 빈툴루에서 무카계 믈라나우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사라왁 원주민 출신으로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기독교인들인데 반해 그의 집안은 이슬람 신자였다. 어렸을 때 교육 문제로 미리로 이주하여 이슬람학을 공부했다. 일본 무술인 아이키도를 배웠는데 운 좋게도 아이키도의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안이 쫄딱 망하는 바람에 학업을 일찍이 그만두어야만 했고 석유회사의 노동자로서 막노동을 하는 삶을 살았다. 당연히 임금은 적었고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야쿱은 사라왁 일반 병원으로 가서 일해보기로 하지만 병원측은 걸레질같은 막일만 시켰고 '''하루만에''' 그만두었다. 그러던 중 학생회에서 새 직업을 얻었고 쿠칭의 한 이슬람 학교로 보내졌다. 시험에서 통과한 그는 사우샘프턴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서 법률학을 공부했다. 곧바로 그는 변호사로 취직했고 최초의 원주민 출신 변호사라는 이력(?)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정계 입문 제의를 받은 그는 사라왁 국민당(PANAS[1] )과 진짜 사라왁 인민당(BARJASA[2] )를 창당하여 두 정당에서 동시에 활동하지만, 결국 PANAS를 탈퇴하고 BARJASA를 위해서만 일한다. 왜냐하면 PANAS가 지나치게 말레이인 엘리트들이 거며쥐고 있었고 비말레이인인 그는 이를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3년 사라왁의 초대 총리로 추대되었으나 그에 대해 대대적인 배신감을 느낀 PANAS는 그에 대해 대대적인 중상모략을 벌였고 결국 내정 취소라는 꼴을 면하지 못했다.
사실 그를 초대 총리로 내정한 것은 다름아닌 '''말라야 중앙정부'''였다. 이전부터 사라왁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주민들 사이에서 독립열기가 날로 갈수록 번졌다. 문제는 사라왁이 스스로 독립할 힘은 없었다는 것. 이 때 싱가포르의 주수상인 리콴유가 당시 사바의 독립 지도자였던 툰 푸아드 스테픈스에게 "일단은 말라야에 몸 좀 맡겨두자"고 제안했는데, 이후로 사바가 말레이시아로의 잠정 편입을 결정했고 사라왁이 이를 따랐던 것. 그런데 문제는 사라왁이 말레이시아에 가입하도록 주도했던 건 다름아닌 '''야쿱 본인'''이었다. 연방정부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를 예뻐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를 총리로 세우고자 조종하기 시작했던 것.
여하튼 이 때문인지 그는 연방정부의 선동에 넘어가기 시작했고 서서히 민족 반역자로 돌변했다. 1965년 초대 총리 스테픈 칼롱 닝칸을 주도로 사라왁 주민들의 토지 소유를 전면 허락하는 법안을 제안했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의 토지 소유가 용이해지자(당시에는 말레이인만이 소유 가능) 하지 오펭 등과 중상모략을 벌였고 결국 닝칸은 이듬해 축출된다.
한편 당시 사라왁은 일본의 나리타처럼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하던 곳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고집센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는데 정부 입장에서는 당연히 눈엣가시였다. 이에 제2대 연방총리이자 독재자인 압둘 라작은 야쿱을 불러 공산주의자를 척결하라고 지시했는데, 이 때부터 그는 연방정부의 말을 '''무조건 따르기 시작'''했다.
1969년 본토에서 5.13 폭동이 일어나자 사라왁의 천연자원 소유권이 주정부에서 연방정부로 넘어갔는데, 야쿱은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대놓고 '''협력'''했다. 그리고 1970년 총리에 취임한 뒤 닝칸 시절부터 내걸었던 "사라왁인의 사라왁"이라는 슬로건을 대놓고 버려버리고 대신에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를 내걸어 '''공개적으로 반역을 선포'''했다. 이미 본토의 여당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의 당원이었던 그는 사라왁을 UMNO의 기반으로 만들고 이슬람화를 추진하려는 수작을 부렸고 이 과정에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식민정부의 앞잡이가 된 그는 11년동안 집권하며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1981년 그는 압둘 타입 마흐무드에게 총리직을 넘기고 사퇴했으나 대신에 그보다 더 '''위'''인 총독에 올랐다. 물론 내각책임제인 관계로 총독은 실권이 없지만, 그는 여전히 타입을 꼭두각시로 조종했고 이후 타입과 여러모로 관계가 틀어진다. 이후 1987년 총선에서 타입의 세력이 승리하자 '''아예 한 판 붙었다.'''
그 후 정계를 떠나 조용히 살다가 2015년 1월 3일 87세 생일을 맞이했고 6일 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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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하신 동네 할아버지...?
Tun Datuk Patinggi Haji Abdul Rahman bin Ya'kub, 1928.1.3 ~ 2015.1.9
1. 개요
사라왁의 3대 총리이자 4대 총독을 지낸 정치인.
2. 생애
1928년 1월 3일 빈툴루에서 무카계 믈라나우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사라왁 원주민 출신으로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기독교인들인데 반해 그의 집안은 이슬람 신자였다. 어렸을 때 교육 문제로 미리로 이주하여 이슬람학을 공부했다. 일본 무술인 아이키도를 배웠는데 운 좋게도 아이키도의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안이 쫄딱 망하는 바람에 학업을 일찍이 그만두어야만 했고 석유회사의 노동자로서 막노동을 하는 삶을 살았다. 당연히 임금은 적었고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야쿱은 사라왁 일반 병원으로 가서 일해보기로 하지만 병원측은 걸레질같은 막일만 시켰고 '''하루만에''' 그만두었다. 그러던 중 학생회에서 새 직업을 얻었고 쿠칭의 한 이슬람 학교로 보내졌다. 시험에서 통과한 그는 사우샘프턴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서 법률학을 공부했다. 곧바로 그는 변호사로 취직했고 최초의 원주민 출신 변호사라는 이력(?)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정계 입문 제의를 받은 그는 사라왁 국민당(PANAS[1] )과 진짜 사라왁 인민당(BARJASA[2] )를 창당하여 두 정당에서 동시에 활동하지만, 결국 PANAS를 탈퇴하고 BARJASA를 위해서만 일한다. 왜냐하면 PANAS가 지나치게 말레이인 엘리트들이 거며쥐고 있었고 비말레이인인 그는 이를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3년 사라왁의 초대 총리로 추대되었으나 그에 대해 대대적인 배신감을 느낀 PANAS는 그에 대해 대대적인 중상모략을 벌였고 결국 내정 취소라는 꼴을 면하지 못했다.
3. 사라왁이 말레이시아에 통합되다
사실 그를 초대 총리로 내정한 것은 다름아닌 '''말라야 중앙정부'''였다. 이전부터 사라왁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주민들 사이에서 독립열기가 날로 갈수록 번졌다. 문제는 사라왁이 스스로 독립할 힘은 없었다는 것. 이 때 싱가포르의 주수상인 리콴유가 당시 사바의 독립 지도자였던 툰 푸아드 스테픈스에게 "일단은 말라야에 몸 좀 맡겨두자"고 제안했는데, 이후로 사바가 말레이시아로의 잠정 편입을 결정했고 사라왁이 이를 따랐던 것. 그런데 문제는 사라왁이 말레이시아에 가입하도록 주도했던 건 다름아닌 '''야쿱 본인'''이었다. 연방정부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를 예뻐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를 총리로 세우고자 조종하기 시작했던 것.
여하튼 이 때문인지 그는 연방정부의 선동에 넘어가기 시작했고 서서히 민족 반역자로 돌변했다. 1965년 초대 총리 스테픈 칼롱 닝칸을 주도로 사라왁 주민들의 토지 소유를 전면 허락하는 법안을 제안했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의 토지 소유가 용이해지자(당시에는 말레이인만이 소유 가능) 하지 오펭 등과 중상모략을 벌였고 결국 닝칸은 이듬해 축출된다.
한편 당시 사라왁은 일본의 나리타처럼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하던 곳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고집센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는데 정부 입장에서는 당연히 눈엣가시였다. 이에 제2대 연방총리이자 독재자인 압둘 라작은 야쿱을 불러 공산주의자를 척결하라고 지시했는데, 이 때부터 그는 연방정부의 말을 '''무조건 따르기 시작'''했다.
1969년 본토에서 5.13 폭동이 일어나자 사라왁의 천연자원 소유권이 주정부에서 연방정부로 넘어갔는데, 야쿱은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대놓고 '''협력'''했다. 그리고 1970년 총리에 취임한 뒤 닝칸 시절부터 내걸었던 "사라왁인의 사라왁"이라는 슬로건을 대놓고 버려버리고 대신에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를 내걸어 '''공개적으로 반역을 선포'''했다. 이미 본토의 여당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의 당원이었던 그는 사라왁을 UMNO의 기반으로 만들고 이슬람화를 추진하려는 수작을 부렸고 이 과정에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식민정부의 앞잡이가 된 그는 11년동안 집권하며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1981년 그는 압둘 타입 마흐무드에게 총리직을 넘기고 사퇴했으나 대신에 그보다 더 '''위'''인 총독에 올랐다. 물론 내각책임제인 관계로 총독은 실권이 없지만, 그는 여전히 타입을 꼭두각시로 조종했고 이후 타입과 여러모로 관계가 틀어진다. 이후 1987년 총선에서 타입의 세력이 승리하자 '''아예 한 판 붙었다.'''
그 후 정계를 떠나 조용히 살다가 2015년 1월 3일 87세 생일을 맞이했고 6일 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