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라 다케노스케

 

小倉武之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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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


일제 강점기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일본 기업가이자 문화재 수집가. 한마디로 일제 강점기 대구 재계의 거물.

2. 생애


1870년 치바현 나리타시에서 태어난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1904년 경부철도 대구출장소에 발령받아 한반도에 건너왔다. 1905년에는 경부철도를 퇴사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대구에서 사 모은 토지 가격이 폭등한 덕에 큰 돈을 모았다. 1평당 3~4원에 산 대구의 토지 가격이, 경부선이 개통되고 일본인들이 대구로 몰려들자 100배 이상 상승했다고 한다.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 발포 전이라 일본인들은 불법적으로 조선인의 명의를 빌려 토지를 구매했다. 당시 경상북도관찰사 이용익이 이런 행위를 강력히 단속하자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그에게 항의한 적도 있다. 1907년에는 대구제련합자회사를 설립해 운영했다. 이 회사는 주로 가마니를 제작했는데, 가마니는 일본으로 곡물을 보내는데 꼭 필요한 물품이었기 때문에 보조금까지 받았다. 그렇지만 가마니 판매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지역마다 일본인의 자본에 의해 전기회사가 설립되고 있었다. 전기회사를 운영하면 해당 지역에 독점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설립 인가를 받으려는 경쟁이 상당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지역 자산가들과 함께 대구지역 전기회사 설립을 신청해,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설립 인가를 따냈다. 그는 1911년에 대구전기주식회사(大邱電気株式会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대구전기는 1918년 대흥전기(大興電氣)로 이름을 바꾸고 다른 지방의 전기회사를 합병하면서 규모를 키웠다. 같은해 함흥전기를 합병한 것을 시작으로 광주전기, 통영전기, 전남전기, 남원전기, 안동전기, 경주전기, 울산전기, 거제전기, 여수전기, 하동전기 등 중소회사를 연달아 합병해 조선 남부의 전력 공급 대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설립 당시 자본금은 10만엔이었으나 1926년에 이르면 200만엔으로 불어났다.
1937년에는 조선총독부 정책에 따라 6개 전기 회사가 합병해 남선합동전기(南鮮合同電氣)[1]를 세웠는데, 이 때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함흥회령에도 사업 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국 1939년 설립된 북선합동전기의 초대 사장이 되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조선의 전기왕'''. 상공업자들의 모임인 대구상공회의소에서 자기 파벌을 이끌면서 대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1918년에는 선남은행을 인수해 전기회사 경영에 활용할 자금을 모집했다. 1933년 선남은행은 경일은행을 인수해 대구상공은행이 되었다. 대구상공은행은 나중에 상업은행[2]에 합병되었다.
한편, 사업 성공으로 번 돈으로 1920년경부터 조선의 문화재를 모으는데 열중했다. 이른바 오구라 컬렉션이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일제 패망 후 귀국해 지바현 나라시노시에 살다가 1964년 사망했다.
대구에 있던 그의 저택은 그가 수집한 컬렉션으로 꾸며진 정원이 딸려 있었고, 현재 대구 중구 동문동 패션 주얼리 타운 자리이다. 여담으로 이 자리는 1950년대까지 미군이 주둔하였고 후에 육군 방첩대와 대구의 숱한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구금하고 고문한 육군 보안사령부(8052부대)가 있었던 곳이다.

3. 오구라 컬렉션


그가 일제 식민지 한반도에서 수집한 골동품들을 따로 일컫는 말로 오구라 컬렉션 문서 참조.

[1] 해방 후 다른 회사와 통합되어 한국전력공사가 되었다.[2] 한일은행과 합병, 한빛은행우리은행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