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의 난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분석


1. 개요


고려시대1168년 전라도 탐라현에서 발생한 민란이다.

2. 배경


고려 전기까지만 해도 국호를 유지하며 고려에 조공을 바쳤던 탐라국은 숙종 10년인 1105년 탐라군으로 개칭된다. 당시의 제주도는 행정 업무를 맡는 지방관이 없는 속현이었고, 의종 시기(재위 1140~1176) '탐라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현령이 파견된다.[1]
1160년대에 탐라에 부임한 현령 중 최척경(崔陟卿)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최척경은 완산(전라북도 전주시)의 향리 출신으로 경산부(경상북도 성주군) 판관으로 임기를 마친 뒤 잠깐 개경에 돌아갔다가 또 다시 탐라에 발령됐는데,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벽지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현령 자리를 극구 사양했다. 최척경은 권문세가의 연줄이 없어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는데, 중서시랑평장사 판이부사 최윤의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면) "마땅히 좋은 벼슬로 보답해주겠다."[2]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탐라현으로 간다. 마지못해 부임했지만 최척경은 임기 중 수령으로서 이로운 일을 시작하고 폐단을 혁파하며 현민들이 즐겁게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3. 전개


그러나 최척경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간 뒤에 새로 부임한 현령은 이익을 위해 번다하게 세금을 걷는 등 불법을 자행했다. 수령의 횡포에 제주도민의 분노는 커져갔고, 결국 1168년 11월경 양수(良守)를 대표로 한 현민들이 무장 봉기하고 현령을 쫓아내버린다. 양수 등은 본국에 "만약 최척경이 다시 현령이 되면 반드시 무장을 풀겠다."[3]라고 통보한다. 탐라현민의 뜻은 전라도안찰사를 통해 개경에 전달됐고, 의종은 재상 최포칭(崔襃偁)에게 "이렇게 어진 사람이 있는데, 어째서 쓰지 않았는가?"[4]라고 타박하며 최척경에게 현령직을 제수했다.
한편 임기를 마치고 개경에 돌아갔던 최척경은 큰 낭패를 겪고 있었다. 좋은 벼슬을 약속했던 재상 최윤의는 1162년 이미 죽고 없었으며, 두번 연속 지방관을 지내며 백성의 고혈을 착취하지 않은 최척경은 처자식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걱정을 해야 할 만큼 가난했던 것이다. 다시 탐라에 부임하라는 명을 받든 최척경은 의종에게 가족을 데리고 부임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청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이후 탐라 지방관들은 가족과 함께 부임하는 것이 상례가 된다.
최척경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현민들은 배를 띄우고 맞이했으며, 최척경이 탐라 땅을 밟자 모두 무기를 버리고 "공께서 오셨으니 저희 모두가 다시 살았습니다."[5]라고 했다. 지절을 받들고 간 탐라안무사 조동희(趙冬曦)는 탐라현민을 효유했으며 반란 주모자들은 앞에 선포한 것과 같이 스스로 항복했다. 양수 등 2명과 그 무리 5명은 참수형에 처했으며 나머지 가담자들에게는 곡식과 포를 주고 위무했다.

4. 분석


양수의 난은 제주도가 고려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된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첫 반란이다. 12세기 들어 제주도는 기존의 지배층(토호)과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이 공존하는 사회가 된다. 수령의 간섭과 착취, 동원으로 탐라민의 불만은 풀리지 않고 계속 쌓여나갔으며 그 반작용으로 반란은 빈발했다. 12세기~13세기 초에는 반란으로 술렁이는 민심을 잡기 위해 본국에서 안무사가 여러 번 파견돼야 했다.
반란 주모자 양수는 제주 양씨 족보에 이름이 올라있는데, 사실이라면 탐라 토호가 앞장서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 된다. 탐라지 등 기록에 따르면 제주에서 양(良)씨는 고(高)씨 성주(星主) 다음가는 왕자(王子)를 지내며 후에 양(梁)으로 성을 바꾼다. 탐라 토호가 반란 수괴로 처형에까지 이른 경우는 찾기 힘들다. 이후의 여러 반란에서 탐라 토호들은 반란 세력에 가담했다가도 효유하러 온 안무사나 수령 등에게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1] 고려사 식화지에서는 의종 이전 인종 때 탐라현령, 탐라현위의 녹봉이 정해져 있는데 이는 식화지의 오류로 파악된다.[2] 則當報以美官[3] 若得陟卿爲令, 當釋兵.[4] 有賢如此, 何不用之?[5] 公來, 吾屬再生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