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1. 개요
2. 원인
3. 전개
4. 결과


1. 개요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은 1988년 2월 20일부터 1994년 5월 16일까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영유권을 놓고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2. 원인


1980년대 말 소련의 최고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민주화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해 소련의 공화국들은 자체적으로 다당제 선거를 실시하면서 지방자치권 역시 크게 강해졌다.[1] 1988년 2월 20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최고 소비에트의 아르메니아인 대표들이 아르메니아로의 귀속 동의를 천명했다. 그러자 아제르바이잔은 자치주를 없애고 카라바흐 지역을 공화국의 직할 통치 하에 두었다. 불과 일주일 뒤 수도 바쿠와 인접한 대도시 숨가이으트(Sumqayıt)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한 아제르바이잔인 주도의 숨가이으트 학살사건(Սումգայիթի ջարդեր / Sumqayıt hadisələri)이 일어난다. 두 나라의 사건에 대한 평은 판이하게 다르다. 아르메니아 쪽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이 자행한 잔악한 학살이라 비난하였으며,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계의 폭동으로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인명 피해가 생겨 진압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1989년 12월 1일, 아르메니아의 최고 소비에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에 합병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같은 해, 아르메니아에서는 17만 명의 아제르바이잔인이, 아제르바이잔에서는 3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추방당했다.
1991년에 소련8월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부터 모스크바 중앙정부의 연방 구성 공화국들에 대한 장악력은 약해졌다. 이에 나고르노카라바흐는 9월 2일 독립을 선언하였고, 11월 4일,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경제 봉쇄로 대응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이미 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 귀속을 요구하는 시위가 수도 예레반에서 수 차례 터진 터라 소련 소속의 두 공화국의 분위기는 더욱 나빠졌고, 결국 소련이 무너진 뒤 '''1992년에 독립한 두 나라의 전쟁이 터지고야 말았다.''' 소련 말기인 1991년 11월,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 독립 세력이 대다수인 스테파나케르트에 포위전을 펼쳤다. 그 결과 169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지만 아르메니아는 방어에 성공하였다. 1992년 2월,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 세력이 대다수인 호잘르(Xocalı, Khojaly)[2]를 폭격하며 점령을 시도하였고, 이 와중에 아제르바이잔 민간인 200여명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호잘르 학살사건(Xocalı soyqırımı / Խոջալուի արյունահեղություն)으로 칭하며 아르메니아의 대표적인 전쟁범죄로서 규탄하고 있다.

3. 전개



일자별로 본 전쟁 경과. 아제르바이잔이 얼마나 땅을 뜯겼는지 알 수 있다(...).
[image]
[3]
아제르바이잔의 행정구(분홍색)와 나고르노카라바흐(초록색)
1993년에 아르메니아군이 대대적으로 아제르바이잔 본토를 침공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영토와 인접한 아그담(Ağdam), 퓌줄리(Füzuli), 재브라이을(Cəbrayıl)과 같은 아제르바이잔 남서부 행정구들을 잇달아 무력 장악하였다. 또한 아르메니아 국경 지역의 아제르바이잔 행정구였던 캘배재르(Kəlbəcər), 라츤(Laçın), 구바들르(Qubadlı), 잰길란(Zəngilan)을 점령하였다. 나고르노카라바흐를 포함하여 이때 차지한 땅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에 이르렀다. 관련 교과서의 내용.
당시 병력 한 명 한 명이 아쉬웠던 아제르바이잔은 찬 밥 더운 밥 안 가리고 지원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치케리야 체첸 반군과 아프가니스탄무자헤딘까지 아제르바이잔 편에 서서 싸웠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전투에서 잇달아 패배했고, 이 때문에 초대 대통령이었던 아야즈 뮈탤리보프와 그 후임인 애뷜패즈 엘치배이가 차례로 물러나야 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보다 인구와 영토가 2배나 큰 나라이다. 막판에 아제르바이잔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이 했던 것처럼, 16세 이상이면 무조건 동원하는 '''인해전술'''까지 펴기 시작했다. 실제로 아제르바이잔은 대대적인 반격으로 퓌줄리구와 본래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영토에 속했었던 호자밴드(Xocavənd)구의 동부 지역을 되찾기는 했다. 하지만 캘배재르 탈환 작전은 실패했다.
이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유효 병력이 아르메니아보다 훨신 많았음에도 아르메니아에 크게 고전했다. 첫째로 아르메니아군은 경험이 풍부한 보병이 위주였던 반면에 아제르바이잔 군대는 바쿠의 유전에서 석유를 캐던 공병 출신들이 많았다. 또한 미국과 러시아가 아르메니아를 적극 지원했으며, 이란은 자국 북부 아제르바이잔인들의 분리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아르메니아 편에 가까운 중립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은 사실상 고립된 상태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그나마 형제국이자 똑같이 아르메니아와 원수지간인 터키가 고문단 파견이나 무기 지원 등 간접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도와주었다. 아주 잠깐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의 나흐츠반 자치공화국으로도 진격한 적이 있었는데, 터키 국경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보니 아제르바이잔의 혈맹인 터키가 아르메니아에 나흐츠반 자치공화국에서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전면전을 벌일 것이라 경고하며 터키군을 국경 쪽으로 이동시키자 바로 아르메니아 군대가 철수하였다. 그래서 나흐츠반 자치공화국은 이 전쟁의 포화에서 별 피해가 없었다. 나흐츠반은 터키의 개입으로 전쟁의 포화는 면한 대신 사실상 아르메니아 편에 선 중립국 이란 탓에 본국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한동안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아제르바이잔으로서는 1993년에 남부 소수민족인 탈리시인이 한 때 일방적으로 자치공화국을 선포했던 악재도 겹쳤다.

4. 결과


1994년 러시아프랑스가 중재에 나섰다. 이후에 로베르트 코차랸이 아르메니아 대통령에 당선되고, 5월 5일 비슈케크 조약으로 정전(停戰)하였다. 전쟁은 아르메니아의 승리라는 게 중평. 동원된 병력은 아르메니아 측이 최대 시점 2만(아르메니아군 8000, 나고르노카라바흐군 1만), 아제르바이잔 측이 최대 시점 4만 2천(아프간, 체첸 의용병, 터키 장교 등 1500~2500명 제외)으로 아제르바이잔이 훨씬 많았지만, 오히려 전사자는 아르메니아 측 4,592명, 아제르바이잔 측 2만 5천~3만으로 아르메니아가 훨씬 적었다. 민간인 사망자 수는 아르메니아인이 1500여 명, 아제르베이잔 700여 명이며 아르메니아 난민은 50만 명 가량, 아제르바이잔 난민은 70만 명 가량 발생했다.[4]

아제르바이잔이 1988년부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에 고통 받아왔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공화국은 전쟁을 촉발시키고 무력을 사용해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5분의 1에 달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및 인접한 7곳의 행정 구역을 점령했으며 점령 지역 내에서 인종청소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UN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822호(1993), 853호(1993), 874호(1993) 및 884호(1993)를 통해 아제르바이잔에 행해지는 무력사용을 지속적으로 규탄하고 있으며 아제르바이잔 영토 보전과 자주권을 침범하는 그 어떠한 행위 및 그런 행위로 인해 이루어지는 모든 상황이 타당하다고 인식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추가적으로, 점령된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아르메니아가 수립한 불법 괴뢰 정권과 하부 조직들은 지속적으로 국제적으로 논의되고 있으며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이라 일컬어지는 이 독립체는 아르메니아에서조차도 어떠한 국제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제르바이잔 외교부(현재는 접속불가)

어쨌든 이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이 패배하는 바람에, de jure(국제법상) 아제르바이잔의 영토이지만, de facto(사실상) 아르메니아 영토라는 괴이한 상황이 되었다. 해당 지역은 아르메니아의 실효 지배 하에 있다. 이러한 영토 분쟁 상황은 세월이 흐른 2020년에 일어난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의 원인이 된다.
터키는 당시 미국 압력으로 지원도 못했고 이스라엘이나 우크라이나도 지원하지 않아 아제르바이잔은 사실 고립되었다. 러시아가 일부 장비를 지원한 수준이라서 아제르바이잔은 아랍연맹이나 심지어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에게까지 이슬람 형제 운운거리며 지원해달라고 애원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거절당했다.[5]
이 앙금을 잊지 않은 아제르바이잔은 이후 자원 무기를 주축으로 이스라엘과 우호적이 되면서 자신을 모른척하던 아랍연맹에게 엿을 먹였다. 이스라엘군과 훈련도 하면서 아랍연맹에서 언짢아하자 우릴 외면하던 것들이 이제와서 뭐? 이슬람 동맹한테 엿이나 쳐드셔~라고 반응했다. 그리고, 조지아와도 경제적 우호를 다졌고 이스라엘 주둔을 통하여 이란도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로부터 무기를 수백억 달러 어치를 들여오고 이스라엘군 교관도 불러와 훈련도 했으며 네탸나후 이스라엘 총리가 방문하여 이스라엘과 우린 혈맹이나 마찬가지라고 알리예프가 환영할 정도였다. 이스라엘도 아제르바이잔 석유를 통해 자국군 연료 문제를 많이 해결하고 나아가 골칫거리인 이란 핵개발을 막을 요충지로 아제르바이잔에 이스라엘군 주둔까지 얻어냈다. 이러니 미국도 더 이상 아제르바이잔에게 함부로 뭐라고 할 수도, 아르메니아만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26년 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거꾸로 아르메니아가 고립되어 아제르바이잔에게 신나게 맞고 사실상 항복하면서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대부분의 지역을 수복하게 되었다.[6]
[1] 이러한 지방자치권 강화는 고르바초프의 실책으로 결국 발트 3국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독립 요구가 강해져 소련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2] 현재는 아르차흐 공화국 아스케란구의 이바냔(Իվանյան, Ivanyan) 마을이다. 1990년 4월에 아제르바이잔 SSR의 도시 지위를 부여받았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이후 주민 대다수가 난민으로 도시를 떠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호잘리(Khojaly)'로 더 잘 알려져 있다.[3] Copyright 2006. Golbez. All right reserved.[4] 출처 : 위키백과, The Caucasian Knot: The History and Geopolitics of Nagorno-Karabagh, Gefährliche Töne의 "Frozen War" 등.[5] 체첸과 다게스탄의 의용병들이 와서 좀 돕긴 했지만 역부족이었다.[6] 그나마 초반에는 아르메니아군이 용맹히 항전했으나,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국제적인 고립과 군사적 패배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항복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