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뷜패즈 엘치배이
(1938년 6월 24일 ~ 2000년 8월 22일)
아제르바이잔의 정치인이자 2대 대통령. 1992년 6월부터 1993년 9월까지 1년 동안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1938년 아제르바이잔 SSR 나흐츠반 ASSR 오르두바드구 캘래키(Kələki)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애뷜패즈 개디르굴루오글루 앨리예프(Əbülfəz Qədirqulu oğlu Əliyev)이다. 엘치배이는 본명이 아닌 가명으로, 엘치(Elçi)는 '사자(使者)'를, 배이(Bəy)는 튀르크인의 칭호인 '베이'를 의미한다. 바쿠 대학의 사학 교수 출신으로 70년대에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1988년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성향의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이 결성할 때 참여해 대표를 지냈다.#
아제르바이잔은 독립과 동시에 아르메니아와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 휩쓸려들어가게 되었는데, 아제르바이잔군의 패전으로 호잘르 학살이 일어나자 공산당 출신으로 온건파였던 뮈탈리보프 정권에 대한 여론은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결국 민족주의 세력의 압력으로 뮈탈리보프가 사임한 이후 치러진 최초의 민주적인 대선에서 엘치베이가 60%대의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이 되었다.#
엘치베이는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외교 정책을 폈으며, 따라서 CIS 가입을 거부하고 아제르바이잔어를 아제르바이잔의 국어로 채택했다. 동시에 엘치베이는 범튀르크주의를 지지하면서 친터키 정책을 폈는데, 처음에는 우호적이였던 이란과의 관계는 엘치베이가 이란 내 아제르바이잔계 소수민족과 연대를 시도하면서 악화되게 되었으며 러시아 또한 점차 아르메니아를 지원하는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다.[1] 엘치베이 집권 기간 동안 전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1993년 봄에는 캘배재르에서, 여름에는 아그담에서 아제르바이잔군은 패배를 거듭하였다.
엘치베이는 이에 아제르바이잔군 지도자였던 수래트 휘세이노프를 해임하려고 하자 수래트 휘세이노프는 제2의 도시인 갠재에서 반란을 일으켜 이내 수도 바쿠에 입성했고, 엘치배이는 바쿠에서 탈출했다.## 엘치배이가 탈출한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구 소련 시기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였던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99% 득표율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엘치베이는 1997년 귀국을 허락받아 다시 바쿠로 돌아왔고, 2000년 암으로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