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크렌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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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gon Rudi Ernst Krenz
(에곤 루디 에른스트 크렌츠)
'''출신 정당'''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생물년'''
1937년 3월 19일 ~
'''재임기간'''
1989년 10월 18일 ~ 1989년 12월 3일
1. 개요
2. 생애
3. 서기장 취임과 동독 붕괴
4. 서기장 퇴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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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전 서기장 겸 국무회의 주석으로,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의 붕괴 당시 동독 국가수반이었다.
전임 국가평의회 의장이었던 에리히 호네커 휘하에서 2인자 자리에 있었다는 것과, 그의 후임으로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는 것, 그리고 총서기의 말 한마디로 붕괴된 베를린 장벽 사건 때문인지 그래도 인지도가 있는 편.

2. 생애


1937년 3월 19일, 포메른 지방 콜베르크[1]에서 태어났으며, 1944년 동부 포메른에서 독일인들이 추방당했을 때 그의 가족은 리프니츠-담가르텐에 재정착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동독이 수립된 지 10년이 지난 1955년, 그는 사회주의통일당에 입당하였는데, 여기서 크렌츠는 서독 사민당수로부터 '''완전히 냉담한 인간'''이라고 불릴 정도의 냉혹함과 수완을 발판 삼아 당과 내각에서 요직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그는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에른스트 텔만 피오니어단의 지도자를 지내다가, 1973년 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이 되었으며, 또한 국가 인민의회의 의원(1971~90)을 지내면서, 1981년까지 국무회의 위원을 겸하였다. 1974년부터 1990년까지 공산당 청년 운동 단체인 자유독일청년단의 지도자,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빌리 슈토프[2] 총리가 이끌던 각료평의회의 각료로도 재직했다.

3. 서기장 취임과 동독 붕괴


원래 에곤 크랜츠는 자신의 후견인인 호네커에 대해 "생전에 호네커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존경하고 있었으며, 당 최고권력인 서기장조차도 호네커의 은퇴 후 내지는 사후에야 취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1989년 동유럽 혁명 과정에서 호네커가 내[3]외부[4] 적인 불신임 속에서 사임하자 동독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1989년 10월 18일에 서기장에 취임한다.
취임 후 그는 호네커를 공개비판한 뒤, 호네커 시대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해소하고 이동의 자유를 포함한 점진적인 개혁에 나설 것을 천명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정책은 대체로 호네커의 정책에 간판만 바꿔 단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와 체코슬로바키아 등 동맹국을 통한 망명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등 질서의 해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민주화 시위는 동독 각지로 계속해서 확산되어 가고 있었고, 수도인 동베를린에서까지 시위의 불길이 이어지는 가운데, 11월 9일에 크렌츠 내각은 구체적인 여행자유화 정책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동서독 국경을 통한 입출국 허용 및 절차 간소화와 같은 제도적 개선을 골자로 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개선 방안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 없이 단순히 "빨리"와 같은 수사적 표현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점, 공식적인 절차보다도 슈타지에 의한 신분 조회와 같은 비공식적 절차가 더 큰 문제였다는 점, 그리고 이미 그 시점에서 크렌츠 내각이 본격적인 개혁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는 점 등으로 인해 대다수의 동서독 양 국 국민들은 대체로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크렌츠 내각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여 여행자유화 계획을 발표하게 될 귄터 샤보브스키 대변인에게 제대로 브리핑을 하지 않았고, 막 복귀하여 갑작스러운 정치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샤보브스키는 다음날 자정부터 발효될 여행자유화 정책이 이미 발효되었다고 착각하고, 기자회견장에서 '''"베를린 장벽을 포함한''' 동서독 국경을 (...) '''즉시, 지연없이'''"개방한다고 발표하는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여러가지 우연이 겹치면서 베를린 장벽은 그날 밤 무너졌고, 그와 동시에 출범한지 1달도 지나지 않은 에곤 크렌츠의 내각도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 정부가 동독 주민들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분명해짐에 따라 동독군, 슈타지, 국경경비대 등 동독 정부의 통치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관과 수단들이 모두 무력화되었다. 동독 기독민주연합, 동독 자유민주당 등 동독 의회의 위성정당들은 내각 총사퇴와 민주적 절차에 의한 자유 총선거를 요구하였고, 크렌츠 내각과 여당인 사회주의통일당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할 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1일에 사회주의통일당의 일당 독재를 명문화하였던 동독 헌법 제1조가 삭제되었고, 이틀 뒤 에곤 크렌츠와 당 정치국, 당 중앙위원 전원이 총사퇴했다.
다른 동독 고위급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에곤 크렌츠 또한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이자 현 좌파당의 전신)인 민주사회당으로부터 1990년에 제명되었다.

4. 서기장 퇴임 이후


1997년에 크렌츠는 베를린 장벽 및 동서독 국경의 월경자 사살 명령을 내린 혐의를 비롯한 동독 시절의 범죄 행위에 기소되어 징역 6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크렌츠는 자신을 기소한 것을 "승자의 패자에 대한 복수"라 변호해보기도 하고, 유럽인권법원에 재심을 요청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2003년에 4년을 복역하고 가석방되었으며 그 뒤로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에 살고 있다. 다른 동독 고위간부 출신자들이 최대한 노출을 피하고 조용하게 여생을 보낸 것과 다르게 미디어에 자주 출연하며 동독 정권과 사회주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동독에서는 오스탈기(Ostalgie)[5]라 하여 지금도 동독 체제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크렌츠는 오스탈기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1] 현재 폴란드 쿠야브스코-포모르스키에 주, 코워브제크 시[2] Willi Stoph, 1914 ~ 1999, 동독의 정치가이자 3대 국가평의회 의장이었던 인물. 이 사람이 집권할 때부터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이 논의되기 시작했다.[3] 당시 호네커는 와병중이었기 때문에 동유럽 민주화 혁명의 흐름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라이프치히를 비롯한 대규모 시위에 대해 강경진압을 주문하면서 중앙당 내부에서도 지도력이 의문시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편 동독군 내부에서는 동독 시민들을 동독 군인들이 진압하는 데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으며, 주독 소련군은 호네커의 진압 요청을 대놓고 거부했다. 라이프치히 시위에서는 진압을 위해 공수부대가 파견되었지만 지역당에서 나서서 유혈사태를 막는 판국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면적인 강경진압을 명령했다면 호네커는 자진사퇴가 아니라 남의 손에 끌려내려왔을 것이다.[4] 고르바초프는 본인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대놓고 거부한 호네커에 대해 사회주의통일당 내부의 호네커 축출 움직임을 묵인하는 것으로 복수했다. 물론 고르바초프의 사감이 없더라도 당시 고르바초프의 소련은 당시 공산주의 진영의 쇠퇴를 인정하고 소련을 연방 잔류국을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신연방 구상) 동유럽 공산당 정권의 위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 없었고, 더군다나 위성국 위기에 대한 소련의 무력 개입을 명문화한 브레즈네프 독트린 또한 고르바초프가 파기했기 때문에 개입할 명분 또한 없었다.[5] 직역하면 동쪽 향수병이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