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호네커

 



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2.2. 제3제국 시절의 행보
2.3. 전후 장기 집권
2.4. 몰락
2.5. 말년
3. 평가
4. 매체에서
5. 이야깃거리
6. 소속 정당
7. 관련 문서

[image]
'''이름'''
Erich Honecker
'''출생'''
[image]독일 제국 자를란트 노인키르헨(Neunkirchen) 1912년 8월 25일
'''사망'''
[image]칠레 산티아고1994년 5월 29일

1. 개요


독일공산주의자이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전 서기장. 동독의 최고권력자였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정치인으로, 동독의 서기장 중 가장 장기 집권[1]하였으며, 동독 역사상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912년 8월 25일, 독일 자를란트 주 노인키르헨(Neunkirchen)에서 광부이자 공산주의자인 빌헬름 호네커(Wilhelm Honecker)의 4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6남매 중 첫째인 카타리나(Katharina, 1906–1925), 둘째인 빌헬름(Wilhelm, 1907–1944), 막내인 카를로베르트(Karl-Robert, 1923–1947)는 다들 10~30대에 요절했고, 셋째인 프리다(Frieda, 1909–1974)와 다섯째 게르트루트(Gertrud, 1917–2010)만이 에리히와 함께 오래 살아남았다.
공산주의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호네커는 10살 생일 직후 스파르타쿠스단의 비벨스키르헨(Wiebelskirchen) 지구 소년단에 들어갔다. 14살 때는 독일공산당(KPD)의 청소년 단체에 가입했으며, 1929년에 정식 공산당원이 되었다. 당시 그의 정식 직업은 슬레이트공이었다고 한다. 그가 공산주의에 경도된 또 하나의 이유가, 그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거주하던 자르 지방이 프랑스군정 지구가 되어 프랑스군의 주둔을 경험한 탓이라는 설도 있다.

2.2. 제3제국 시절의 행보


1933년,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은 정권을 장악한 뒤 공산당 등 다른 정당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불법화된 공산당 활동을 호네커는 이 시기에 도리어 열성적으로 시작했고, 곧 독일 나치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혀, 1933년에는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금방 풀려나기도 했다.1935년, 결국 게슈타포에 의해 다시 체포된 뒤, 반란 모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10년 간의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공산당원 중에는 제법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독일 정부로부터 호네커는 수 차례의 전향 요구를 제의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수감되어 있던 수용소가 연합군폭격으로 파괴되던 찰나에 아슬아슬하게 이감되어 살아남는 등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전쟁 말기의 혼란을 틈타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1945년 4월 27일에, 수용소를 점령 후 해방시킨 소련군의 도움으로 베를린으로 빠져나왔다.

2.3. 전후 장기 집권


석방된 그는 곧 소련군에 소속된 독일 공산주의자들과 합류했는데, 당시 소련군에 소속된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그들의 점령 지역에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기 위해 소련 국내에서 훈련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는 자유독일청년단(Freie Deutsche Jugend; FDJ)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 되어,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단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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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DJ 시절의 호네커. 1946년에 찍힌 사진이다.
1946년,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동독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소련의 압력으로 통합, 신 정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을 결성하도록 막후에서 힘썼다. SED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급속히 성장했고, 1967년에는 동독의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의 후계자로서 주목받았다. 1971년 SED 당수와 국가평의회 의장을 겸임하게 됨으로써 그는 당과 정부를 모두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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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제5회 SED 전당대회 당시 호네커의 모습. 뒤에 있는 사람이 그의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다.
1970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에게 울브리히트 축출을 건의했고 결국 이듬해에 정치국원 13명과의 연명을 통해서 이를 관철시키는데 성공했다. 1976년 10월 29일, 발터 울브리히트의 후임자였던 퇴역 육군대장 빌리 슈토프 장군이 집권 3년만에 물러나면서 뒤를 이어 서기장에 취임했다.
호네커의 통치 기간 동독은 '''상대적으로 억압적인 국가 중 하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유럽소련 위성국들 중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을 누렸다. 그는 서독과의 무역 및 관광 교류를 증진시켰고[2], 그 대가로 서독의 경제 원조를 받았다.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소련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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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의 김일성과 호네커

2.4. 몰락


이후 1980년대 말, 유럽 공산 국가들이 차례로 몰락하자 호네커는 나름대로 위기 의식을 갖기 시작했으나, 공산주의 체제를 더는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9년, 호네커는 매년 10월 7일에 이뤄지던 독일민주공화국 수립 기념 행사(당시에는 40주년)를 역대 가장 성대한 행사로 개최하여, 공산주의 체제가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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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주년 기념 행사 당시 국가인민군을 사열하는 호네커. 국방부장관 겸 동독 육군 장군 하인츠 케슬러(Heinz Keßler, 1920.01.26 - 2017.05.02)의 왼쪽에서 경례 중인 중절모 쓴 사람이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소련의 서기장인 미하일 고르바초프이다.
그러나, 이틀 뒤인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정권 반대 시위가 끊이지 않은 데다, 퍼레이드 참석차 방문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호네커와 회동한 자리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대열에 동참을 호소했다 거부당한 데에 대한 반격으로 호네커 축출에 힘을 실어 줌으로써, 10월 18일 호네커는 젊은 나이의 에곤 크렌츠에게 당 서기장 및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했다.

2.5. 말년


통일 후 일단 베를린의 소련 육군 주둔군 기지로 도피했는데, 독일은 호네커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소련 정부는 이를 거부, 호네커를 자국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소련이 붕괴된 후, 이듬해 구 공산권에 대해 부정적이던 러시아 연방옐친 정부의 영향으로 더는 보호받지 못하고 1992년 독일로 송환되었다. 이후 호네커는 동독에서 집권하던 시절 서독으로 탈출하려던 동독 시민 192명을 즉결처분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이 재판 자체가 국제법적으로 동서독이 서로 다른 나라였던 시절 최고지도자의 통치행위를 흡수통일 이후 책임을 물어 재판하는 것이라서 큰 논란이 되었다. 게다가 암투병으로 인해 당장 사망해도 이상치 않은 중환자를 심리적으로 옥죄는 가혹한 행위였기에, 호네커의 평판이 최악이었던 당시에도 재판 지속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위를 점했다고 한다.[3] 이때 호네커는 1991년에 북한 망명을 타진하기도 했는데 김일성은 즉각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호네커를 북한에 데려와 편한 여생을 보내게 하라고 지시했지만 끝내 실패하여 크게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재판을 받으며 수감 생활을 하던 1993년, 으로 인한 병 보석 처리된 뒤 반년 후에 칠레로 망명하여 회고록을 집필하다가 이듬해 5월 29일 수도 산티아고에서 사망했다. 호네커의 사망에 북한에선 유족에게 "조선의 통일 정책을 적극 지지 성원해 주었는데 말년에 불행하게도 타국에서 서거한 데 대해 애석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라는 내용의 조전을 보냈다. 사후에 그 회고록은 통일독일의 기성 출판사들이 출간을 거절해서 어느 듣보잡 출판사가 출판하게 되었는데, 한창 통일 후유증이 흉흉했을 때라 구 동독 지역에선 꽤 팔려 출판사 입장에서 대박을 냈다고 한다.
실각 이후 그는 민주사회당(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에서 제명되었고, 그와 그의 부인은 1990년에 새로 결성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여 94년 죽을 때 까지 당원으로 머물렀다.

3. 평가


비록 호네커 개인의 실책 탓만은 아니지만, 일단 동독을 망하게 만든 원흉 1호로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래도 공산주의 국가의 독재자긴 하나 김일성이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같은 인간 말종 취급은 받지 않으며, 그 역시 최소한 인간이기를 포기한 적은 없었다. 호네커는 나치체제에서 목숨걸고 반나치 투쟁한 공로가 크고 동독을 공산 국가 중 가장 잘 살고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로 만든 것도 이 사람이다. 물론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공산주의 특유의 좋지 않은 억압은 당연히 있었으나 이때의 동독은 그나마 타 공산 국가들에 비해선 숨이라도 돌릴 수 있던 시기였다. 일단 공산당 지도자 중엔 성군은 아닐지언정 악평이 적은 편에 속하는 것은 확실하다.
호네커 일가의 생활 수준은 당시 서독의 중산층 정도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많다.[4] 물론 살 돈이 있어도 소비할 물품이 부족해서 오랫동안 대기만 타고 있던 대다수 동독 시민들에겐 이 정도도 엄청난 특권으로 보였겠지만, 동독 시민들의 생활 수준이 의식주 걱정할 일은 없었다는 점을 보면 상대적인 차이로도 호네커는 타 독재자들보다 검소하게 살았다. 오히려 국가원수라는 직책을 생각하면 되려 그 정도의 생활도 못 누리는 게 이상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실각 이후 그간 배정받았던 주택, 가구, 일상용품 등이 압류당했고, 아예 개인 계좌도 사용 정지되면서 사실상 전재산을 몰수당하였다. 업무 관련 서류나 사진, 편지 같은 사적인 물품 정도가 망명지인 칠레에 가져갈 수 있었던 전부였다고 한다.[5]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엔베르 호자를 제외하면 동구권 대부분의 전직 공산독재자들은 억압적이긴 했어도 호화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고슬라비아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1980년 사망 직후에 남겨진 개인 재산이라곤 오래된 양복 한벌이 전부였다.

4. 매체에서


독일 통일이나 동독의 말기 모습을 다룬 영화에서 자주 보이거나 언급되는 편이다.[6] 영화 굿바이 레닌에서 호네커가 하야하면서 호네커 초상화가 즉각 비내리는 길거리로 버려지는 모습이 나오며 타인의 삶에서는 호네커에 관한 농담을 지껄이다가 곤경에 처하는 소위가 등장한다.
이원복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에 등장하는데 시대착오적인 악랄한 독재자로 묘사된다.

5. 이야깃거리


  • 그의 아내 마르고트는 동독의 교육부 장관이었고, 2016년 5월 6일 사망하였다. 죽을 때까지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끝까지 동독 체제를 옹호하다 칠레에서 사망하였다. 기사
  • 1987년 서독 방문시 고향 노인키르헨을 방문해 40년 만에 여동생 게르트루드와 상봉하기도 했다. 노인키르헨은 그 이전에도 동독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 가운데 하나로, 이 곳에 한해서는 서기장 고향 견학 목적이라면 서독 방문 허가가 상대적으로 쉽게 나온 편이다.
  • 공산주의 유머 가운데 호네커를 소재로 한 농담이 존재한다.
>호네커가 모스크바에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일치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호네커와 함께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한 뒤 고르바초프는 옆에 있던 어린 공산당원에게 물었다.
>
>"너의 어머니가 누구지?"
>"조국입니다."
>
>"너의 아버지는 누구고?"
>"바로 고르바초프 서기장님이시죠."
>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니?"
>"훌륭한 공산당원이 되고 싶습니다!"
>
>이러한 소련의 모습에 호네커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더불어 동독에서도 그러한 단결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다. 고르바초프가 동독에 방문한 것이다. 호네커는 고르바초프와 함께하는 공식 행사를 마친 뒤 옆에 있던 어린 공산당원에게 질문을 했다. >
>
>"너의 어머니가 누구지?"
>"조국입니다."
>
>"너의 아버지는 누구고?"
>"바로 호네커 서기장님이시죠."
>
>호네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질문을 이었다.
>
>"그럼 너는 커서 어떤 어른이 되고 싶으니?"
>"고아가 되고 싶습니다!"[7]
>호네커가 아침 일찍 집무실로 출근하였다.
>창문을 열며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좋은 아침이야, 친애하는 태양아!"
>그러자 태양이 대답하길
>"좋은 아침이에요, 친애하는 에리히!"
>
>점심때 호네커가 다시 창문을 열고 태양에게 말하길,
>"좋은 오후야, 친애하는 태양아!"
>그러자 태양도
>" 좋은 오후에요, 친애하는 에리히!"
>
>일과 후 저녁에 호네커가 다시 창문쪽으로 가서 말하길,
>"좋은 저녁이야, 친애하는 태양아!"
>그런데 태양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좋은 저녁이야, 친애하는 태양아... 도대체 뭐가 문제니?"
>그러자 태양이 대답하길
>"날 좀 내버려 둬! 난 지금 서쪽에 있다고!"[8]
>호네커가 의전용 자동차[9] 타고 LPG[10]로 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길에서 돼지가 한 마리 튀어나왔고, 운전수가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해 돼지를 치어 죽이고 말았다. 화가 난 호네커는 돼지 주인에게 사과하라고 운전수를 농장으로 보냈다.
>
>한 시간 뒤, 운전수는 잔뜩 취해 술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 호네커가 물었다.
>
>"어떻게 된 거야?"
>
>운전수의 대답.
>
>"저는 그냥 가서 '나 호네커 서기장 운전수인데, 아까 그 돼지 쳐 죽였소!'라고 했어요."
>호네커가 슈타지 국장인 에리히 밀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호네커가 말했다.
>
>"밀케 동무. 요즘 유행하는 유머를 들어보셨소? 나에 관한 유머들인데, 요즘은 그걸 모으는 게 취미라오."
>
>밀케가 답했다.
>
>"그렇습니까, 서기장 동무. 저와 취미가 비슷하시군요. 저는 그 유머를 퍼트리고 다니는 사람을 모으는 게 취미입니다."

  • 유난히 인지도가 없는 편인 동독 사람들 중 한국인들에게는 그나마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동독을 배경으로 하는 여러 영화들에서도 단골로 등장하고,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등장하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격동의 시기였던 독일의 통일 직전까지 집권했던 사람인 만큼 적어도 동독의 지도자 중에서는 가장 인지도 높은 사람이다.
  • 브레즈네프와 OME스러운 입맞춤을 한 걸로도 유명하다(...) 자세한 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문서 참고.
  • 서독의 자를란트 노인키르헨이 고향이어서, 동독 사람들은 서독을 방문할 때 '호네커의 고향 견학'이란 명목으로 여행지를 노인키르헨으로 신고하는 사례가 많았단다.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19 - 1933
정계 입문

1933 - 1945
강제 해산

1945 - 1946
재창당

1946 - 1989
합당

1989 - 1990
당명 변경

1990 - 1994
제명
작고

7. 관련 문서



[1] 2대 정부 수반이었던 발터 울브리히트의 집권 기간(1960년 9월 12일 ~ 1973년 8월 1일)보다 불과 40일 정도 더 집권일수가 길다(호네커의 집권 기간은 1976년 10월 29일 ~ 1989년 10월 18일이다.). 둘 다 13년에서 며칠 못 미치는 기간 동안 집권했다.[2] 아래에서 보듯 호네커도 이산가족이었던 게 컸다.[3] MDR의 2019년도 다큐멘터리 Honeckers letzte Reise.[4] NDR의 2009년도 다큐멘터리 Erich Honecker. Ein deutscher Politiker; ZDF의 2014년도 다큐멘터리 Geheimakte Honecker[5] MDR의 2019년도 다큐멘터리 Honeckers letzte Reise[6] 보통 슈타지같은 관공서(?)에 빌헬름 피크, 발터 울브리히트의 초상화와 함께 걸려있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초상화를 클로즈업하면서 우리는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 이런 연출로 종종 쓰인다.[7] 다만 이 유머 같은 경우에는 온갖 바리에이션이 존재해서 뭐가 원조인지를 알 수가 없다. 당장 2차대전 이전 작품인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도 언급되는걸 보면 호네커는 원조가 아니다.[8] 구 동독 시절 슈타지의 반체제 인사 감시를 다루었던 독일 영화 타인의 삶에도 이 유머가 등장한다. [9] 당시 호네커 시절에는 국가원수용 승용차가 시트로엥 CX와 볼보 760을 개조한 리무진이었다고 한다. 이 차들은 현재 독일 통일 후 드레스덴의 교통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10] 동독의 국영 농업 기업인 '농업생산협동조합(Landwirtschaftliche Produktionsgenossenscha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