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나시르
1. 개요
재위 1180년 3월 28일 ~ 1225년 10월 5일الناصر لدين الله
앗 나시르 리디닐라
생몰 1158년 8월 6일 ~ 1225년 10월 5일
아바스 왕조의 34대 칼리파. 마지막으로 위대한 압바스 칼리파로 평가받는다. 안정된 이라크를 물려받은 앗 나시르는 과거 강력했던 압바스 조를 복원하려 시도하였다. 우선 그는 쇠퇴해가던 셀주크 제국에서 섭정 키질 아르슬란이 술탄을 칭하도록 사주해 이란을 더욱 분열시켰고, 이후 호라즘 제국의 손을 빌려 마지막 셀주크 술탄인 토그릴 3세를 제거하였다. 동시에 내전을 틈타 1189-90년에는 티크리트, 1190-91년에는 하디싸와 아나를 점령하며 쿠르드 지방을 제외한 현 이라크 공화국 영토를 얼추 확보하였다. 1195년에는 후제스탄을 정복하며 930년대 이후 압바스 조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하지만 이후 호라즘 조가 이라크를 압박하자 몽골 제국의 칭기즈칸에게 호라즘을 공격해 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그의 치세에 압바스 조는 호라즘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증손자 알 무스타심이 30여년 후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에게 처형되고 왕조가 사실상 멸망하게 되었다. 다만 앗 나시르의 반세기에 이르는 장기간의 통치 기간동안 이라크와 바그다드는 9세기 이후 유례없는 평화의 시기를 보내며 번영하였다.
2.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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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탄시리야와 함께 바그다드의 몇 안되는 압바스 시대 건축물인 앗 사라이 모스크 (1193년 건립)
1182년 11월 살라흐 앗 딘이 모술을 포위하자 앗 나시르가 개입하기 위해 북상하였다. 동시에 토그릴 3세 역시 남하하자 살라흐 앗 딘은 신자르로 후퇴하였다.
1183-84년 경 앗 나시르는 키르쿠크 남쪽의 다쿠크를 점령하였다.
1186년 마침내 살라흐 앗 딘은 모술의 복종을 받으며 레반트 일대의 이슬람 지역을 통합하였다. 같은해 케르만 셀주크가 오우즈의 침공으로 멸망하며 셀주크 조의 세력은 이란 서부로 축소되었다. 1187년 살라흐 앗 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며 이슬람의 3번째 성도가 한세기 만에 압바스 칼리파의 이름 하에 수복되었다.
2.1. 셀주크 제국의 멸망
1187년 7-8월, 키질 아르슬란이 라이에 당도한 직후 토그릴은 아타베그 진영을 이탈하여 동쪽의 셈닌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바반드 왕조의 후삼 앗 다울라 등 왕공들의 지지를 얻은 토그릴은 일종의 근왕병을 편성하여 서진, 수도 하마단을 점령하였다. 키질 아르슬란은 북부로 도주하였고, 그 틈에 쿠틀루그 이난즈와 아미르 아미란 형제가 아타베그 진영에서 이탈하여 합류하였다. 한편 11월 7일 아잠 (이란 서부)를 떠나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한 키질 아르슬란은 바그다드로 사절을 보내 셀주크 술탄의 커져가는 힘을 경고하며 칼리파에 복속하는 대가로 원군을 청하였다. 아잠 일대를 장악한 토그릴 역시 사절을 보내와 자신을 술탄으로 책봉하고 자신이 거주할 바그다드의 다르 알 술탄 (술탄 궁전)을 보수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던 앗 나시르는 토그릴의 서신을 받자 곧바로 술탄 궁전을 흔적도 없이 밀어버리며 노선을 확실히 하였다. 이러한 적개심의 표현 후 앗 나시르는 60만 디나르를 들여 군대를 편성하였다.
1188년, 1만 5천의 기병이 모이자 그해 4월에 와지르 (재상) 이븐 유누스가 사령관을 맡아 출정하였다. 잘랄 앗 딘 우바이둘라 이븐 유누스는 키질 아르슬란과의 합류도 기다리지 않은채 곧바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하마단을 향해 진군하였다.[1] 도중 다이마르그에서 토그릴의 진영과 마주친 이븐 유누스는 이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압도적인 병력에도 불구하고 족장 마흐무드 바르잠 알 이바이 휘하의 튀르크멘 병력이 술탄 진영으로 배신하며 칼리파 군은 패배하였고 이븐 유누스는 포로가 되었다. (1188년 5월 5일) 약 반세기 전 같은 길을 따라 행군했던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와 마찬가지로 참패를 겪은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때와 달랐다. 앗 나시르 본인은 무사했고, 이라크 전역에서 모인 세금으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재차 하마단을 향해 출정하던 그해 7월 무렵, 토그릴 3세는 휘하의 주요 아미르들 중 아이바와 오자다 등을 처형하였다.
비록 승리하였지만 술탄 측의 피해도 적지 않던 상황에서 젊은 술탄의 독단적인 행보는 군부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 앞서 전향하였던 쿠틀루그 이난즈가 재차 토그릴 진영을 떠나 숙부 키질 아르슬란 편에 가담하였다. 그와 함께 키질 아르슬란은 1년만에 아잠으로 귀환하였고, 이번에는 칼리파 군대도 약속한 장소에서 아타베그와 합류하였다. 연합군은 어렵지 않게 하마단을 점령하였고 8-9월 무렵 키질 아르슬란은 토그릴의 5촌 당숙인 산자르 이븐 쉴레이만샤를 술탄으로 추대하였다.[2] 계속된 전쟁 끝에 전세가 불리해진 토그릴은 아잠을 포기하고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토그릴은 튀르크멘 영주 이즈 앗 딘 하산 이븐 킵차크의 성채에 피신하여 살라흐 앗 딘 등의 왕공들에게 도움을 청하였지만 허사였다.[3] 내전을 틈타 앗 나시르는 티크리트에 대한 지배권을 수복하였다. 1189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선 무슬림들의 칼리파에 대한 예배가 허용되었다.
한편 포위된 토그릴은 마지막 시도로 그간 칼리파와 앗 나시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아들 알프 아르슬란과 함께 사절단을 바그다드로 파견해 자신을 대신해 사과하게 하고 이븐 유누스에 가한 행위에 용서를 구했으며 칼리파의 명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동시에 키질 아르슬란에게도 사절이 파견되었는데, 그는 제안 자체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칼리파 역시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고, 결국 2년간의 포위 끝에 토그릴은 아타베그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토그릴은 아들 알프 아르슬란과 함께 타브리즈 인근의 카흐란 성채에 구금되었다. (1190년 10월) 이제 거칠 것이 없어진 키질 아르슬란은 앗 나시르의 승인 하에 산자르마저 폐위하고 형수 이나츠 카툰과 결혼한 후 하마단에서 스스로를 술탄으로 선포하였다. 동맹이 아잠 일대를 통치하게 됨으로써 앗 나시르는 북방의 시름을 덜 수 있었다. 그 무렵 칼리파 군은 유프라텐스 중류의 하디싸와 아나를 점령하였다.
그러던 1191년 8-9월 '술탄' 키질 아르슬란이 암살되며 상황은 급변하였다. 키질 아르슬란 사후 그의 네 조카인 아부 바크르, 오즈베그, 쿠틀루그 이난즈, 아미르 아미란이 골육상쟁을 벌였다. 내전은 1195년 누스라트 앗 딘 아부 바크르가 아제르바이잔을 석권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1192년 5월에 자한 팔라반의 맘루크 마흐무드 아나스 오글루에 의해 유배지에서 풀려난 토그릴은 아부 바크르의 추격병들을 따돌리고 재차 튀르크멘들을 포섭하여 군대를 편성하였다. 그러곤 동쪽으로 진군하여 그해 6월 22일, 카즈빈 부근에서 쿠틀루그 이난즈와 아미르 아미란 형제를 격파하였다. 이후 잔여 병력을 흡수한 토그릴은 4년만에 하마단을 점령하고 술탄으로 복위하였다. 그는 술탄의 재물고와 지발에서 이스파한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하였다. 아잠에서 축출된 쿠틀루그 & 아미란 형제는 아제르바이잔의 아부 바크르에게 도전했으나 이 역시 패배하자 각자 라이와 시르반으로 도주하였다.
라이의 쿠틀루그 이난즈는 신생 강대국인 호라즘 왕조의 테키쉬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테키쉬는 군대를 이끌고 와 쿠틀루그 이난즈를 축출하고 라이를 점령하였다. (1192년) 이후 군대를 준비하던 토그릴에 대해 테키쉬는 협상에 나섰다. 그리고 토그릴은 자신의 딸을 호라즘 왕자 유누스 칸과 결혼시키며 테키쉬와 사돈을 맺으며 그에게 복속하였다. 하지만 테키쉬가 동생 술탄 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잠의 세금을 거둔 후 회군하자 토그릴은 준비한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1193년 3월, 토그릴은 호라즘의 라이 총독 탐가치를 전사시키고 호라즘 주둔군을 축출하며 라이를 장악하였다. 30여년 만에 셀주크 술탄이 이란 서부를 석권한 것이다. 하지만 임박한 테키쉬의 반격에 대해 토그릴은 야즈드의 아타베그나 살구르 왕조, 혹은 아부 바크르 등 잠정적인 동맹을 모색하지 않았다. 그나마 쿠틀루그 이난즈와의 우호를 위해 그 모친인 이나츠 카툰과 결혼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엄청난 연상의 정략 결혼은[4] 이난츠 카툰의 토그릴 독살 음모가 탄로나 그녀가 처형되는 것으로 파탄에 이르렀다. 이후 토그릴은 하마단으로 돌아갔고, 쿠틀루그 이난즈는 서북쪽의 잔잔으로 도주하여 재차 테키쉬에게 개입을 청하였다. 이때 앗 나시르 역시 호라즘에 사절을 보내 토그릴에 대한 도움을 부탁하였다. 우선 테키쉬는 7천의 호라즘 병력을 파견하였다. 그러자 1194년에 토그릴은 쿠틀루그 이난즈에 맞서 북상하였고, 호라즘 병력의 존재에도 그를 격파하였다. 잔존 병력과 도주한 쿠틀루그 이난즈는 셈닌에 이르러 테키쉬가 이끄는 호라즘 대군과 합류하였다. 한편 호라즘 측의 하집 (관료) 쉬하브 앗 딘 마수드가 테키쉬의 아들을 술탄 휘하의 라이 총독으로 봉하고 우선 사베흐로 철수할 것을 청해왔다. 토그릴은 이를 아미르들과 논의하였는데, 화의를 수용하거나 최소한 잔잔과 이스파한의 지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다수의 의견을 묵살하고 전투를 결심하였다.
토그릴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쿠틀루그 이난즈가 서신으로 그가 당도할 경우 배신해오겠다는 뜻을 시사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어쨋든 만류에도 불구하고 토그릴은 라이로 향하였고, 호라즘 대군이 당도할 때까지 긴박한 상황임에도 궁전에서 유희를 즐겼다. 마침내 3월 19일, 테키쉬의 대군이 모습을 보이자 토그릴은 농성 대신 군대를 이끌고 회전에 나섰다. 술탄 토그릴은 별다른 작전도 없이 적진의 선발대 중앙부를 향해 돌격하였다. 하지만 이미 전세를 직감한 아미르들은 요지부동이었고, 오직 60명의 근위대만이 술탄의 무모한 돌격에 함께하였다. 짧은 전투 끝에 토그릴은 눈에 부상을 입고 낙마하였고, 그와 악연을 이어가던 쿠틀루그 이난즈가 나서 목숨을 애걸하는 술탄을 참수하였다. 향년 25세였고, 그의 죽음은 대 셀주크 제국의 종말이었다. 이후 그의 몸통은 라이에 효수하고 수급을 바그다드에 보내졌다. 앗 나시르는 이를 궁전 앞의 누비 성문에 메달아 선조들의 넋을 기렸다.
2.2. 호라즘 조의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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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나시르의 금화 (디나르)
셀주크 제국의 완전한 멸망과 함께 호라즘 제국은 하마단에서 메르브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지니게 되었다. 동시에 테키쉬는 기존의 '콰레즘샤' 대신 '콰레즘샤의 아들인 '''술탄''''을 칭하며 위세를 드러내었다. 칼리파의 승인도 없는 행위에 대해 앗 나시르는 불쾌함을 느꼈지만
1198년에야 앗 나시르가 테키쉬를 이란, 호라산, 투르키스탄의 술탄으로 승인하며 갈등은 봉합되었다. 2년 후 테키쉬가 사망하고 아들 무함마드 2세가 술탄으로 등극하였다.
호라즘 술탄 무함마드는 심지어 쉬아파 칼리파를 옹립하곤 바그다드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앗 나시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영토에서 당도한 순례객들을 박대하는 것 정도였다.
1219년 신임 술탄 알 카밀이 5차 십자군에 대해 도움을 청하자 앗 나시르는 대규모의 원군을 약속하였다. 다만 그 전에 십자군이 괴멸되어 파견되지는 않았다.
[1] 본래 한 지점에서 아타베그 측과의 합류를 기다리려 계획하였음[2] 쉴레이먄샤가 호라즘 술탄의 조카딸과 결혼해 얻은 아들[3] 당시 무슬림 연합군을 이끌던 살라흐 앗 딘은 안티오크 공국 원정 도중 군대가 지쳐 후퇴하던 터라 여유가 없었다.[4] 이난츠 카툰은 벌써 자한 팔라비와 키질 아르슬란에 거친 3번째 결혼이었다. 토그릴은 아마 2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