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겐도
1. 역사
일본의 종교. 창시자는 엔노 오즈누(엔노 교쟈)로, 일본의 토착 산악 신앙에 불교(특히 밀교)와 도교 등이 혼합하여 만들어진 종교다. ''''수행을 통하여 번뇌를 떨치고, 그리하여 깨달음을 경험한 힘을 얻는다.'''' 하여 슈겐도(修験道)라고 한다. 혹은 슈겐종(修験宗)이라고도 한다.
(당연히) 일본의 토착종교인 신토의 영향도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수행체계는 불교와 많이 가깝다. 이러한 영향으로 신앙의 대상은 신불습합을 근간으로 둔다. 이 슈겐도를 수행하는 이들을 슈겐자(修験者)나 야마부시(山伏)라 부르는데. 야마부시란 산(山;やま)에서 엎드려(伏し) 수행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수행(修行)하는 사람(者)이라는 뜻에서 그냥 교쟈(行者)라고도 한다.
2. 창시
슈겐도의 전승에 따르면 슈겐도는 7세기 일본 아스카 시대, 본래 음양사 집안 출신인 엔노 오즈누(役 小角, 634?-701?)라고 하는 인물이 창시하였다. 엔노 오즈누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산에 들어가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는 등 자신만의 수행을 하다가 17세에 간고지(元興寺)라는 절에서 공작명왕의 주법을 배웠다. 이 주법의 힘을 바탕으로 20세에는 유명한 주술사가 되어 귀족의 질병을 고치기도 하였다. 카츠라기산(葛城山)에서 처음 산악수행을 시작하여 일본 전역의 명산을 돌며 수행하다 킨푸산(金峯山)에서 슈겐도의 기초를 닦았다. 전설에는 공작명왕의 주법으로 이산 저산 날아다니며 수행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일본에 있는 슈겐도의 영산(靈山)들은 죄다 엔노 오즈누가 수행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전설들이 있다.
산악수행을 거듭하던 엔노 오즈누는 마침내 '요즘 중생들을 보니까 엄청 힘들어하는 것 같다.' 하면서 나라현 오미네산(大峰山) 정상에서 기도를 올려 세상을 구할 만한 본존을 청하였다. 그러자 석가여래, 관세음보살, 미륵보살[1] 이 순서대로 나타났으나 엔노 오즈누는 모두 거절했다.
세 불보살이 떠난 뒤 세 불보살의 공덕이 하나로 뭉쳐진 자오곤겐(蔵王権現)이 특유의 무서운 모습을 하고[2] 나타나자, 그 모습을 보고 '저런 강한 부처야말로 중생들을 구원할 수 있다! 자오곤겐으로 정하겠다!'면서 자오곤겐을 슈겐도의 본존불로 삼고 오미네산을 슈겐도의 본산으로 삼았다
역사적으로는 8세기 나라 시대에 불교가 일본에 전해지면서 일본 고유의 산악신앙과 불교가 만나 독자적인 신앙으로 성립되어 밀교의 한 일파로 전해오다가 14세기 가마쿠라 시대 말부터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진언종 계열의 당산파(当山派)와, 천태종 계열의 본산파(本山派)로 확립되었다.
2.1. 이후의 슈겐도
이후 슈겐도는 헤이안 시대에 크게 융성하여 이후 독자적인 교단으로 성장하였고, 불교종단인 진언종과 천태종의 승려 중에서도 뛰어난 슈겐쟈들이 나와 천태종계 슈겐도와 진언종계 슈겐도도 성립되었다. 대표적으로 진언종에서는 쇼호, 천태종에서는 엔친[3] 이 있다. 하지만 슈겐도의 위치와 성격이 불교와 신토의 중간쯤인 데다가 독자적인 교단이라고 해도 불교나 신토처럼 강력한 통합교단이나 총본산 같은 개념이라기보다는 '''친목 모임이나 신앙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다 보니''' 구성원들의 일도 신사에서 신관을 맡거나 깊은 산골에서 절의 주지를 맡거나, 아니면 각자의 수행생활에만 전념하는 식으로 제각각이라 유사시 탄압받기 딱 좋았다.[4] 또한 전국시대에는 슈겐쟈가 전국을 돌며 수행하고 통행에도 큰 제지를 받지 않았으므로, 슈겐쟈가 스파이로 고용되거나 스파이들이 슈겐쟈 복장으로 정탐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단점은 메이지 유신 때 신불분리령과 국가신토를 내세우면서 국가 차원의 제대로 된서리를 맞을 때 슈겐도가 불교와 달리 이렇다 할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박살나는 이유가 된다.''' 당시 불교는 처음엔 상대가 국가와 국가를 등에 업은 신토계다 보니 자체적인 결사 운동 정도로 조용히 참았지만,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신토와 제대로 교리/종교사(史)논쟁을 붙어보자!'고 강하게 맞섰고, 신토계는 그 즉시 꼬리를 내려버렸다(...) 그리고 그 꼴을 본 일본 정부는 서양의 기독교에 대항하기 위한 자국의 종교로 불교를 택해버렸다. 그나마 천태종과 진언종계 슈겐도마저 폐지되었으나 지방 산악을 거점으로 근근히 명맥을 잇다가 현대[5] 에 다시 독자적인 교단 설립을 시도, 현재는 전국적으로 교단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진언종계열과 천태종 계열이 가장 크다.
3. 종파
3.1. 천태종 본산파
온조지(園城寺, 미이데라)에는 옛부터 쿠마노 삼산[6] 등지에 가서 산악 수행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1090년 시라카와 상황이 쿠마노를 참배할 때 안내역을 맡은 온조지 승려 조요(増誉)가 쿠마노 삼산의 검교직에 임명됐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쇼고인(聖護院)[7] 의 몬제키(門跡, 주지) 가쿠죠 법친왕(覚助法親王)[8] 은 온조지 장리(長吏)과 구마노 삼산 검교를 겸임하면서 쿠마노 삼산, 오오미네 산에서 수행하던 천태종 계열 슈겐쟈를 통제하였고, 16세기 초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구게로 후지와라 고셋케의 하나인 고노에(近衛) 출신 몬제키 도코(道興)가 이들을 조직화한 것이 본산파이다.
본산파는 국가 또는 군 단위로 가무시(霞)라는 지역 조직을 결성하고 세력을 넓히면서 산보인(三寶院)[9] 을 본사로 삼고 있던 진언종계의 당산파(當山派)와 대립하게 되었다. 에도 막부 초기인 게이초 연간에 가사를 놓고 두 파벌이 충돌하자, 1613년 막부는 쇼고인과 산보인 두 절에 슈겐도법도(修験道法度)를 선포해 어느 특정 한 계파가 독점하지 못하게 하고 양파 간의 규칙을 세웠다. 슈겐도법도는 본산파의 지역 거점이기도 했던 가무시에 대해 규제했기 때문에 본산파에게 불평등한 조건이었지만, 에도 시대 내내 당산파에 비해 우위를 점하면서 총본산(법두)인 쇼고인 휘하에 엔케(院家)-센타츠(先達)-렌코시(年行事)-지츠마츠인(直末院)-준렌코시(准年行事)-도코(同行) 등의 서열까지 정비했다.
본산파는 메이지 유신 후의 신불 분리령 및 1872년의 슈겐도 폐지령으로 천태종에 강제통합되었지만, 쇼고인은 당연히 이 조치에 계속 반발했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에 본산파는 본산수험종(本山修驗宗)이라는 종파로 독립했고, 이후에 요시노 등에 소속된 몇개 사찰이 금봉산수험본종, 쿠라마홍교 등으로 또 독립해나갔다. 이러한 조치는 당산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산파는 본산파와는 달리 패전 뒤에도 독립하지 않고 진언종에 통합된 대로 남았으므로, 현재 일본에서 슈겐도의 명맥은 본산파로부터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3.2. 진언종 당산파
지금의 일본 나라현 긴푸산(金峰山) 및 와카야마현 오미네산(大峰山)을 거점으로 하는 진언종 계열 슈겐도 종파. 9세기 긴푸산을 거점으로 수행했던 교토 산보인(三宝院)[10] 의 진언종 승려 쇼보(聖宝)에게서 시작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 기나이 일대에 있던 곤고부지(金剛峯寺), 고후쿠지(興福寺), 호류지 등지에서 온 진언종 계열 슈겐자들이 오미네산 오자사(小笹) 지역을 거점으로 무리를 결집해 도잔가타오오미네시(当山方大峯正大先達衆)라 칭하면서 해마다 일본 각지에서 모인 슈겐자들의 센타쓰(先達) 역을 맡아 갖가지 행사들을 집전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36개 사원이 이 조직에 속했는데, 중세 후기에 이르러 천태종 계열이었던 본산파와 대립이 격화되었다.
에도 막부 초기 게이초 연간에 가사를 놓고 양파가 충돌하자, 당산파는 산보인의 기엔(義演)[11] 을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본산파와 싸웠다.
당시 슈겐도 내 세력규모로 따지면 본산파가 지역 거점도 많고 조직도 훨씬 정비된 반면, 당산파는 각 지역 진언종 계열 슈겐쟈들의 연합에 가까웠기에 양파의 세력 싸움에서 본산파가 우위를 점하긴 했는데,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기엔은 오고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해 1613년에 에도 막부로부터 슈겐도핫토라는 법도를 발표하게 한다. 슈겐도 내에서 어느 한 파벌이 독점하는 것을 규제하는 내용으로 본산파가 각지에 가진 지역 거점을 단속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슈겐도핫토로 해서 본산파보다 다소 열세였던 당산파는 존립할 수 있었다. 이후 당산파는 본산파에 맞서 산보인을 총본산(법두)으로 조직 정비를 도모했고, 에도 시대에는 12개 사찰이 당산파에 속했다. 여기에 1699년 산보인의 요청에 따라 야마토 국 호가쿠지(鳳覺寺) 주지직를 '제국총가사두(諸國總袈裟頭)'로 임명하는 동시에 에도의 계정원을 호가쿠지의 별원(別院)으로 삼아 당산파를 통제하는 실무직을 맡게 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후 신불 분리령 및 1872년 슈겐도 철폐령으로 당산파는 진언종으로 강제로 통합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본산수험종이라는 종파로 독립한 본산파와 달리 당산파는 진언종에 통합된 채로 남았다. 그래도 나라 긴푸센지(金峰山寺)의 긴푸센지 슈겐본종(金峰山修験本宗)이나 당산파의 옛 본산이었던 산호인에서 진언종다이고파(真言宗醍醐派)라는 이름으로 명맥이 이어진다.
4. 교리와 수행
슈겐도의 교리는 '''밀교적인 영향이 강하다.''' 본존불인 대일여래를 관하면서 대일여래와 일체화됨으로서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슈겐도의 가르침인데, 이는 밀교의 수행법인 삼밀 중 본존불을 마음 속으로 관하는 수행법인 의밀의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밀교와는 달리 입산수행을 강조한다. 이는 애니미즘의 산악 숭배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슈겐도에서는 산 자체를 신성한 성지, 또는 부처 그 자체로 보기에 입산만으로도 대일여래와 일체화되었다 보기도 한다.
따라서 산속에서의 험난한 수행은 슈겐쟈 자신의 번뇌와 업을 씻고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으로 본다. 다만 이런 해탈을 하는 수행만 하는 것은 아니고, 슈겐도의 정의인 '''수행을 통하여 번뇌를 떨치고, 그리하여 깨달음을 경험한 힘을 얻는다.''' 에서 따와 수행의 힘으로 고통에 빠진 중생들을 구하기 위하여 각종 주술을 연마하기도 하고, 신사에서 제사를 주관하거나 민간에서 사람이 병이 나면 한국의 무당이나 판수들처럼 병 고치는 의식[12] 을 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힘을 얻기 위한 혹독한 수행으로도 유명한데, 바위 절벽을 맨손으로 타거나, 폭포를 맞으며 불경을 외우기, 한겨울 밤에 얼음을 깨고 강에 들어가기 등의 수행이 있다. 이를 뉴부(入峰), 또는 미네이리(峰入り)라고 하는데 보통 짧게는 2박3일, 길게는 보름 가까이 진행된다. 특히 유명한 것은 니시노 노조키(西の覗き)라고 하는 수행으로 신객(新客)이라 불리는 첫 뉴부 수행 참가자의 양 어깨에 밧줄을 묶어 상반신을 절벽으로 밀어버리는데 이때 뒤에서 센다츠(先達)라고 불리는 선배 수행자들이 "수행의 초심을 잃지 않겠는가?", "부모께 효도하고 처자를 아끼겠는가?" 같은 질문을 하는데 보통 신객들은 정신이 어찔해서 부정의 대답을 한 적이 없다고.
이 수행을 할 때 서쪽을 바라본다고 니시노 노조키(서쪽을 바라봄)라고 부른다. 서쪽은 예부터 저승, 극락을 상징하는 방향이라, 이 수행을 통해 옛날의 자신을 죽여 없애고 새로운 삶을 얻은 나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 수행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발을 제외한 전신을 밀어버렸는데 사고(...)가 일어난 후로는 상반신만 미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일단 대개의 수행은 산악도로를 따라 쥬쿠(宿)이라고 불리는 성지를 순례하면서 경전을 외우는 것이다.
5. 의상
슈겐쟈 복장은 일본에만 있는 독특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에서 퇴마사나 불교 관련 캐릭터가 슈겐쟈 복장을 입은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청의 엑소시스트의 시마 렌조 등등.
슈겐쟈 복장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토킨(頭襟)이라는 관과 유이게사(結袈裟)라는 가사다. 위 사진에서 설명하면, 슈간자들이 이마에 달고 있는 검은 통(?) 같은 것이 토킨이다. 토킨은 슈겐쟈의 개조인 엔노 오즈누가 유배에서 풀려 돌아 왔을 때 위로의 의미로 몬무 덴노가 하사한 관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원래는 검은 옻칠로 단단하게 만든 천이지만, 현재는 나무 혹은 플라스틱(....)으로 만든다. 대일여래가 쓰고 있는 보관을 의미하며 12연기를 상징하도록 각 12개를 낸다.
유이게사는 가사 중 9조 가사를 접어서 묶은 형태에서 시작되었다. 엔노 오즈누가 산에서 수행중에 걸치고 있던 가사가 말려 올라간 모습에서 따왔다는 전승과 역시 엔노 오즈누가 산에서 가사를 걸치는 끈이 끊어진 것을 원숭이가 포도덩굴을 가져와 엮어서 공양올렸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전승이 전한다. 어찌 되었든 실제 제대로 걸치면 산에서의 수행에 거추장스러운 가사를 개량한 것이다. 털공 혹은 법륜(法輪)모양의 장식이 6개 혹은 4개가 달려있는데 이는 불교의 육바라밀을 상징한다고 한다. [14]
6. 대중 매체
교고쿠 나츠히코의 소설 망량의 상자 속 작중작인 '수집자의 정원'에 슈겐자가 등장한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수험승으로 번역되었는데, 원작에서는 줄거리 개요가 살짝 언급만 되다가 애니 9화에서 일부 장면이 등장했다. 쿠보 슌코의 데뷔작으로 줄거리는 중생의 고뇌(+혼백)를 자신만의 정원에 가두어 섬기고 있다는 어느 신관을 말리고자 찾아간 슈겐쟈가 거꾸로 신관에게 설파당해 그의 정원을 이어받는 이야기.
Fate/Grand Order에 등장하는 스칸디나비아 페페론치노가 이 수험도를 사용하는데, 이쪽 세계관에서는 일본 특유의 마술체계라고 한다.
7. 관련 문서
[1] 특히 미륵불 부분은 한국에도 엔노 오즈누와 비슷한 설화가 있는데 금산사를 지은 진표율사가 오랜 수행결과 미륵불을 친견하고 교법을 전수받았다는 설화이다. 그리고 진표율사 설화는 증산계통 종교에 영향을 주었다.[2] 온몸에서 광휘의 불길이 둘러싸고 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있으며,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다. 이 자오곤겐은 일본 밀교 고유의 본존으로, 분노로서 탐욕과 번뇌가 그득한 중생들을 깨우치게 한다고 한다.[3]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났을 때 신라명신의 가호로 풍랑이 가라앉았다는 일화가 있다.[4] 현재 한국의 무속인 단체인 경신연합회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경신연합회는 전형적인 이익단체로, 등록된 무당들이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범죄 등)을 하지 않는 한, 무당 각자의 특성이나 사상, 굿 등 세세한 부분에 대한 통제는 없다.[5] 정확히는 전후 쇼와 시대[6] 일본 와카야마현 다나베시에 있는 혼구 대사(本宮大社)와 신구시에 있는 하야타마 대사(速玉大社), 히가시무로 군의 나치 대사(那智大社)의 세 신사를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 일본에서는 기이 지역 산악신앙의 성지로 신불습합 이후에는 세 곳의 주제신이 각기 아미타불, 약사여래, 천수관음과 동일시되다. 이들은 부처가 신의 모습을 빌어 나타났다고 해서 쿠마노 산쇼곤겐(熊野三所権現)이라 불리는 등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며 2004년에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의 일부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쿠마노 산잔을 통할하는 직책으로 쿠마노 벳토(熊野別当)가 있었는데, 쿠마노 벳토였던 단조는 겐페이 전쟁 때에는 쿠마노 수군이라 불린 해적 집단을 거느리고 겐지를 돕기도 했다. 산이 많은 곳이다 보니까 오히려 배를 만들 나무를 구하기가 수월했다고.[7] 교토 소재. 조요가 머물렀던 연고가 있는 사찰이었다. 여담으로 조요의 스승이 엔친으로 당에 유학 다녀오는 길에 '''신라명신의 가호를 받아서 풍랑에서 벗어났다'''는 일화가 있는 그 사람이다.[8] 고사가 덴노의 황자. 친왕이면서 승려로 출가하면 법친왕이라고 부르고, 이러한 법친왕이나 혹은 구게 출신으로 출가한 승려들이 주지가 되면 몬제키(門跡)라고 부른다.[9] 쇼고인과 마찬가지로 교토에 있다. [10] 다이고지(醍醐寺)에 속한 사찰로 경내의 오중탑은 오닌의 난 때에도 소실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하며 현재 탑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11] 일본어 위키의 설명에 따르면 기엔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교토의 도지(東寺)에서 인왕경대법회를 열었다고 하며, 히데요시와 그 아들 히데요리의 후원을 얻어 자신이 있던 산보인을 부흥시키기도 했고, 기엔의 아버지는 고셋케 니조 하루야스(二条晴良), 어머니는 황족 후시미노미야 사다아쓰 친왕(伏見宮貞敦親王)의 딸인 데다 기엔 자신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양자였다.[12] 정식명칭은 가지(加持)기도[13] 일명 본텐게사(梵天袈裟)[14] 당산파 슈겐도의 어느 센다츠의 말에 따르면 실용적으로 가사를 말아 끈으로 만들어 바위 등을 오르는 수행에서 자일과 같이 사용하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