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암살사건

 


1. 개요
2. 전개
3. 사건 이후
4. 대중매체에서
5.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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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 서재에서 기거하던 백범 김구가 당시 포병 장교였던 안두희에 의해 암살된 사건.

2. 전개


1949년 6월 26일 오후 당시 서울 경교장에 기거하고 있던 백범은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는 중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줄은 예상도 못하였으며, 이 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하게 지나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시각 경교장에 백범을 알현하고 싶다는 사람이 찾아왔으니, 그는 바로 육군 포병사령부 장교인 안두희였다. 안두희는 당시 군복 차림을 하고 경교장에 와서 비서진에게 백범 선생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고, 비서진들은 아무런 검문이나 경계 없이 안두희를 그대로 백범이 있는 서재로 보내주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 그 아무도 이 자가 백범을 죽이게 되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하였으며, 마침 안두희의 허리춤에 권총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단지 군인이라는 이유로 검문이나 제지 없이 통과시키게 된 것이었다. 어쩌면 비서진들의 허술함이 빚은 결과일지도.
이 때 백범은 서재에 있었으며, 글씨를 쓰던 중 비서로부터 포병장교가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며 보고하게 되고 백범은 들어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잠시 후 안두희가 백범 앞에 나타나게 되자 백범에게 먹물을 갈아도 되겠냐고 묻고, 백범이 안두희의 모습을 보게 된 순간 안두희는 권총을 꺼내들며 백범을 향해 총을 발포하게 된다.
이 때 총성을 들은 비서진들이 서재로 달려가보니 백범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죽어있었다.

3. 사건 이후


안두희는 경교장을 빠져 나가다가 경교장 경비들에게 잡혀서 군사경찰사령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백범이 남북 협상을 통해서 정치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시키고 찬동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면서, 결국엔 참다 못해 백범을 죽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형기가 15년으로 감형되었다.
정부는 백범 암살 사건은 안두희 개인 단독 범행으로 발표했으며, 안두희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백범과 의견충돌을 벌이다가 죽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시켜 군에 복귀시켰고, 정치권 일각에서 석방 논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자 계급을 소위에서 소령으로 특진시켰다.
이후로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로 건너가 군납업자로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잠적 상태에 있었고, 4.19 혁명 이후 진상조사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으나 윤보선 정부 때까지 아무런 논의가 없었고, 안두희 본인도 암살 사실을 밝히려 하지 않는 등 난항을 겪었다.
이후 안두희는 수감되었지만 6.25 중에 석방되어 오히려 진급했고, 이후 정권과 결탁하여 대저택을 짓고 떵떵거렸으나 결국은 몰락하여 백범 암살범이라는 낙인을 받게 되어서 여러 곳에서 암살 및 살해 위협을 받아오다가 1996년 버스기사 박기서로부터 정의봉[1]에 맞아 결국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으며, 당사자인 안두희도 사망하게 되면서 풀리지 않은 의문의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오랜 시간에 흘러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김구 암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의 목소리가 커졌다. 여기에 1992년 드디어 안두희의 육성 증언이 나왔다. 이에 국회는 1993년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약 2년간의 조사 후 위원회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 보고서는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 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사건으로 보고 있다.
'의혹의 모략꾼' 김지웅은 암살사건 전반을 계획 조율했으며 홍종만은 암살하수인들을 관리했다. 이들은 모두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지만 안두희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 쪽이었다. 즉,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 포병사령관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당시 방첩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다.
신성모가 주도하는 '88구락부'가 암살 사건의 진정한 배후였다는 주장도 있다. 신성모가 내무장관에서 국방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직후, 군부와 경찰관계의 핵심분자들이 상호간의 정보 교류란 명목으로 만든 것이 88구락부였다. 김삼웅에 의하면 88구락부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당시 방첩대장, 김태선 서울특별시청 경찰국장, 김지웅 국방부 군사경찰대[2] 고문 등 군부와 경찰의 정보 관계 핵심들, 그리고 김준연 동아일보 논설위원 겸 한국민주당 총무간사, 장택상 외무장관 등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며 시국 문제를 논의해온 비밀그룹으로, 친일파 전봉덕 군사경찰사령관[3]과 고문수사관으로 소문난 노덕술, 최운하 등 일제경찰 출신 등도 여기에 참여했다고 한다.
또한 보고서는 김구 암살 사건의 배후와 관련해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온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였고, 또 그가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사건에 사전 개입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 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 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4. 대중매체에서


백범을 다룬 대중매체에선 자주 다뤄지는 소재인데,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 19~20회와 1995년 KBS 대하드라마 <김구> 제1회 및 16회(최종회), 2003년 4월 29일 SBS 드라마 <야인시대> 80회 등지에서 비중있게 다뤘다. 특히 <김구>에선 백범 암살 전 김창룡과 안두희가 암살 모의를 하는 장면으로 보아 김창룡이 백범 암살의 배후라는 설정으로 나왔는데, 이에 김창룡의 딸이 소송을 걸었으나 1997년 대법원이 제작진의 손을 들어줬다.(대법원 97다19038)

5. 참고 자료



6. 둘러보기



[1] 정말로 몽둥이 이름이 정의봉이다.[2] 당시 헌병대[3] 당시 헌병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