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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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을 쌓고 있는 모습이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독경찰과, 미소를 짓고 있는 동독 국경수비대원이 미묘하게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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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반대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동독 국경수비대 준사관들과 악수를 나누려고 하는 것 같은 서독 사람들의 모습.
독일어
Berliner Mauer
영어
Berlin Wall
프랑스어
Mur de Berlin
러시아어
Берлинская стена
1. 개요
2. 왜 생겼는가?
2.1. 독일과 베를린의 특이한 상황
2.2. 육지의 섬
3. 베를린 장벽 이전
4. 분할되는 베를린 - 베를린 장벽의 구조
5. 각종 탈출 시도
6. 붕괴까지의 과정과 이후
6.1. 대한민국에 보존중인 베를린 장벽
6.1.1. 2018년 서울 베를린 장벽 훼손 사건
7. 관련 어록


1. 개요



1961년 8월 13일독일민주공화국이 만들고 1989년 11월 9일에 붕괴되어 통일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베를린 한가운데에 존재했'''었던''' 장벽, 시설물의 통칭. 해당 명칭은 주로 서방 세계에서 통용되던 것이었고 동유럽공산권 국가들에서는 '반파시스트 방벽(Antifaschistischer Schutzwall)'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장벽을 처음 세울 때는 소련동독도 좀 곤란하기는 했다. 원래 소련동독 당국자들의 기대는 위대한 공산주의의 기치 아래 발전하는 동베를린의 폭풍간지를 보고 서베를린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동베를린으로 우르르 몰려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시궁창이라 오히려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끝없이 이탈하는 모양새가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장벽 건립을 지시한 동독 초대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도 공식 석상에서는 보란 듯이 자랑스러운 투로 연설했지만 사석에서는 "이건 우리가 체제 경쟁에서 졌음을 우리 스스로 인정하는 자충수인데..."라고 푸념했다고 한다. 동독 외의 다른 동유럽 국가에서도 반응은 마찬가지였는데 헝가리 인민 공화국 서기장이었던 카다르 야노시는 '장벽 건립으로 공산주의 운동 전체의 명예가 훼손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도 장벽을 "흉물스러운 물건"이라고 평하면서도 동독의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인정했다.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도 서베를린에 날아와서 한 유명한 'Ich bin ein Berliner' 연설에서 "자유진영공산진영간의 가장 큰 문제가 뭔지 모르겠다는 자, 공산주의가 미래의 물결이라는 자, 공산주의와 협조해나갈 수 있다는 자, 공산주의가 적어도 경제적 진전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자는 베를린에 와보라. 자유에도 문제가 많고 민주주의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는 벽을 세워 사람을 가두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 라며 베를린 장벽을 강하게 비판했다.
통일된 이후로 조각조각나서 여기저기로 팔리기도 했다. 이걸 벽째로 사서 소장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덧붙여 지금도 장벽의 파편을 카드에 담아 팔고 있기도 하다. 또 게임 월드 인 컨플릭트의 한정판은 실제 조각을 독일 정부의 보증서와 함께 주었다고 한다. 베를린에서 장벽의 잔해랍시고 돌덩이를 팔고 앉아있는 경우도 있는데, 가짜일 가능성이 높으니 낚이지 말자.
청계천 한화 장교 빌딩 앞에 벽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었으나# 2018년 훼손되었다. 2018년 서울 베를린 장벽 훼손 사건 문서 참고.

2. 왜 생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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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동독에 조그맣게 뚫린 구멍이 바로 서베를린이며 '''서독 땅이다.'''
베를린 장벽의 탄생의 원인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얄타 회담에 의해서 연합국 4국 -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서 전범국이였던 독일이 분할했다. 원래는 미/영/소 3국에 의한 분할 점령이었으나 프랑스가 자신들 또한 승전국이므로 자신들도 분할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미국과 영국이 점령 지역 일부분을 떼내 프랑스에게 넘겼다. 4개국이므로 영토 또한 4분할 되었는데 전체적인 구도는 소련의 몫이 미/영/프 3국의 몫의 합보다 조금 작은 구도였다. 얄타 회담에 따라 폴란드로 오데르-나이세 선의 이동의 동방 영토가 넘어갔으나 넘겨준 과정은 소련이 동독 지역 + 구 동방 영토를 점령하고 그 중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지역을 폴란드에게 넘겨준 것이다. 따라서 분할 점령 당시 소련 점령 지역(약 22만 3천km2)은 미/영/프 점령 지역(약 24만 5천km2)보다 조금 더 작다. 베를린 또한 마찬가지로 소련 관할인 동베를린(약 401km2)이 미/영/프 관할인 서베를린(약 490km2)보다 조금 더 작다.
문제는 동쪽의 소련 구역 내에 독일의 상징인 수도 베를린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베를린은 예외로 하여 같이 분할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결국 연합국 4국은 독일 전역을 미국+영국+프랑스 점령지역으로 구성된 서독과 소련 점령지역으로 구성된 동독으로 분할하면서 베를린도 마찬가지로 동베를린은 동독령, 서베를린은 서독령으로 4분할을 하게 된다. 서베를린은 소련군 점령 지역인 동독에 처럼 떨어져 버렸으며 훗날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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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바다나 산, 도로 등을 통해 단절된 것이 아닌 이념으로 단절된 이 땅을 사람들은 '육지의 섬'이라 불렀다. 서베를린이 서독의 월경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서베를린에도 작은 월경지들이 또 딸려 있어서 문제였다. 서독 '본토'와 서베를린 사이를 오가기도 힘든데 서베를린 '본토'와 서베를린의 월경지들을 오가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자세한 건 월경지 문서 참고.
독일 분할 당시 오스트리아 역시 독일에 합병된 상태였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은 국민투표 치르고 그 결과에 따라 합병을 했으니 일단은 합법적인 과정이었음을 감안하여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로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나 영세중립국을 조건으로 1955년에 통일되었다.
왜 하필 베를린에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면 베를린은 30년 전쟁 이후 독일을 주도하였던 프로이센의 오래된 수도라서 그 상징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동독의 지배자인 소련은 물론이고 서독을 통치하게 된 나머지 연합군들도 베를린을 포기하지 못하여 그냥 나눠버리는 선에서 합의하게 된 것이다. 또한 서방 연합군의 일원인 미국, 영국, 프랑스는 자기네들이 없었다면 그만큼 소련도 동부 전선에서 더 큰 피해를 입어야 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독일 해군과 공군의 등뼈를 부러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시작하여 마켓 가든 작전휘르트겐 숲 전투, 아르덴 대공세를 거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서 지크프리트 선을 뚫고 서부전선에서 진격을 멈춘 엘베강 레크비츠까지 흘린 서방 연합군의 장병들의 피가 공적이 쌓여 서베를린을 얻어낸 것이다.

2.1. 독일과 베를린의 특이한 상황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여 상호간 교류가 전혀 없는 한국과는 달리, 동서독은 첨예하게 대치는 하고 있긴 '''한데''' 상호간의 교류가 활발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좋게 말한 거고 실상은 '''우리한테 이익되는 쪽으로만 교류하기'''다. 그것을 쉽게 보여 주는 예가 동독과 서독의 축구 경기다. 스포츠 강국인 동독이 서독보다 못했던 몇 안 되는 종목이 바로 축구. 그래서 동서독 축구 대표팀의 친선경기는 분단 역사상 전혀 없었다. 유일한 대결이 월드컵 본선에서 맞붙은 것. 이 땐 동독이 이겼다.[1] 청소년 대표나 올림픽 대표는 몇 차례 만난 적은 있긴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같은 분단이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그 근본적인 상황 자체가 서로 달랐기에 가능했다. 유럽은 기존의 '지배국'의 입장으로서 나름대로의 탄탄한 이념/정치적 체계를 갖추고 있어서 전후 스타트가 좋았다. 제1차 세계 대전보다 한참 전의 사람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억누르기 위해 이들의 요구 조건인 '사회보장제도'를 한발 앞서 만들어 놓을 정도였으나 같은 시각 아시아 국가들은 아직 개인 정치 이념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대부분이 전제왕조 국가였다. 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은 '식민지'로 지내왔고 이에 따라 종전 이후 자신들을 통제해 줄 지배 세력이 없어진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유입된 냉전의 이데올로기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서로 복잡하게 얽힐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럽도 한때 1947년트루먼 독트린마셜 플랜 그리고 1948년베를린 봉쇄를 통해 긴장이 고조되었지만 당시 유럽은 이제 막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라 다시 한번 서로 싸울 여력도 생각도 없어서 서로를 그렇게 자극하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결국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의 분단 국가들의 경우 이러한 상호간의 큰 전쟁이 없었고 이에 분단 과정에서 서로를 향한 혁명과 전쟁을 동반한 피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독일의 경우는 자발적으로 나뉜 것이 아니라 승전 세력인 연합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 나뉜 분단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양 국가의 거주민들이 서로를 싫어해서 나뉜 게 아니라 그냥 외부의 간섭으로 찢어졌을 뿐이었으니 구태여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통 분단 직후 양측의 수준이 비슷했던 다른 분단국가들과는 달리 독일은 양국의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났다. 서독은 마셜 플랜 등에 의해서 경제적 우위에 있었고 상대적으로 동독은 경제적으로 쪼달리는 게 사실이었다. 뭐 사실은 미국의 쇼미더머니의 영향이지만 서독은 저 돈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일례로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가려면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가든가 동독에 깔린 도로를 이용해 가야 했다. 다만 서독 정부에서 서베를린 주민들의 교통비를 일정부분 부담해서 현지인들에겐 큰 부담은 아니었다. 당연히 동독은 서독인들이 자신들의 도로를 이용하는 것에 대한 막대한 통행료를 부과했으나 서독은 이 통행료를 내는데 전혀 인색함이 없었다. 그러나 개인 단위로 다닌다고 하면 엄청난 부담을 져야 했다.
저러한 돈질의 영역을 보여주는 게 바로 서독의 정책이었는데 동독 사람이 서독으로 건너올 때마다 '''정착지원금'''도 꼬박꼬박 주고 '''연금'''도 꼬박꼬박 지급해줬다. 당연히 동독 입장에서는 배알이 꼴려야 정상이겠지만 실제로 동독은 매우 냉정하게 판단을 했다. "서독은 돈질해서 연금제도 같은 게 잘 되어있네? 그러면 '''비노동인력'''을 서독으로 보내면 우리는 사회부담이 경감되잖아?" 실제로 저러한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65세 이상 노인에 대해서는 동독이 서독 방문 허가도 잘 내주고 그랬다. 이 외에도 중증 장애인등 동독 사회에서 전적으로 '나오는 것은 없고 그저 보조해야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서독 방문 허가에 혜택을 주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참 일할 나이의 사람들에게는 서독 방문이 허용되지 않았다. 목적은 언제까지나 '비생산연령층을 줄여서 생산연령층의 부양 부담을 덜어주는 것'에 있었기 때문. 하지만 '''자유'''란 달콤해서, 많은 사람들이 서독으로 향해 발길을 향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래저래 제약이 많은 동독에서 서독으로 가는 방법은 몇 가지 뿐이었다.

2.2. 육지의 섬


1번째로 동서독 국경, 이른바 철의 장막을 넘는 방법이 있었다.
…말이 좋아 철의 장막이지 이 동네를 쉽게 설명하자면 '휴전선절반만 있구나' 하면 된다. 대한민국 휴전선과는 달리 서독 측 국경지역은 공산측이 자기네 사람들 통과는 막아도 서방 쪽에 대놓고 사보타주를 하거나 하지는 않아서 좀 자유분방해서 감시초소 몇 개 있고 사람이 먹고사는데 필요한 건 다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적군파 지원 등의 내부 사보타주는 했지만 북한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자기들 좀 수틀린다고 침투요원을 보내서 국경 마을을 때려 부순다든가 병영을 폭파한다든가 하는 짓은 없었다. 상기한 대로 또 다시 전쟁이 생기는 것을 서로 원치 않았기 때문.
이 때문에 막장 사건이 좀 많이 생기기도 했다. 국경 인근 마을에서 술먹고 주정부리다가 국경선 넘어서 동독 국경경비대에 체포돼서 벌금형이나 징역형 크리 먹는다거나 소가 도망쳐서 동독의 자유를 만끽하다 명을 달리한다거나 말이다.
반면 동독 측 국경지역은 민간인 통제구역도 있고 지뢰밭도 있고 철조망도 있고 무장경비대도 돌아다니는 말 그대로 비무장지대와 동급은 못되고 마이너 버전인 그런 지역이다.
일반적으로 동독 측 철의 장막 지역에서 민간인 통제구역은 8km 정도였다. 당연히 이 구간에서 국경경비대에 적발되면 즉결처분 당할 수도 있다. 애시당초 '''국경선 20km 안쪽 지역'''에는 사는 사람이 '''없다.''' 종종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오는 용자들도 있긴 한데 그건 한국에서 군사분계선 넘는 거보다 조금 쉬운 수준. 실제로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 동독 국경경비대는 최소 2인 1조 근무를 원칙으로 했다. 누구 1명 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동서독 국경 문서를 보면 당시 동독측 군사분계선의 경비 상태 그림이 있으니 참고하시라.
한반도의 상태와 비교하자면, 우선 민통선은 독일 쪽보다 훨씬 작다. 대체로 길어야 6km. 동독 측의 민통선 폭을 적용한다면 강화-김포-'''일산-운정-문산-금촌'''-연천-동두천-포천-철원 등 수도권 주요 접경지대 도시에 사람이 '''몽땅 소개'''되고 출입하려 할 때마다 신분조사에 별도의 증명서류를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휴전선 쪽의 군사 밀집도는 세계 최고로서 좀 더 쉽게 말하면 마지노선 1/3 길이의 전선에 마지노선과 비슷한 수의 군대가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국경 경비대도 2인 1조로 배치하면 그 둘이 서로 마음이 맞을까봐 3인 1조 근무가 기본이다.
2번째로 해외여행을 통해 망명 비스무리한 형식으로 가는 방법이 있었다. 가장 많이 애용된 루트는 인근 중립국오스트리아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오스트리아가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연다는 소문이 들리자 같은 공산권 국가 간에는 여행과 체류가 비교적 쉬웠던 점을 이용하여 '''첫 날부터 7,000명'''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하여 오스트리아 국경지대를 넘어 서독으로 넘어갔다. 2번째 탈출에는 무려 '''20,000명'''의 동독 주민들이 넘어갔다. 동독 군사관계자들은 이 소식을 3일 후에 듣고 나서야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 경비를 강화하자고 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관계자는 동독 군사 관계자들을 씹어버리고 국경을 그냥 방치해 버렸다. 다만 이는 상기했듯 동독이 여행 허가를 잘 안 내주기 때문에 정말 돈 많고 빽 있는 게 아니면 불가능했다. 북한에서 여행증을 끊고 중국으로 출국해서 한국으로 도망치는 것보단 쉬웠겠지만.
마지막 3번째는 바로 서베를린. '''자유진영의 섬'''이라고도 불린 곳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물론 위험 부담이야 있지만, 첫번째 방법처럼 민간인 통제구역을 몇 km씩 넘나드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모험이다. 그래서 '''실제로 많이 행해졌고 또 성공률이 높은 방법이었다.'''
열기구로도 동독에서 서독으로 빠져나온 가족이 있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장벽 자체를 이런저런 방법을 통해 돌파한 탈출자들도 물론 존재한다. 아래 '탈출 시도' 항목을 참조하시길.
문제는 저렇게 튀는 인력들이 말 그대로 동독에 크나큰 타격을 입히기 딱 좋다는 점이었다. 공부 좀 한 '''엘리트 계층 유망주'''가 튀는 건 그나마 내상이 덜한 정도... 그러나 지속적으로 노동인력이 사라지게 되면 말 그대로 계획경제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더군다나 주로 튀는 인력이 청년계층이다 보니 '''군사력'''에도 영향을 주게 되는 건 당연지사. 이러니 정권유지가 될 수 없다. 애시당초 일 할 사람이 남아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나온 답안은 간단했다. '''서베를린을 틀어막는다.'''

3. 베를린 장벽 이전


베를린 장벽 이전에도 서베를린과 동베를린간의 엄격한 지역구별이 존재했다.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군사 작전 문제'''다. 말 그대로 서로간의 영역이 겹치면 그대로 전쟁이니, 골목길 하나까지 철저하게 다 나눠먹어 놨다. 심지어는 브란덴부르크 문 앞 광장까지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면밀하게 명시했을 정도다. 실제로 서베를린 관할이던 국회의사당 몇 미터 바로 뒤에 경계선이 놓여 있었고, 아돌프 히틀러의 야심작이던 포츠담 광장도 정확히 절반으로 나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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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LEAVING '''THE AMERICAN''' SECTOR"
"YOU ARE '''NOW''' LEAVING '''BRITISH''' SECTOR"
이런 지역 구분 때문에 생긴 재미있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서베를린은 영국군/프랑스군/미군육군이 관할하는 지역으로 나뉘고, 이에 따라 경고 표지판이 살짝 바뀌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브란덴부르크 문 앞 지역은 영국 육군 관할지였고, 첩보물의 배경으로 많이 쓰인 체크 포인트 찰리 앞 지역은 미 육군 관할지였는데, 양측의 경고문이 위와 같이 달랐다.
당연히 출입 시 검문을 하는 것도 서독 국경경비대(BGS)가 아닌 미/영/불 3국 육군이었고, BGS는 그저 보조에 불과했다. 국제적으로는 서베를린은 서독 영토가 아닌 미, 영, 불 군대의 점령지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940년대 말에 사실상 수훈 자격을 가질 주둔지가 사라져 수훈자가 급감한 미군의 점령지 주둔군 훈장을 베를린 주둔 미 육군 복무자는 1990년까지 받을 수 있었다. 행정 업무는 서독 측에서 맡긴 했고, 시장은 선출했지만. 대표적으로 독일 총리인 빌리 브란트가 서베를린 시장 출신이다. 서베를린과 마찬가지로 동독의 수도 역할을 한 동베를린 역시 공식적으로는 동독 정부의 관할이 아닌 소련군의 점령지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서독 본토와 서베를린을 잇는 항공 노선은 서독 항공사가 취항할 수 없었다. 동독이 서독 항공기의 영공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합군 점령 시기 독일 제공권은 미/영/프와 소련이 접수했다. 이와 함께 미/영/프와 소련은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진입할 수 있는 3개의 항로에 대해서 합의했다. 연합군은 민간 항공기 관제권의 민간 이양을 검토했으나 2차 대전 이전에 독일에는 민간에 의한 항공 관제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조직을 설립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서독 본토의 민간 관제권은 1950년대에 연합군으로부터 이양받기는 했으나 베를린은 여전히 점령지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예외였다.[2] 그래서 서독 본토에서 서베를린으로 비행기 타고 가야할 때 영/미/불 항공사 항공편을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이들 나라의 대표 항공사, 영국항공, 에어 프랑스, 그리고 '''팬암'''에서 서독과 서베를린을 연결하는 항공편을 대신 운항하였다. 팬암은 1980년대까지 런던 히드로 등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로 가는 항공편을 운항했다. 반면 동독 쪽은 쇠네펠트 공항이 역시 소련군의 점령지로 간주되었던 동베를린 경계선 밖에 있었기 때문에 국영 항공사 인터플루크가 비행편을 띄우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 대신 이 쪽도 동서독 국경을 직접 넘을 수는 없었다.
이는 1954. 10. 23. 파리의정서(Pariser Protokoll)에서 수정된 1952년의 독일조약(Deutschlandvertrag)이 독일연방공화국 정부, 즉 서독의 연방정부가 베를린 지역에 대해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독연방의회(Bundestag)의 베를린 지역구 의원은 베를린 시민의 직접선거로 뽑히지 않고 베를린 지방의회에서 간선으로 선출되었고, 연방의회에서 베를린 지역구 의원은 표결권조차 가지지 못했다. 또한 서독의 헌법이었던 기본법(Grundgesetz)도 베를린에서는 상당 부분 그 효력이 제한되었으며, 심지어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조차도 베를린에서는 그 효력이 제한될 정도였다.[3]

4. 분할되는 베를린 - 베를린 장벽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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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베를린 장벽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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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의 전반적인 구조.
장벽은 1961년에 처음 축조한 뒤에도 3~4차례 계속 개량되었다. 장벽의 총 길이는 약 155km로 그 중 도시를 둘로 나누는 장벽, 즉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의 경계에 세워진 장벽은 약 43km였다. 높이 3.6m의 콘크리트 장벽이 106km 가량 뻗어 있었고, 나머지 49km는 철조망이 3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980년대의 최종 개량형 장벽은 맨 윗동에 둥그런 구조물이 추가되어, 탈출자들이 잡고 넘어가기 힘들게 만들었다. 철조망도 윗쪽을 죄다 뾰족한 철침처럼 만들어서 움켜잡았다가는 손에 구멍이 숭숭 나도록 설계했다.
장벽 자체가 동서베를린 시계나 서베를린과 동독의 경계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장벽은 그 선에서 몇 발짝 동독 쪽으로 움푹 들어간 형태였다. 그래서 간혹 장벽을 개보수 하거나 새로 축조하러 경비대원과 근로자들이 장벽을 넘어오기도 했다. 물론 이런 작업 때는 항상 다른 경비대가 따라붙어 감시했고, 작업 전에 우선 진짜 경계선을 따라 자신들을 둘러쌀 임시 바리케이드를 가설해야 했다.
장벽 바로 뒷편의 동베를린/동독 영토에는 폭이 약 60~70m 되는 무인지대가 설정되어 있었고, 국경경비대 등 군 관계자나 사전에 출입이 허락된 장벽 시설 관리자, 건설자 혹은 수선공만 검문을 받고 들어갈 수 있었다. 무인지대 내에는 감시탑 302개, 20개의 감시벙커, 127km에 이르는 전기감지장치(감지장치에 달라붙으면 경보가 울린다), 124km의 순찰통로, 105km의 차량 방어용 도랑이 설치되어 있었다. 장벽 감시병은 1,200명에 달했고 야간에는 30m 간격으로 설치해둔 서치라이트를 켜두었고 무인지대에는 반드시 지뢰가 1평 당 '''30~50개'''정도 깔려있어 탈출을 막았고 지뢰 설치 지역마다 조명탄 인계철선이 늘어져 있어 인계철선이 당겨지면 '''조명탄이 튀어 올라가 그 주위를 밝히게 했다.'''
그 외에도 무인지대에는 반경 20~30m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수평으로 건너맨 외줄에 목줄을 연결시킨 군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풀숲에 탈주자의 모습이 가려질 까봐 죄다 제초제를 뿌려서 식물 생장을 막아버렸다. 강이나 호수가 있어서 장벽 축조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물속에 가시철망이 촘촘하게 달린 철제 바리케이드를 쫙 깔아놓았고, 모터보트를 타고 수시로 드나들며 감시했다.
장벽 건설에 사용되는 비용은 1970년까지 1억 동독 마르크 정도에 달한 것으로 추산되며, 장벽을 경비하던 동독 측 병력은 28년 동안 총 1만1천 명에 달했다.
'''이래도 탈출이 가능하냐??'''고 하면… 시도가 많았다.

5. 각종 탈출 시도



그럼에도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1989년 가을까지 약 5,000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장벽 돌파 방법도 웬만한 스파이 영화 뺨칠 정도로 가지각색이었는데, 몇 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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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를린 장벽 축조 결정이 내려진 뒤 최초의 탈출자로 기록된 인물은 사진의 한스 콘라트 슈만이었다. 슈만은 한국의 의무경찰과 비슷한 준군사조직이었던 병영화 인민경찰(Kasernierte Volkspolizei. 약칭 KVP) 소속 부사관이었고, 사전에 서독 경찰과 합의하여 장벽을 탈출하기로 한 그는 장벽을 만들 자리에 임시로 깔아둔 철조망 앞에서 경비를 핑계로 어슬렁대고 있었다. 서독 측 군인이 "Komm darüber!"(이쪽으로 넘어와!) 라고 외치자 그는 재빠르게 철조망을 넘어가 서독 경찰이 준비한 차량에 탑승하여 탈출하였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이후 서독에 정착하게 되었다. 사진이 상당히 극적으로 촬영되었고, 또 첫 탈출자가 동독 공권력의 일원인 경찰이었다는 점에서 자유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탈출 장면과 탈출 후의 기자회견 영상 하지만 이 기록 덕분에 슈만은 동독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혔고, 바이에른에 거주하며 잉골슈타트의 아우디 공장에서 설비 관리자로 일하다가 통일 이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친척과 가족들의 냉대와 서먹함을 극복하지 못해 다시 돌아왔다. 이런 씁쓸한 경험에 전직 슈타지나 국경경비대원이 자신에게 복수하러 올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겹쳐 우울장애에 시달리다가 1998년 56세의 나이로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다.
  • 초기 장벽은 벽돌을 여러 장 쌓아올려 모르타르로 고정한 형태였고, 이 점을 노려 대형 버스나 트럭, 심지어 동독군에서 훔친 전차 같이 육중한 차량을 몰고 벽을 들이받아 돌파하는 식으로 탈출한 사례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동-서베를린 사이의 도로 흔적이 남은 구간에서는 경비가 삼엄해졌고, 장벽도 벽돌보다 훨씬 견고한 철근 콘크리트 벽체로 개량되었다.
  • 점령군 병력 이동을 위해 장벽 사이사이에 설치한 몇 안 되는 검문소를 돌파해 탈출한 이들도 있다. 차단봉 밑을 지나가기 위해 보닛이며 유리창을 싹 뜯어버린 차를 몰고 목숨을 건 곡예운전을 해서 서베를린에 도착한다는 계획이었는데, 2차례 성공했다.
  • 소련군 육군 장교 군복을 직접 만들어서 네 명이 탈출한 사례도 있다. 남성 세 명은 승용차를 타고 장교 행세를 하면서 유창한 러시아어로 검문소의 국경수비대원들을 물먹였으며, 나머지 한 명은 옷을 만들어 준 여성인데 그 차의 트렁크에 숨어서 무사히 서베를린으로 탈출했다.
  • 차량을 이용한 탈출 사례가 늘자 군용이고 민수용이고 가리지 않고 철저한 검문 검색이 행해졌는데, 2인승 초소형 경차의 경우 이렇다할 적재공간이 없기 때문에 비교적 느슨한 수색만을 받고 통과하고는 했다. 이에 착안해 차대를 최대한 쥐어짜 1사람이 가까스로 숨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개조된 차량 1대가 탈출용으로 이용된 사례가 있다. 수 차례에 걸쳐 성공적으로 월경에 이용되었으나, 한 노인을 탈출시키던 시도 중 검문 과정에서 기침을 참지 못해 차가 요동치게 되었고, 이를 수상하게 여긴 국경수비대원에 의해 발각되며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인적이 드문 한밤 중에 장벽과 가까운 편인 고층 건물에서 밧줄에 옭아맨 무거운 추를 장벽 너머에 던져놓고, 줄에 매어 놓은 리프트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 탈출한 유격을 방불케 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장벽과 가까이 있거나 무인지대에 있던 건물들은 가능한 한 철거 혹은 폭파되었고, 장벽의 높이도 계속 높아지게 됐다.
  • 대형 트럭에 싣고 다니는 커다란 드럼케이블의 나무통 속을 이용해 1통 당 4명씩 들어가 탈출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세 번째 탈출 시도 때 수상하게 여긴 국경수비대원이 나무판자를 뜯어내 탈출 기도자를 찾아내면서 덜미가 잡혔다.
  • 장벽 밑에 땅굴을 파고 탈출한 사례도 상당수 있다. 서베를린과 가까운 동독의 어느 가정집에서는 화장실 변기를 뜯어내고 저수조를 우회해 장벽 너머 145m 떨어진 서베를린의 빵집까지 땅굴을 팠고, 이 땅굴로 59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서베를린의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탈출 협조단도 지질학과 학생까지 동원해 정교한 땅굴을 파내려 갔고, 동베를린에 심어둔 비선 조직과 연계해 탈출자들을 서베를린으로 인솔했다. 다만 이 방법도 훗날 꼬리가 밟혀서, 탈출을 위해 땅굴을 파내려가다가 동독 국경수비대에 덜미를 잡힌 이들도 많았다. 발견된 땅굴에도 탈출 시도가 불가능하도록 가스와 수류탄 세례가 퍼부어졌고, 이후 모두 메워졌다. 급기야 이것 때문에 동독 국경수비대는 지하에 터널을 파서 순찰을 했다.
  • 소련기 도장을 한 초소형 항공기를 이용한 월경시도도 있었다. 동독군 방공포병들에게 발각되기는 했지만, 이들이 격추를 망설이던 사이 무사히 월경.
  • 의외로 대형 공업기계류에 숨어서 탈출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물론 국경수비대원들도 이런 대형 기계류는 가능한 선에서 뜯어보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나 이중공간을 만들어 국경수비대원들의 눈을 속이고 무사 탈출했다.
  • 승용차에 철판을 덧댄 자작 장갑차를 몰고 검문소를 강행돌파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이쪽은 결국 앞유리쪽 방탄판을 관통한 총알에 의해 운전자가 사망하면서 실패.
  • 서독 출신의 남자가 동독에 사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탈출시키기 위해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매번 동독과 서독을 오갈 때 학자마냥 항상 큰 가방에 책을 가득 넣고 다녔다. 동독 국경수비대원들은 이것을 보고 매번 수상히 여겨 그가 국경을 오갈 때마다 철저하게 검문했지만, 항상 가방 안에는 책만 잔뜩 있었기 때문에 매번 보내줄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국경수비대원들이 그를 기억하고 '또 저 양반이네…'하는 식으로 그를 그냥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동독을 방문하고 서독으로 갈 때도 동독 국경수비대원들은 조사를 대충 하고 그냥 보내주었는데, 그 때 그 서독 남자의 가방 속에는 책이 아닌 자신의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온갖 신묘한 재주로 탈출에 성공한 이들 이상으로 실패한 이들도 많았다. 총 136명의 사망자가 나왔는데, 이 수치는 탈출 시도자, 경비원, 오인 사격의 희생자 등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심지어 분단 말기에는 장벽 위에 매달려서 탈출하려는 사람에게 동독 국경수비대가 총을 난사해서 장벽 위에 '''죽은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는데''' 이게 동독 구역인지 서독 구역인지 애매해서 사체 수습도 못한 채 한동안 방치되었던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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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 희생자는 크리스 귀프로이라는 남성으로 21살의 나이(1968년생)에 1989년 2월 6일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총에 맞았다. 장벽이 무너지기 불과 9달 전이었다. 묘비명은 "Opfer der Honecker Diktatur"(호네커 독재의 희생자). 같이 넘던 친구는 살아남아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 해 9월 풀려났다. 그를 쏴죽인 국경수비대 장교 잉고 H(가명)는 통일 후 체포되어 3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2년형으로 감형되어 형기를 채우고 풀려났다. 같이 기소된 수비대원 세 명은 "상부의 명령을 피할 수 없었다"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비밀탈출통로을 첫 공개하였다.#

6. 붕괴까지의 과정과 이후


1989년 9월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월요 시위가 기폭제가 되어 동독 전역으로 민주화 시위가 번진다. 이 여파로 발생한 에리히 호네커의 실각을 전후로 동독 사람들은 언론 자유화, 여행 개방을 주제로 매주마다 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동독 지도부는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불간섭 정책은 확고했고, '''그 쪽도 그 쪽대로 급한 상황이라''' 결국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여행자유화''' 정책을 1989년 11월 9일 오후 6시 58분 경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다.
물론 일종의 회유책으로 나온 정책이었으니 만큼 일단 동서독 국경을 통한 입출국 허용 및 행정 절차 간소화, 여권발급기간 단축 등이 발표되었으나 실제론 여권발급기간 단축 외엔 별로 달라졌다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 기자회견장에서 어떤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부터 국경 개방이 시행되느냐?"는 질문을 했고, 휴가 후 복귀하자마자 회견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당 지도부에서 결정한 정책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던 동베를린 SED 총서기 귄터 샤보프스키#가 별 생각없이 '''지연 없이 즉시(Sofort, unverzüglich.)'''라고 대답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원래는 그 다음날인 11월 10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시간 상으로는 어느 정도 맞게 설명한 것이다. 저녁 7시에 발표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상의 약 40초 부분에서 나온다. 통일 이후 샤보프스키는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는 동독인 다수를 살해한 정치 혐의로 1989년 10개월간 투옥되었다 사면되었고, 평생 자신의 실수에 대한 죄책감과 도의적 책임감에 시달렸기 때문에 좀처럼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여생을 보내다 2015년 11월 1일 사망했다.
사실 동독 및 서독 기자들은 위에서 말한 대로 국경 개방 같은 것도 아닌 단순하게 여행 조치에 숨통을 틔워 준 수준이라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걸 알아챘기 때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독일어가 서툴렀던 이탈리아 ANSA 사의 리카르도 에르만은 회견 직후 이 '''여행 자유화''' 조치를 '''국경 자유 통과'''로 착각하고 본국에 급전을 보내는 (동독 입장에서) 세계적 오보를 냈다. 참고로 이 소식을 받은 ANSA 본사에서도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 에르만을 미친 사람 취급했었다. 허나 현지 기자를 믿어달라는 에르만의 간청에 본사가 굴복하면서 '''세계사는 바뀌었다.''' 이 소식은 미국을 건너 그날 밤 서독 텔레비전에까지 퍼져나가 순식간에 수많은 동서독인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1989년 11월 9일 당시 ARDTagesschau 보도.

1989년 11월 9일 당시 ZDFHeute-Journal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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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샤보브스키의 기자회견 직후에는 동독인들도 시큰둥한 반응이였다. 본격적으로 동독인들의 눈이 돌아가기 시작한 건 처음 오보를 낸 이탈리아를 거쳐 미국 등 세계적으로 퍼진 소식이 서독까지 돌아오고 난 뒤부터였다. 마침내 양쪽 시민들은 공구를 가지고 와서''' 장벽을 개박살내기 시작했다.''' 빨리 벽을 부수기 위해 양쪽에서 오함마, 드릴, '''심지어 불도저크레인까지 끌고 나왔다!''' 당연히 동독 국경수비대원들과 세관원들은 막으려고 했지만, 통제 불가능한 어마어마한 인파가 계속 밀려와서 상황 통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총서기도 당 지도부의 결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마당이니 국경경비대원들도 상부에서 어떠한 지시도 받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이 때 동독 국경수비대 대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 하나였다. 따로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 없이 총을 쏴대면서 유혈 진압을 하다가 분노한 군중들에게 맞아 죽는 것과, 얌전히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당연히 대원들은 후자를 택했다.
장벽 해체 소식을 듣게 된 서방의 여러 예술인들도 베를린으로 와서 특별 콘서트를 여는 등, 연말까지 축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심지어 마지막 사진처럼, 동독 국경수비대원들조차 서독 경찰의 환영을 받으며 장벽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독일 유학 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서베를린 동독 난민 수용소 수위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베를린 시민들이 난민 수용소에 갇힌 가족들을 보러 오느라 몰려들어 김정운 교수는 이들을 저지하고 수용소 열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대치했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1989년 12월 31일 신년 전야의 모습. 그렇게 대다수의 동서독인들은 이곳에서 1990년 새해를 맞이했다.

미국의 가수 데이비드 해셀호프(David Hasselhoff)의 축하공연. 노래는 Looking For Freedom.
다만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는데,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프랑스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 같은 인사들은 장벽 붕괴가 곧 통일의 시발점이고 이는 유럽의 균형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독일이 통일되면 다시 강대국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란 두려움은 만성적인 것이었고, 실제로 당시엔 그럴만도 했다. 독일 내에서도 아직 통일에 대한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장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다고 느낀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우려와 상관 없이 장벽의 해체는 계속되었고, 1990년 10월 통일이 공식 선언된 이후에도 계속 장벽과 제반 시설물에 대한 철거, 끊긴 도로와 철도의 복구가 계속되었다. 이 작업을 위해 3년 동안 1억 마르크의 예산과 400여 명의 해체 전문가가 투입되었고, 철거 과정에서 제거된 흙과 시멘트만 해도 무려 '''75만 톤'''에 달했다.
장벽 제거, 통일 논의와 더불어 그 동안 베를린을 분할 관리해온 미군영국군, 프랑스군, 소련군(이후 러시아군)도 단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시의 경계 업무를 독일 측에 완전히 인계했다. 훗날 당시 오보 기사를 만들어낸 리카르도 에르만은 2008년 독일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수여받기도 했다.
2000년대에 가서는 기존 장벽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없어졌는데, 다만 일부 구간에는 분단 당시의 상황을 후대들에게 재교육하기 위해 그대로 남겨놓은 곳도 있다. 대표적인 구간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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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 - 프리드리히스하인-크로이츠베르크 지구의 뮬렌슈트라세에 있는 장벽 존치 공간으로, 약 1.3km 구간의 장벽이 보존되어 있다. 갤러리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분단 시절 자주 낙서와 그래피티 대상이 되었던 장벽을 여러 현대미술가들의 캔버스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2013년 3월 일부분이 헐리고 말았다. 아래를 참고할 것. 도심에서 살짝 동쪽으로 벗어난 곳이고 베를린 동역이 코앞에 있다. 거리가 길어서 사람은 의외로 많이 없지만 형제의 키스 그림 앞만큼은 사람이 꽤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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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의 지형(Topographie des Terrors) - 크로이츠베르크 지구의 니더키르히너슈트라세에 있는 존치 공간인데, 예전에 나치 친위대 산하의 악명높은 비밀경찰 조직이었던 게슈타포 본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통일 후 이들이 벌여놓았던 참상과 잔악함을 후손들에게 교육시키기 위해 박물관이 조성되었고, 본부 바로 옆에 있었던 약 80m 가량의 장벽도 허물지 않고 남겨두어 전시 공간으로 쓰고 있다. 가장 포토존과 거리가 먼 곳이다. 테러의 지형 자체도 포츠담 광장과의 거리도 가깝고 입장료도 무료이며 전시물도 상당히 알차다. 다만 악행을 여과없이 보여주다 보니 참수 장면 등이 사진 그대로 나오는 등 상당히 수위가 높은 전시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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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당시 체크 포인트 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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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체크 포인트 찰리의 모습.
체크 포인트 찰리와 포츠담 광장 사잇길 - 검문소를 철거하고 광장을 현대적인 재건축하기 위해 이 구간도 원래 헐릴 예정이었지만, 분단 시대 가장 유명했던 장소이기도 했으니 역사 유산으로 남겨놓자는 여론을 받아들여 존치시키고 있다. 제 2차 베를린 위기 당시 미 육군과 소련 육군 전차가 대치한 곳 이기도 하다. 현재 검문소 앞에는 냉전 당시 군인 복장을 하고 있는 연기자들이 있는데 2유로 정도를 주면 같이 사진을 찍어준다.
포츠담 광장 - 위 세 군데처럼 큰 규모로 보존되어 있지는 않으며, 서너 개의 장벽 구조물을 장벽이 있던 자리를 따라 세워놓은 정도다. 거의 관광객용 포토존 급. 진지하게 장벽을 구경하고 싶다면 이쪽은 피하자. 어차피 포토존 아닌 곳을 찾기 힘들지만 여기 있는 장벽은 사실상 장벽이 '있었다' 정도의 설명을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다. 게다가 장벽에는 씹던 껌까지 붙여져 있다.
이외에 철거된 구간들에서 장벽이 서 있던 곳을 표시하기 위해 도로에 박아놓은 표석이나 기념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포츠담 광장이나 일부 기념되는 장소는 장벽 라인이 있다. 철거 후 남은 잔해 장벽들은 전세계에 보내져 전시되고 있으며, 일부는 대한민국에도 보존되어 있다.
2009년 11월 9일에는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베를린에서 대대적인 기념 행사가 열렸는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부터 약 1,000여 개의 스티로폼 장벽들로 도미노를 쌓고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 월경을 허가한 바로 그 시각에 밀어서 넘어뜨리는 퍼포먼스가 열렸다. 이 행사는 ZDF 같은 방송국들에서 실황으로 중계되었다. 영상
동시에 아직도 분단 상황에 놓여 있는 한국 예술인들을 초청해 장벽과 분단을 주제로 한 예술품을 전시하는 행사도 열렸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때문에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축조된 장벽의 철폐를 요구하는 평화운동가들의 집회도 개최되었다. 인터넷 상에서도 장벽 철폐 = 규제 철폐라는 은유로 중국 같이 인터넷 접속을 제한하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넷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이 때의 영향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베를린 장벽에 "조국은 하나"라고 '''한글로 써 놓은''' 것이 찍힌 사진이 존재한다.
여담이지만 장벽 해체 이후 남은 몇몇 조각들은 관광객들이나 수집가들을 상대로 판매한다는 모양. 월드 인 컨플릭트 한정판에도 장벽 조각이 들어 있다.# 가끔 몇몇 사기꾼들은 여행객들을 상대로 의미없는 돌덩이를 '베를린 장벽 조각'이라고 파는 경우가 종종 있는 모양이다. 일부 기념품점에서 5~10유로로 작은 돌조각을 살 수 있다. 베를린 장벽 그림의 엽서의 일부로 플라스틱 구에 들어있는데 매우 그럴듯하다.
2013년 3월 27일 이스트사이드에 남은 장벽이 새벽에 기습적인 철거로 무너졌다. 고급 아파트먼트 단지를 위한 도로를 내고자 이뤄진 것인데 장본인인 건설업체 대표는 도로공사가 끝나면 복원하겠다고 하여 욕먹고 있다.
영화배우 김꽃비가 베를린 체류 중 ARD 타게스샤우의 베를린 장벽 철거 25주년 관련 보도에 출연했다. 지나가던 아시안 관광객 1인으로 2014.11.9 Tagesschau 뉴스 영상(3분 12초부터)

희한하게도 '베를린 장벽'이라는 게임도 만들어졌다. 갈스패닉 시리즈로 유명한 카네코에서 독일이 통일되자마자 바로 만들기 시작해서 1991년 1월에 출시했는데#, 유치원생 같은 옷을 입은 주인공이 바닥을 주먹으로 깬 다음 거기에 적이 끼이면 주먹으로 때려 다져서 죽이는 게임이다. A 버튼은 땅을 깨는 주먹, B 버튼은 깨진 땅을 발로 다져서 원래대로 만드는 버튼이다. 텀블팝이나 스노우 브라더스와 비슷한 게임이다. 적들도 무슨 고슴도치 같은 적들이 나오는데 베를린 장벽과의 연관성이라고는 이 게임의 배경을 독일이 통일할 때 찍은 사진으로 썼다는 것 하나 뿐이다. 교도통신과 일본의 '세계문화포토'라는 포토에이전시의 허가를 받고 해당 언론사들이 취재한 사진들을 정식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타이틀 화면 아래에 있는 저작권 표기에 이 두 업체가 표기되어 있다.
스페인의 가수 라 오레하 데 반 고흐의 음반 Cometas por el cielo[4] 에 있는 수록곡 중 Dia Cero는 바로 베를린 장벽의 슬픔을 나타내는 노래다.

장벽이 무너질 당시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가 방한 중이었다. 김대중과의 면담 도중, 독일의 통일이 언제쯤 이뤄질 것 같냐는 질문에 먼 훗날이라고 대답했더니 바로 장벽이 무너졌다는 급보가 날라와서 부랴부랴 귀국했다고.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도이칠란트편[5]을 보면 구판에서는 "도이칠란트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하는 여러 가지 키워드 중 "베를린 장벽" 이라고 답하는 컷이 있었다. 그리고 1990년 이후 나온 개정판에서는 이 대사가 "통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에는 대전광역시의 표심이 진보 지지의 서대전과 보수 지지의 동대전으로 정확히 2등분되는 것을 바탕으로 대를린 장벽이라는 패러디가 있었다.[6] 하지만 19대 대선부터는 동대전도 진보 쪽이 우세하게 나와 '''대를린 장벽이 붕괴되어 대전이 통일됐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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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대한민국에 보존중인 베를린 장벽


베를린 장벽의 철거 이후 장벽의 일부가 세계 곳곳으로 팔려나가거나 기증되었는데, 한국에도 베를린 장벽의 실물을 볼 수 있다. 서울, 의정부, 대전, 제주에 보존된 것으로 알려졌다.
1993 대전 엑스포를 맞이하여 베를린 장벽이 대전광역시에 들어왔는데, 당시 독일관 앞에 전시되어 있었고, 엑스포 폐막 이후 대전에 기증되어 현재 대전엑스포공원 내 대전엑스포 기념관 외부에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2020년 기준 그래피티 범죄자들로 인해 서울에 있는 장벽보다 더 큰 피해를 받아서 심각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에는 청계천 복원을 기념하여 우리은행의 자금 지원과 베를린 시의 기증으로 서울특별시 청계2가 사거리의 장교빌딩과 한화빌딩 맞은편에 조성된 '베를린 광장'에 설치되었는데 베를린 장벽의 실물 3개와 100년이 넘은 독일 가로등, 베를린의 상징인 곰 조형물 등을 볼 수 있다.
2007년에는 제주도가 베를린 시로부터 장벽 2개와 철조망을 기증받아 제주4.3평화공원 구내에 설치하였다.
2014년에는 의정부시의정부역 앞의 평화통일공원을 건설하면서 베를린 시와 민간회사의 기증으로 베를린 장벽의 실물 4개와 브란덴부르크 문 축소모형을 설치했다.
장벽 전체는 아니지만, 거기서 떼어낸 파편 두 개도 국립중앙도서관에 상주하는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장벽 구조물 일부를 활용한 조형물이 1993년 건국대학교 상허기념도서관 앞에 설치되었다.

6.1.1. 2018년 서울 베를린 장벽 훼손 사건



7. 관련 어록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라틴어: Civis romanus sum[7]

)’였습니다. 오늘날, 자유 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유진영공산진영 간의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잘 모르거나 또는 모르면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Let them come to Berlin). 공산주의가 미래의 흐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 공산주의자와 함께 나아갈 수 있다고 유럽과 일부 지역에서 말합니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

심지어 공산주의는 나쁜 제도이지만 경제 발전의 기회를 준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

민주주의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며 완벽하지도 않지만, 우리는 결코 국민을 가두려고 또는 국민이 우리로부터 떠나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벽을 쌓은 적은 없었습니다. 미국 국민은 비록 옆에는 없었지만 지난 18년의 역사를 여러분과 함께 한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대서양 건너 수 만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민을 대신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8년 간 포위 당하고도 서베를린처럼 희망과 결의가 활기 있게 살아있는 도시는 아직 없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야말로 공산주의의 좌절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가장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시장님 말씀처럼 가족을 뿔뿔이 흩어 놓고, 남편과 아내, 형제와 자매를 갈라 놓고, 함께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떼어 놓는 것은 역사와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든 간에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이 말을 자랑스럽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

- 1963년 6월 26일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연설 중에서.

"General Secretary Gorbachev, if you seek peace, if you seek prosperity for the Soviet Union and Eastern Europe, if you seek liberalization: Come here to this gate! '''Mr. Gorbachev, Open this gate! 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

"고르바초프 서기장! 평화를 원한다면, 소련동유럽의 번영을 원한다면, 자유화를 원한다면, 이 문으로 오시오! '''고르바초프 씨, 이 문을 여시오! 고르바초프 씨, 이 장벽을 허무시오![8]

'''"

- 1987년 6월 12일,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이와 관련된 비하인드 영상


[1] 1974년 월드컵 본선에서 붙었다. 당시 개최국이 서독이었고 서독은 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결승까지 가서 네덜란드를 꺾고 우승까지 차지했다. 여담으로 뮌헨에서 열린 이 결승전은 '''프란츠 베켄바워'''와 '''요한 크루이프'''의 세기의 대결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2] German Air Traffic Control During The Cold War: The Story of Rhein Control 참조[3] 이에 관해서는 K. Hesse, Grundzüge des Verfassungsrechts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20. Aufl. 1995, Rdnrn. 93f. 참조.[4] 총합으로 따지면 6집, 레이레 마르티네스 기준으로 2집.[5] 이원복은 독일 유학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도이칠란트"라는 표현을 고집한다.[6] 충청도 지역의 표심이 대체적으로 보수적인지라 동독 가운데 붕 떠 있던 서베를린처럼 보수적인 충청도 가운데 진보로 붕 떠 있는 서대전이라는 의미도 있다.[7] 고대 로마에서는 체포될 때 이 말을 하면 고문을 받지 않고 정당한 수사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울이 있다.[8] 육성이 1997년작 영화 '자칼'의 오프닝에 삽입되었다. 이 연설에 얽힌 뒷이야기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