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즈데게르드 1세

 


사산 왕조 제14대 샤한샤. 재위기간 399-421년.
1. 즉위하기까지
2. 즉위 후
3. 의문사
4. 평가


1. 즉위하기까지


샤푸르 3세와 그의 유대인 아내 슈샨두흐트 사이의 아들이였으며, 궁중암투중 승계권을 빼앗긴다. 그러나 곧 재기하였고 399년에 폭군이였던 바흐람 4세를 암살하여 제위에 오르는데 성공한다.

2. 즉위 후


야즈데게르드의 치세는 특별한 일이 없이 평온했다. 사산 왕조는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동로마 제국과 불화없이 지냈다. 오히려 로마의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408년에 죽자, 평소에 후원하기로 다짐했던 그의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를 제국의 황태자로서 충실히 지켜주었다.[1]
유대인 어머니를 두었기 때문에 종교에 관심이 많았는지 모르지만 치세 초기엔 기독교를 옹호하고 조로아스터교를 멀리했으며 '''오히려 기독교로 개종하길 원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그의 치세 초기엔 기독교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널리 퍼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410년에는 이들의 영향으로 인해 기독교의 자유가 선포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기독교도들은 그를 황제 가운데 거룩한 호의를 베푼 선하고 자비로운 황제라며 칭송했'''었'''다.
그러나 크테시폰에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불의 신전이 기독교도들에 의해 전소되어 재건 불가능하게 된 적이 있었는데, 이 방화사건은 조로아스터교의 신관들에게 큰 반발을 일으켰다. 신관들은 야즈데게르드가 어떠한 조치를 취하기를 요구하였고. 결국 야즈데게르드는 신관들에게 제국 내의 기독교를 박해할 권한을 부여한다. 그 후 5년 동안 제국내의 기독교인들은 붙잡히거나 살해당했으며, 거리의 모든 교회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살육과 배신적인 행위로 인해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는 악평이 자자했으나 그러나 그는 여전히 페르시아인에겐 훌륭한 황제였다. 유대인 어머니를 기려 이스파한에 "예후디예"라는 유대인 거주지를 건설하는 등 유대인들을 적극 배려하였다.

3. 의문사


야즈데게르드는 421년에 사망하는데, 이에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히르카니아에 머물고 있을 때, 강에서 매우 멋진 말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그것에 치여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암살. 지못미

4. 평가


기독교로 인한 소요사태를 제외하고는 치세동안에는 상당히 평온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암살로 최후를 맞이하는 등 이 시기에는 귀족들과 조로아스터교 신관 들 그리고 황실 내부의 암투가 격화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아무리 평온하게 정국을 안정 시켰어도 막장 드라마스러운 상황은 해결하지 못했다는 소리. 이는 사산 왕조의 역대 황제들의 짧은 제위기간 및 최후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1] 이로 인해서인지 로마의 역사학자 프로코피우스는 그를 선한기질의 소유자이며 자신이 말한 것을 반드시 지키는 자라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