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렬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여행렬은 1892년 10월 17일 평안남도 중화군 풍동면 남양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서울 YMCA 영어학교를 수료했으며,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만주로 건너가 부친 여순근과 김승만(金承萬)을 만나 임시정부와의 연락방법과 국내활동 방안을 상의하고 귀국하였다. 그후 재차 상하이를 다녀와서 홍석운·이기영(李起榮)·김예진(金禮鎭)등과 항일구국단(抗日救國團)을 조직하고 그 총무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11월 만주에서 돌아온 표영준, 유성삼의 편으로 권총이 반입되고, 주석환(朱錫煥)·김상만(金相萬) 편으로 폭탄이 반입되었다. 여행렬은 이들을 평양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만나 결사의용단(決死義勇團)을 조직하고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920년 8월 3일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 결사대 제3대의 장덕진(張德震)·박태열(朴泰烈) 등이 입국하자 이들과 협력하여 평남도청과 평양경찰서 등 일제의 주요기관을 일시에 폭파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 8월 3일 밤 9시 30분, 여행렬은 표영준과 함께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고, 평양성 서쪽의 칠성문(七星門)으로 피신하다가 일경의 불심검문을 받게 되자 이를 사살하였다. 같은 달 20일에는 평남경찰부장이 탄 자동차를 부벽루(浮碧樓) 앞에서 저격하였으나 운전수만을 부상시켰다. 그리고 22일에는 평양에서 20리쯤 떨어진 노상에서 일경을 만나자 이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추적으로 1920년 9월 5일 중화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921년 2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7년 8월 22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만주로 건너간 그는 부친과 지청천, 허영백(許英伯) 등의 선배들을 만나 보고 상해로 가던 도중,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거주제한을 받았다. 이후에도 1945년 2월 평양 신사 방화와 군사 시설 파괴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를 받고 평남 경찰부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8.15 해방 후에는 김구를 모시며 그의 정치적 행보를 함께 했지만 백범 김구 암살사건 이후에는 정계를 은퇴하고 서울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1973년 8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여행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