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딜로 글로보츠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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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4월 21일 - 1945년 5월 31일)'''
사상 최고로 악하다고 알려졌던 조직 속에서도 독보적으로 악했던 인물.
- 역사가 마이클 앨런
1. 개요
오딜로 글로보츠닉(Odilo Globočnik). 보통 힘러가 지어준 지구라는 뜻의 '글로부스'(Globus)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루블린의 총독부 SS 경찰 사령관이자 라인하르트 작전 사령관이었던 친위대 중장(Gruppenführer). 폴란드 총독부와 그 주변 유대인 200만명을 학살한 최고 실무책임자로 전후 1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1945년 5월 31일 체포되었고 체포 당일 심문 직전에 입속에 물고 있던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어 자살했다.
2. 생애
190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트리에스테[2] 에서 독일계 슬로베니아인 프란츠 글로보츠닉과 체코-독일계 세르비아인 안나 글로보츠닉 사이에서 태어났다. 10대였던 1차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오스트리아가 패전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이 붕괴한 이후 가족 전체가 오스트리아 남부의 케른텐으로 이사하였으며, 도중에 유고슬라비아와의 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글로보츠닉은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갔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케른텐으로 이주 후 인문고교로 진학했다. 졸업 후 건축사로 일한 글로보츠닉은 1931년에 나치당에 가입하고 친위대에 입대했다.
1933년에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가입하였고, 오스트리아 나치당과 독일 나치당의 연락임무를 맡다가 1934년 말 독일 나치당의 친위대 장관이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오스트리아 연락담당관이 되었다. 1936년 7월 16일에는 히틀러의 베르히테스가덴의 별장으로 초대되었고, 증언에 의하면 히틀러는 그에게 오스트리아 나치당이 비합법적인 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를 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글로보츠닉은 1935년까지 4번에 걸쳐 오스트리아 경찰에 체포되었음에도 프리드리히 라이너 및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와 함께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연대하여 합법적으로 잉크바르트의 나치당 정권을 세우는 것에 노력했고, 안슐루스 당시에는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오스트리아의 합병 후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빈 지구의 독일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글로보츠닉은 1938년 3월 12일에 친위대 대령으로 진급하여 친위대 상급지구 도나우의 사령관이던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참모가 되었다. 이후 히틀러는 안슐루스 성사에 대한 보답으로 1938년 5월 22일 글로보츠닉을 나치당의 빈 대관구 지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글로보츠닉은 해당 지역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와 매관매직 행위가 드러나 히틀러의 분노를 샀고, 결국 1939년 1월 30일 해직되었다. 하지만 친위대 장관인 힘러는 안슐루스 당시 활동했던 글로보츠닉을 눈여겨 보고 있었기에 그를 보호했고, 글로보츠닉은 친위대에서 추방당하진 않았다. 이후 글로보츠닉은 명예회복을 위해 친위대 특무부대[3] 에 입대하여 1939년 3월부터 제 2연대 게르마니아에서 복무했다.[4]
단, 일반친위대에서의 계급은 인정되지 않아 글로보츠닉은 친위대 소위로 근무하게 되었다. 폴란드 침공 당시 소위로 복무하여 임무를 수행했고 폴란드 점령 후인 1939년 11월 9일 힘러에 의해 폴란드 총독부령 루블린의 SS 경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1941년 여름 어느날 힘러는 글로보츠닉에게 유럽 유대인 학살에 대한 히틀러의 심중을 털어놓았고, 그에게 '''유럽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폴란드 유대인 대부분을 수용하고 있는 폴란드 총독령 유대인 제거를 [5] 실행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힘러는 이번 유대인 학살에는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덜 공개적이며, 학살 집행자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덜한 방식의 도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글로츠보닉이 실행한 방법이 바로 홀로코스트 하면 떠오르는 강제 수용소와 가스실이었다. 이후 가스실 건설은 1941년 가을 세 곳에서 시작되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 헤움노 그리고 루블린 인근의 베우제츠였다. 그리고 가스실에서의 대량학살이 시작된 것은 1941년 12월초 헤움노에서였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는 1942년 2월 중순부터, 베우제츠에서는 1942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세 수용소에서의 가스실 만으로는 유대인 학살 처리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글로보츠닉은 소비보르와 트레블링카에 추가로 강제 수용소를 더 건설했다. 소비보르는 1942년 5월부터, 트레블링카는 1942년 7월에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1년부터 1943년까지 글로보츠닉은 라인하르트 작전을 지휘하며 무려 200만명의 폴란드 유대인들을 학살했고, 이 공적(?)으로 글로보츠닉은 1942년 11월 9일 SS 및 경찰 중장으로 승진했다.
1943년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한 이후로는 프란츠 슈탕글(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소장), 크리스티안 비르트(베우제츠 절멸수용소 소장), 프란츠 라이히라이트너(소비보르 절멸수용소 소장)등의 라인하르트 작전 당시의 부하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보내져 이탈리아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 카를 볼프의 휘하에서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트리에스테(아드리아 해 연안 작전 구역)의 SS 경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을 토벌하였다. 글로보츠닉의 임무는 유격대의 토벌이었지만 동시에 이탈리아 국내의 유대인 포획작전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연합군이 접근해오자 그는 오스트리아의 케른텐으로 도망친 뒤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바이센제 근처의 산에 피신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오스트리아에서 영국군 제4 왕립 후사르 연대 병력에 체포되었으며, 심문받기 직전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어 자살하였다. 한편 글로보츠닉 사후 그의 사망 사진이 위조된 것이고, 글로보츠닉이 돈과 보석으로 영국군 병사를 매수한 후 달아났다는 주장이 있다.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나치 전범들과 함께 시리아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진위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3. 매체에서의 등장
로버트 해리스의 대체역사 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 메인 악역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 속 세계에서는 독일이 전쟁에서 이긴 관계로 실제 역사에서와 달리 1945년에 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천만이 넘는 유럽 유대인들을 완전히 절멸시키고 친위대장[6] 으로 진급하였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64년 시점에서는 힘러 사후 새로운 친위원수[7] 가 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오른팔이자 게슈타포 사령관으로서 주인공 크사비어 마르크 친위소령[8] 이 나치 고관들의 급작스런 의문사 사건을 수사하는 것을 사사건건 방해하며 대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