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우

 


성명
양승우(楊承雨)
이명
양세진(梁世振)
생몰
1891년 ~ 1926년 2월 21일
출생지
평안남도 평양부 수구리
사망지
평양형무소
위패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양승우는 1891년생이며 평안남도 평양부 수구리 출신이다. 그는 1914년 남만주로 망명해 각지를 전전하며 동지를 규합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1918년에 다시 만주로 건너가 유하현에서 독립무장단체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제2대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실전경험을 쌓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러시아 백군에 참가하여 하얼빈에서 활동했다. 이후 화전현에 돌아와 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20년 봄에 조맹선의 소개로 관전현의 독립단 교통부장 양기하를 만났고, 1920년 8월 독립단이 광복군사령부로 확대 개편하자 이에 가입하여 제6대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광복군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무장한 부하들을 인솔하고 국내에 진입하여 벽창의용단(碧昌義勇團)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어 평안도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1920년 8월에는 창성군 창주면 사창동에서 일제 밀정을 총살했고, 그해 10월에는 부하인 김중관(金重寬)·곽상진(郭相鎭) 등을 거느리고 대동군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잡하다 일경 3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또한 대동군 전촌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을 처단하기도 했다. 이에 일제 경찰이 현상금을 내걸고 그를 체포하려 들자, 그는 일단 관전현으로 되돌아왔다.
1922년 대한통의부(統義府)가 조직되자 이에 가담하였으나 통의부가 내분이 일어나 유림파와 청년파로 분리되자, 그는 이웅해(李雄海)·오동진(吳東振)·고활신(高豁信)·김승만(金承萬)·현정경 등과 같이 청년파에 가담했다. 이후 양측은 서로 심각한 갈등을 빛었고, 급기야 1922년 10월 14일엔 유림계의 전덕원이 부하 20여 명과 함께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를 사살하고 청년 김성국에게 총상을 입혔으며, 독립운동계의 원로인 양기탁, 법무부장 현정경, 검무감 김관성, 교통국장 황동호, 비서과장 고활산 등을 결박하고 난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양측의 극한 대립은 1923년 1월에 가서야 전덕원 일파가 의군부를 조직해 통의부에서 이탈하면서 겨우 마무리되었다.
1923년초에는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벽창의용대 및 광복군대표로 참가하여 성명서 발표에 서명하기도 하였으나, 이 회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6월에는 관전현의 태평초 보민회(太平哨保民會) 지부장이며 일경 경부의 부친이자 친일파인 김용국(金用國)을 사살하였으며, 동년 8월에는 다시 국내에 들어와 창성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경찰을 만나는 대로 사살하고 금융조합을 습격하는 등 관서 일대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경찰의 추적이 있자 이를 피해 한동진(韓東振)과 같이 장춘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이후 평양 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그는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며 상고를 취하했고, 1926년 2월 21일 평양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양승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