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유성삼'''
'''劉成三'''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7년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 하달리
<color=#fff> '''사망'''
1920년 8월
평양부 기홀병원
<color=#fff> '''이명'''
김희준(金熙俊), 장비(張飛)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유성삼은 1897년생이며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 하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한 뒤 여순근, 주석환(朱錫煥)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했다. 이후 일제의 관공서와 일제 고위관리를 암살·처단할 것을 지시받고 동년 11월 표영준·주석환 등과 함께 국내로 밀파되었다.
귀국 후 1920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 김석황 등과 함께 평양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독립의용단(獨立義勇團)을 조직하고 테러와 암살을 통한 의열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동년 7월에는 평양에서 김석황·김예진(金禮鎭)·장혜근(張惠根) 등 동지들과 회합을 갖고 평남 제3부와 평양 경찰서, 그리고 평양부청(平壤府廳)을 폭파할 것을 협의·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거사에 필요한 폭탄과 권총을 반입하여 단원인 여행렬에게 은닉시키도록 지시하였다.
1920년 8월 3일 오후 9시경, 그를 비롯한 의용단원들은 세 부대로 편성되어 평남 제3부·평양경찰서·평양부청 청사에 각기 폭탄을 투척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표영준(表英俊)과 함께 평양시내 각 곳에 「관공리의 퇴직을 명령함」「정탐자에게 회개를 명함」「자산가에게 독립자금 출연을 권고함」「일반 국민에게 거의를 명령함」등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명의의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을 배포하는 한편, 일제 관공서 폭파작업에 관여하였으나 평남 제3부 청사에만 폭탄을 투척하여 파손시키고 일경의 검거를 피해 은신하였다.
의거 4일 후인 7일 밤, 그는 표영준 등과 함께 평남 제3부 소속 경찰관이 자동차를 타고 지날 때에 사살할 것을 모의하고, 이튿날 밤 거사장소를 답사하며 실행방법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동월 9일 오후 9시경, 표영준과 함께 거사장소에 대기하던 중 평안자동차상회 소속의 자동차가 지나가자, 평남 제3부 경찰관의 차로 오인하여 권총을 발사하고 은신하였다.
그 뒤 8월 16일 평양부 신양리에서 동지들이 잘못 사격한 총탄에 맞아 외국인이 경영하는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하였으나 며칠 후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유성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