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시바 모리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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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芝 盛平
1883년 12월 14일 - 1969년 4월 26일

合気とは、敵と闘い、敵を破る術ではない。世界を和合させ、人類を一家たらしめる道である。合気道の極意は、己を宇宙の動きと調和させ己を宇宙そのものと一致させることにある。私はこのことを武を通じて悟った。

합기는 적과 싸워 적을 막는 기술이 아니다. 세계를 화합시키고 인류를 하나가 되도록 하는 길이다. 아이키도의 비법은 나를 우주의 움직임과 조화시켜 자신을 우주 자체와 일치시키는 데 있다. 나는 이것을 무를 통해서 깨달았다.

1. 소개


1. 소개


아이키도(合気道) 의 창시자이자, 일본의 무술가로, 아이키도의 시조이다. 아이키도 측에서는 개조(開祖 카이소), 큰스승(大先生/翁先生 오오센세)이라고 부른다.
1883년[2] 12월 14일, 와카야마현 다나베(田辺)시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키도류(起倒流) 등 여러 무술을 배우다가 러일전쟁 때 일본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종군했다. 1907년 제대하여 홋카이도 개척민으로 건너갔다가 대동류 합기유술의 시조인 다케다 소가쿠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1919년 홋카이도를 떠나 본토로 돌아가 신토계 신흥종교 오모토에 입교하여 교단의 무술사범이 되었고 여기서 첫 도장을 열었다.[3] 우에시바의 종교적 면에는 오모토의 성사(聖師)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郞 1871-1948)가 큰 영향을 끼쳤다.
데구치 오니사부로는 1910-1940년대에 걸쳐 일본의 종교계와 사회에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주목받은 인물이다. 오니사부로의 초명은 우에다 키사부로(上田喜三郞)인데, 스스로 산에 들어가 주문을 외우며 수행하고, 스승 나가사와 카츠타테(長沢雄楯) 밑에서 혼다 영학을 배우는 등 신토식 술법과 사상을 깊이 익힌 종교인이었다. 1898년, 아야베에서 신들림 증상을 보이며 추종자들을 끌어모으던 가난한 과부 노파 데구치 나오(出口なお 1837-1918)와 만나 나오의 막내딸 스미코(すみ子)와 결혼하고 데구치家에 입적되어 이름을 데구치 오니사부로라고 바꾸었다. 이후 나오를 교주로 하는 종교단체 오모토를 세웠는데, 오모토 교단은 오니사부로가 나오와 함께 공동교조라고 인정한다.[4] 나오와 오니사부로는 둘 다 종종 신들림을 하였는데 서로 신들린 채로 격렬하게 싸웠다. 이 때문에 나오의 추종자들이 오니사부로를 적대하는 등 갈등이 깊었으나, 결국 나오가 오니사부로를 종교적으로 권위를 인정하였다. 1918년 나오가 사망하자 나오의 막내딸이자 오니사부로의 아내인 스미코가 2대 교주가 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오니사부로가 교단의 지도자였다.
오니사부로는 혼다 영학에서 배운 진혼귀신법(鎮魂帰神法)이란 술법을 오모토 교단에 전하였다. 진혼귀신법은 손으로는 수인을 맺고 입으로는 주문을 외우면서 인위적으로 신내림을 받게 한 뒤, '사니와(審神)'라는 판정자가 어떤 신이 들렸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오니사부로는 그 자신이 사니와가 되어 데구치 나오에게 들린 신을 '판정'했고, 오모토 교단에 입교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진혼귀신법을 시켰다. 이는 입교자가 신들림 체험을 겪게 하여 영적 세계를 확신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우에시바 역시 오모토 교단에 입교하여 오니사부로를 통해 진혼귀신법을 체험하였다.'''
우에시바가 이후 오모토에 입교한 후 아야베의 오모토 본부에 도장을 차렸던 것이나, 이후 별도로 종교체험을 하여 종교적 성향이 깊어진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오모토와 데구치 오니사부로의 영향이 있었다. 1921년 1차 오모토 사건 때 진혼귀신법이 일본 정부와 언론으로부터 사교(邪敎)라고 공격받는 빌미가 되자, 오니사부로 "신계의 대본영에서 명령이 있었다."라고 설명하며 자기 손으로 진혼귀신법을 묻어버렸다. 아직까지도 오모토 교단은 이 술법을 금지한다.
오니사부로는 당시까진 아직 무명의 젊은 무술인이었던 우에시바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 옆에 두어 측근으로 삼았다. 당시 일본에서 교세를 팽창하던 오모토 교단에 여러 지위 있는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는데, 오니사부로는 우에시바와 동석하여 손님을 맞곤 했다. 이때의 경험이 우에시바는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과 안면을 트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오니사부로의 지도 아래 신토식 수행을 계속 했다. 1921년 1차 오모토 사건이 일어나 교단이 공격을 받았지만, 우에시바는 여전히 오모토 신자로 남았다.
1924년, 우에시바는 오니사부로와 함께 몽골로 선교 여행을 갔으나[5] 중국군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던 끝에 우에시바는 이듬해에 엄청난 영적 개명을 경험했고, 그 이후 무술 실력이 갑자기 더욱 고강해졌다고 한다. 1926년 도쿄로 이사하여 아이키카이 본부 도장을, 1931년 황무관(皇武館)이라는 도장을 세워 황족, 군인, 사업가 등의 자제들을 가르치며 명성을 쌓았다.
1935년 일본에서 제2차 오모토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정부는 오모토 교단이 반역을 꾀한다는 혐의로 교단 재산을 압류하고 나오의 무덤을 파헤쳤으며, 건물을 파괴하고 오니사부로 등 교단의 지도부급 인사를 연행하는 등 초법적으로 탄압하여 교단이 붕괴 직전에 놓였다. 3대 교주의 남편이자 오니사부로의 사위인 데구치 히데마루(出口日出麿)는 고문을 받아 정신이상이 왔을 정도였다. 1차 오모토 사건 때와 비교해도 유달리 가혹한 탄압의 시기에 우에시바는 오모토를 떠났다.[6] 그러나 오모토 신자로 있는 동안 받은 종교적 영향은 이후의 삶에도 짙게 남았다.
30년대 말부터 제자들이 우선적으로 징병되어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가자 도장의 활동을 꾸준히 줄였다. 1942년에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전쟁을 비판했으며, 전시정책의 일환인 대일본 무덕회(大日本武徳会)의 통제를 거부하고 이바라키현 이와마정(岩間町: 현 카사마시笠間市)에 은거하기도 했다.[7] 1944년에는 이와마정에 아이키 신사(合気神社)를 세우고 스사노오타케미카즈치 등 일본에서 전통적으로 무(武)나 힘(力)과 관계된 신령 43위를 모셨다. 우에시바는 스스로 아이키 신사를 "아이키도의 산실"이라고 설명했다고 하는데, 아이키 신사는 오늘날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이바라키현 카사마시 요시오카(吉岡)에 있다.
전쟁이 끝나고 1948년 재단법인 아이키카이(合気会)를 설립한 뒤 아이키도(合気道)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다. 대전 말기부터 1960년대까지 일본은 물론 전세계에 아이키도 전파에 힘썼다.
1969년 4월 26일, 향년 만 85세로 도쿄에 있는 저택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날 일본 정부는 우에시바에게 아이키도를 창시하고 보급한 공으로 훈장을 추서하였다. 무덤은 고향 다나베시에 있는 코잔사(高山寺)에 마련하였다. 계명[8]은 아이키원 성무원융 대도사(合氣院盛武円融大道士). 해석하면 '아이키도의 무(武)가 높아 원융의 경지에 오른 대도사'
이와마정에서는 우에시바가 죽자 명예 정민(町民)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또한 아이키 신사에서는 우에시바의 사망일과 가까운 4월 29일에 '아이키 대제(合気大祭)'라는 이름으로 예대제를 거행하는데, 이때에는 세계 각지에서 아이키도 수련자가 찾아오곤 한다.
만화가 이타가키 케이스케바키도 71화에서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일화를 간략히 설명했다. 1990년쯤 모리헤이의 수제자 시오다 고조를 인터뷰하면서 몇 번인가 들은 일화라고 한다. 이타가키가 설명한 간략한 내용에 배경지식을 합쳐 설명하면 이러하다.
오모토는 우익적인 분위기를 띠면서도 은근슬쩍 천황의 권위를 상대화하고 현세를 부정하는 종말론적인 경향이 있었다. 오모토는 교세를 빠르게 확장했거니와 특히나 군 장교 중에도 입교하는 사람이 많아서, 일본 정부는 오모토 교단이 무장반란을 꾀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결국 1921년 경찰은 교단의 지도부를 체포하고 언론들은 오모토를 사교라고 대대적으로 비난하는 '1차 오모토 사건'이 벌어졌다. 무장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의심했기 때문에 경찰들은 강경하게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그런데 당연히 교단의 지도자 데구치 오니사부로[9]의 측근 우에시바 또한 체포해야 했다.
근데 당시 경시청은 그의 지도를 받고 있어서 그의 실력이 굉장함을 알있기 때문에 사람 한 명에게 쓰기엔 과하기 짝이 없는 작전을 짜냈다고 한다. 우선 소방차로 우에시바를 포위하고, 일제히 방수하여 무력화시킨 다음에 투망을 씌워 사람보다 2~3배를 길어 보이는 기다란 장대로 여러 명이 내리쳐서 저항하지 못하게 한 후 체포한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고조의 말에 의하면 이 작전은 우에시바가 몸을 숨기고 들키지 않았기에 실행되지 않았으나 당시 경찰이 그 정도로 우에시바의 무력을 무서워했다고...
또다른 일화도 있다. 1941년 일본 육군헌병학교에서 검도 대신 우에시바의 무술을 교과로 채택하자, 어느 헌병대장이 여기에 불만을 품고 부하 대여섯 명에게 지시를 내려 목검을 들고 밤에 숙소를 습격했지만 모두 제압당했다고 한다.[10]

[1] 젊은 시절[2] 일본의 연호로는 메이지 16년, 조선에서는 고종 재위 20년이었다.[3] 이 때문인지 지금도 오모토 교단에서는 아이키도 관련 세미나를 열기도 하는 등 아이키도와 관계가 깊다.[4] 오모토 교단은 나오를 개조(開祖), 오니사부로를 성사(聖師)라고 부른다.[5] 오니사부로가 몽골에서 만주에 이르는 종교국가 고려국(高麗國)을 건국하고자 떠나자 경호원으로서 동행을 하였다.[6] 우에시바만이 아니라 오모토에 입교한 나름 명망 있다는 사람들이 이 무렵에 대거 교단을 떠났다.[7] 은거 중 영친왕과의 만남과 일화에 대해 자서전에 기록했다.[8] 일본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다 부처가 된다 하여, 승려가 아닌 이라도 죽은 뒤에는 (마치 승려가 되거나 수계를 한 듯이) 계명(법명)을 지어준다. 우리나라 불교에는 이런 관습이 없다.[9] 당시 공식적인 교주는 오니사부로의 아내 스미코였지만, 교단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오니사부로였기 때문에 일본 언론들은 오니사부로를 그냥 '교주'라고 보도했다.[10] 이 습격을 주도했던 인물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였던 아라카와 히로시의 사촌이라 한다. 그 사촌은 후일, 아이키도를 수련하는 아라카와 히로시에게 습격 당시를 회상하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