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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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st Thälmann''' (1886년 4월 16일 ~ 1944년 8월 18일)
독일의 정치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활약했던 독일 공산당(KPD) 지도자였다.
함부르크의 항만노동자 출신으로 1902년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에 육군 병사로 징집되어 1918년 독일 제국 패망 시까지 포병으로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이후 1920년 독일 공산당(KPD)에 합류하였으며, 1921년에는 독일 공산당의 대표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함부르크에서 무장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따라 한동안 도피 생활을 하기도 한다.
1924년에는 국회의원, 1925년에는 독일 공산당의 중앙위원장이 되어 당의 대중화를 도모하였다. 같은 해에 독일 공산당의 준군사단체였던 적색전선전사연맹(Roter Frontkämpferbund)의 수장에 오르면서 독일 공산당의 총재직도 겸임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공산당의 후보로 192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애초에 상대는 탄넨베르크 전투 이후 전 독일의 영웅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였기 때문에 바로 탈락하고 만다. 텔만이 출마해서 중도층의 표를 상당 부분 갉아먹은 덕분에, 힌덴부르크를 위협할 가장 큰 적수였던 가톨릭 중앙당의 빌헬름 마르크스가 피를 본다.
하지만 이후 텔만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저지르는데,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하는) 중도 좌파 세력을 파괴하라' 라고 하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지령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1928년 6차 코민테른 대회를 기점으로, 스탈린주의에 충실한 방향으로 공격적, 과격적 노선이 채택되면서 코민테른의 기능도 맛이 가기 시작한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한창 세를 불리고 있던 나치를 견제하지 않고 독일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으로 표기) 세력과 전력을 다해 싸우는 근시안적인 행보를 보였고, 이런 만평까지 나올 정도였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가 준군사조직 자유군단에 의해 죽었는데, 그때 자유군단을 지휘한 구스타프 노스케(Gustav Noske), 그에게 지시를 내린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모두 사민당 소속이었다. 사민당과 공산당은 철전지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관계이긴 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출마한 텔만은 힌덴부르크, 히틀러에 이어 10.2%의 지지율로 3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힌덴부르크의 당선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득표율이었다. 참고로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에 공산당이 내세운 슬로건이 "힌덴부르크를 뽑는 것은 히틀러를 뽑는 것이고, 히틀러를 뽑는 것은 전쟁으로 가는 길이다"였다.[1]
이듬해인 1933년에는 히틀러가 총리직에 오른 데 이어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체포하면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텔만을 비롯하여 4천여명의 공산당원들이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체포했으며, 텔만은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투옥되었다. 수감생활 중이던 1939년 8월, 나치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을 당시 소련 측의 의중에 맞춰 그를 석방하려던 계획이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이후 부헨발트 수용소에 줄곧 갇혀 지내다가,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패망이 짙어지자 히틀러의 명령으로 총살 되었다고 전해진다. 나치는 그가 연합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었다. 만약 그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동독의 지도지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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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st Thälmann''' (1886년 4월 16일 ~ 1944년 8월 18일)
1. 개요
독일의 정치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활약했던 독일 공산당(KPD) 지도자였다.
2. 생애
함부르크의 항만노동자 출신으로 1902년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에 육군 병사로 징집되어 1918년 독일 제국 패망 시까지 포병으로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이후 1920년 독일 공산당(KPD)에 합류하였으며, 1921년에는 독일 공산당의 대표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함부르크에서 무장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따라 한동안 도피 생활을 하기도 한다.
1924년에는 국회의원, 1925년에는 독일 공산당의 중앙위원장이 되어 당의 대중화를 도모하였다. 같은 해에 독일 공산당의 준군사단체였던 적색전선전사연맹(Roter Frontkämpferbund)의 수장에 오르면서 독일 공산당의 총재직도 겸임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공산당의 후보로 192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애초에 상대는 탄넨베르크 전투 이후 전 독일의 영웅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였기 때문에 바로 탈락하고 만다. 텔만이 출마해서 중도층의 표를 상당 부분 갉아먹은 덕분에, 힌덴부르크를 위협할 가장 큰 적수였던 가톨릭 중앙당의 빌헬름 마르크스가 피를 본다.
하지만 이후 텔만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저지르는데,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하는) 중도 좌파 세력을 파괴하라' 라고 하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지령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1928년 6차 코민테른 대회를 기점으로, 스탈린주의에 충실한 방향으로 공격적, 과격적 노선이 채택되면서 코민테른의 기능도 맛이 가기 시작한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한창 세를 불리고 있던 나치를 견제하지 않고 독일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으로 표기) 세력과 전력을 다해 싸우는 근시안적인 행보를 보였고, 이런 만평까지 나올 정도였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가 준군사조직 자유군단에 의해 죽었는데, 그때 자유군단을 지휘한 구스타프 노스케(Gustav Noske), 그에게 지시를 내린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모두 사민당 소속이었다. 사민당과 공산당은 철전지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관계이긴 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출마한 텔만은 힌덴부르크, 히틀러에 이어 10.2%의 지지율로 3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힌덴부르크의 당선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득표율이었다. 참고로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에 공산당이 내세운 슬로건이 "힌덴부르크를 뽑는 것은 히틀러를 뽑는 것이고, 히틀러를 뽑는 것은 전쟁으로 가는 길이다"였다.[1]
이듬해인 1933년에는 히틀러가 총리직에 오른 데 이어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체포하면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텔만을 비롯하여 4천여명의 공산당원들이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체포했으며, 텔만은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투옥되었다. 수감생활 중이던 1939년 8월, 나치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을 당시 소련 측의 의중에 맞춰 그를 석방하려던 계획이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이후 부헨발트 수용소에 줄곧 갇혀 지내다가,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패망이 짙어지자 히틀러의 명령으로 총살 되었다고 전해진다. 나치는 그가 연합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었다. 만약 그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동독의 지도지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3. 여담
- 사실 비판할 거리는 많았다 경제대공황 이후로는 혁명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판단하면서 나치당의 힘을 과소평가하며 나치에 맞서기보다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지층을 빼는데 골몰한 나머지 나치의 힘이 커졌음에도 지속적으로 대립하는 근시안적인 행보를 보였던 것. 결국 공산당과 사민당이 서로 힘을 뺀 결과, 나치당이 우익정당들과 손잡고 진짜로 집권하게 되자 그제서야 수습하려했지만 타이밍이 너무나도 뒤늦은데다가 우연한 사건까지 겹쳐 결국은 비참한 말년을 보내게 된 스탈린주의자였다. 그러나 일관된 반나치 전적과 장기간 수감 이후 전쟁 막바지 처형이란 최후 때문에 전후 독일 공산당과 동독 정권에서 영웅시되고 높이 평가받았다. 나치의 영향은 철저하게 배제하지만, 여전히 국가적 정체성이나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를 주입할 필요가 있었던 동독 당국에선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계 국제여단원들과 더불어 사회주의 독일의 원류 정도로 추앙했다.
- 그의 일대기를 다룬 선전 영화 <텔만: 계급의 아들>, <계급의 지도자 텔만> 2부작은 전후 복구 기간 동독 정권에서 큰돈 투자하여 만든,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의 정수가 담겨 있는 영화로 크게 히트했기 때문에 텔만은 실제 정치인으로서 행적보다 나치에게 희생당한 순교자로서 대중에게 크게 각인되었다. 또한, 그를 기리는 찬가인 텔만의 노래(Thälmannlied)도 있었다.
-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국편에 서서 싸운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출신 의용군을 중심으로 한 1,500명 규모의 대대가 만들어졌으며, 그를 기리기 위해 '텔만 대대(Thälmann-Bataillon)'라고 이름 붙여졌다. 2차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한 요시프 브로즈 티토 휘하에도 1943년에 조직된 텔만 대대가 존재했다. 독일군 탈영병과 현지 독일계 주민으로 구성된 부대로 약 200여 명 규모였다.
- 스탈린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1928년 측근이 벌인 공금횡령 추문을 덮으려다가 텔만은 당 중앙위원회에서 축출되었다. 이때 스탈린이 개입하여 그를 위원장 자리에 복귀시켰고, 이후 당내 우파, 중도좌파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깡그리 쫓아내 버린다. 이는 독일 공산당의 스탈린주의화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