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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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으로 민주당계 정당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정치인. 본명은 지대형(池大亨), 아명은 수봉(壽鳳), 호는 백산(白山), 자는 석규(錫奎).
2. 생애
1888년 한성부에서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5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899년 교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배재학당을 거쳐 1908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에는 이미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이뤄진 뒤라 조선보병대 정도만이 유일하게 남은 군사 조직이었다. 1909년 육군무관학교마저 폐쇄되면서 1학년과 2학년 사관생도들은 일본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2] 로 편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퇴를 택하게 되었다. 이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각오로 일본행을 택한다.
191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졸업 동기로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1891년생), 이응준(1891년생), 홍사익(1889년생), 김경천(1888년) 등이 있다. 1919년 동기 김경천과 함께 일본군에서 탈영해 남만주 삼원보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망명 당시 일본군 교범 등을 들고 갔으며 아내에게도 자신의 행방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라는 당부를 남겼다. 뒤늦게 일본군이 수배령을 내렸지만 이미 지청천은 만주로 빠져나간 뒤였다.
이후 서로군정서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1920년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서일, 김좌진과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자유시로 이동했으나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이후 오하묵 등과 잔여 병력을 이끌고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다시 고려혁명군을 결성하는데 참여하였고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교육 방침 등에 있어 당시 고려혁명군을 장악해 통제하고 있던 소련 당국과 대립하였고 결국 소련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명 활동으로 3달 후 풀려났고 이후 만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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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주로 돌아와 정의부와 혁신 의회에 참여하였다. 1930년대 중국의 호로군과 함께 한중 연합 작전을 펼쳐 쌍성보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만주 사변으로 만주 전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만주에서 더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자 중국 본토로 이동해 1934년 김구가 설립한 뤄양군관학교 한인 특별반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김규식, 김원봉, 조소앙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 내부의 권력 투쟁 결과 김원봉, 김두봉 등 사회주의 계열이 당권을 장악하자 지청천, 조소앙, 김규식, 신익희 등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집단 탈당하게 된다. 민족혁명당 탈당 후 지청천은 조선 혁명당을 창당, 조소앙은 한국 독립당을 재창당, 김구는 한국 국민당을 창당하였는데 이 3당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1940년 3당을 합당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 정당인 한국독립당이 탄생된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고 지청천은 총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충칭에는 역시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던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본대가 머물고 있었는데 조선의용대는 1941년 확대 간부 회의에서 화북 연안에 있는 중국 공산당으로의 합류를 결정했고 이에 반대하는 김원봉 및 예하 본대 90여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병력이 모두 이탈하여 조선의용대 화북 지대가 되었다. 이후 김원봉은 1942년 조선의용대 잔여 병력을 이끌고 한국광복군에 편입하여 부사령관이 되었으나 과거의 앙금 때문에 총사령관 지청천의 지시를 받기를 거부하여 부대를 따로 돌렸고 이 때문에 지청천은 온전히 부대를 운용하지 못했다. 당시 장준하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소속으로 지청천의 밑에서 복무했다.[3]
1945년 광복이 이뤄지자 1946년 귀국해 우익 청년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세웠다. 1948년 남북 협상에 반대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으며 제헌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출마하여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었다. 대한국민당(1948년)에 대동청년단의 잔존 정치 세력을 이끌고 합류하였고 대한국민당이 민주국민당(1949년)에 합류하면서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1월 15일에 향년 68세로 급서하였다.
3. 기타
- 가족으로는 아내인 파평 윤씨 집안의 윤용자가 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인 지달수와 지정계, 딸인 지복영[4] 도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했고 뒤에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여 중령으로 전역했다. 외손자인 이준식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핵심 인사 중 1명이었고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위원회에서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20년 현재 제11대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 당시 지하 활동을 하는 투사의 숙명과도 같이 가명을 많이 썼다.[5] 독립운동을 하면서 일제의 지명 수배를 피해 여러 이름을 돌려가면서 사용하기도 하여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지청천이라는 이름 이외에도 호나 자, 외가의 성인 이(李)를 이용하여 지수봉(池壽鳳), 지을규(池乙奎), 지석규(池錫奎), 이청천(李靑天), 이대형(李大亨) 등 여러 이름을 사용하였다. 성인이 된 후 자신이 지은 '청천(靑天)'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드물어 눈에 띄기 쉬운 성씨인 지씨 성 대신 어머니의 성씨이며 흔한 성씨인 이씨 성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에 '이청천(李靑天)'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었고 많이 쓰였는데 실제로 오래된 기록이나 서적에는 본명 못지 않게 이청천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등장하며 적잖은 사람들은 본명이 이청천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독립운동 때문에 도망을 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이름을 자주 고칠 수 밖에 없었다.
-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한터라 일본어를 잘했다. 신흥무관학교 교장에 재직할 당시에도 일본인 같은 어투를 사용했다고 한다. 연설 때 ええと(에-또, 우리말의 '어...음...')를 연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해방 이후 병역법을 창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징병제, 징집병 제도의 초안은 모두 지청천의 병역법에서 기초하였다. 일본 제국의 병역법을 베껴 제정했다는 설이 있다.
- 6.25 전쟁 발발 직전에 지청천이 이승만에게 수비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이승만은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결국 6.25 전쟁이 터지자 지청천은 "이승만 박사가 내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이런 일이 터졌다"라며 한탄했다. 지청천은 자발적으로 이승만을 지지하던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이승만은 푸대접했는데 지청천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임에도 해방 이후 군대 관련 요직은커녕 장관 하나 제대로 거친 적이 없다.[6] 이승만이 지청천을 홀대한 배경에는 그가 해방 정국부터 정부 수립 초기 이승만과 최대 라이벌이었던 김구와 가까웠던 사이라는 점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지청천과 같이 한국광복군에서 함께 활동하면서도 일찌감치 이승만과 가까웠던 이범석은 이후 국무총리 및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4. 대중 매체에서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성우 출신 한규희가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권성덕이 연기했다.
- 1991년작 KBS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선 성우 오승룡이 연기했다.
- 1994년 8월 21일자 KBS1 <다큐멘터리 극장>에서는 탤런트 강민호가 연기했는데 그의 인생 말년 출연작 중 하나다.
- 군 뮤지컬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김성규, 온유가 맡아 연기하고 있다.[7][8]
5. 둘러보기
[1] 일제의 독립운동가신상기록[2] 일본육군사관학교의 예과였다.[3] 한국광복군은 1지대, 2지대, 3지대로 나뉘는데 1지대는 김원봉이 지휘, 2지대는 지청천이 지휘, 3지대는 김학규가 지휘했다. 여기서 1지대와 2지대 간의 내분이 생각보다 심했다.[4] 한국광복군 최초의 여자 광복군이라고 한다. 실제로도 참전해서 일본군과 싸운 전적이 있다.[5] 한국의 독립운동가 외에도 다른 나라에서도 레닌, 스탈린 등 지하 운동가들은 다들 당연히 가명을 썼다.[6] 물론 여론이 떠들썩하자 마지못해 무임소 장관(현 특임장관)이라는 형식적 직함을 주기는 했다.[7] 본래 초연에서는 성규 혼자 모든 회차를 연기 했지만 온유 입대 후 앙코르 공연부터 더블 캐스팅으로 진행 중이다.[8] 초연 캐스팅 보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정말 더블 캐스팅이 아닌 이상 쉴새없이 공연에 나서야 한다. 성대에 무리가 오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