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스 섬

 

[image]

그리스어: Σάμος
터키어: Sisam
[image]
주된 관광지인 피사고리오(Πυθαγόρειο)의 모습.
1. 개요
2. 역사
2.1. 고대와 중세
2.2. 근현대
3. 관광


1. 개요


그리스의 섬 중 하나로 에게해 동부에 있다. 터키의 쿠샤다스(Kuşadası)까지는 10여 km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을 정도로 가까우며, 바로 맞은편에 역시 터키에 속하는 디딤(Didim, 고대명은 디디마)과 마주하고 있다. 인구는 2011년 기준 32,977명이며, 전체 면적은 477.4 km2이다. 동부 에게해의 섬 가운데서도 꽤 큰 편에 속한다. 섬 인구의 1/3인 12,517명이 수도인 바시(Βαθύ)에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는 와인의 명산지로 유명하다.
피타고라스에피쿠로스의 고향이며, 이솝 또한 사모스인 주인의 노예로써 이 섬에 흔적을 남겼다. 때문에 섬 남동부에 끝자락에 위치한 도시(고대 사모스의 중심지)의 이름을 피타고라스를 따서 피사고리오라고 명명했다. 항구에 피타고라스의 동상이 서 있다.

2. 역사



2.1. 고대와 중세


[image]
이라이온과 에우팔리노스의 터널
이오니아 문화권이었으며,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 중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도시였다. 현재도 유명하지만, 고대부터 사모스의 와인은 특산품으로 유명했으며, 또한 로마인들이 사모스 도기(Samian ware)라고 지칭한 붉은색의 도기도 특산품으로 각지에 수출되었다. 이오니아와 그리스 본토를 잇는 교역로를 차지하고 있어 중개무역이 발달했다.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고대 사모스는 마찬가지로 이오니아의 막강한 도시였던 밀레토스와 경쟁했으며, 그리스 세계에서 삼단노선을 처음 사용한 지역으로도 알려져있다. 특유의 사자문양을 새긴 사모스의 드라크마 은화는 그리스 세계뿐만 아니라 멀리 이집트, 일리리아 일대에서도 발견될 만큼 널리 통용되었다.
고대 사모스의 유적으로는 기원전 540년에 세워진 헤라 신전인 이라이온(Ηραίον)과 사모스 도심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섬 중앙을 가로지르는 산맥을 뚫어 만든 에우팔리노스의 터널(Ευπαλίνειο όρυγμα)이 남아있다. 그리고 피싸고리오의 고고학 박물관에는 피타고라스가 사모스에 살던 시절 참주인 폴리크라테스의 아버지의 관이 보관되어 있다.
기원전 499년에 사모스는 이오니아 반란에 합류했고, 페르시아가 이에 빡쳐서 세번이나 사모스를 침공하지만 단단히 요새화된 사모스를 정복하는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사모스가 겪은 피해도 상당한지라 결국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었다가 기원전 479년에 반란을 일으켜 델로스 동맹에 합류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는 아테네의 편을 들었다.
이후 디아도코이시대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로마 제국이 디아도코이 왕국들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기원전 132년에 로마의 지배에 들어갔다. 이후의 사모스 섬은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지 못하고 동로마 제국제노바 공화국, 이후 1479년경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들어갔다.

2.2. 근현대


오스만 제국이 이 섬을 접수할 무렵 사모스는 해적의 소굴로서 반쯤 버려진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오스만 제국이 이 섬을 장악한 계기도 사모스를 기반으로 해적질 하는 그리스인, 제노바인 해적들을 단속하기 위해서였다. 오스만 제국은 사모스 섬에 네개의 정교회 교구를 설치하고, 이 4개 교구의 주교들을 판관(Kadi)으로 임명해 간접통치하고 로도스 섬의 파샤의 명령에 따르게 했다. 현재도 사모스 섬에는 당시 주교좌 성당과 수도원들이 남아있다. 한편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사모스섬은 1771년부터 1774년까지 러시아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오스만 제국 영토에 들어온 자유주의민족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사모스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image]
리쿠르고스 로고쎄티스의 초상화
1821년 8월 6일, 사모스 출신의 군인이자 친우회의 맴버였던 리쿠르고스 로고세티스(Λυκούργος Λογοθέτης, 1772-1850)는 그리스 본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전쟁에 힘입어 사모스인을 모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1] 이후 사모스인들은 그리스 독립전쟁에 합류해 활약했지만, 정작 그리스 왕국의 독립을 결정지은 유럽 열강들은 '''사모스 섬을 독립 그리스에서 제외시켰으며''' 이에 빡친 사모스인들은 폭동을 일으킨다. 하지만 열강의 압력과 오스만 제국과의 합의로 결국 사모스 섬은 사모스 공국(Ηγεμονία της Σάμου)으로 오스만 제국을 종주국으로 해서 독립하는 것으로 타협해야했다. 이후 사모스 공국은 1834년부터 1912년까지 오스만 제국을 종주국으로 하고 자치를 누리게 되는데, 이때의 공작들을 보면 페스를 쓰고, 오스만 제국의 관복을 입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1차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한 이후 사모스 섬은 그리스 왕국에 귀속되었으며, 현재는 포도··올리브·올리브유·시트러스·무화과·아몬드·담배 농업과 휴양업으로 먹고사는 조용한 동네가 되었다.

3. 관광


그리스에서 선박으로 터키로 넘어가려는 배낭여행객이라면 히오스, 사모스, 코스, 로도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제법 사람들로 북적인다. 특히 터키인은 이 섬을 방문하는데 비자는커녕 여권조차도 필요 없기 때문에 여름 휴가철에는 터키인들을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다. 물가도 상당히 저렴하고, 코카리 해변, 포시도니오, 섬 중앙에 위치한 사화산인 케르키스 산(정상높이 1434m)을 비롯해 자연경관도 아름다운 편이라 오랫동안 쉬어가기에도 좋은 곳이다. 섬 내에서는 바씨를 중심으로 버스가 다니는데, 바씨에서 피타고리오까지는 버스로 12분, 코카리까지는 20분 정도 걸린다.
터키에서 사모스 섬으로 넘어올 경우 3월부터 11월까지 쿠샤다스에서 배가 매일 2회 다니며, 운임은 2016년 기준으로 편도 25유로, 왕복 40유로이다. 인구가 비교적 많은 섬이라 인근의 파트모스, 아가토니시, 레로스, 코스, 낙소스 섬으로도 정기선이 꽤 자주 다니기 때문에 섬을 따라다니는 여행을 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image]
[image]
특이한 기념품으로 '''피타고라스의 잔'''이 있다.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발명한 와인잔인데, 모두가 공평한 양의 와인을 마실 수 있도록 특수고안된 잔이다. 중앙에 기둥처럼 올라간 구조물이 있고 잔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잔에 그려진 금 이상으로 와인을 채우면 잔속의 와인이 구멍을 통해 죄다 흘러내린다.[2] 원래는 포도주를 따르는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 고안된 잔이라고 하며, 그리스 전국에서 관광지라면 어디서든 구할 수 있지만 원 제작지인 사모스 섬이 유명하다.
그리스인들에게도 사모스는 이국적인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터키 본토와 매우 가깝기 때문에 문화, 풍습이 터키와 유사하고, 터키로 가는 길에 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 오늘날에도 8월 6일은 사모스 섬의 기념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축제를 연다. 섬 곳곳에서 동로마 시절 그리스어로 Χρίστος Σαμόν έσωσεν (그리스도께서 사모스인들을 구원하셨다) 라고 쓰여진 깃발을 볼 수 있다.[2] 동양의 계영배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