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쇼의 난
1. 개요
1507년부터 시작된 호소카와씨 주연의 쟁란. 간레이 자리를 목표로 호소카와 가문이 벌인 내전이고, 쇼군이 관여하고 있지만 그 영향력과 군사적 행동이 적었기에 '''양 호소카와의 난(両細川の乱)'''이라고도 불린다.
2. 상세
에이쇼 4년의 호소카와 마사모토 암살 사건 이후 벌어진 호소카와 스미모토, 호소카와 스미유키, 호소카와 타카쿠니 세 양아들 사이에 벌어진 호소카와씨의 내란을 설명할 때 쓰이는 말로, 타카쿠니가 최후에 간레이가 되고 연호를 타이에이로 고쳤기에 '''에이쇼의 난'''이라고 불린다.[1]
오닌의 난과 메이오의 정변 후에 일어난 대규모 사건으로, 칸레이 가문인 호소카와씨는 물론,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즈미와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연루되었고, 서쪽의 유력 가문인 오우치씨의 오우치 요시오키의 키나이 진출, 앞으로 키나이 정세에 깊게 관여할 미요시씨의 미요시 유키나가의 발흥 등, 센고쿠 시대의 혼란함을 대표하며 막부의 요직인 칸레이의 권위마저 나락으로 빠뜨릴 사건의 시작이기도 하다.
3. 호소카와 가문?
호소카와씨는 남북조 시대의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친족으로, 타카우지가 큐슈로 퇴각할 당시 시코쿠에 남겨져 타카우지파 군사를 규합하는 임무를 맡았고, 그들의 군공으로 타카우지가 막부를 열자 슈고(守護)로서 임명되어 아시카가 쇼군가의 최측근이 되었다. 호소카와 요리유키의 시대에는 일시적으로 시코쿠 4국의 슈고를 담당해 시코쿠 칸레이(四国管領)로 불리게 될 정도의 세력을 자랑했다. 센고쿠 시대로 돌입할 당시에는 이요를 코노씨에게 돌려주고 아와를 분가 산슈 가문에 할양시켜주었지만, 키나이에도 슈고국을 두게 되었고, 시바씨, 하타케야마씨와 함께 간레이를 서로 돌려쓰는 3칸레이 가문 중 하나로 취급받았다.
특히 당주가 호소카와 카츠모토일 때는 오닌의 난의 동군 총대장으로서 최중요 인물이었고, 그 아들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쇼군을 폐립시키는 메이오의 정변을 일으키는 등, 당시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가문이었다.
4. 마사모토의 양자 입양
사건의 발단은 간레이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후계자 문제에서 시작됐다. 당시 마사모토는 어째서인지 정실을 두지 않았었고, 이에 자연스레 실자가 없었으니 다른 가문의 남아를 양자로 들여야 했던 것이다.[2]
먼저 마사모토가 눈독을 들인 인물은 같은 호소카와 일문의 아이였던 호소카와 타카쿠니였다. 타카쿠니는 호소카와 야슈 가문(野州家)의 사람이었으나, 마사모토에게 양자로 들여진 후 몇 년간은 커다란 활동을 맡은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타카쿠니를 양자로 맞이한 마사모토는 메이오의 정변을 실행한 전후로, 또 다른 양자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대상은 전날 칸파쿠를 지낸 쿠죠 마사모토(九条政基)의 아들인 스미유키였다. 메이오의 정변으로 새롭게 쇼군의 자리에 옹립한 아시카가 요시즈미의 부친 마사토모(足利政知)의 부인과 자매였던 사람이, 스미유키의 모친이었기에, 무가와 조정을 합체 시키려했던 마사모토의 의도가 엿보인다.[3] 그러나 스미유키는 호소카와 일족과 중신들에게 그다지 큰 지지를 얻지 못하였고, 무가와 조정의 합일 또한 지지부진 일변도였기에 스미유키 또한 강고한 기반을 얻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명에 더해 다시 양자로 들인 인물이, 호소카와 가문의 유력 분가에 해당하는 호소카와 산슈 가문(讃州家)의 스미모토였다. 스미모토는 마사마토가 직접 선택하기 보단 가신들이 추거하여 양자에 입적한 케이스로, 주로 산슈 가문의 당주 호소카와 시게유키(細川成之)와 일부 중신들의 지지로 인해 양자가 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마사모토의 공식적인 양자는 세 명이라는 놀라운 수에 달했고, 마사모토 본인이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딛이면 파멸이 뻔히 보이는 체계를 갖추는 사태에 이르렀다.
5. 선수를 친 스미유키
후계자가 확보된 호소카와 가문은 여전히 마사모토를 중심으로 쿄토에서 크나큰 권력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하며, 후계자들에게도 권한을 주며 마사모토의 후계 당주로서 육성해나가고 있었다.
처음 마사모토는 본인의 구상대로 스미유키를 중심으로한 후계자 정책을 실행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스미유키를 지지하면서 호소카와 가문의 본국 중 하나인 사누키와 키나이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는 코자이 모토나가가 그의 군사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였으므로, 스미유키의 앞날은 밝은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토나가는 굉장히 급진적이고 과격했던 인물로, 군사 활동의 배상으로 멋대로 세금을 경감시키거나, 중앙 정권과 관계되어 세금이 면제된 지역에 세금을 걷도록 명령하는건 예삿일이고, 마을과 장원이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군세를 모아 습격을 가하거나 방화를 일삼는 중신이었던 것이다. 마사모토는 이런 모토나가에게 대해 군세를 더해주거나 중재의 군세를 파견하는 등, 온화하게 대처했으나, 1505년에 모토나가가 야마시로에 공습을 가하자 본인이 직접 군세를 이끌고 출진하여 대치하는 상황에까지 치닫게 되었다. 이후 모토나가는 어떠한 처벌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그가 지지하는 후계자 스미유키는 1506년에 쿄토 이북의 탄바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4]
스미유키 일파가 난폭한 태도를 보이고 본인이 직접 징벌까지 내리게 된 마사모토는, 새롭게 스미모토를 중용해나가기 시작한다. 1506년 2월엔 호소카와 산슈 가문의 유력 코쿠진인 미요시 유키나가가 죠라쿠하여 길을 닦아놓았고, 4월엔 스미모토 본인이 죠라쿠에 성공하여 마사모토와 함께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마사모토와 모토나가의 다툼은 쿠게들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격화됐으며, 모토나가는 스미모토 일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유키나가와도 싸움을 벌일 정도의 난폭함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와중에도 모토나가는 군에 배속시킬 인원을 차출하지 않은 마을에 대해 방화를 하는 등 그의 과격한 기조를 바꾸는 일은 없었다. 여기에 마사모토는 스미모토와 유키나가를 대동해 직접 탄고에 정벌을 나가는 등, 스미유키 일파는 점점 마사모토와 멀어져 갈 뿐이었다. 이에 스미유키와 모토나가는 치명적인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게 된다.
결국 1507년 5월에 탄고에서 쿄토로 돌아온 마사모토는, 6월 23일의 심야에, 스미유키의 일파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5]
6. 타카쿠니의 대두
스미유키 일파는 마사모토를 암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스미모토의 저택을 습격해 스미모토 일파를 오우미에까지 몰아 넣었다. 이로 인해 스미유키는 사실상 칸레이에 위치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것이 되었으며, 7월에는 쿄토로의 죠라쿠를 완료하여 자신이 호소카와 가문의 당주라는 것을 명확히 증명해냈다.
이렇게 모토나가 등의 도움을 받으며 권력을 얻은 스미유키였지만, 그의 전성기는 너무 빨리 져버리고 말았다. 8월 1일을 시작으로 마사모토의 또 다른 양자인 타카쿠니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세력이 몰락해버린 것이었다. 타카쿠니의 세력에는 텐큐 가문(典厩家), 아와지 슈고 가문(淡路守護家) 등의 호소카와씨 일문이 주력을 맡았고, 이에 맟선 모토나가와 야쿠시지 나가타다(薬師寺長忠)가 합전을 오래 끌지 못한 채 사망해버린 것이 큰 이유였다. 물론 스미유키 자신 또한 공격을 받았고, 셋푸쿠를 행하여 자신의 생애를 마쳤다.[6]
스미유키 일파를 삽시간에 멸망시킨 타카쿠니는 자기 자신이 칸레이가 되는 일 없이 스미유키와 라이벌격이자 군사를 어느정도 할애 해준 스미모토에게 권력을 양도해주는 행동을 보였고, 이에 맞춰 스미모토 일파는 죠라쿠하여 권력을 되찾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스미모토와 그의 중신격인 유키나가의 사이는 그리 원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타카쿠니는 궐기를 준비해나가게 된다.
타카쿠니가 우선적으로 노린 것은 바로 명분과 군사력이었다. 메이오의 정변으로 인해 쫓겨난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는 당시 오우치 요시오키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스오에 머물고 있었는데, 타카쿠니는 이들과 연계하여 당시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와 칸레이격인 하루모토를 갈아 치울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여기에, 당시 큐슈와 츄고쿠 일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던 서국 최대급의 다이묘 요시오키마저 끌어들이는 것으로, 군사면에서도 상당한 방비를 보인 타카쿠니는, 스미모토가 자신과의 화친의 낌새를 보이자 이가로 달아나 1508년 4월에 거병했다.[7]
반면 스미모토는 큰 군사행동을 벌이는 일이 없었고, 쇼군 요시즈미와 함께 오우미로 물러나는 것에 그치게 된다. 이로써 타카쿠니는 다른 양자들을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호소카와 가문의 적류가 되는 것에 성공하게 되었다. 월말에는 사카이를 경유해 요시오키가 쿄토로 들어왔고, 6월에는 6월에는 요시타네가 다시 쇼군으로 추대되어, 요시오키는 야마시로 슈고에, 타카쿠니는 칸레이직에 공식적으로 임명됐다[8] . 그야말로 명분과 실력을 두루 사용한 타카쿠니의 승리였다.
이후에 이르러셔야 스미모토 일파는 본격적으로 타카쿠니를 물리칠 군사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509년, 1511년, 1517년에 벌어진 큰 전투에서 타카쿠니와 요시오키의 군세에 의해 번번히 참패를 겪을 뿐이었다. 군세 회복을 위해 아와지 슈고 가문을 멸망시키고 유키나가는 장남까지 잃어버리는 전쟁이었지만, 이렇다할 군공은 없이 계속해서 키나이 주변이나 시코쿠로 철퇴를 반복하는, 누가 봐도 스미모토의 승산은 없어보였다.
그러나, 1518년 8월에 본국의 위기를 감지하고 요시오키가 츄고쿠로 하향하자 상당한 동요가 일게 된다.[9] 스미모토 일파는 이를 틈타, 멸망시킨 아와지 슈고 가문의 당주 호소카와 히사하루(細川尚春)를 살해하였고, 셋츠의 수많은 코쿠진들에게 쵸랴쿠를 걸어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인 뒤, 다시 한 번 총공격에 나섰다.
11월부터 키나이에서 군사 활동을 시작해가는 스미모토 일파는 수월히 타카쿠니의 세력을 무너뜨려 가는 것에 성공했고, 마침내 1520년이 되자 타카쿠니가 오우미로 퇴거하기에 이르렀다. '''수많은 역경을 거치며 얻어낸 스미모토 일파의 값진 승리인 것이다.''' 쇼군 요시타네는 통제력을 잃어버린 타카쿠니를 무시하고 스미모토 측과 통하여 일을 진행시켰기에, 스미모토 일파가 타카쿠니를 물리치고 새로운 칸레이가 된 것과도 마찬가지 였다.
하지만 스미모토 일파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우미로 물러난 타카쿠니는 5월이 되자 롯카쿠 사다요리, 쿄고쿠 타카키요 등과 함께 쿄토로 들이닥쳤고, 스미모토 일파는 허무하게 깨지고 만 것이다. 이와중 유키나가는 타카쿠니 세력에 포로로 잡히게 되어, 아와지 슈고 가문 히사하루의 아들의 요청에 의해 셋푸쿠를 행하여 인생을 끝냈다. 스미모토 본인은 아와의 쇼즈이로 물러나 기회를 엿보려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병사하고 만다. 이로써, 스미유키 일파에 이어 스미모토 일파가 그 힘을 다하게 되었고, 칸레이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정통 후계자 자리는 다시 한 번타카쿠니가 차지하게 되었다.
7. 스미모토 세력의 재흥
8. 타카쿠니 세력의 항쟁
9. 하루모토의 실각
10. 소동의 최후
11. 기타
12. 참고 사항
긴 역사를 자랑하는 호소카와씨 답게 에이쇼의 난은 상당한 복잡성을 띄었고, 여기에 얽힌 분가만을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일반인들에겐 한 없이 어려운 이야기다. 그런고로 에이쇼의 난에 얽힌 분가들을 한 번 정리해보자.
'''종가''': 호소카와씨의 본가.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남북조 전쟁으로부터 힘을 키웠고, 여러 관직을 얻으며 혈족을 만들어내어 일본의 명실상부한 가문이 되었다. 세대로 계승되는 관도가 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였기에, 관도의 속명을 딴 케이쵸 가문(京兆家)으로도 불린다. 유명한 인물이라면 역시 오닌·분메이의 난의 주역 중 한 명인 호소카와 카츠모토.
타카쿠니, 스미유키, 스미모토 세 명이 각자 소속된 분가에서 마사모토 혹은 그의 가신들에게 선정되어 양자가 된 다음 마사모토가 사망하자 종가의 자리를 잇기 위해 내전을 벌이는 것이 에이쇼의 난의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난의 종결 이후에는 미요시 나가요시나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에 속하며 때때로 정치 활동을 펼쳐나갔다.
[1] 일본어 위키피디아에서는 에이쇼의 변(永正の変)이라 부르고 있으며, 에이쇼의 난은 동국에서 벌어진 쟁란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2] 보통 민간에서는 슈겐도라는 종교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여자를 가까이 두지 않고 남색을 즐겼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다. 야마다 쿠니아키<山田邦明> 연구자는 마사모토의 이 행동을 우에스기 켄신의 예를 들며, 가문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 자신의 실자를 두지 않고 주변의 인물들에게 양자를 들여가며 영향력을 넓혀가기 위해 취한 행동이라 비정하고 있다 - 四国と戦国世界 p.21[3] 三好一族と織田信長 p.14/三好長慶 p.34[4] 二水記 - 四国と戦国世界 p.23[5] 後法成寺関白記/宣胤卿記 - 四国と戦国世界 p.23[6] 일기류를 통해 당시 전투의 전사자 목록을 봤을 때, 단순히 키나이에서 활동하는 스미유키 일파뿐만이 아니라 사누키의 슈고다이를 맡고 있던 카가와 가문과 야스토미 가문의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야마다 쿠니아키 연구자는 스미유키 일파의 행동을 쿄토 주변의 세력이나 모토나가 뿐만이 아니라 사누키의 사람들도 이 일에 가담한 것으로 보고, 지방에 속한 그들이 중앙 정계에 적극적으로 진출한 흔적으로 보고있다. - 四国と戦国世界 p.29[7] 三好長慶 p.35[8] 三好長慶 p.36[9] 본디 슈고직에 임명된 다이묘들은 쿄토에 상시 거처하면서 막부의 정치를 도와주는 것이 기본적인 직무였다. 그러나 오닌 · 분메이의 난을 통해 중앙 정계가 흔들리고 피폐해지자, 슈고 다이묘들은 쿄토의 거처를 그만두고 본국으로 내려가는 사태가 다발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새롭게 야마시로 슈고직을 더하게 된 요시오키의 하향엔, 쿄토의 막부를 재건시키기 보단 자신의 영국을 평정하는 것이 오우치 가문과 자신의 영국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三好長慶 p.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