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브란트

 


'''빌리 브란트 주요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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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공화국 제4대 연방총리
빌리 브란트
Willy Brandt
'''
'''본명'''
Willy Brandt
빌리 브란트[1]
'''출생'''
1913년 12월 18일
독일 제국 슐레스비히홀슈타인뤼베크
'''사망'''
1992년 10월 8일 (향년 78년 294일)
독일 라인란트팔츠운켈
'''정당'''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 (1931~1946)
(1946~1992)
'''재임기간'''
1969년 10월 21일 ~ 1974년 5월 7일
(만 4년 6개월 16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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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출생
2.2. 언론인
2.3. 서베를린 시장과 야당 대표
2.4. 서독 총리
2.6. 퇴임 후
3. 어록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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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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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tzt wächst zusammen, was zusammengehört.“
('원래 하나였던 것이, 이제 함께 성장한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포스터.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현장을 방문하여.

독일 사회민주당(SPD) 소속의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정치인.
서독의 제4대 총리를 지냈으며, 동독 등 동유럽과의 관계 개선을 골자로 하는 '동방정책'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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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 12월 18일, 독일 북부 뤼베크에서 사생아로 태어남.
1928년 - 인문계 고등 학교 요하네움에 들어감. 이 시절, 사회주의 청년 활동에 참여함.
1930년 - 17세의 나이에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들어감.
1931년 - 신당인 사회주의 노동당(SAP)에 들어감.
1932년 -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함. 선박 중매소에서 일하면서 사회주의 노동당원으로 계속 활동함.
1933년 - 나치 정권의 탄압을 피해 노르웨이망명하여, 반나치 운동과 노동 운동을 함.[2]
1937년 - 스페인 내전(1936~1939)에 특파원으로 참여해, 반파시스트 운동에 뛰어듦.
1938년 - 독일 나치 정부에 의해 시민권을 빼앗김.
1940년 - 2차 세계대전(1939~1945)이 일어나, 노르웨이가 독일에 점령되자, 스웨덴으로 탈출함. 이 때, 노르웨이 국적을 얻음.
1942년 - 유럽 사민당계 망명 인사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세계 민주 사회주의 단체'의 서기가 됨.
1944년 - 사민당의 재건에 힘쓰고, 다양한 단체들을 사민당에 통합시키려고 노력함.
1945년 -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노르웨이로 돌아가 활동을 계속함.
1947년 - '베를린 연합군 관리 위원회'의 노르웨이 대표단 공보 담당으로 서베를린에 들어옴.
1948년 - 독일 시민권을 다시 얻고 사민당 지도부의 베를린 대표 취임.
1949년 - 5월,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성립. 10월,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성립. 브란트, 독일 연방 의회의 서베를린 시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들어감.
1957년 - 서베를린 시장으로 선출됨. 이후 베를린 위기를 극복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음.
1961년 -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이 세워짐.
1964년 - 독일 사민당의 대표로 선출됨(~1987).
1966년 - 우파 기민당과 손잡아 대연정 정부를 탄생시키고(~1969), 부총리 겸 외무 장관이 됨.
1969년 - 9월, 자민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연방 총리가 됨. 동방 정책을 공식화하고 동독, 동유럽의 공산 국가들, 소련과 관계 개선을 추진함.'''
1970년 - 1월 22일, 동독에어푸르트에서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3]인 빌리 슈토프와 회담을 가짐.
1971년 - 평화 정책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음.
1974년 - 5월 6일, 보좌관 귄터 기욤동독 스파이로 밝혀지자, 총리직에서 물러남.
1976년 -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함.
1977년 - '국제 개발 문제 독립 위원회' 의장을 맡아, 제3세계 발전을 위해 노력함.
1979년 - '유럽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유럽 통합을 위해 애씀.
1987년 - 사민당 대표직을 사임하고, 명예 대표로서 후배 정치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남음.
1989년 -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이듬해 독일 통일이 이루어짐.
1992년 - 10월 8일, 세상을 떠남.
(출처 :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 웅진출판주식회사, 1996년)

2.1. 출생


태어났을 때의 본명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 (Herbert Ernst Karl Frahm)인데, 그는 사생아로 태어났고 그로 인해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을 수 없어 외할아버지의 성인 프람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머니도 사생아 출신이고,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의 친부가 아닌 계부였던 관계로 프람이라는 성은 그와는 혈통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성이었다. 1948년에는 망명 중에 썼던 이름인 '빌리 브란트'로 아예 개명했다.

2.2. 언론인


나치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유럽 각국을 망명하면서 모국인 독일 국적 및 망명 국가의 국적까지 모두 박탈당하는 바람에 무국적자였던 기록이 있다. 사회주의 활동을 하느라 이곳 저곳을 왕래[4]했는데, 노르웨이에서 붙잡혔으나 높으신 분들의 힘으로 무사히 풀려났다.[5]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 당원이 되고서 언론인 겸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당시의 활동으로 인해 추후 정치계에 입문한 후에도 독일 유권자들에게 상당한 의심의 눈초리를 받곤 했다. 나치 당원이라는 의심을 받은게 아니라 노르웨이 군 소속으로 '''독일군과 교전했다는 의심'''. 전후 상당수의 독일인들은 "히틀러건 나치건 뭐건 어쨌든 우리는 조국을 위해 싸웠다"라는 인식으로 당당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연합국에게 패전국 대접을 톡톡히 당하는 동안에 입밖으로 그런말을 내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브란트 역시 정계입문 초반 "도망치는 도중에 노르웨이 군으로 신분을 속였을 뿐이지 진짜 노르웨이 군 소속으로 독일군과 교전하진 않았음여 ㅠㅠ"라고 변명해야할 정도였다.[6] 이런 식의 침묵과 부정을 걷고 독일이 제대로 과거사에 대한 재인식과 자기 비판을 시작한 것은 68혁명 이후의 일이었고 바로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아래 서술되어 있듯이 빌리 브란트가 총리가 되고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7]

2.3. 서베를린 시장과 야당 대표


독일 분단 이후 서베를린의 시장을 맡기도 했으며, 이 때 연방(미국, 영국, 프랑스 등)과 소련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서독과 동독의 관계를 해소, 결합시키는 데 애썼다. 라이벌(?)이었던 당시 총리 콘라드 아데나워는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전쟁'''이 터질 위험이 있다고 본 것. 브란트는 먼저 서독동독의 위치를 동등하게 끌어올린 후 미국-소련으로부터 독립시켜 통일시키려는 입장을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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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베를린의 위기(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로 인하여 서로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를 극복하는 데도 애를 썼다. 미국의 병력 지원을 약속받기도 하고, 자신이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물어 보라던 대통령이 베를린까지 날아와서 "나도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명연설을 하기도 했다.[8] 베를린 장벽 건설에 발생한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년 동안 동독과 협상을 진행했다. 서독 중앙정부와 미국, 영국, 프랑스의 승인을 받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결국 1963년 체결된 통행증협정을 통해 브란트의 시정 지지도는 크게 상승했고 동방정책의 기틀이 마련됐다.
이 때 브란트는 사민당 대표 후보가 되었음에도 선거 운동 따위 접고 시민들을 진정시켰는데, 아데나워 총리는 반대로 사생아라는 출신이나 전쟁 중 행적을 가지고 브란트의 과거사를 들먹이면서 선거 운동을 했다. 덕분에 시민들과 시 의회 직원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 노력이 노벨 평화상을 탄 것에 기여한건 사실이다. 선거에서 의석이 늘어난 사민당은 1962년 12월 19일의 슈피겔 스캔들(슈피겔 지가 나토의 군사 작전에 대해 보도하자, 국방부 장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를 위시로 한 기민련 내각이 슈피겔 기자들과 편집부를 반역죄로 체포한 사건)을 빌미로 과반에 미달하게 된 기민/기사련과의 대연정을 거부했고 다시 기민/기사련-자민 연정이 성립되었다[9]
빌리 브란트는 1963년 사민당의 대표로 선출되어 여러 대중적인 정책을 내세워서 당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1965년 총선에서도 역시 기민/기사련에 뒤지는 2당이었으나 경제위기, 외교 노선 갈등[10] 등으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내각의 인기가 떨어지고, 기민/기사련이 자유민주당(독일)과도 갈라서면서 결국 1966년 11월, 제1당 기민련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총재와 제2당 사민당 빌리 브란트 총재의 협상에 의해서 독일 역사상 최초의 대연정이 성립하였다. 90.1%(447/496석)의 의석이 내각에 참여한 것이다. 당초 브란트는 자민당과의 소연정을 고려하고 있었다. 기민/기사련과는 동방정책에서 충돌한 전력이 있었고 또 선거 과정에서 브란트의 과거사를 공격한 구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사민당과 자민당의 하원 의석만으로도 하원의 과반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사민당 원내대표 헤르베르트 베너의 강력한 설득 및 에리히 멘데 자민당 대표의 미온적 태도 때문에 결국 대연정이 출범했다. 제1당 기민련의 키징어 총재가 총리를 맡고, 제2당 사민당에서는 빌리 브란트 외무장관을 포함해서 총 9명의 장관이 내각에 참여하였다.[11] 사민당 역시 연정 참여로 집권 역량을 충분히 얻게 되었다.
외무장관으로서 브란트는 자신의 안보 참모인 에곤 바를 정책기획국장에 임명하는 등 동방정책을 국가적 차원으로 확장하려 했다. 동방정책 추진은 대연정 당시 브란트가 내걸었던 조건이었다. 브란트는 구체적으로 소련과의 상호 무력 사용 포기 협정,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선 조정 협정을 추진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와의 외교 관계도 점차 정상화 됐다. 키징어 역시 처음에는 동서독 화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9년 근본적으로 기존의 공산권에 대한 강경정책을 고수하는 기민련과 공산권과의 적극적인 화해/협력을 주장하는 동방정책을 내건 사민당의 충돌로 대연정은 무너진다.

2.4. 서독 총리


1969년 9월 총선에서 기민/기사련이 242석, 사민당이 224석, 자민당이 30석을 얻었다. 또 다시 콩라인에 머무르나 싶었지만 브란트의 결단이 사민당을 여당으로 이끌었다. 대연정 말기 기민/기사련과 사민당의 관계가 경색됐기 때문에 키징어는 자민당과 연정을 맺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는 키징어만의 희망이었다. 정국의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독일 자민당은 당시 키징어 총리와 사이가 극악이었다. 키징어는 대놓고 선거 기간에 "자민당을 의회에서 쫓아내 버리겠다"라고 공언하고 다녔고, 키징어 내각이 내세운 핵심 공약 중 하나가 독일식 비례제를 철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역구로 의원을 배출할 능력이 없던 자민당 입장에서 키징어의 재집권은 사실상의 사형 판결이었다.
브란트는 이 틈을 이용해 자민당과 연정을 구성하는데 성공한다. 사실 총선 전부터 발터 셸이 자민당 대표로 선출된 이후 자민당의 노선은 기민/기사련보다 사민당에 더 가까워진 상태였다. 다급해진 키징어는 내각의 절반을 자민당에 내주겠다고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빌리 브란트는 서독이 수립된 이후 첫 사민당 출신 총리로 취임했다. 1930년 헤르타 뮐러가 퇴임한 지 40년 만이었다. 다만 자민당의 몇몇 의원들이 반란표를 때려서 총리 인준이 부결될 뻔했는데 3표만 모자랐으면 총리직을 잃을 뻔했다.[12]
그는 콘라트 아데나워 이래로 독일 정부가 고수하고 있던 "동독과 수교를 맺고 있는 국가와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적극적으로 공산권과의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동방정책'을 표방하였다. 이로 인해 소련 및 동구권 공산권 국가와의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커다란 외교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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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념비에서 참회의 무릎을 꿇은 사건으로 유명하다. 일명 '''브란트의 무릎꿇기(Brandt Kniefall)'''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당시 헝가리의 뉴스 캐스터는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족이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의 행동에 감동을 받은 폴란드 총리 유제프 치란키에비치는 다음 행선지로 가는 차안에서 브란트를 끌어안고 울었다. (치란키에비치는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그리고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Forgivable, but Unforgettable)”라고 말했다. 에곤 바르는 브란트의 행동이 만용이었다고 지적하였으나 브란트는 갑자기 머리 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대답했고 바르는 이를 두고 "만행을 저지르지 않은 한 사람의 머리에 떠오른 한 순간의 영감으로 우리는 역사적인 죄과를 고백할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사실 브란트 총리가 추념비를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폴란드인들은 서독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나치독일에게 점령당해서 엄청난 고초를 겪은데다가, 참혹한 독일과 소련의 전투 와중에 전국토가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차대전 종전 이후에도 폴란드와 독일 간의 국경선은 여전히 쟁점이었다. 따라서 그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반가워할 리가 없었는데...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인 와중에 추념비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은 장면을 생방송으로 지켜본 뒤에는 서독에 대한 감정이 많이 좋아졌다. 폴란드 총리가 브란트에게 감사의 말을 할 정도. 혹자는 당시 브란트의 파격적인 사과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는''' 그가, 이렇게 '''해야 할''' 사람들을 대신해서 무릎을 꿇었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브란트는 보수우익을 포함한 많은 국민들에게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왜냐면 '''과거 영토의 소유권을 자기 멋대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항목 참조할 것. 당시까지만 해도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인해 소련 등에 의해 동쪽 영토를 강제로 상실한 것은 일시적인 조치이며, 외교적 노력을 통해 회복해야 할 영토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브란트의 행각에 대해 거센 반발에 있었다. 조상 대대로 수백년간 살아온 땅을 브란트 자신의 인기를 위해 마음대로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격앙된 반응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2년 뒤에 열리는 1972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유대인들과 동구권 국가 등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이런 대외정책으로 인해 연정 파트너 자민당 내 일부 세력의 반발로 하마터면 불신임을 받을 뻔했지만 2표 차이로 극적으로 총리직을 유지하게 된다. 1972년 승부수를 건 의회 해산 총선거에서 사민당은 1당이 되는 기념비적 승리를 올렸다.
동방정책의 결과 1972년 동서독 양측의 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같은 사민당 출신의 후임 헬무트 슈미트, 심지어 1980년대 기민당의 헬무트 콜 수상도 그의 동방정책을 큰 틀에서 유지했으며, 이는 냉전 체제의 종식과 함께 실현된 1990년의 독일 재통일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
하지만 1973년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서독 경제와 함께 브란트의 사민당 정권도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2.5. 기욤 간첩 사건과 성추문


그러나 얼마 못가 1974년 자신의 비서 귄터 기욤과 그의 부인 크리스텔 기욤이 동독의 간첩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많은 독일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13] 그래서 빌리 브란트 본인이 동독의 간첩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비서만 그랬을 뿐 그와는 무관했다. 조사 결과 귄터 기욤이 동독에 넘긴 자료들 중에 국가 안보에 위해가 될만한 정보는 밝혀지지 않았다. 귀욤은 브란트의 개인 비서였지 거창한 비서실장 같은 자리에 앉은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높은 사람의 비서라고 해도 국가의 존망을 흔들 수 있는 정보에 접근하는것은 과거든 현재든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당한 정보가 동독으로 흘러들어갔으나,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특급 정보는 귀욤이 구할 수 없었다.다만 기욤이 동독에 넘긴 자료에는 브란트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것이 많았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어찌되었던 브란트는 기욤 사태와 자신은 직접적으로 무관하다고 주장하면서 총리직 사퇴 요구를 거부하고 있었다.
브란트는 자신은 간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서 총리직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설상가상으로 연방범죄청이 기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브란트의 섹스 스캔들, 심한 음주 행각 등이 추가로 드러났다. 브란트의 섹스 중독을 만족시키기 위해 귄터 기욤이 수시로 브란트에게 매춘부를 공급했던 것이다. 브란트가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외에 순방을 나갔을 때나 선거 유세를 위해 지방을 순회할 때도 기욤은 브란트의 개인적 취향에 맞는 창녀들을 엄선해서 브란트의 호텔방이나 총리 전용 열차에 계속 공급했다.[14] 이에 소속당인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브란트의 실추된 이미지로는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브란트를 내치고 슈미트를 차기 총리로 내세우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 사민당 지도부는 총리직에서 내려오지 않고 버티고 있던 브란트에게 동독이 섹스 스캔들 자료를 압박 수단으로 삼을 것이라며 사임 압력을 가했고, 결국 이를 버텨내지 못한 브란트는 4년여만에 총리직를 사임했다. 표면적으로 브란트는 기욤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심한 우울증으로 총리직을 수행하기 어려워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2.6. 퇴임 후


1976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즉 국제 사민주의 정당 모임의 의장으로 활동했다. 이 당시 10월 유신 독재를 비판한 통일사회당김철 당수와도 인연이 있어서, 프랑스 사회당프랑수아 미테랑과 함께 김철을 지원했다고 한다. 도쿄에서의 SI 대회에서는 김철의 귀국을 위해 일본사회당 의원들을 대동하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1987년에 김대중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것을 주도했다. 이후 김대중은 매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꾸준히 올랐고, 마침내 2000년에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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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자, 서독 내 좌파 인사들 가운데서는 가장 적극적으로 '즉시 통일'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듬해 3월에는 동독을 직접 방문하여, 동독 정부 하에서 실시된 최초이자 유일의 자유 총선을 위한 공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해 10월 3일의 독일 통일 선포식에서도, 헬무트 콜 당시 총리와 동석하였다.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의 일화인데, 당시 그는 방한중이었다.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와의 면담에서 김대중이 언제 독일이 통일되겠냐고 묻자 '''"먼 훗날"''' 이라고 답했는데, 몇시간 후 장벽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독일로 귀국했다고 한다.
통일 2년 후인 1992년 10월 8일, 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78세.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베를린에 안장되었다. 평생의 숙원이었던 조국의 통일을 보고 죽었기에, 축복받은 삶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3. 어록


"Unter der Last der jüngsten Geschichte tat ich, was Menschen tun, wenn die Worte versagen. So gedachte ich Millionen Ermordeter."

오늘의 '''역사의 무게''' 아래서, 나는 사람들이 그 무게를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때 행하는 바로 그런 행동을 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의 죽음을 나는 그렇게 기렸다.

"Wir wollen mehr Demokratie wagen."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하고자 한다."

'''독일에 2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해도, 서로에겐 외국이 아닙니다. 그들의 관계는 그저 "특별한 관계"일 뿐입니다.''' -1969년 10월 28일, 정부의 정책 발표회 때.[15]

우리는 신이 아니라 투표자들에게 선택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민주주의에 공헌한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올해 여름에 신문을 다시 내려놨습니다. '''베를린은 살아남을 것이며, 은 무너질 것입니다.'''

-1989년 11월 10일, 베를린 시청에서. 그리고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은 통일되었다.


4. 기타


  • 사생아 출신으로 이 때문에 자주 인신공격을 받았다. 예를 들어 총리 인준 표결 당시 나타났던 몇몇 무효표에는 '프람은 절대 안됩니다.'라는 글귀도 있었는데, 사생아 출신인 그를 프람이라는 옛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대단한 비방이었다.
  • 골초였다. 총리 재임 시절 주치의의 권고로 금연을 했는데 그로 인해 우울증이 심각하게 악화됐다. 브란트가 금연을 하던 시기에 그의 측근이자 후임 총리였던 슈미트는 내각 회의에서 무심코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브란트의 비서에게 '총리 각하가 힘들어하는데 굳이 그 앞에서 흡연을 했어야 하냐'며 잔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진다.[16]
  • 보기와 다르게 울보였다. 선거에서 질 때마다 보좌관 앞에서 눈물을 쏟은 일이 잦았다고.
  • 사생활은 그리 깔끔하지 않았다. 망명생활 중이던 1941년 노르웨이에서 안나 카를로타(Anna Carlotta)와 결혼했으나, 1948년에 이혼했다.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노르웨이 여류 작가이자, 사회주의 정당에서 활동하고 있던 루트 한센(Rut Hansen)과 처음 만났다. 2년 후 루트의 남편이 죽자, 브란트는 안나와 이혼하고 루트와 재혼했다. 브란트가 총리직을 사임한 후, 루트는 섹스 스캔들로 만신창이가 된 그를 위로해주고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1980년 브란트는 그때 자신을 지켜주고 위로했던 루트를 배신하고 총리 시절 비서였던 35세 연하의 브리기테 제바허(Brigitte Seebacher)와 재혼했다. 루트는 죽을 때까지 브란트를 만나지 않았으며, 브란트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는 세번째 부인이었던 브리기테 제바허-브란트가 루트가 장례식 참석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 본격 2차세계대전 만화에서 빌리 헤링턴으로 출현한다. 오 마이 숄더 대신 오 마이 폴트(fault)란 대사를 한다(...)
  • 시장을 역임한 베를린 시는 신공항을 건설하면서 빌리 브란트의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했다.

[1]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Herbert Ernst Karl Frahm(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은 가명이었다가 1948년에 개명하여 본명이 되었다.[2] 빌리 브란트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3] 1964~1973 재임. 독일어로는 Vorsitzender des Ministerrates der DDR.[4] 이 중에는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거나 나치 독일 치하의 베를린에 잠입하는 것도 있었다.[5] 노르웨이어를 기똥차게 잘해서 신분을 속이고 포로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6] 이런 변명은 독일에 위치한 빌리 브란트 기념관에서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나치와 싸운 독일인은 여전히 스스로를 배신자가 아니라고 변호한다는 것.[7] 68혁명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 68혁명에 참여한 젊은이들의 부모나 조부모가 나치당이나 친위대 간부들을 일종의 '민족 엘리트' 로 여기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치고 히틀러고 난 모르겠고, 여튼 우리는 조국을 위해 싸운거 아니냐' 정도면 양반이고 심하면 '우리가 져서 역적 취급이지 이겼으면 영웅 아니냐' 식의 정당화도 했었다. 68혁명 당시 독일 청년들이 분노한 원인 중 하나가 나치의 횡포와 만행에도 불구하고 자기합리화에 급급한 부모 및 조부모 세대에 대한 분노였다.[8] 이를 두고 만약 케네디가 함부르크(Hamburg)에서 연설했다면 "나는 햄버거(Hamburger)입니다"라는 말이 나올 뻔 했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왔다.[9] 이 선거에서 정치적 위신이 크게 손상된 아데나워는 결국 1963년 경제부 장관 에르하르트에게 총리직을 넘겨주고 퇴임한다.[10] 반(反)앵글로색슨 유럽주의 대 친미 대서양주의[11] 독일에서는 연립정부의 2당 대표가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맡는 것이 관례다. 다만 꼭 그런 것은 아닌데, 2017년 총선 결과 출범한 앙겔라 메르켈 4차 내각에서 당시 사민당의 수장 마르틴 슐츠는 입각하지 않았으며, 사민당 몫 부총리직은 올라프 숄츠 당시 함부르크 시장이 재무장관으로 입각하며 가져갔다.[12] 독일에서 총리 인준안은 '''무기명투표'''로 치른다.[13] 당시 서독에는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에서 파견한 다량의 간첩이 사회 각계각층에 깊숙히 침투해 있었음이 통일후 슈타지 재판에서 드러났다. 통일 당시 서독에 최대 30,000명에 이르는 고정간첩과 정보원이 있었다는 추정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동독에 가족이 살고 있던 경우가 많았다. 슈타지는 서독의 계층별 인사들을 파악한 후 가족들이 동독에 남아있는 사람들에 접근 가족을 인질로 협박하였다고 한다. 가족들의 안위 때문에 스파이가 되긴 했지만 타의적인 것이기에 자발적인 스파이들에 비해서 그 효과가 크지 않았다고 한다. [14] 입막음 비용은 슈타지에서 지원[15] 이 개념 자체는 대한민국북한 관계와도 같다. 무엇보다 자국을 서독과 별도의 국가로 주장하고 외교부로 대화했던 동독의 입장에 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할슈타인 원칙에서 한 발짝 물러선 것이며, 또한 상대를 국가로서 존중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위 비교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1민족 2국가'''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 듯, 국가로 존중하되, 특수한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다.[16] 참고로 슈미트 역시 엄청난 골초여서 퇴임 후에도 금연 시설에서 제멋대로 담배를 피는 것으로 유명했다. 워낙 정치적 거물이어서 그럴때면 주변에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뒀다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