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둘 라작

 


1. 소개
2. 생애
3. 업적
4. 유산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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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B Tun Abdul Razak bin Hussein, 1922. 3.11 ~ 1976. 1.14
'''툰쿠 압둘 라만과 더불어 말레이시아의 독립 운동을 주도한 국부'''.
말레이시아의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로 1970년부터 1976년까지 제2대 총리로 지낸 사람이다. 그 이전에 초대 부총리를 지낸 바 있다.

2. 생애


1922년 3월 11일, 파항프칸에서 태어났으며 집안의 장남이었다. 비록 그가 말레이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인도네시아계 원주민부기스 혼혈이다. 쿠알라캉사르 말레이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싱가포르로 건너가 래플스 대학교에서도 추가적으로 공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당시 말라야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으로 건너가 법학을 전공했고 변호사(Barrister) 자격을 얻었다. 후에 영국 노동당에 입당하여 말레이인 당원들과 함께 일하지만,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서러운 조국의 실정을 알고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독립의 주체로 알려진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의 청년당원으로 입당하였고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파항의 총리대신이 된다.
1955년 사상 첫 총선 당시 자신의 지역구인 프칸에서 승리하였고, 이후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2년동안 조국해방을 주도할 일원으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보여왔으며 1957년 독립과 함께 말레이시아의 초대 부총리로 취임한다.
1965년 싱가포르가 축출된 이후 그는 젊은 피 수혈에 열을 올렸고 대대적인 신입을 영입하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 1970년 툰쿠 압둘 라만 총리가 사임한 후 총리직을 승계했으나, 6년 뒤 영국에서 급서하였다. 향년 54세. 역대 말레이시아의 총리들 중 '''유일하게 재직 중 사망한 사람'''이었다.

3. 업적


오늘날 초대 수상인 툰쿠 압둘 라만과 더불어 말레이시아의 국부로서 추앙받는다. 물론 희망동맹(PH)이라는 야권을 중심으로 그를 왜곡하는 경우가 많고, 당장 나무위키에도 PH 지지자가 쓴 듯 원색적인 비난으로 점철된 적이 있었다. 실제로 그의 행보들 중에는 독재로 의심받는 것들도 있기는 했지만, 뭐는 독재 소리를 안 들을까? 사람이 100% 착하거나 올바를 수는 없는 법이고, 특히 정치를 하다 보면 비판은 꼭 존재하게 되어 있다.
라작 총리는 5.13 사건으로 어수선해진 말레이시아를 지키기 위해 일명 Rukun Negara를 도입했다. 이 Rukun Negara는 특별한 정책인 것은 아니고, 쉽게 말하면 국민의례 같은 것이다. 애초에 5.13 사건이 인종폭동이었고, 이 원인은 민족 간의 갈등이었기 때문에, 이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는 "신을 향한 믿음", "헌법 수호" 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말레이인의 사회적 지위가 약하다고 판단해 일명 부미푸트라 정책을 도입했는데, 이는 부미푸트라, 즉 말레이인을 포함한 원주민들의 특별 권리를 존중하는 한편 그들을 사회적으로 약간 더 우대하는 정책이다. 부미푸트라는 수 백년이라는 긴 세월을 말레이시아 땅에서 살아 왔지만 영국령 시절에 급격하게 들어온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에게 밀려 2등, 3등으로 격하되었다. 비록 전임자인 라만 시절에 말레이인을 다소 우대하는 정책이 있기는 했지만, 큰 실효를 보지 못했고, 라작은 확실히 실효성이 있으면서도 타 민족을 존중하는 정책을 통해 민족 간의 화합을 도모했다. 가령, 경제적 지위를 말레이인, 비말레이인, 외국인에게 각각 4:3:3으로 정해서 말레이인에게 약간 더 높은 지위를 주는 한편, 말레이시아 인구의 다수민족인 말레이인 무슬림의 특별 지위를 더 존중해서 말레이 이슬람 정신을 보호하는 것이다(이를 헌법 제153조라고 한다).
이러한 정책 덕에 말레이시아는 본격적인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고, 말레이인의 생활 수준이 급격하게 향상되었다. 현재 말레이인의 사회적 지위는 과거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높아졌으며, 부유한 말레이인들도 흔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정책들은 민주행동당(DAP), 인민정의당(PKR) 등 야권으로부터 "독재적",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고, 특히 말레이시아 야권 중 역사가 가장 오래 된 DAP는 라작을 독재자,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나무위키의 이 문서 또한 이전에는 친야권 성향이 쓴 듯 원색적인 비난으로 가득했다. 당장 Rukun Negara 도입 과정에서의 계엄령 선포라던가, 부미푸트라 정책 도입 등에 대한 비판은 야권으로부터 여전하다.
하지만 5.13 사건으로 말레이시아 사회가 매우 어지러웠기 때문에 계엄령 선포는 불가피했고, 무엇보다도 야권에서는 이 시절 야권인사들, 반대파들이 대거 투옥되었다고 비판하나, 실제로 투옥된 사람들은 폭동 주도자들, 내란 선동가들이었지, 일반 야권인사들을 무더기로 투옥하지는 않았다. 거기다가 라작의 대표적인 정적이었던 DAP의 실권자인 림킷시앙은 5.13 사건의 주동자였고, 이 뒤에는 라작의 후임 중 하나인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가 암묵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작 야권의 비판·비난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꼴이 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부미푸트라 정책은 야권으로부터 그토록 인종차별적이라고 비난을 받아왔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서도 평가 절하되었다. 그러나 중국인의 경제권이 너무 센 상태에서, 이 정책이 없었으면 과연 말레이인들이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돈의 무서움을 감안한다면,[1] 중국인이 수적으로는 말레이인에게 밀려도 말레이인을 아주 장악해서 대놓고 말레이 정신을 말살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거기다가 말레이시아의 중국인들은 이웃한 인도네시아나 태국과는 달리 현지인으로서의 동화를 거부하고,[2] 아직도 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면서 말레이시아화를 거부한다. 설상 동화되었더라고 해도, 인도네시아나 태국도 그렇듯이 말레이인 우대는 그대로 있었을 것인데, 하필 동화를 거부했으니 어쩌면은 당연한 처사이다.
다만 비판의 여지를 떠나서, 한 가지 실수가 있다면 그것은 라만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가 출당된 마하티르의 복당을 허락한 것이다. 훗날 마하티르는 총리에 오른 뒤 계파 갈등을 조장해서 UMNO가 위헌정당으로 찍히는 데 일조했으며, 이 때문에 신UMNO로 재창당하게 되었다. 지금의 UMNO는 그래서 신UMNO다. 그래도 경제는 살렸으니 좋지 않은가...할 수도 있겠지만, 한참 뒤 마하티르가 겉으로는 말레이인 우대를 주장하면서 뒤에서는 DAP에게 말레이인을 모독하라고 지시한 것이 밝혀지면서 마하티르의 복당을 허락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라작은 사후 말레이시아의 국부로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고, 그의 아들 중 하나인 나집 라작은 이러한 라작의 후광을 받아 라작의 지역구를 계승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라작 사후 33년이 지난 2009년 총리에 오르면서 대표적인 부자(父子) 지도자가 되었다. 다만 나집의 경우 부친의 후광을 일부 깎았다는 비판이 존재하기는 하나, 상당수가 문제가 많은 PH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걸러서 보자.

4.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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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르 툰 라작이 적힌 체라스의 이정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국부로서 지명으로 꼭 들어가곤 한다. 여기를 보면 나무위키에 다 적기에는 손이 아플 정도로 많다.
[1] 실제로 절도나 소매치기 같은 범죄들도 주로 돈 때문에 발생한다.[2] 다만 여기에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중국인에게 자치권을 지나치게 부여한 것도 한 몫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