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침공

 

영어: '''Invasion of Poland'''(폴란드 침공)
폴란드어: '''Kampania Wrześniowa'''(9월 전역)/'''Wojna Obronna 1939 Roku'''(1939년 방어전)
독일어: '''Fall Weiß'''(백색 작전)/'''Polenfeldzug'''(폴란드 전역)
러시아어: '''Польская кампания вермахта (1939)'''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image]
1939년 9월 20일 영국 일간지 <이브닝 스탠더드>지에 실린 만평 "회동"[1]
[image]
행군하는 폴란드 육군
[image]
독일 국방군을 사열하는 아돌프 히틀러[2]
[image]
독일-폴란드 국경에 있는 검문소에서 차단기를 들고 있는 독일 국방군 오토바이 부대.[3]
'''날짜'''
1939년 9월 1일 ~ 1939년 10월 6일
'''장소'''
폴란드 제2공화국
'''교전국'''
<^|1>[image] '''폴란드 제2공화국'''
[image] '''나치 독일'''
[image]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image] 단치히 자유시[4]
[image] '''소련'''
'''지휘관'''
<^|1>[image] 폴란드군 편제
[image]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총사령관)
[image] 타데우슈 쿠트셰바(포즈난군 사령관)
[image] 스테판 돔프비에르나츠키(프루시군 사령관)
[image] 발레리안 추마(바르샤바군 사령관)
[image] 브와디스와프 보르트노프스키(포모제군 사령관)
[image] 타데우슈 피스코르(루블린군 사령관)
[image] 안토니 쉴링(크라쿠프군 사령관)
[image] 카지미에시 파브리치(카르파티군 사령관)
[image] 에밀 크루코비츠프셰지미르스키(모들린군 사령관)
[image] 율리우쉬 룸멜(우치군 사령관)
[image] 독일군 편제
[image] 발터 폰 브라우히치(육군총사령관)
● 북부집단군
[image] 페도어 폰 보크(총사령관)
[image] 귄터 폰 클루게(제4군 사령관)
[image] 하인츠 구데리안(4군 휘하 제19군단장)
[image] 게오르크 폰 퀴힐러(제3군 사령관)
● 남부집단군
[image]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총사령관)
[image]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제8군 사령관)ㅤㅤㅤㅤ
[image] 발터 폰 라이헤나우(제10군 사령관)
[image] 헤르만 호트(10군 휘하 제15군단장)
[image] 빌헬름 리스트(제14군 사령관)
[image] 슬로바키아군
[image] 페르디난트 차틀로시
[image] 소련군 편제
[image]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총사령관)
● 벨로루시 전선군
[image] 미하일 코발료프(사령관)
[image] 바실리 쿠즈네초프(제3군 사령관)
[image] 바실리 추이코프(제4군 사령관)
[image] 니키포르 메드베데프 (제11군 사령관)
[image] 이반 자하르킨(제10군 사령관)
● 우크라이나 전선군
[image] 세묜 티모셴코(사령관)
[image] 이반 소베트니코프(제5군 사령관)
[image] 필리프 골리코프(제6군 사령관)
[image] 이반 튤레네프(제12군 사령관)
'''결과'''
나치 독일, 소련의 승리
'''영향'''
폴란드 제2공화국 멸망
폴란드 망명 정부 수립
독소 폴란드 점령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병력'''
[image] 폴란드군 95만 명[5]
- 39개 사단[6]
- 16개 여단
- 포 4,300문
- 전차 880대
- 항공기 400~550대[7]
[image] 독일군 150만 명
- 60개 사단
- 포 9,000문
- 전차 2,750대
- 전투기 2,315기

[image] 소련군 46만 명(최대 80만까지 추산)
- 33개 사단
- 11개 여단
- 포 4,959문
- 전차 4,736대
- 전투기 3,300기

[image] 슬로바키아군 5만 명[8]
'''피해규모'''
[image] 폴란드군
- 사망 6만 6천 명
- 부상 13만 3700명
- 포로 66만 명[9]
[image] 독일군
- 사망 16,343명
- 실종 3,500명
- 부상 3만 300명
[image] 소련군[10]
- 사망 및 실종 1,475명
- 부상 2,383명
[image] 슬로바키아군
- 사망 37명
- 실종 11명
- 부상 114명
1. 개요
2. 배경
2.1. 영국, 프랑스
2.2. 독일-폴란드 간 국경분쟁
2.3. 독일의 경제 위기
2.4. 소련-폴란드 국경분쟁
2.6. 자작극과 개전
3. 전쟁 계획
3.1. 독일 국방군
3.2. 폴란드군
3.2.1. 폴란드 육군
3.2.2. 폴란드 공군
3.2.3. 폴란드 해군
3.2.4. 폴란드 국내의 문제
4. 진행
4.1. 독일군의 공세
4.1.1. 국경 전투
4.1.2. 바르샤바를 향하여
4.2. 소련의 침공
4.2.1. 폴란드군의 탈출
4.3. 종지부
5. 종결 이후
5.1. 민간인 피해
5.4. 폴란드의 저항
5.6. 손실과 교훈
7. 뒷이야기
7.1. 폴란드 기병에 대한 왜곡 선전
8. 둘러보기


1. 개요


9월 초하루 히틀러의 명령 한마디에 독일군이 폴란드로 쳐들어가고 뒤이어 영국, 프랑스에서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자 폐제(廢帝) 카이저는 히틀러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충고를 하였다. 6천만 명의 독일 국민을 죽음으로 돌려보내고 패전의 책임을 진 채 20년을 해와 달을 벗 삼아 지내는 동안 그는 회오(悔悟)의 한숨이 안 나오는 때가 없었다. 지구에 불을 질렀던 잘못을 그는 해와 달의 말없는 얼굴에서 깨달았다. 그리하여 히틀러에게 '그대는 제2의 카이저가 되지 말라. 나의 오늘의 생활을 그대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간곡한 충고를 하였다. 노파심이라면 노파심일 따름이겠으나 대전의 불속에 직접 들어가서 경험한 선배로서 보내는 교훈이라면 후배인 히틀러로서는 응당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나 그는 들은 대꾸도 안 했던 것이다. 다만 카이저에 보내는 대답 대신으로 '진군이다'라는 것을 부르짖을 따름이었다. 히틀러는 왜 지구에 불을 질렀는가, 위대한 방화자 히틀러는 무슨 야심으로 방화를 했는가.

- 1939년 9월 23일 동아일보 5면, 구주전란(歐州戰亂)의 이모저모(一): 대전(大戰)의 방화자는 독일, 히틀러는 제2의 카이저가 될 것인가

1939년 9월 1일부터 10월 6일까지 약 한 달 동안 '''폴란드 제2공화국'''과 '''나치 독일''', '''소련''',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11]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다른 강대국들의 싸움에 가려졌지만 폴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나라 중 하나이며 소련, 중국, 나치 독일에 이어 4번째로 많은 사망자(민간인과 군인 모두 포함)가 발생했다. '''폴란드 인구의 17%인 600만 명'''이 전쟁 기간 중 목숨을 잃었으며 폴란드의 물적 자산의 20%가 파괴되었다.

2. 배경



2.1. 영국, 프랑스


히틀러는 1933년 총리가 된 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독일을 옥죄던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는 동시에 군비를 무제한으로 늘리겠다고 주장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흠칫했지만, 갓 취임한 히틀러를 그냥 입만 살아 있는 선동가라고 생각했으므로 이런 발언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후 1934년 히틀러는 대통령과 수상을 합친 직위인 총통에 올라 나치당 이외의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수권법을 통과시켜서 절대 권력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독일에서 독재 체제를 구축하자마자 외부로 시선을 돌렸다. 히틀러의 침략 논리는 '''독일인이 사는 곳은 모두 독일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36년 히틀러는 비무장지대로 되어 있던 라인란트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는 명백한 베르사유 조약의 위반이었으나 원래 독일의 영토였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외교적 항의에 그쳤다. 이후 한 발 더 나아가 독일이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는데도 영국과 프랑스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이탈리아 왕국베니토 무솔리니가 이에 발끈해서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히틀러는 쥐트티롤을 이탈리아 영토로 인정하여 국경을 확정해 무마했다. 이런 사례 같이 히틀러를 용인하여 전쟁을 피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소극성은 시쳇말로 약한 외교로서 후에 매우 비판을 받지만, 영국과 프랑스 같은 민주주의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전쟁을 싫어하는 여론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30~40대의 대부분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참호전을 겪은 참전 용사들이라서 '''어떻게 해서든 전쟁은 피했으면...'''하는 여론이 대세였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소극적으로 나온다는 것을 파악한 히틀러는 이웃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독일계 주민이 다수인 주데텐란트(Sudetenland)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나서서 히틀러를 막아 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를 배신하고 주데텐란트를 히틀러에게 떼어 주면서 다시 전쟁을 회피하였다. 이때 히틀러는 영불의 대표단에게 "이번만 봐 주면 다시는 안 그러지." 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불과 반 년 만에 히틀러는 뮌헨 협정으로 보장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무시하고 체코를 병합, 슬로바키아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란 괴뢰국으로 만들며 영불과의 약속을 파기했다. 속았다는 걸 깨달은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가 공공연히 다음 목표로 외치고 있는 폴란드단치히 회랑(Danzig korridor) 문제에서 폴란드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프랑스의 대독일 전략은 '마지노 선을 중심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방식의 방어를 공고히 하고, 기타 국가들로 독일의 뒤를 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 기타 국가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폴란드로 모두 프랑스의 전략에 동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그중 폴란드를 빼고 모두가 독일에게 잡아먹힌 상황이었던 것이다.
최악의 경우 폴란드가 사라지고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후방 안전이 확실히 보장된 독일과의 1대1 전쟁'은 프랑스에게 악몽과도 같은 상황이었고, 그래서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폴란드에 대한 독립 보장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2.2. 독일-폴란드 간 국경분쟁


[image]
(폴란드와 단치히(폴란드명 그단스크) 자유시는 독일 본토를 동프로이센과 갈라놓고 있었다)
근본적인 배경은 단치히 회랑 문제였다. 독일 통일의 핵심 주역인 프로이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종료와 베르사유 체제를 통해 동서로 쪼개지고, 그 가운데 회랑 지역을 신생 독립국인 폴란드가 얻게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핵심 항구 도시인 단치히(Danzig)는 단치히 자유시로서 사실상의 독립 국가로 존속하고 있었다.
독일 입장에선 동프로이센과 그 중심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는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되는 중요한 지역이었고, 월경지가 된 동프로이센 지방과 본국과의 연결은 절실한 문제였다.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의 대두 이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단치히 회랑을 반드시 되찾아야 할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1934년 1월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으로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으나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뮌헨 협정으로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접수하더니 1939년 3월에 체코를 합병해 버리면서 본격적으로 단치히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영국과 프랑스는 3월 30일 유사시 폴란드에 대한 군사 원조를 보장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국경 지대의 조그마한 땅[12]을 얻기 위해 뮌헨 협정에 가담한 폴란드였던 만큼, 그단스크 문제를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나치 독일의 주장에 의하면 그단스크의 할양이 폴란드 회랑의 무력화라고 보기 힘들고, 히틀러도 폴란드에 '''회랑의 철도 치외법권'''을 요구하는 대신 그단스크 25년 자유 이용권을 준다는 것이었으나, '''폴란드가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미 폴란드 회랑에 그단스크를 대신하여 건설한 그디니아(Gdynia; 독일명 고텐하펜(Gotenhafen))의 물동량이 그단스크를 넘어선 상황이었으므로 그단스크 할양이 폴란드 회랑 할양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독일의 생각이었다.
문제는 히틀러의 외교적 신뢰도가 매우 낮았다는 것과 폴란드가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는 것이었다. 라인란트, 오스트리아, 체코의 문제로 히틀러의 신뢰도는 매우 낮았고 폴란드는 주변 모든 국가에 분쟁을 일으킨 나라답게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실제 그단스크 문제는 1938년 후반부터 독일-폴란드 간 외교 교섭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폴란드는 히틀러의 의도라는 것을 알자마자 거부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단스크가 독일이 폴란드에게 원하는 '''최소한도'''였다는 것이다.
당시 독일은 폴란드를 프로이센의 영토를 강탈한 주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독일인 전체의 바람이었다. 단지 그 범위가 차이 났을 뿐인데, 그단스크, 폴란드 회랑, 포즈난(Poznań; 독일명 포젠(Posen))의 순으로 중요도를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본적인 요구인 그단스크도 폴란드가 거부하면 독일 내부는 히틀러와 나치당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단치히 문제에서 폴란드의 거부가 이어지자, 히틀러는 점차 폴란드를 대화 상대로 삼기를 포기하였다. 이후 히틀러는 폴란드에 순차적으로 강경한 요구를 꺼내고 대 폴란드 전쟁을 준비했다. 1938년에는 단치히와 회랑 통행권을 요구하던 독일이었으나 1939년 초에는 회랑까지, 1939년 4월부터는 전쟁 계획을, 8월에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어 폴란드 침공을 기정사실화하였다. 여기에 뮌헨 회담과 체코 합병으로 외교적으로 자신감이 생기는 한편 독일의 국력이 강해졌다고 인지하게 된 것도 빼놓을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는 1938년의 제안만으로 독일이 폴란드를 내륙국으로 만들 요구를 했다는 것은 자료의 일부만 보고 말한 것이며, 히틀러가 처음에 요구한 것은 그단스크와 회랑 통행권이라는 것이 당시 독일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건 조금만 살펴봐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영토적인 면에서 봐도 단치히 자유시가 독일로 넘어가면 사실상 회랑의 폭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영해의 폭도 크게 줄어들게 된다. 독일뿐 아니라 폴란드도 그단스크를 자국의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 그단스크에 폴란드의 소규모 군대가 주둔하며 세관을 관리하기도 했다. 그런데 히틀러의 요구대로 하면 독일 영토가 되는 그단스크를 폴란드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게 된다.

1938년 10월 말에 리벤트로프는 '''폴란드 회랑을 지나는 철도와 도로를 포함'''해서 그단스크를 독일에 돌려주고 대신 단치히 지역에서 폴란드에게 무상으로 항구를 제공하고 또 국경선을 공동으로 지키면서 불가침 협정을 25년으로 연장하는 안에 합의하여 독일과 폴란드의 모든 이견을 일거에 해결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 히틀러 평전 2권 P217, 이언 커쇼

그리고 통행권은 우습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회랑 통행권을 나치 독일에게 부여하면 앞서 언급한 그디니아를 포함해서 사실상 회랑 전체의 통치권을 상실해 버린다. 회랑의 철도 치외법권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철도로 독일 군대와 민간인이 제집 드나들듯이 폴란드 회랑을 드나들 것이 뻔하며 철도 부지가 사실상 독일의 영토가 되기 때문이다.
경제적 문제도 있다. 새로 건설된 그디니아의 물동량이 그단스크의 그것을 넘어섰다고는 하지만 그단스크는 여전히 폴란드의 무역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38년 당시 폴란드 수출에 있어 46.1%의 폴란드 제품이 그디니아를 경유했지만 동시기 그단스크도 전체 수출품의 31.6%가 경유했던 무역항으로 전체 폴란드 수출에 있어 여전히 1/3에 이르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히틀러의 요구는 그단스크[13]뿐만 아니라 폴란드 회랑 지대를 횡단하는 철도 부지까지 내놓으라는 것으로 이렇게 되면 단순 계산상(그디니아+그단스크)으로도 폴란드 수출 물량의 77.7%가 막히게 된다. 이미 독일과의 무역 전쟁세계 대공황으로 경제난에 시달리던 폴란드에게 이런 요구는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었다.
더 심각한 것은 치외법권 자체만 따져도 타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해치기 때문에 외교관이나 대사관에만 한정적으로 적용되는 등 매우 좁은 범위만 적용하는데, 위의 인용문을 보면 치외법권 수준이 아니라 폴란드 회랑을 지나는 철도와 도로 중 단치히와 연결되는 것을 통째로 독일에게 할양하라고 적혀 있다. 이러면 독일이 아주 인심을 써서 도로 1개와 철도 1개만 이 주장을 적용했다고 해도 해당 도로와 철도가 폴란드 회랑을 횡단하기 때문에 폴란드 회랑은 말 그대로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이로써 폴란드의 바닷길은 확실하게 차단된다. 이 정도면 칼만 안 들었지 강도 수준이다.
원래부터 자국 국경에서의 검문 검색 및 통제권은 국가의 주권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이게 무너지면 사실상 영토 통제권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의 유럽연합 같이 자국 영토의 통행권을 민간인에 한해 타국에게 부여하는 것은 21세기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가능해진 것이며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직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저런 주장은 말만 그럴싸했지 땅을 바쳐라에 더 가깝다. 무엇보다 얼토당토 않는 것이 그때까지 독일이 이미 폴란드 회랑 지역의 도로를 계속 사용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저런 요구를 들이민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은 폴란드에게 폴란드 회랑을 할양하는 것과 더불어 당시 나치가 이끌던 반공 협정(Anti-Comintern Pact)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이때 폴란드는 독일뿐 아니라 동쪽의 소련과도 불가침 협정을 맺은 상황이었기에 이는 폴란드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이는 사실상 폴란드를 독일의 괴뢰국으로 만들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거기에 독일은 폴란드를 123년이나 분할 점령 통치한 국가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인해 간신히 독립한 폴란드의 입장에서는 통행권 요구를 빙자해 몇십 년도 지나지 않아서 명백한 자국 영토를 다시 뜯어가겠다는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게다가 그 영토가 국가 멸망 전에도 폴란드의 영토였고, 신생 폴란드에게는 유일한 해양 출구인 폴란드 회랑이라 중요성도 크며, 백번 양보해 독일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고 해도 체코슬로바키아의 전례에서 알 수 있듯이 추가 요구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2.3. 독일의 경제 위기


히틀러와 나치당은 훗날 케인즈식의 경제 정책으로 1930년대의 대공황의 위기를 돌파하였다. 아이러니하게 이 대공황은 독일 국민들이 기존 정치계에 대해 실망하는 계기가 되어 히틀러가 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기회였다. 히틀러는 독일의 대공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전쟁 준비에 매달렸다. 군수 산업을 팽창시키고, 효율적인 군수 업무를 위한 사회 인프라 건설에 매달리다 보니 1930년대 후반에는 독일의 대공황은 거의 극복된 것처럼 보였다. 이는 미국뉴딜 정책으로 민간 인프라 건설에 몰빵하여 대공황을 극복하려고 한 것과는 방향은 다르지만 어쨌든 결과는 비슷했다.
그러나 민간 인프라와는 달리 생산성이 거의 없던 군수 방면에만 몰빵한 결과[14] 독일 정부는 재정 위기를 겪게 되었다. 그동안 계속 지출을 늘리면서 적자 예산을 편성한 결과 1930년대 후반부터는 누적된 재정 적자로 파산의 그림자가 닥쳐왔다. 히틀러로서는 권력을 놓지 않으려면 전쟁밖에 선택할 길이 없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한몫 단단히 챙겨오지 않는 한은 정부 재정은 붕괴하고 자신도 권좌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의도에 맞게 나치 독일군은 다른 나라를 점령하면 우선 그 나라의 중앙은행을 털어서 금괴를 독일로 운송하는 짓을 제일 먼저 하곤 했다.[15] 이렇게 다른 나라로부터 강탈한 금괴가 수백 톤이고, 이것은 전후 '히틀러가 숨겨놓은 비밀 금괴'의 떡밥이 되었다.[16]
그리하여 히틀러의 입장에서 전쟁은 불가피했다. 이것이 영국-프랑스의 개입 우려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침공을 강행하게 된 한 이유였다.

2.4. 소련-폴란드 국경분쟁


폴란드는 동쪽의 소련과도 국경분쟁이 있었는데 원래 러시아 제국일부였던 폴란드가 독립할 때쯤 소비에트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에 뒤이은 러시아 내전 때문에 완전히 피폐해져 있었다. 한편 우크라이나에서도 공산주의자들과 반혁명세력(백군)과의 내전이 벌어졌는데 친폴란드 백군은 전황이 불리하자 폴란드에 원조요청을 했고 폴란드는 이를 기회로 우크라이나를 먹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출병했다. 이에 반발한 공산주의자들은 볼셰비키가 집권한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직 소련 성립 전이었다)에 구원 요청을 하여 우크라이나 내전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지휘하는 소비에트군(소비에트 러시아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연합으로, 아직 양국이 소비에트 '연방'으로 묶이기 전이다)은 우크라이나에 침공해 온 폴란드군을 격퇴했으나 패주하는 폴란드군을 추격하던 소비에트군이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 근처에서 대패하며 전세는 역전되었다. 소비에트군은 패퇴했고 반혁명 세력의 창궐로 다른 곳이 다급해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우크라이나의 1/6과 벨로루시의 절반 정도를 폴란드에 떼어주고 정전 협정을 맺었다.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서부가 폴란드에 합병되자 정교회 성당이 파괴당했고 우크라이나어 교육이 금지되었다. 나머지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이 출범하자 거기에 가입해 소련의 일부분이 된다. 소련의 일부가 된 우크라이나는 이후 미증유의 기아 사태인 홀로도모르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폴란드는 동서로 소련-독일이라는 양대 강대국과 모두 국경분쟁을 일으키고 있었고 독일과 소련 모두 폴란드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2.5. 독소 불가침조약


나치 집권 후에 독일이 노골적으로 반소련 정책을 취하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서방(영국-프랑스)과의 집단 안보 체제를 구상하였다. 그래서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서방국가들을 방문하여 협상을 벌였으나, 소련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양국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받았다. 특히 폴란드는 독일이 침공하더라도 소련군이 폴란드 국내에 들어와 독일군과 싸우는 것을 극렬 반대했기 때문에 소련과 서방과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한편 히틀러는 자신의 침략 전쟁에 소련이 처음부터 개입하면 이후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다음부터는 소련과 일시적인 화해를 모색하였다. 스탈린도 유대인인 리트비노프를 해임하고[17] 자신의 심복이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외무장관에 임명하여 독일에 화해 제스처를 보냈고, 결국 양 독재자는 의기투합하여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스 외에도, 영국이 전격적으로 폴란드와 상호 안전 보장 조약을 체결하면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독일과 폴란드는 서로를 비난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막기 위해 독일에 여러 경로로 압력을 넣었다. 1939년 4월 28일 독일은 1934년에 체결한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과 1935년에 맺은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잇달아 파기하며 맞대응했다. 그러던 8월 23일,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면서 모든 것이 엉클어졌다.
히틀러는 소련의 동의를 얻어낸 이상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영불 양국은 1938년에도 뮌헨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린 적이 있었다. 히틀러는 군부에 폴란드 침공을 명령했고, 곧 '''백색 작전(Fall Weiß)'''이라는 계획안이 세워졌다. 원래는 8월 26일 새벽 4시에 침공 작전에 돌입할 예정이었으나, 8월 25일에 폴란드-영국 군사 동맹 조약이 체결되자 시행이 한 차례 미뤄진 후 9월 1일이 되어서 작전이 개시되었다.

2.6. 자작극과 개전


8월 31일 밤 폴란드 국경에 위치한 독일 도시 글라이비츠(Gleiwitz)[18]의 한 방송국에 폴란드 육군 소규모 병력이 기습 침투를 한 다음, 방송국을 점거하고 직원들을 강압적으로 위협하며 독일에 대한 전쟁 선언문을 낭독하고 철수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부하였던 알프레드 나우요크스 SS 소령의 지휘로 이루어졌던 독일의 철저한 자작극이었다'''. 폴란드 육군으로 위장한 독일 요원들이 쌩쑈를 한 다음, 국경 부근엔 사전에 차출된,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폴란드 육군 군복을 입힌 채 사살한 뒤 시신을 버려두고 떠난 것이다. 당시 작전 개시의 암호는 'Grossmutter gestorben'('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 사실은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나치 전범을 밝히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이전까지는 연합국 내에서도 폴란드가 먼저 독일을 자극하여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여겼고, 폴란드 정부가 해명했음에도 연합국 진영에서는 폴란드가 괜히 독일을 먼저 공격해 전쟁을 유발시켰다고 찬밥대우했다. 이런 의심을 받은 이유는 폴란드가 일찍부터 독일과 영토 분쟁을 겪고 있었고 동쪽에선 러시아 내전을 틈타 소련을 침략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9월 1일 새벽 독일은 폴란드의 선제 공격에 대한 반격이라는 구실로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채 폴란드를 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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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직전 폴란드군과 독일군의 사단 배치도)

3. 전쟁 계획



3.1. 독일 국방군


(편제는 폴란드 침공/독일군 편제 문서 참조)
독일군은 전통적인 포위섬멸전 교리에 따라 전 전선에서 공세를 가해 폴란드군의 퇴로를 끊은 다음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중부전선에서의 공세는 자제하고, 대신 북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 여기에 당시 독일의 괴뢰국이던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베르놀락 야전군(Poľná armáda „Bernolák)이 남부집단군과 함께 공격에 가담하여 대규모 공세를 실시, 양군이 비스와 강 유역에서 합류하여 국경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폴란드군이 미처 퇴각하기 전에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기로 하였다. 총 병력 150만~180만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며 이외에도 베르놀락 야전군 소속 5만여 명이 함께 동원되었다(훗날 베르놀락 야전군의 일부인 고속 기동 부대 칼린치악(Kalinčiak)은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주공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의 남부집단군으로, 총 병력은 88만 6천여 명(8군, 10군, 14군)에 이르렀다. 8군과 10군이 폴란드 영토 중앙을 가로질러 진격하는 결정적인 공세를 가하고 14군은 슬로바키아, 헝가리 국경을 따라 폴란드 영토 남쪽으로 진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특히 10군에는 독일군 기갑 세력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폴란드 중앙부의 북동부 지역까지 진격하여 결정적 공세를 가하는, 독일군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주공인 남부집단군 중에서도 주공이었으니 이 평가는 전혀 아깝지 않다. 특히 10군의 진격로 상에는 폴란드에서 가장 부유한 중공업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페르디난트 차틀로시(Ferdinand Čatloš) 지휘 하에 3개 사단으로 편성된 5만 1,306명의 병력을 보유한 친독 슬로바키아군 또한 폴란드 남부 국경으로 진군하여 독일군을 돕게 했다.
한편 페도어 폰보크의 북부집단군(3군, 4군, 예비 사단 4개로 구성, 총 병력 63만 명) 중 4군은 단치히 회랑을 관통, 동프로이센과의 육상 교통로를 형성하며, 동프로이센에 있던 3군은 그대로 남하하여 포위망의 북쪽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들은 비스와 강에서 합류, 바르샤바 서부에서 폴란드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고 이후 주력이 사라지고 예비군 동원이 채 끝나지 않은 폴란드를 짓밟으며 수도 바르샤바로 곧장 진격할 계획이었다. 여기에 폴란드 내부의 독일인들이 제 5열을 형성하여 호응하기로 되어 있었다. 합계 150만의 독일군이 폴란드 침공에 동원되었다. 히틀러는 8월 31일 침공을 9월 1일 오전 4시 45분부터 시작할 것을 명령했다.
독일이 남부 전선을 주공으로 삼은 이유는 전쟁에 필요한 폴란드 중화학 공업 지대와 탄전이 폴란드 남부 지역에 밀집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부 폴란드-독일 국경 지대 중 상(上) 실롱스크(Górny Śląsk)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폴란드와 독일의 주요 분쟁지역으로, 해당 지역은 탄전과 광산이 밀집,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폴란드와 독일 간의 국경분쟁을 거쳐 상부 실롱스크는 분할되어 32%는 폴란드에, 68%는 독일에 귀속되었는데 폴란드에 넘어간 지역이 경제적으로 더 가치있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이유와 역사적 이유로 인해 독일 사령부는 폴란드의 남부 국경을 주공 방향으로 잡았다.
당시 4천여 기에 이르렀던 공군기 중 60%인 2,315기와 전체 기갑 전력의 85%인 전차 2,750대 및 장갑차 1,094대, 야포 9,000문을 폴란드 방면으로 배치했으며, 총 6개 기갑사단이 폴란드 전선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들 전차 중 3호 전차4호 전차는 모두 합쳐 310대뿐이었고 체코슬로바키아제 LT vz. 35LT vz. 38 역시 각각 120대, 57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1호 전차2호 전차(1,127대)였다. 특히 1호 전차의 경우는 그냥 철판 위에 기관총만 달아 놓은 격이었던 TKS에 비해서는 사정이 나았지만 7TP와 마주치면 그야말로 학살 수준으로 터져나가 독일군 사령부로 하여금 속 터지게 만들었다. 대전 초기 서방 연합국에 비해 빈약했던 독일의 기갑 전력을 보여 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겠다. 반면 1939년 당시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공군 중 하나로 조종사들의 기량과 항공기의 성능도 수준급이었다. 이들은 폴란드 영토 전역에 폭격을 퍼부어 폴란드군의 진격을 방해하고 군수 물자 생산 지역을 파괴할 것이었다. 특히 Ju87 급강하폭격기가 이에 큰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군사 작전 이외에 독일군은 폴란드계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계획도 짰다. 탄넨베르크 작전(Unternehmen Tannenberg)에 의하면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 이후 6만 1천여 명의 폴란드 엘리트들을 처형하기로 되어 있었다. 침공이 시작된 후 독일군은 폴란드 민간인 2만여 명을 처형했으며,[19] 이 중 2천여 명은 침공이 시작되기 전에 독일 내에서 학살된 폴란드계 독일인이었다.

3.2. 폴란드군


(편제는 폴란드 침공/폴란드군 편제 문서 참조)

1939년, 열병식을 거행하는 폴란드군
폴란드군의 계획은 철저한 방어전이었으며 반격은 빨라도 개전 2달 후 예비군 동원이 완료되고 서부전선의 영국군, 프랑스군이 공세전에 나서는 시점에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즉, 폴란드가 목표로 했던 것은 절대적인 시간 벌기, 즉 지연전이었다. 독일의 침략이 목전에 다가오자 폴란드는 예비군의 부분 동원령을 선포했다. 당시 폴란드 육군은 숫적으로 100만명의 대군이었지만 이 중 상비군은 28만 3천여 명(장교 1만 8천3백여 명, 부사관 4만 3천여 명 포함)이었으며 70만 이상의 인력은 예비군으로서 전시에 동원될 것이었다. 폴란드는 독일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폴란드 중앙에 대규모 산업 시설을 건설하여 침략군에 맞설 현대적 무기를 생산할 본격적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는 방어 계획에서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데 전 영토 절대 사수 개념이었다. 폴란드의 방어 계획 핵심은 국경에서의 방어전이었으며 국경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차근차근 후퇴하여 최종적으로 비스와(Wisła) 강에서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폴란드군의 주력 부대는 모조리 독일과의 국경 지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일과 마주한 국경선 지역이 근본적으로 너무 길었으며(폴란드와 독일의 국경선은 2,000km에 달했고, 여기에 뮌헨 협정으로 인해 연장된 슬로바키아와 폴란드 국경선 800km까지 더해진다. 뿐만 아니라 이 국경선은 거의 대부분 드넓은 평야 지대로 제대로 된 자연적 방어선도 없었다) 국경선과 그 부근에는 방어선으로 쓸 만한 지역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비군 동원까지 완료해도 과연 국경선 전체를 지킬 수 있는지 의문이 가는 실정에서 상비군만으로 국경선을 지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무리수라는 결론이 나온 지 오래였다.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와 프랑스처럼 국경 지대에 각종 장비를 설치하고 부대를 배치, 기지 설치 등 요새화 작업에 착수했으나 애초에 국경선이 2,800km에 이르는 데다가 자연적 방어선의 이점도 없이 모든 걸 새로 건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있던 현대적 무기들마저 외국에 팔아서 돈을 버는 등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던 폴란드가 이걸 혼자서 완수하기는 무리였고 방어선이 완성되기도 전에 전쟁이 발발되어 버렸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서방 연합군 및 폴란드군 소수파는 국경 방어를 포기하고 비스와 강 동쪽에 주력을 집중시켜 방어하기 용이한 비스와 강을 천연의 방어선으로 삼아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전략·전술적으론 현명해도 폴란드가 절대 선택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만약 이 전략을 채택한다면 폴란드는 자국 최대의 산업 및 광산 지대, 핵심 인구 밀집 지역을 포기해야 하며 그 면적도 국토의 절반이 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건 소련군이 동부 국경선을 공격하지 않았을 때나 유효했으며, 비스와 강은 철벽 방어선으로 부를 정도로 강력한 방어선도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비스와 강이나 그 외의 다른 폴란드 내륙 지방에 위기상황을 감안해서 방어선 구축이나 요새 건설을 해놓은 것이 거의 없으므로 후퇴해서 방어선을 지킨다고 해도 얼마나 버틸지 의문이었다. 또한 비스와 강을 방어선 삼아도 문제가 되는게 비스와 강 너머에 있는 동프로이센 주둔 독일군이 방어선의 후방으로 공격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동프로이센과 폴란드 중심부 사이를 나레프(Narew) 강이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이 나레프 강은 비스와 강보다도 폭이 좁은 강이었다. 폴란드 자체가 국가 방어에 매우 불리한 것이, 폴란드 공업 중심지와 인구 밀집 지역, 광산지역이 서부 지역에 있었고, 폴란드-독일 국경 자체가 바로 이 지역을 둘러싸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20]
더군다나 폴란드는 독일군의 주공이 단치히 회랑 쪽으로 집중될 것으로 오판하고 단치히 및 동프로이센 주변에 주력의 1/3을 집중 배치했다. 사실 이는 매우 상식적인 판단으로 단치히 문제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인 만큼 독일이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을 강점하고 폴란드의 반격 역량을 소멸시키는 선에서 전쟁이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폴란드 전 영토의 점령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히틀러에 대한 평전을 쓴 이언 커쇼에 따르면 히틀러는 전면적 승리가 확실시된 그 순간까지도 폴란드 처리를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단치히 회랑과 과거 독일 제국이 지배하던 폴란드 영토만 차지하고 나머지를 괴뢰 독립 국가로 두는 방안도 고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라도 독일군이 폴란드 전역을 점령하는 것 자체는 변함이 없고 다만 전쟁 후에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일 뿐이다.
단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폴란드가 독일의 위협을 제대로 감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 군에 대한 현대화를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폴란드도 나름대로 독일의 점증하는 위협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개전 3년 전인 1936년부터 전쟁 대비를 계속 진행해 왔다. 하지만 폴란드는 개전 시기를 빨라도 1942년으로 잡아 버렸고 이에 따라 1936년~1939년은 공장 건설 및 사회 인프라 확충, 무기 개발의 시기로 1940년~1942년은 본격적인 무기 생산 시작 및 규모 확충의 시기로 잡았다. 실제로 당대 독일 군부의 고위 인사 중에서도 1939년을 개전 시기로 잡은 것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폴란드 군부의 예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자꾸 아돌프 히틀러가 보채면서 1942년 이후 개전을 주장하던 전쟁부 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등을 해고해 버려 히틀러의 나치당이 독일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시 같은 이유로 국방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Werner von Fritsch)도 해고되었다. 그는 1937년 11월 5일의 면담에서 대외적으로 좀 더 조신하게 행동할 것을 촉구했다가 조작된 동성애자 의혹을 받고 갈렸다.

3.2.1. 폴란드 육군


무기와 장비, 병력에 있어서의 열세 또한 현격했다. 장교, 부사관들의 자질 및 병사의 훈련 자체는 괜찮은 편이었지만 상비군은 30만 명 정도였고 대부분은 예비군이었다. 현대전에 대한 지휘관들의 이해는 충실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인해 그 장교들이 필요로 하는 기갑 전력이 빈약했다. 전차만 봐도 도합 2750대에 달하는 기갑 전력을 동원한 독일 육군에 비해 폴란드 육군이 보유한 전차는 1040여대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575대가 TK-3, TKS 계열의 탱켓이었다(그나마 위력적인 신형 20mm 기관포를 장착한 TKS가 존재했지만 그 수량이 24대에 불과했다). 심지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무기로 구식화가 심각한 르노 FT-17 102대(더욱이 이중 일부는 연철로 제작된 훈련용 전차(일명 FT-17 CWS)라 장갑 방어력이 사실상 없는 물건들이었다)도 1선 전차 전력에 포함되어 있는 상태였다.
전체 1,040대의 전차 중에서 실제로 의미가 있던 전차 숫자는 7TP 단포탑형 110대, 르노 R35 50대, 호치키스 H35 3대, 비커스 Mk. E 단포탑형 22대(전체 수량 38대 중 22대는 47mm 포 장착 단포탑형, 나머지 16대는 7.92mm 기관총 2정으로 무장한 2포탑형), 20mm 기관포 장착 TKS 24대, 경량형 자주포 TKS-D 2대(1937년 TKS-B 프로토타입 및 C2P 견인차의 차체를 기반으로 제작된 자주포 형식의 TKS 프로토타입으로 37mm 보포스 대전차포를 무장으로 장착했다. 실제 양산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기존에 제작되어 테스트를 거친 2대는 또다른 자주포 프로토타입인 TKD 4대[21]와 함께 제10차량화기병여단에 소속되어 1938년 뮌헨 협정 때 톄신 합병 당시에 동원되었으며 이듬해 9월 전역에서도 개전 초기 독일군을 상대로 사용되다 손실되었다. 다른 자주포 모델인 TKD는 바르샤바 방어전에 투입되었다가 손실되었다고 전해지나 아직까지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다)를 합쳐 211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너무 구식이거나 무장과 방어력이 너무 빈약했다. 반면에 독일 육군의 실질적인 기갑 전력이라 할 만한 2호 전차, 3호 전차, 4호 전차, 35(t) 전차와 38(t) 전차는 합계 1,614대 정도로 단순 숫자로는 2.5배, 질적으로는 7.5배의 차이가 났다. 폴란드 육군의 야포 보유 수량은 4,300여 대였지만 이것도 독일 육군 야포 보유량[22]의 절반에 못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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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 육군의 7TP 경전차. 사실 이 경전차는 차기 전차 개발기간 동안 전력 공백을 메꿀 임시방편용으로 개발된 전차였다.
폴란드 육군의 정예 기갑 전력인 7TP 전차(세계 최초로 디젤 엔진을 장착하고 세계 최초의 잠망경인 군들라흐 잠망경(Gundlach periscope)을 장착하는 등 그 시대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혁신적인 전차였다)는 상대편인 독일 육군의 1호 전차2호 전차를 질적으로 능가했지만 수량이 132대에 불과하여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7TP의 개량형인 9TP(공식적으로는 9TP라는 명칭으로 불리지 않고 단순히 '강화형 7TP(7TP wzmocniony)'라고 불렸다)는 침공 직전인 1939년에 이르러서야 프로토타입 제작이 계획되던 상황이었고(개량형 전차에 사용될 엔진 등의 테스트는 새로 제작된 프로토타입이 아니라 기존의 1766번 7TP 전차에 임시로 장착되어 1938년 5월에 시행되었다) 그조차 독일의 침공으로 개발 및 양산이 백지화되고 말았다. 이외에 새로운 순항전차 모델인 10TP와 14TP, 기타 20/25TP(정식 명칭은 아니고 당시 전차를 발주했던 여러 폴란드 회사에서 22톤, 23톤, 25톤급 등의 다양한 계획을 제출했기에 편의상 20/25톤급이라고 불렀다)도 계획되어 있었지만 그 중 10TP만이 1938년에 와서야 프로토타입이 1대 만들어져 시운전을 거쳤을 뿐이고(또 다른 모델인 14TP는 1938년에 프로토타입 제작이 시작되었으나 1939년 9월 시점에서는 미완성이었다. 여기에 정찰용 경전차로 계획된 4TP(또는 PZInż.140), 수륙양용 경전차 PZInż.130 등의 프로토타입도 1기씩 존재했지만 양산이 기각되었고 만들어 놓은 프로토타입 또한 무장이 부착되지 않은 상태라 전투에는 투입되지 못했다. 그 외에도 폴란드는 TKS를 기반으로 한 경량형 자주포나 대전차포 모델도 개발을 진행 중이었지만 독일의 침공으로 모두 무산되었다) 나머지는 시간 부족으로 그조차 만들지 못했다.
그 밖에 기병여단에 배치된 비커스 Mk. E 경전차 38대와 프랑스에서 수입한 르노 R35 50대, 100대의 장갑차(경장갑차 wz.34 87대와 wz.28 3대, 중장갑차 wz.29 우르수스(Ursus) 10대), 14대의 트럭 탑재형 자주포(원형은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개발한 물건으로 75mm mle 1897 기반 대공포를 디용 부통(De Dion-Bouton) 75CV 차체에 얹은 것이었다. 폴란드는 독립 후 전간기 시기에 14대 분량을 프랑스에게서 순차적으로 구매했는데, 폴란드군 내에서 형식명은 따로 없고 단순히 '75mm 자주포'라고 불렸으며 이 중 일부는 나중에 PF-621L 트럭 기반 차체로 바뀌었다. 이 자주대공포들은 개전 이후 독일군을 상대로 전투에 투입되어 실제로 전투기 격추 등의 전과를 거두기도 했고, 살아남은 차량은 9월 18일 루마니아 교두보를 통해 루마니아로 탈출했다)가 있었지만 개중 일부는 부대 편성 미완 등의 문제로 인해 아예 전투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일부 기병여단들의 경우 차량화와 기계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었지만(제10차량화기병여단(10.BK(mot))과 바르샤바 차량화-기갑여단(WBP-M)이 대표적이다) 전체적인 군의 기계화 진척도는 미진하여 말이나 수레 같은 재래식 수단에 병력 및 물자의 수송을 상당 부분 의지해야 했고(그런데 독일군 또한 군 전체의 기계화는 이루어지지 않아 수송을 군마에 의존하는 비율이 꽤 높았다. 폴란드군에 비하면 장비의 전반적인 수준이 훨씬 양호했다) 소총이나 기관총, 야포 등의 화기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시절의 물건도 일부 섞여 있었다.
R35 전차에 관해 첨언하자면 원래 폴란드군은 R35의 성능에 만족하지 못하고 질적으로 더 우수한 소뮈아 S35를 구입하고자 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거부하면서 결국 R35 100대를 주문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폴란드 침공이 발발했을 시점에는 이 물량의 절반인 50대와 테스트 목적으로 같이 구입한 호치키스 H35 전차 3대(차체는 H39 형식이었다는 언급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만이 폴란드에 들어와 있었고 그나마도 후방에서 부대 편성조차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전차들은 전쟁 발발 직후 제21경전차대대에 소속된 채 폴란드 총사령부 예하 예비대로 남아있다가 9월 17일 소련군의 침공 이후 34대 분량이 루마니아 교두보를 통해 폴란드를 탈출했고, 6대는 스타니스와부프(Stanisławów; 지금 우크라이나 이바노-프랑킵스크(Іва́но-Франкі́вськ; Ivano-Frankivsk))에서 제10차량화기병여단에 새로 배속되어 그 중 3대 분량이 헝가리로 넘어갔다. 나머지 전차들은 본토에 남아 전역 말미 독일군과 소련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소진되었다(폴란드에 들어오지 못한 나머지 50대 R35 전차들의 행방에 대해선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는데 루마니아에 전달되었다가 루마니아군에 흡수되었다는 추측도 있고,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로 보내졌다는 추측도 있으며, 10월경에 목적지를 바꿔 시리아로 향하여 그곳에 남아있다 종전 후 그중 일부가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시리아군에 의해 전투에 동원되었다는 추측도 있다).
개전 시점에서 폴란드의 기갑 병력은 2개 차량화여단, 3개 독립 경전차대대(제1, 2 경전차대대(7TP)와 제21 경전차대대(R35). 단 제21 경전차대대는 침공 발발 시점에서 부대 편성이 완료되지 않았다) 및 3개 경전차중대(FT-17), TK-3, TKS 혹은 장갑차로 구성되어 각 보병사단과 기병여단에 배치된 11개 기갑대대 및 15개 정찰전차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1939년 9월 독일의 침공 당시 급히 조직되어 전선에 나간 기갑 병력도 있었는데, 바르샤바 방어 사령부 예하 3개 경전차중대(중대당 전차 11대가 배속되고 각각 7TP 단일 포탑형, 7TP 2포탑형, TKS로 편성) 및 두브노(Dubno) 집단 소속 반(半)개 중대(R35, H35 각각 3대씩으로 편성), 그 밖에 각종 구식전차와 TKS, 장갑차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가 있었다. 한편 폴란드는 16량[23]장갑열차를 방어전에 투입하여 침략해 온 독일군을 상대로 적지 않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24] 폴란드 전역 말미에는 그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일부는 독일군의 손에 노획당했다. 개전 당시 폴란드군 기갑 전력 배치 상황은 여기를 참고.

3.2.2. 폴란드 공군


폴란드 공군은 육군보다 더 상황이 암담했다. 전쟁 발발 직전 폴란드 공군은 세계적인 수준의 조종사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운용 가능한 항공기의 수량은 크게 부족했고 대다수 기종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기종이었다(이 당시 폴란드의 주력 전투기였던 PZL P.7과 PZL P.11은 최대 속도가 330~370km/h 정도였는데 이는 독일 공군의 주력 Bf109 E형에 비해 거의 200km/h 가까이 뒤떨어질 뿐 아니라 대다수의 독일 공군 폭격기보다도 느린 속도였다). 나치 독일의 루프트바페가 폴란드 전역에만 2,315대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동원한 데 비해 폴란드 공군은 600여 대의 항공기만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나마도 70% 가량의 전력인 400여 대만을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다. 경폭격기(PZL.23 카라시(Karaś))와 중(中)폭격기(PZL.37 워시(Łoś)) 전력의 경우는 전투기에 비해 질적으로 약간 사정이 나았지만 전투에 투입된 물량은 다합쳐 150-160대에 그쳤다. 그나마도 PZL.23의 경우는 1939년에 이르러 이미 구식 기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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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폭격기 PZL.37 워시(Łoś)
PZL.37 워시(Łoś) 중폭격기는 당대 폴란드 공군의 최신예 폭격기로 세계적인 기준으로 봐도 꽤 좋은 폭격기였다. 하지만 생산량은 겨우 120대 정도였고 그나마도 실전 배치된 기종은 36기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좋은 기종도 집중적으로 운용하지 않고 전투기 호위도 제대로 붙이지 않은 채 개별적으로 조금씩 사용하다가 소모되었다.[25]
이들 전투기와 폭격기 이외에도 다른 기종들도 개발 중에 있었거나 생산 예정이었지만 독일군의 침공으로 인해 만들지 못했다. 예를 들어 전폭기 PZL.38 빌크(Wilk)는 프로토타입 2기만 제작되었고 경폭격기 PZL.46 숨(Sum)은 프로토타입만 제작, 중(中)폭격기 PZL.49 미시(Miś)는 프로토타입을 제작 중, 중(重)전폭기 PZL.48 람파르트(Lampart)와 PZL.54 리시(Ryś) 역시 프로토타입을 제작 중이었으며 전투기 PZL.45 소쿠우(Sokół)와 PZL.50 야스트숌프(Jastrząb)는 프로토타입만 제작되었다. 이들 모두 이후 대량 생산될 예정이었지만 예정보다 일찍 독일이 침공하는 바람에 제대로 생산되지 못했다.
한편 폴란드 군부는 PZL.23의 개량판인 PZL.43을 1937년에 제작하였지만 이들은 불가리아 수출판이었던 탓에 54기나 제작되어서는 '''이게 거의 다 불가리아로 수출되어 버렸다.''' 또한 PZL P.11보다 더 근대화되어 있던 PZL P.24 전투기도 적어도 100여 대 이상이 터키,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에 수출되었다. 원래 폴란드 공군은 이보다 더 발전된 PZL.50 야스트숌프를 사용하려고 했지만 대량 생산 이전에 독일군이 침공함으로써 오히려 해가 되어 버렸다. 빈약한 폴란드 공군 입장에서는 이게 절대로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차라리 수출을 취소하고 자국에서 운용했으면 방어전에서 조금이나마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침공 당일 실질적으로 전투에 투입 가능했던 폴란드 공군기는 전투기 170기, 폭격기 163기가 전부였고 나머지는 잡다한 관측기 및 훈련기(구형 루블린(Lublin) R-XIII, RWD-14 차플라(Czapla), PWS-26 등)이거나 출격 준비를 갖추지 못한 비행기들이었다(위키피디아 자료). 그 밖에 폴란드군은 전쟁 발발 이전 160기의 M.S.406과 10기의 허리케인, 1기의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외국에서 주문한 상태였지만 이 전투기들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폴란드 국내에 들어오지 못했다.

3.2.3. 폴란드 해군


폴란드 해군은 육군이나 공군과 비교해도 매우 빈약했다. 당장 폴란드의 역사만 보아도 윙드 후사르 등 화려한 활약을 펼친 폴란드 육군에 비해 폴란드 해군은 내세울 만한 게 거의 없었던 것이다. 1918년에 창설되어 그 역사가 21년밖에 안 되었던 폴란드 해군의 가용전력은 구축함 4척, 잠수함 5척, 기뢰함 1척, 기타 소해정 몇 척에 불과했고 전쟁이 벌어지는 즉시 압도적인 전력의 독일 해군에 의해 해안 지역에서 전멸당할 가능성이 컸다. 영국 사령부는 이들이 해안 지대에서 가망 없는 전투를 하느니 차라리 프랑스와 영국으로 이동하여 연합국 해군과 함께 연합 작전을 펼치는 것이 훨씬 낫다는 판단을 내렸고 8월 24일에 폴란드군 총사령관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Edward Rydz-Śmigły)에게 폴란드 해군의 주요 전력을 자신들 쪽으로 이동시키라고 요구했다. 시미그위는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8월 26일 폴란드 함대 사령관 유제프 운루크(Józef Unrug) 소장은 작전 명령서에 서명했고, 8월 29일, 리츠시미그위의 명령이 내려짐으로써 'Peking(베이징), Peking, Peking'이라는 신호와 함께 폴란드 해군 전력의 거의 전부였던 3척의 구축함인 그롬(Grom), 브위스카비차(Błyskawica), 부르자(Burza) 함이 조국을 떠나 영국 에든버러를 향한 머나먼 항해길에 올랐다. 중간에 독일 해군 및 정찰기와 조우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9월 1일 오전 9시 25분에 조국이 나치 독일에 침략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들은 낮 12시 58분 영국 해군 함대에 합류하여 오후 5시 37분 에든버러의 항구에 정박하였다.
폴란드 항구 헬(Hel)에 남아 있던 기뢰함 그리프(Gryf)와 구축함 비헤르(Wicher)는 9월 3일 독일 공군의 Ju87에게 공격을 받고 침몰하였다. 침략자의 군대로부터 살아남은 3척의 구축함 중 그롬은 독일군의 노르웨이 침공 기간에 독일군의 공격을 받고 59명의 승조원과 함께 바다에 침몰했다. 추가로 폴란드 침공 기간 동안 간신히 살아남은 폴란드 잠수함 2척이 영국으로 이동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폴란드 망명 해군은 이후 영국으로부터 함선을 대여받고 전쟁에 참여하며, 비스마르크 추격전티르피츠 공격에도 참가했다.
영국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한 운 좋은 잠수함 2척 중 하나인 오제우(Orzeł)는 이후 참으로 드라마틱한 함생을 살게 된다. 자세한 것은 오제우 문서 참조.

3.2.4. 폴란드 국내의 문제


이러한 숫적, 질적 열세 이외에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우선 1919년 폴란드 독립 당시 전체 성인의 1/3이 문맹자였으며, 이후 폴란드에서 국민 교육이 이루어지면서 문맹률이 낮아지긴 했지만 문맹자가 거의 없는 독일과는 상황이 달랐다(그래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가 의욕적으로 국민 교육에 나서면서 문맹률은 많이 낮아진 상황이었다. 1921년 당시 폴란드 농촌 지역의 문맹률은 38%에 이르렀으나(당시 폴란드에서 농민은 전체 국민의 75%를 차지했다), 1931년에는 27%로 낮아졌고(도시 지역까지 감안하면 전국적으로는 23%) 1937년에는 18%까지 줄어들었다. 사실 당시 폴란드의 교육 문제는 폴란드가 교육에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폴란드의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이 폴란드인들의 교육에 거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인 탓이 컸다). 또한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독일계인 독일과 달리 폴란드는 전형적인 다민족 국가였는데, 실제로 1931년 인구 조사에서 폴란드인들은 66%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우크라이나인(15.3%), 유대인(8.6%), 벨로루시인(4.3%), 독일인(2.6%), 기타 순이었다. 이 중 독일인들은 폴란드 독립 후 상전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자신들의 처지에 불만을 가졌고, 폴란드 지주 계급에 대해 원한을 갖고 있던 우크라이나인들 또한 전간기 동안 동화 정책을 펼친 폴란드 정부에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전통적인 적대감 이외에도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잘 개발되어 있으며 폴란드인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폴란드 서부와, 반대로 소수민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26] 개발이 거의 되어 있지 않던 폴란드 동부간의 경제적 격차 또한 이러한 갈등을 더욱 부추겼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소련군이 폴란드 동부로 진군하여 독일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정유공장에 이르렀을 때, 우크라이나인 기술자가 흐루쇼프를 반기며 폴란드놈들 밑에서 나같은 우크라이나인이 기술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폴란드 욕을 쏟아내었고 옆에서 폴란드인 기술자들은 소련군 고위장교에게 우크라이나인 동료가 우크라이나어로 뭔가 말을 쏟아내는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려있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숫적으로 의미있는 소수민족 중에서 그나마 폴란드 정부에 고분고분한 편이었지만 전간기 폴란드에 점차적으로 퍼지고 있던 반유대주의는 이들을 완전한 폴란드 국민으로 통합시키는 데 있어 저해 요소로 작용하였다. 전간기 폴란드 지도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의 사나치아(Sanacja, 청결) 정부는 민족보다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였기에 유대인들에게 관대했지만[27] 피우수트스키의 반대파이자 사나치아 운동과 함께 폴란드 정치의 양대 축이었던 민족민주주의(Narodowa Demokracja) 운동은 배타적 민족주의의 속내를 드러내었다. 이후 피우수트스키가 죽자 이러한 반유대주의적 경향은 더욱 심해져 갔다.
군대 구성에 있어서도 이러한 민족 간 갈등은 여실히 드러났다. 95만에 이르렀던 폴란드군 병력 중 유대인은 8~10%[28](또는 약 13만명), 우크라이나인은 11~12%[29](또는 약 11만 명)에 이르렀지만 1939년 9월 개전 당시 폴란드군 고위 장성 중에서 이민족 출신은 극히 드물었다.[30] 이와 같은 민족 갈등은 이후 자유 폴란드군을 구성할 때도 재발했는데, 예를 들어 망명정부군에 가담한 장성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Władysław Anders)는 자신의 군대를 순수한 폴란드계로 구성하기 원했을 정도였다. 이는 폴란드 제2공화국(II Rzeczpospolita Polska)이 완전한 국민국가로 거듭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마지막으로 당장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폴란드 정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예정보다 빨리 예비군을 총동원하려고 했지만, 그런 조치는 독일의 침공을 앞당길 수 있다고 서방 연합국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개전할 때까지 총동원령이나 예비군 소집을 하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와 그단스크 문제를 통해 독일의 영토 확장욕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한 나머지 이 짓거리를 폴란드 침공이 발발하기 직전인 8월 30일까지 계속했다. 실제로 이날 폴란드군 총사령관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 원수는 폴란드군의 '전시 동원'을 선포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아직까지 가망이 남아 있다 생각하여 폴란드에게 태클을 걸었다(전쟁 아직 안 났어! 괜히 자극하지 마!). 결국 9월 1일 시점에서 폴란드는 동원 계획의 70% 정도만을 완료한 상태였으며, 상당수의 부대는 아직 대형조차 갖추지 못한 채 전선으로 다급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4. 진행




4.1. 독일군의 공세



4.1.1. 국경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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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전 당시 폴란드군과 독일군의 배치 및 독일군의 작전도. 보면 알겠지만 폴란드의 포즈난 군과 포모제 군이 '''국경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 싸먹어 주고 싶을 정도로''' 위태위태한 위치에 있다. 나치 독일은 중부에서의 공격을 자제하고 북쪽과 남쪽에서 양익 포위를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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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포격을 받아 연기에 휩싸인 베스테르플라테.
9월 1일 새벽 4시 45분, 친선우호를 목적으로 그단스크에 기항한 독일 해군의 전(前) 드레드노트급 도이칠란트급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31]이 그단스크에 있는 폴란드 요새를 11인치 주포로 기습 포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뒤이어 독일군은 베스테르플라테에 상륙했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군의 보이치에흐 나이사레크(Wojciech Najsarek) 하사가 독일군의 기관총을 맞아 절명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첫 번째 전사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폴란드 북부 해안 지역을 공격하기 직전인 새벽 4시 40분, 독일 공군은 폴란드 도시 비엘룬(Wieluń)에 기습적으로 공습을 감행, 도시의 75%를 파괴하고 시민 1,200여 명을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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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단스크 우체국을 공격하는 무장친위대. 사진 속의 장갑차는 오스트리아ADGZ 장갑차.
한편 그단스크에서는 폴란드 우체국에 모여 있던 콘라트 구데르스키(Konrad Guderski) 휘하 우체국 직원과 민간인 55명, 철도청 직원 1명이 수백여 명에 이르는 독일군과 독일계 반란군을 상대로 항전했지만 결국 15시간의 전투 끝에 중과부적으로 패배, 구데르스키를 포함한 8명은 전사하거나 항복 후 독일군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하고 4명은 부상 악화로 사망, 포로로 잡힌 38명은 처형, 4명은 탈출하여 도망쳤다. 이 4명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오늘날 그단스크 우체국에서의 항전은 폴란드인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적에게 맞서 싸운 전설로 남아있으며, 1995년 독일의 뤼베크 지방 법원은 처형당한 38명에 대한 재심을 실시, 당시 독일 군사 법정이 그단스크에 살던 38명을 재판할 권한이 없었다고 판결하면서 처형당한 이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상기했듯 독일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폴란드에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32] 기습적인 포격을 당한 베스테르플라테(Westerplatte)의 수비대는 8월 말에 80명에서 증원된 2백여 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3천4백여 명의 독일군을 상대로 4백여 명에 이르는 피해를 입히며 '''9월 7일'''까지 버텼다. 북부 해안 지역에서 폴란드군의 조직적 저항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헬(Hel) 반도의 폴란드군이 항복한 10월 2일에 이르러서였다.
북부 해안 일대에 대한 포격과 더불어 독일군은 당초 계획한 대로 게르트 폰룬트슈테트 휘하 남부집단군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파상 공세를 퍼부었다. 여기에 비엘룬 공습을 시작으로 독일의 급강하폭격기 부대가 항공지원에 나섰고, 이후 독일 남부집단군 소속 2개 기갑사단과 1개 보병사단이 오전 8시 폴란드 국경을 넘어 모크라(Mokra)로 진군했다. 전투 첫날 해당 국경선을 방어하던 폴란드 제7보병사단과 장갑열차 시미아위(Śmiały), 보윈 기병여단(Wołyńska Brygada Kawalerii)이 모크라를 공격해 온 독일군을 격퇴했지만 폴란드 남부의 방어선은 장비와 병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허술한 상태였다. 프쉬치나(Pszczyna)에서는 4일까지 베르나르트 몬트 준장의 폴란드 제6보병사단이 하인리히 폰비팅호프(Heinrich von Vietinghoff)의 독일 제5기갑사단과 SS 게르마니아 연대를 맞아 싸웠지만 결국 패배했으며, 벵기에르스카 구르카(Węgierska Górka)의 폴란드군 또한 독일군에 선전했으나 거의 15배에 이르는 독일군의 숫적 우세에 분쇄되어 패배했다. 미코우프(Mikołów)에서는 독일 제8보병사단과 제28보병사단, 제5기갑사단이 폴란드 제55보병사단을 박살내고 진격했다.
결국 남부 방어선은 계속 이어지는 독일군의 거센 공세를 견디지 못해 얼마 안 가 무너지고 말았다. 원래 폴란드군은 독일의 주공 방향이 남부 지역이 될 것으로 파악하고 해당 지역에 병력을 집중했지만, 독일군의 진격 페이스를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 맞춰 생각하고 동원도 미처 끝내지 못한 상태였기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한 것. 그 와중에 서남부 국경 지역을 방어하던 다른 폴란드 야전군인 포즈난 군과 크라쿠프 군은 우치 군이 독일 제8군과 제10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밀려나는데도 제대로 협조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포즈난 군은 독일의 양익포위를 피하기에 바빴고 크라쿠프 군도 제자리를 지키는 데에 여념이 없었으니...
페도어 폰보크 휘하 북부집단군도 뒤이어 북쪽 국경 지대에서 공세를 개시, 폴란드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9월 1일 므와바(Mława)에서 에밀 크루코비츠프셰지미르스키(Emil Krukowicz-Przedrzymirski) 소장이 이끄는 모들린 군 소속 제 8보병사단과 제 20보병사단은 게오르크 폰퀴힐러(Georg von Küchler)의 제3군 소속 5개 보병사단과 1개 기갑사단으로 구성된 독일군에 맞서 1,200여 명 전사 및 1,500여 명 부상의 피해를 입는 동안 독일군에게 2,800여 명 전사 및 실종, 3,000여 명 부상의 피해를 입히고 전차 72대를 파괴하는 등 굉장히 선전했지만 독일 공군의 폭격과 계속되는 독일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3일 만에 퇴각하여 비스와 강과 나레프 강에 걸친 제2선으로 후퇴했다.
폴란드 북서 지역의 폴란드 회랑(Korytarz Polski)을 방어하던 포모제 군 소속 제9보병사단과 제27보병사단, 체르스크 작전 집단도 서부 국경 지대에서 귄터 폰클루게하인츠 구데리안의 독일 제2군단과 제19기갑군단의 공격을 받아 5일까지 투홀라(Tuchola) 숲 전투에서 독일군의 압도적인 기갑 전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투홀라 숲 전투에서 2,350명의 폴란드군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독일군의 피해는 1,249명이었다. 그중 제19기갑군단의 피해는 850명이었다. 제9보병사단은 독일군의 포위망 속에서 붕괴했으며, 포모제 군은 서부 국경과 동프로이센 양쪽에서 협공을 받아 퇴각했다. 포모제 군은 투홀라 숲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큰 손실을 입었으며, 그 피해는 전체 병력의 1/3에 달했다. 특히 제9보병사단의 잔존 병력은 30%에 불과했다.
거기다 전 전선에서 루프트바페의 맹공습이 개시되었다. 이 공격으로 인해 폴란드의 지상군은 전투 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는데 돌파한 독일군을 영격하는 것 자체가 지장을 받은 데다가 통신 연락이 끊어지고 후방에 있는 보급·통신·지휘 체계가 집중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독일군은 폴란드 군사 시설뿐만 아니라 병원, 묘지, 심지어 피난민 열차에까지 공습을 가했다. 거기에 피난민까지 도로에 몰리는 등의 사태가 겹쳐 사실상 이때부터 폴란드군은 각자 알아서 전투하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으며, 통합지휘 따위는 물 건너가게 된다.
이 정도로 폴란드군의 전투 의지가 상실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원래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없는 불리한 처지에 놓인 것은 사실이었다. 이외에도 폴란드 정부는 개전 전에 독일의 모든 공격을 격퇴할 수 있다고 선전했는데, 전쟁 발발 이후에는 독일군의 빠른 진격과 무차별 폭격, 점령지 내의 독일군의 잔혹 행위에 충격받은 폴란드 피난민들이 도보로 이동하면서 폴란드군 진격의 장애물이 되었다.[33]
하지만 폴란드 공군이 손가락만 빨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흔히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기량도 우수해진 파일럿과 Bf109 등 신형 전투기로 무장한 독일 공군에게 수적으로 불리한 폴란드 공군이 완전히 밀렸으리라고 여겨지나 이는 사실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 폴란드 공군은 독일 공군의 신형 전투기인 Bf109에 비해 한참 뒤쳐지는 전투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숫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기 285기를 손실시키고 279기를 반파시키는 등 대단히 분전했다. 예를 들어 전투 첫날 바르샤바의 폴란드 공군 부대는 바르샤바를 폭격하러 온 독일 공군 부대와 공중전을 벌여 큰 피해를 입히고 쫓아냈다. 란체스터 법칙이 잘 적용되는 공중전에서 질적,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지 않고 분전했다는 것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폴란드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공군은 독일군의 질적, 수적 우세에 밀려 제공권을 상실하고 만다. 2주 동안의 분투 끝에 14일에는 개전 당일에 400기에 이르렀던 폴란드군의 항공기가 54기까지 줄어들었고, 이 시점에 이르러 폴란드 공군은 활동을 중단했다. 아주 활동을 중단한 것은 아니고 그 이후로도 종종 지상군 지원에 나섰지만 17일에 소련이 침공한 이후로는 완전히 무력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전투기 조종사들은 영국으로 망명하여 훗날 영국에서 벌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9월 3일에는 폴란드 해안 지방이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토의 독일군에 의해 폴란드 본토로부터 차단되었으며 이 날 귄터 폰클루게의 제4군은 비스와 강에, 퀴힐러의 제3군은 나레프 강에 도달했다. 이후 제3군은 12일 나레프 강에 형성된 폴란드군의 방어선을 분쇄, 바르샤바 동부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준장의 기병대가 이들을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나레프 강을 방어하던 율리우쉬 줄라우프(Juliusz Zulauf) 준장의 폴란드군은 나레프 강으로부터 퇴각, 14일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4.1.2. 바르샤바를 향하여


9월 3일, 남부집단군의 발터 폰라이헤나우의 제10군도 바르타(Warta) 강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2일 뒤인 9월 5일에 그의 좌익은 폴란드 중서부의 공업 도시 우치(Łódź)에, 우익은 키엘체(Kielce)에 도달했다. 우치 군이 북쪽의 포즈난 군과 동남쪽의 크라쿠프 군으로부터 분리되어 독일 제8군과 제10군의 공격을 받았고, 폴란드 야전군 가운데 가장 전력이 빈약했던 카르파티 군 또한 독일 제14군과 친독 슬로바키아군의 공격을 받고 니다(Nida) 강과 두나예츠(Dunajec) 강으로부터 밀려났다. 불과 1주일 만에 비스와 강과 폴란드 중심부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9월 8일, 우치가 격전 끝에 독일군의 손에 떨어졌다. 해당 지역에 배치된 우치 군은 도시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될 때까지도 여전히 병력 동원이 진행 중이었다. 국경선 가까이 배치되어 있던 폴란드 3개 사단은 독일군의 공격을 받고 얼마 가지 않아 붕괴했다. 우치의 함락은 폴란드군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포즈난 군과 크라쿠프 군 사이를 담당하고 있던 우치 군이 독일 제8군과 제10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패퇴하면서 초기의 남부 방어 계획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로 인해 독일군에 대항해 선전하고 있던 다른 폴란드군이 연달아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타 지역으로 후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치가 함락된 당일 라이헤나우 휘하 기갑군단은 바르샤바 외곽으로 진주했으며, 우익의 경사단들은 9일까지 바르샤바와 산도미에쉬(Sandomierz) 사이의 마을을 점령했다.
그동안 빌헬름 리스트 휘하 제14군은 프셰미실(Przemyśl) 근교의 산(San) 강 주변까지 진격했다. 같은 시기 북부 전선의 제19기갑군단은 나레프 강을 도하하여[34] 부크(Bug) 강에 형성된 폴란드군의 방어선을 공격하였다. 초기의 국경전투(Bitwa graniczna)에서 연패한 폴란드군은 9월 6일 시미그위 원수로부터 비스와 강과 산 강을 따라 형성된 제2 방어선으로 퇴각하여 방어전에 임할 것을 명령받았다.
폴란드군의 분전으로 몇몇 전선에서 전진이 늦춰지기는 했으나 독일군은 예정된 계획대로 진격했으며, 바르샤바는 독일군에 둘러싸인 형세가 되었다. 바르샤바에 형성된 12만 폴란드군의 방어선은 주로 바르샤바 서쪽 외곽에 집중된 형태를 띠었으며, 바르샤바의 북쪽에는 빅토르 톰메 준장 휘하 4만여 명의 폴란드군이 방어하는 모들린(Modlin) 요새가 있었다. 독일군은 바르샤바 외곽으로 진출한 8일부터 바르샤바를 공격했으나 폴란드군의 강력한 방어선에 부딪혔고, 독일 제31보병사단의 지원을 받은 제4기갑사단이 무리하게 바르샤바 내로 진입하려 하다가 큰 피해를 입고 쫓겨나기까지 했다.[35]
이후로도 제4기갑사단은 계속 바르샤바를 공격했지만 그때마다 실패를 거듭할 뿐이었다. 이에 시가전에서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독일군 사령부는 외부에서 포위망을 형성하여 바르샤바 내에 계속 폭탄을 퍼붓고 외부로부터의 물자 반입 및 병력 증원을 차단하여 바르샤바를 고사시키는 작전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바르샤바 전투가 28일까지 상당히 치열하게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7만 독일군의 전사자는 1,500여 명, 부상자는 5,000여 명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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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샤바 방어전의 형세. 푸른색이 폴란드군, 붉은색이 독일군이다. 정작 전투가 끝날 때까지 독일군은 바르샤바 시내에 한 발짝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고 한다. 뭐 대신에 외부에서 폭탄을 쏟아부었지만.
바르샤바 공방전에 대해 첨언하자면, 초기에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던 바르샤바의 폴란드 정규군 병력은 4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중대밖에 없었고 이외의 병력은 2선급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후 국경 전투와 브주라 전투에서 후퇴한 폴란드군이 합류하고 시민 자원병을 받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병력을 충원받았다. 이 과정에서 독일 총사령부는 8일에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고 선언했지만 이후 승리한 게 아니라 대패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뻘쭘해졌는지 바르샤바를 강력한 요새(Festung Warschau, 바르샤바 요새)라고 선전하면서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정당화'''했다. 독일군은 고의로 바르샤바의 인프라를 파괴하고 시민들을 학살했는데, 이 과정에서 소이탄까지 대거 들여와 바르샤바를 아예 전소해 버리려 했을 정도였다. 한편 북부의 모들린 요새도 13일부터 헤르만 호트 휘하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15일에는 독일군이 바르샤바 동부로 진주하면서 바르샤바를 포위하는 형세가 완성되었다.
사실상 1주일 만에 폴란드군의 국경 방어 계획은 대실패로 끝나, 폴란드 회랑과 대폴란드(Wielkopolska), 상부 실롱스크(Górny Śląsk)를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폴란드군은 바르샤바와 르부프(Lwów, 現 우크라이나 리비우(Львів; L'viv)) 방면으로 퇴각하면서 독일군과 전투를 치렀다. 여기에 폴란드군은 나치 독일의 훈련을 받고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독일계 반란군과 남쪽 국경선에서 치고 올라오는 친독 슬로바키아군까지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36] 폴란드군의 대부분은 독일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급히 후방으로 후퇴하였고, 독일의 예상 포위망에서 상당수의 폴란드 병력이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이에 독일군은 당초 자신들이 계획한 포위망보다 더 거대한 제2의 포위망을 형성하여 폴란드군을 에워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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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계 반란 집단인 자위단(Selbstschutz) 지휘관들. 군복에 달린 패치, 계급장 등을 보면 SS무장친위대 군복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들은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군인과 민간인들을 습격하고 전후 폴란드 민간인 학살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9월 8일에는 독일군이 바르샤바 외곽에 진주하여 바르샤바의 폴란드 방어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13일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거의 3주가 지난 28일에 이르러 끝났다. 이보다 약간 앞선 11일에는 라돔(Radom)의 폴란드군이 독일 남부집단군의 맹공을 받은 끝에 항복하거나 소규모 집단으로 분산되어 포위망 바깥으로 벗어났다. 라돔에서는 6만여 명의 폴란드군이 포로로 사로잡혔다. 12일에는 폴란드 동부의 르부프도 페르디난트 쇠르너 휘하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이 도시는 소련군이 진주한 22일에 필리프 골리코프 휘하 소련군에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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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일부터 14일까지의 전투 경과.

4.1.3. 브주라 전투


폴란드 침공 당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 자세한 설명은 브주라 전투 문서를 참고할 것.

4.2. 소련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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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이후의 전황. 느닷없이 소련이 침공해서 동부를 완전히 먹어치웠다.
소련군의 편제는 폴란드 침공/소련군 편제 문서 참고.
소련도 독소 불가침 조약과 이에 따른 밀약에 의해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하기로 했으나, 스탈린할힌골 전투를 핑계로 폴란드 참전을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브주라 전투에서 사실상 폴란드가 독일에 무너지며 패망이 기정사실화되자 부랴부랴 할힌골 전투를 급히 마무리(9월 16일 휴전)하고 바로 다음 날인 9월 17일 폴란드 침공을 개시한다. 참고로 스탈린은 대 일본전에서도 동일한 방식을 취했다. 엽합국의 거듭된 대 일본전 참전 요구에도 스탈린은 유럽에서의 전쟁을 핑계로 계속 참전을 미루다가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직후에 부랴부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고 결국 한반도 38선 이북에 대한 영향력을 가져가게 되었다. 폴란드 침공 역시 독일이 사실상 폴란드군을 무력화시킨 후에야 참전한 소련은 별다른 군사적 희생을 치루지 않고 거의 날로 폴단드의 동쪽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브주라 전투에서 잠시 선전하던 폴란드가 독일의 역습으로 무너지고 있던 9월 17일, 폴란드는 뒤통수를 얻어 맞았다. 소련이 주소련 폴란드 대사에게, "폴란드는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시민들을 보호할 능력을 잃었으며, 망해가고 있는 폴란드의 동부에 살고있는 우크라이나인들과 벨라루스인들을 보호하겠다" 며, 기존 폴란드와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겠다는 선전포고문을 전달한 것이다. 뒤이어 '''61만여 명에 이르는 소련군이 전 국경에서 전격적으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37][38]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일이 바르샤바를 점령하기 전까지 개입할 마음이 없었지만 바르샤바는 28일까지 저항했고, 스탈린은 17일 공격을 개시했다. 이미 거의 모든 주력이 독일군을 막기 위해 달려 나가 있던 상황이라 동부 국경은 말 그대로 텅텅 빈 상황이었다. '''2만여 명'''에 불과한 폴란드 국경방위군단(KOP)이 소련군을 막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나마 소련 쪽 국경선을 수비하던 소규모 경비 부대와 긴급 소집된 예비군 부대들이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소련군은 이들을 손쉽게 박살내며 서쪽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유제프 올쉬나빌친스키(Józef Olszyna-Wilczyński) 준장이 9월 22일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후 그의 부관인 미에치스와프 스트셰메스키(Mieczysław Strzemeski) 대위와 함께 현장에서 총살되었다.
소련이 침공하던 17일에는 마침 독일 북부집단군의 3군과 남부집단군의 14군이 폴란드 남동부의 브워다바(Włodawa) 근방에서 조우하면서 독일의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이미 독일의 제1포위망의 목표였던 바르샤바에서 독일군은 조우했고, 브워다바에서의 조우는 더 큰 제2포위망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미 상당수의 폴란드 병력이 여기서 또 빠져나가 폴란드 남동부에 주둔했지만, 아무튼 이로써 사실상 폴란드의 패배는 확정되었다.
19일에는 빌노(Wilno; 오늘날의 리투아니아 빌뉴스(Vilnius))가, 24일에는 그로드노(Grodno; 오늘날의 벨라루스 흐로드나(Гродна; Hrodna))가 소련군의 손에 넘어갔다. 그 와중에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은 폴란드 공군은 동부 지역의 비행 기지가 소련군에 넘어가면서 완전히 끝장이 나 버렸다. 폴란드 사령부는 동부 국경의 폴란드군에게 전투 행위를 포기하고 남동부로의 폴란드군 퇴각대열에 합류할 것을 지시했으나 그 와중에 몇몇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이미 대숙청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소련군은 훨씬 빈약한 폴란드군을 상대로 졸전을 벌여 패배하는 일도 잦았으며, 실제 전투로 인한 차량 손실은 150대(완파 43대 포함)로 독일에 비해 적었지만 기계적 결함으로 인해 수백여 대의 기갑 차량이 퍼져 버렸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폴란드의 패망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원래 9월 17일 소련 침공 당시 폴란드군 95만 명 중 75만 명 정도가 아직 남아 있었고, 광대한 동부 영토도 상당히 보존하고 있었기에 소련이 동부 지역에서부터 침공해 오지 않았다면 전쟁이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모를 일이다. 폴란드 침공 막바지에 독일군은 내부적으로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전투를 더 이상 지속할 능력이 소진된 이른바 공세종말점에 다다라 있었다.[39] 특히 침공 막바지 시점에서 독일군의 탄약 보유량은 '''제로''' 상태에 가까웠지만, 동쪽에서 소련군이 침공한 데다 폴란드 정부가 본토를 포기하고 망명군을 꾸리기로 결정한 덕분에 탄약 고갈을 모면할 수 있었다.
실제로 당시 독일군은 전체 사단 가운데 1/3 정도에만 지급할 수 있는 분량의 탄약을 보유했는데 이것으로는 전투를 2주 정도밖에 수행할 수 없었고 예비 보유 탄약까지 동원한다 하더라도 거기서 2주 정도를 더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공군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공군참모총장 에르하르트 밀히는 절박한 심정으로 히틀러에게 현재 보유중인 폭탄 예비량으로는 기껏 해야 2주 정도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고, 그 후에 '''공군 조종사들은 앉아서 카드놀이나 해야 할 판'''(밀히 자신이 실제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이라고 경고했다.
즉, 독일군을 격파한다는 폴란드군의 목표는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원체 빈약한 독일군의 보급선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군수 물자의 재고도 얼마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영국프랑스의 군수 물자 지원이 루마니아를 경유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만일 소련군이 폴란드 동부를 침공해 오지 않았다면 폴란드군이 험준한 지형을 비롯해 많은 자연적 장애물을 가진 남동부[40]의 방어선으로 후퇴하고 독일군은 영국과 프랑스가 루마니아의 콘스탄차(Constanta) 항과 갈라치(Galati) 항을 경유하여 전달해주는 르노 R-35/40과 항공기, 탄약, TNT로 무장한 폴란드군과 대치하면서 '''정말로 위에서 언급한 2달째를 맞게 될 터였다'''.
게다가 폴란드군 사령부는 어차피 바르샤바는 포기하기로 결정하여, 당시 바르샤바에 남겨진 폴란드군의 임무는 도시를 사수하면서 최대한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것이었으며, 이들이 이렇게 저항을 지속하는 동안 주력 부대는 남동쪽으로 퇴각한 다음 서방 연합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저항을 지속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이 시점에 이르면 폴란드 공군이 궤멸 지경에 이른 상태인 데다 해당 동부 지역의 주민 대부분은 폴란드 정부에 호의적이지 않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대다수였음을 고려해야 하며,[41] 위에서 말한 75만 명의 병력 또한 그중 20만여 명은 브주라 전투에서 독일군에 포위당한 채로 퇴각하고 있었고 16만여 명은 바르샤바와 모들린에, 1만여 명은 해안 지대에 갇혀 있었으므로 전황이 폴란드 사령부의 생각대로 100% 진행될지는 의문이었지만 적어도 저항이 상당 기간 지속되리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약 35만여 명이 루마니아 국경 지대의 '루마니아 교두보(Romanian Bridgehead)'로 후퇴하여 방어를 준비했으며, 전황으로 보아도 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 국경 지대와 르부프 인근지역에서 폴란드군은 독일군을 비교적 잘 방어하고 있었기에, 폴란드 정부는 이 계획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해당 지역에 최후 방어선을 구축할 심산이었다. 물론 이는 해당 지역이 독일군의 주공 방향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독일은 폴란드를 북쪽과 남쪽으로 양익 포위하여 폴란드 중앙에서 결판을 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폴란드 남동부는 주공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건 간에 이는 폴란드 입장에서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때 폴란드 입장에서 두고두고 한스러운 것이, 당시 폴란드 동부 지역은 독일군이 진격하지 못한 상태였고, 침공해 온 독일군은 독일군대로 탄약 재고가 동이 나고 있었다. 만일 소련이 침공하지 않았으면 독일군은 곧 탄약이 바닥나 공세종말점에 도달했을 것이고 폴란드는 후방인 동부 지역에서 병력을 재정비해 탄약이 바닥난 독일군에게 역공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오히려 사정이 급해진 독일 측에서 강화를 요청하여 영토를 좀 뺏기긴 하더라도 조금이나마 더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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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공 진행 상황을 나타낸 애니메이션. 보면 알겠지만 9월 17일 당시 동부 영토와 동남부 국경 지대는 아직 완전히 독일에 넘어가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한 루마니아는 폴란드의 우방국으로서 1921년에 '방어적 동맹에 관한 협정'을, 26년에는 '동맹 조약'을 체결한 상황으로, 이들 조약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시점에서도 아직 유효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루마니아는 경제적으로 나치 독일에게 호구로 잡힌 상황이어서 루마니아가 순순히 협조해 줄지는 의문이었다. 게다가 루마니아도 국왕 카롤 2세삽질과 전횡을 비롯하여 국내의 친독 파시스트 단체인 철위단(Garda de Fier)의 난립으로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시 '''총리'''인 아르만드 컬리네스쿠(Armand Călinescu)가 백주대낮에 철위단 단원에게 친영파, 친폴란드파라는 이유로 총 맞아 죽을 정도였다.[42][43] 하지만 폴란드는 루마니아를 계속 중립국으로 놔두려고 했는데, 이는 루마니아를 경유하여 오는 연합국의 물자를 제공받으면서 루마니아 교두보에서 독일군과 맞서 싸우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루마니아가 추축국에 참여한 뒤에도 폴란드와 루마니아의 관계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9월 17일 이후 소련이 공격해 오면서 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폴란드 사령부는 루마니아 교두보를 형성하여 방어전을 펼친다는 기존의 계획을 취소, 대신 프랑스로 퇴각하여 후일을 도모한다는 계획을 짰으며, 12만여 명에 달하는 폴란드군이 루마니아와 헝가리 국경 지대로 진군하여 탈출했다. 폴란드 정부 또한 18일에 루마니아로 이동했지만, 독일과 소련의 압력을 받은 루마니아는 폴란드 정부 및 군부 인사들을 억류했고, 결국 정부는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었다. 이그나치 모시치츠키(Ignacy Mościcki) 대통령은 폴란드 공화국 4월 헌법 제24조에 의거, 9월 17일 브와디스와프 라츠키에비츠(Władysław Raczkiewicz)를 후임으로 삼았다.
29일(또는 30일)에 모시치츠키는 사임했고, 이미 프랑스에 도착해 있던 라츠키에비츠가 대통령직을 인수받았다. 나중에 독일은 18일에 루마니아로 폴란드 정부가 이동했다가 억류된 것을 두고 폴란드 침공은 18일 만에 끝난 원정이라면서 폴란드를 조롱했다.[44] 그리고 루마니아 국경 지대로 탈출할 수 없었던 북부의 폴란드군 가운데 2만여 명은 라트비아리투아니아로 탈출하였다.

4.2.1. 폴란드군의 탈출


이 와중에 루마니아 국경 지대로 탈출하려던 폴란드 크라쿠프 군, 루블린 군, 모들린 군의 잔존 병력과 이를 막으려는 독일 제8군단 및 제22기갑군단 사이에서 토마슈프 루벨스키(Tomaszów Lubelski) 전투가 벌어졌다. 이미 그 동안 계속된 전투로 인해 물자가 고갈되고 원래 전력의 1/3~1/2 정도까지 약화되어 있던 폴란드군은 26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또다시 독일군의 포위망에 걸려들었고 끝내 각개격파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17일부터 20일까지 1차로 폴란드군과 독일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져 폴란드군이 패배한 후, 체시니키(Cześniki)에서 독일군을 격파한 스테판 돔프비에르나츠키(Stefan Dąb-Biernacki) 소장의 또다른 폴란드군이 21일부터 26일까지 지속된 독일군과의 2차 전투에서 패배한 것. 이 전투에서 폴란드군 6만여 명 중 2천여 명의 전사자와 2만 6천여 명의 포로가 발생했으며, 전투에서 살아남은 잔존 병력은 숲에 숨어들거나 개별적으로 루마니아로 이동했다. 독일군도 이 전투에서 1,700여 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한편 독일군의 포위가 진행 중이던 바르샤바에서는 9월 22일 독일 제12포병연대를 지휘하던 베르너 폰프리치(Werner von Fritsch) 상급대장이 프라가 지구에서 총에 맞아 전사했다. 이는 폴란드 침공에서 발생한 독일군의 두 번째 장성급 전사자였으며, 동시에 침공기간 동안 전사한 양측의 장성급 인사 중에서 최고 계급이기도 하다.[45]
한편 독일군이 폴란드군의 끈질긴 항전을 받으며 전선을 돌파하던 9월 7일, 프랑스군은 11개 사단을 동원하여 독일 자르 지방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지만 애초에 독일에게 별다른 피해도 주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프랑스는 그냥 폴란드와의 조약을 준수하는 모양새를 보이기 위해 진군한 것이었지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생각은 없었기에 프랑스군은 굉장히 무성의하게 공세에 임했다. 결정적으로 17일 소련이 폴란드 동부를 침공하자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은 '''폴란드는 이제 끝났다'''고 주장하면서 군사 행동 중지를 명령했고, 9월 20일에는 아예 한술 더 떠서 자르 일대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에게 퇴각 명령을 내려버렸다. 나중에 가믈랭은 프랑스 침공 당시에도 간첩으로 오인받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잘못된 명령만 남발하면서 프랑스군의 패배에 공헌했다. 참고 문헌

4.3. 종지부


소련의 침공으로 폴란드는 국토 동남부 지역으로 피난, 장기 항전을 벌이겠다는 최악의 시나리오 계획마저 발동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수도 바르샤바는 발레리안 추마(Walerian Czuma) 중장과 바르샤바 시장 스테판 스타진스키(Stefan Starzyński)의 지도하에 독일군의 공세를 계속 격퇴하고 독일군의 외곽 초소를 점령하는 등 훌륭히 저항했으나 22일 모들린과 바르샤바를 잇는 연결선이 끊어졌고 24일에는 1,150기에 이르는 독일 공군기의 무차별 공습을 받았다. 26일에는 모코투프(Mokotów)와 돔브로프스키(Dąbrowski), 체르니아쿠프(Czerniaków) 요새가 독일군에 함락되었다. 남부 지역의 방어선이 무너진 것이다.
9월 8일에 신편된 바르샤바군 사령관 율리우쉬 룸멜(Juliusz Rómmel) 소장[46]은 전투를 지속할 수는 있지만 어차피 소련도 개입하여 영토의 나머지 절반을 장악해버렸고 시민들의 고통 또한 너무 극심하니 더 이상 항전해봤자 이득이 없다는 판단 하에 9월 26일부터 항복 협상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9월 27일 12시에 휴전 협정이 체결, 28일에 바르샤바가 항복했으며, 다음 날에는 바르샤바 북부의 모들린 요새도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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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군의 폭격을 받아 불타오르는 바르샤바 왕궁. 전투 기간 동안 바르샤바 시가지 가운데 12%의 건물이 파괴되었고 40% 이상이 손상을 입었다.
이때까지 바르샤바 방어군 6천여 명이 전사하고 10만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시민 사망자도 2만 5천여 명에 달했다. 이외에도 도시의 12%가 폐허가 되고 40%가 넘는 건물이 손상을 입었다. 여기에 독일군은 모들린 요새에서 항복한 수백여 명의 폴란드군 포로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한편 바르샤바를 방어하던 폴란드군은 항복할 때 중장비를 파괴하거나 은닉했는데 이때 은닉된 무기들은 훗날 바르샤바 봉기 당시 사용되었다. 그리고 바르샤바가 항복한 28일 동부 폴란드의 샤츠크(Szack)에서 폴란드군이 3배의 소련군을 상대로 승리했으나 소련군은 보복으로 이때 잡은 모든 폴란드군 포로를 처형했다. 30일부터 폴란드 포로들의 이송이 시작되었으며, 다음 날 독일군이 시내에 진주하였다.
이때쯤 독일군과 소련군이 전 전선에서 만나 승리를 자축했으며, 폴란드군은 와해되어 항복하거나 무기를 버리고 집으로 도망가거나, 혹은 극소수 항전 의지를 가진 자들만이 남아 싸우거나 루마니아로 망명하는 중이었다. 결국 폴란드군 16만 명이 외국으로 탈출해서 이들 중 12만 명은 루마니아에 들어왔고, 최종적으로 이들 중 8만 3천여 명이 프랑스로 탈출하였다. 이들은 폴란드 망명 정부 산하 자유 폴란드군의 주축이 되었다. 폴란드 국립은행에 보관되어 있던 금괴 중 82,403kg은 루마니아가 콘스탄차에서 자국 상선에 실어서 서유럽으로 보내줬으며, 나머지는 1947년에 폴란드로 보내줬다.[47] 서유럽으로 간 금괴는 다른 루트로 보내진 것까지 해서 총 100톤에 달했는데, 이 금괴는 그 뒤로도 계속 영국 중앙은행에서 보관하다가 2019년 11월에 비로소 폴란드로 돌아갔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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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독일 제20차량화보병사단장 마우리츠 폰빅토린(Mauritz von Wiktorin), 하인츠 구데리안, 제29경전차여단장 세묜 크리보셰인(Семён Кривошеин). 9월 22일 브제시치(Brześć)에서.
독일과 소련에게 치이면서 완전히 붕괴된 폴란드 공군 병력도 루마니아로 흘러들어왔다. 침공 기간 동안 폴란드 공군은 171명이 전사하고 63명이 부상, 2,500여 명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1만 2천여 명은 루마니아로 탈출했다. 추가로 97기의 폴란드군 항공기가 루마니아로 넘어왔으며, 이외에도 LOT 폴란드 항공에서 근무하던 인력과 16기의 여객기도 폴란드에서 루마니아로 탈출하였다. 한편 폴란드 해군은 독일 해군과 공군, 육군의 합동 공격을 받은 끝에 아직 남아있던 수상함은 모두 침몰했으며, 3척의 잠수함이 스웨덴으로 피신, 억류되었다.
1939년 10월 2일에는 폴란드 중부 코츠크(Kock)에서 폴란드 전역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프란치셰크 클레베르크 준장이 이끄는 1만 8천여 폴란드군이 3만여 명의 독일군을 상대로 사흘 간 분전, 승리했지만 클레베르크 준장은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10월 6일 독일군에 항복했다. 이 전투를 끝으로 폴란드 침공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 전날인 10월 5일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바르샤바를 방문하여 독일군을 사열하였다. 그리고 폴란드 독립 영웅의 이름을 딴 피우수트스키(Piłsudski) 광장은 후에 히틀러 광장으로 개명되었다.

5. 종결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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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과의 동침- 서쪽과 동쪽으로부터 각각 폴란드를 침공해 온 독일군과 소련군은 폴란드에서 이렇게 조우했다. 그러나 이들은 2년 후...

5.1. 민간인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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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인들을 총살하는 독일의 아인자츠그루펜. 아인자츠그루펜은 폴란드에 있던 16개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학살했고, 포즈난에서는 일산화탄소를 이용한 가스실에서 정신질환자들을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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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8일 치에피엘루프에서 학살당한 폴란드 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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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9일 비드고슈치에서 독일군이 폴란드인들을 총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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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2일 코닌(Konin)에서 총살당하는 폴란드 인질.

'''폴란드에서 밀어붙인 야만스러운 '인종 청소' 계획의 골자인 제거 사업을 승인하면서 결국 히틀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넨 셈이었다. 이제 그것은 1934년 돌격대 지도부가 저지른 학살극과도 달랐고 1938년 11월 유대인을 상대로 저지른 탄압과도 양상이 달랐다. 지금까지 독일안에서는 아무리 심한 행동을 했어도 법이라는 체계와 전통을 완전히 부정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폴란드에서는 고삐 풀린 폭력이 독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방대한 규모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법은 동네 강아지 이름이 되었다. 경찰은 안하무인이었다. 독일 안으로 편입된 땅도 독일 밖과 같은 취급을 경찰한테서 받았다. 폴란드 땅에서 벌어진 일은 1941년 여름 소련 원정 때 벌어진 학살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지만 그래도 엄연히 학살은 학살이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예행 연습이었다. - 이언 커쇼 히틀러 (p. 323)'''

폴란드에서는 1달 하고도 1주일 남짓 되는 침공 당시에만 '''20만'''에 이르는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이후 1941년 독소전쟁을 제외하면 직접적인 침공 및 전쟁 상황에서는 가장 많은 수치였다. 20만의 민간인 사망자 중 10만여 명은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독일군은 군 시설뿐만 아니라 민간인 거주 구역과 사회 인프라, 피난민 행렬과 기차, 묘지를 고의로 폭격하고 파괴했으며, 그 예로 위에서 설명한 침공 첫날의 비엘룬 공습과 9월 13일 70톤에 이르는 폭탄을 얻어맞아 전체의 90%가 파괴되고 시민의 절반 이상이 사망한 프람폴(Frampol) 공습, 2만 5천여 명(자료에 따라 6만여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낸 바르샤바 공습이 있다. 또한 독일군은 폴란드군과 전투를 벌일 때 고기방패를 내세우기도 하였는데, 그 예로 모크라 전투와 므와바 전투를 들 수 있다.
또한 점령지에서는 독일 국방군무장친위대, 독일계 반란군에 의해 수만여 명의 폴란드군 포로와 민간인들이 고문당하거나 학살당했다. 독일의 폴란드 혐오는 전쟁이전부터 유태인 혐오감만큼이나 심했고 전쟁이 터지자 독일은 이 혐오감을 여지없이 들어냈다. 예를 들어 9월 4일 폴란드 남서부의 쳉스토호바(Częstochowa)에서는 독일 제42보병연대가 폴란드 민간인 1,140명을 학살했으며, 그중 110명은 유대인이었다. 같은 날 즈워체프(Złoczew)에서는 독일 제17보병사단이 폴란드인과 유대인 200여 명을 학살했다. 9월 5일에는 독일 제46보병사단 42연대가 카예타노비체(Kajetanowice)에서 독일군 군마 2마리가 부상을 입자[49]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 72명을 학살했으며, 9월 8일에는 치에피엘루프(Ciepielów)에서 독일 제 15차량화보병연대가 연대 휘하 제11중대장이 폴란드 저격수에 죽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폴란드 제74보병연대 출신 포로 300여 명을 학살하였고,[50] 9월 9일부터 10일까지 폴란드 북서부의 크웨츠코(Kłecko)에서도 폴란드 민간인 300여 명이 학살당했다.
12일에는 쉬추친(Szczucin)에서 포로 70명이 학살당했으며, 13일에는 폴란드 남서부의 미엘레츠(Mielec)에서 민간인 55명이 산 채로 화형당했다. 같은 날 밤 잠브루프(Zambrów)에서는 독일군이 폴란드 포로 200여 명을 학살하고 부상당해 죽어가는 포로들을 방관했다. 폴란드 남부 프셰미실과 메디카(Medyka)에서도 14일부터 15일까지 900여 명의 유대인들이 총살당했다. 디누프(Dynów)에서는 유대인 150명이 기관총으로 총살당했고 50명은 산 채로 화형당했다. 므쉬초누프(Mszczonów)에서는 독일 제4기갑사단에 의해 포로 11명이 공개 총살을 당했으며, 실라두프(Śladów)에서도 9월 18일 독일 제4기갑사단이 포로 252명과 민간인 106명을 총살하거나 비스와 강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비드고슈치(Bydgoszcz)에서도 도시가 독일군에게 함락된 직후 친나치 자위대와 아인자츠그루펜 그리고 일부 점령 국방군에 의해 폴란드인 800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때 독일은 폴란드인들에게 학살을 자행하면서 9월 3~4일에 벌어진 폴란드계의 독일계 학살에 대한 보복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정말로 이 학살이 있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으며, 그 전에 해당 지역에는 독일군의 극심한 폭격이 있었고 이로 인한 독일계의 피해도 있었다. 또한 비드고슈치에서는 독일계 제5열이 폴란드군을 공격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때 폴란드군은 붙잡힌 이들을 재판 후 처형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독일군의 폭격과 제5열의 공격으로 인해 도시의 폴란드군이 패닉에 빠졌고 이때 우발적으로 독일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만에 하나 정말로 폴란드계에 의한 학살이 있었다 하더라도 '''독일의 조직적 학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어쨌든 이 사건 이후 독일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폴란드 침공을 정당화하였으며, 100~300여 명 선의 독일계 희생자를 무려 5천여 명까지 늘려 발표했다.
또한 9월 28일 모들린 전투가 끝난 직후에는 자크로침(Zakroczym)에서 폴란드 제2군단보병사단 포로 500여 명과 민간인 100여 명이 독일 제3군 소속인 켐프(Kempf) 기갑사단에 의해 처형되었다.[51] 침공 기간 동안 적어도 3천여 명 이상의 폴란드군 포로가 학살당했으며, 이외에도 폴란드 각지의 마을에서 수십여 명 단위로 민간인들이 살해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때 전체 민간인 학살 사건의 60%가 국방군에 의해 자행되었다(이것만 봐도 국방군 무오설이 '''얼마나 헛소리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점령 이후에는 이보다 더욱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점령 초기 3개월간 폴란드 사회 지도층과 지식인, 의사, 교수 등 엘리트들이 국방군 주둔군과 아인자츠 그루펜, SD 방첩대와 게슈타포를 동원한 나치에게 집중적으로 학살되었다. 이 수치는 6만 1천여 명에 이르며, 그중 1천여 명은 전쟁 포로였다. 히틀러는 아예 폴란드 엘리트들을 절멸할 것을 직접 명령하기까지 했다.[52] 점령 3개월 후에도 지속적인 학살은 계속되었다. 대다수의 국방군이 다음 전쟁을 위해서 소련 국경지대와 내부 관리 주둔 국방군을 남겨두고 철수하자 그 빈자리를 게슈타포들과 친위대로 채워졌는데 이들은 앞선 국방군의 학살이 묻힐 정도로 더 잔인했다. 335만에 이르는 유대계 폴란드인 중 290만 명이 독일에 의해 대량 학살되었고, 2,400만의 폴란드계 폴란드인 중에서도 277만 명이 사망했다. 독일이 소련에게 쫓겨나가기 직전까지 점령지 내에서는 폴란드인들에 대한 대량 학살이 수시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팔미리(Palmiry) 숲에서는 1939년 1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1,700여 명의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이 끌려가 학살당했으며, 비드고슈치에서는 점령 초기 4개월간 폴란드인 1만여 명이 학살당했다. 피아시니차(Piaśnica)에서는 1939년 가을부터 다음 해 까지 폴란드 지식인과 유대인, 체코인, 독일인 정신질환자 등 1만 2천에서 1만 4천여 명이 학살당했다. 피아시니차에서의 대학살은 폴란드에서 '''제2의 카틴''' 또는 '''포모제의 카틴'''이라 불릴 정도로 잔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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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프트바페의 공격에 희생당한 폴란드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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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군에 의해 팔미리 숲으로 끌려가는 폴란드 여성. 물론 그 다음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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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6월 20~21일 사이 팔미리에서 학살당한 폴란드 정치범의 명단.
12월 16일부터 17일 밤 사이 바르샤바 교외의 바베르(Wawer)에서는 독일군 부사관 2명이 폴란드 범죄자에게 죽었다는 이유로 120명이 무차별 체포되어(일부는 잠자는 도중에 침상에서 끌려나왔다) 그중 114명이 총살당했다. 7명만이 살아남았으며, 죽은 이들 중에는 유대인과 적어도 러시아인 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베르에서의 학살 이전에 보흐니아(Bochnia)에서도 12월 18일 52명의 폴란드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바베르에서의 대학살은 독일 군인이 죽은 데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집단 책임'을 물은 첫 번째 예였다.
그리고 폴란드인들은 바베르 학살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폴란드 청년 저항 운동 단체인 회색 대오(Szare Szeregi) 소속 집단 중 하나의 이름이 '바베르'였으며, 이 바베르 집단의 첫 번째 임무는 1940년 크리스마스 당시 바르샤바에서 바베르 학살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그래피티를 벽에 그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르샤바 시민들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이 무참히 죽어간 동포를 잊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폴란드 최대의 저항 운동 단체인 국내군(Armia Krajowa)의 상징인 코트비차(Kotwica, '닻'이라는 뜻의 폴란드어')는 '우리는 바베르(학살)를 복수하리라'라는 폴란드어 'Pomścimy Wawer'의 앞 글자 P와 W를 합성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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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베르에서 희생된 107명을 기리는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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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의 무차별 폭격으로 불타오르는 바르샤바.
폴란드 동부의 포나리(Ponary, 現 리투아니아 파네이라이(Paneirai)로, 1939년 당시에는 폴란드 영토였다)에서는 1941년 7월 빌뉴스에 살고 있던 5천여 유대인들이 끌려와 처형당한 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1944년 8월까지 '''10만여 명'''에 이르는 유대인과 폴란드인, 소련군 포로들이 숲으로 끌려와 처형당했다. 이 중 7만여 명은 유대인, 2만여 명은 폴란드인, 8천여 명은 소련 포로였다. 또한 극소수의 집시들도 끼어 있었다. 이때 살해당한 폴란드인들은 대부분 지식인, 성직자, 저항군 대원 등 폴란드 사회 지도층이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는 폴란드 침공 당시와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1944년 바르샤바 봉기와 뒤이은 독일의 철거 작업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특히 바르샤바 봉기 당시에는 25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등 말 그대로 인계에 생지옥이 펼쳐졌다. 종전 시까지 폴란드 내에서 '''600만 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유럽 전선에서는 소련, 독일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수치였다. 민간인 사망자로 치면 소련에 이어 2번째였으며, 전쟁 전의 인구(1939년 당시 폴란드의 인구는 3,500만 명) 대비로 치면 '''유럽 및 아시아 전선 모두 합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폴란드는 하루 평균 2,500~3,000여 명 꼴로 사망했다. 독소전쟁 발발 후 소련은 하루 평균 2만여 명 꼴로 사망했지만 실제 전쟁기간과 인구 차이를 생각하면 폴란드의 피해는 실로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것이었다. 전체 인구의 6명 중 1명 꼴로 사라진 것이니 폴란드가 전쟁에서 겪은 피해와 손실의 막대함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당연히 오늘날에도 독일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감정은 영 좋지 않다. 전쟁 이후 독일이 싹싹 빌면서 폴란드의 대독 감정도 어느 정도 풀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전쟁을 직접 겪었던 폴란드의 노년층은 독일하면 치를 떤다. 여기에 독일계 폴란드인들이 자진해서 열심히 나치 독일에 부역을 하며 폴란드인들의 어그로를 집중적으로 끌었고, 때문에 전후 폴란드 공산 정권에서 1939년 당시 폴란드 내의 독일계와 이후 얻은 영토 내의 독일인들을 모두 독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도[53] 폴란드의 모든 정파들이(심지어 폴란드 '''반공주의자'''들마저도!)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54]
나중에 독일 시민사회에서 경제 위기를 겪던 폴란드인들에게 원조 물자를 보내고 독일 정부와 학계에서도 과거에 대한 사과역사 교과서 대화 등의 방법으로 화해의 노력을 기울였으며[55] 동구권 붕괴 이후에는 폴란드의 유럽 복귀와 유럽연합 가입을 열심히 지원하면서 어느 정도 화해하긴 했지만 수백 년 간 쌓여온 국민 감정과 전쟁으로 입은 상처는 아직도 앙금으로 남아 있다. 오죽하면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폴란드가 지지는커녕 반대할 정도. 다만 독일 정부가 과거사 반성 및 영토 포기와는 별도로 추방당한 독일인이 폴란드에서 원래 살던 땅으로 귀환할 권리가 있으며 빼앗긴 재산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사실 동프로이센 지방에 대한 영유권 자체에 대해서 독일 스스로도 통일을 인정받는 한편 전쟁범죄에 대한 반성으로 포기한 거지 역사적으로는 독일 땅이었음을 극구 부정하지 않는 상황이다. 이쪽 지방의 경우 전통적인 프로이센의 영토였고 폴란드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서 가져간게 아니라 독일이 연합군에게 패배해서 빼앗긴 것이기 때문. 폴란드 침공의 구실 중 잃어버린 영토 수복도 있었을 정도였고 전후 독일 재통일 이전까지 서독 쪽에서 계속해서 이 땅은 우리땅인데라고 어이없는 소리까지 했다.
그리고 역시나 당연하지만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감정 또한 독일만큼은 아니지만 '''영 좋지 않다'''. 서쪽에서 독일과 열심히 싸우고 있는 와중에 동쪽에서 갑툭튀하여 폴란드의 패배를 더욱 가속화시켰을 뿐 아니라 영토의 절반을 강탈하고 그곳에 살던 폴란드인들을 학살 또는 소련 영내로 강제 이주시켰으니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여기에 카틴 학살과 같은 역사 문제도 얽혀 있다). 또한 소련은 전쟁 후 폴란드에 공산 정권을 세워 위성국가로 만들었는데 가톨릭이 주 종교인 폴란드인들은 종교를 탄압하는 공산 정권과 계속 반목을 일으켰다.
결국 동구권 최초의 비공산 정권이 타데우슈 마조비에츠키(Tadeusz Mazowiecki)에 의해 세워지면서 폴란드 공산정권이 붕괴했고,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던 폴란드와 러시아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56] 심지어 제1차 체첸 전쟁 때는 당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체첸 저항군[57]의 라디오 방송국을 크라쿠프에 유치하려 했다가 러시아의 반발을 사서 중단했을 정도. 이후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개입하자 참전을 검토했다가 NATO유럽 연합의 반대로 포기한 적도 있다.[58]

5.2. 폴란드 분할


한편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에서 합의한 대로 폴란드를 반으로 쪼개 나눠가졌다(이를 일컬어 폴란드에서는 1772년, 1793년, 1795년에 각각 일어난 제1, 2, 3차 폴란드 분할에 이어 '''제4차 폴란드 분할(IV rozbiór Polski)'''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 밖에 슬로바키아와의 분쟁 지역이던 국경 지대 일부는 슬로바키아에, 빌뉴스(폴란드명 '빌노(Wilno)')와 그 주변 일대는 리투아니아 영토로 편입되었다. 단 슬로바키아에 할양된 영토는 종전 후 원상 복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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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 분할도.

5.3.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통치


독일과 소련은 체계적으로 폴란드인의 민족성을 말살하는 무자비한 통치를 펼쳤다. 자세한 내용은 독소 폴란드 점령 항목 참조.

5.4. 폴란드의 저항


폴란드 정부 및 8만 5천여 명에 이르는 폴란드군 장병들은 프랑스에서 폴란드 망명 정부자유 폴란드군을 조직하여 항전을 선언했다. 자유 폴란드군은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당시 연합국 측에서 노르웨이를 도와 나르비크(Narvik) 등지에서 싸웠으며, 이후 독일의 프랑스 침공 당시에도 치열하게 싸웠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 기간 동안 폴란드군 6천여 명이 전사했으며, 이외에도 1만 6천여 명이 포로로 잡혔고, 1만 3천여 명은 독일에 항복을 거부한 채 스위스로 넘어가 억류되었다. 프랑스 함락 이후에는 폴란드 망명정부와 약 3만 5천여 명의 폴란드군이 다시 영국으로 탈출하여 항전을 지속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에는 폴란드 망명 조종사들이 영국 공군에 가세하여 파일럿 부족에 시달리던 영국군에 도움을 주었고,[59] 전쟁 전체를 통틀어 지상 요원까지 합한 인원 2만 명 가까이가 영국 공군에 입대해서 싸웠다. 육상 전투에 있어서도 북아프리카 전역의 토브룩 공방전과 이탈리아 전선몬테카시노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의 팔레즈 포위망에서 독일군의 퇴로를 막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전체적으로 서방 측에서 싸운 폴란드군은 25만 명에 달해서 적잖은 기여를 했고, 이들 중에는 마켓 가든 작전에 참전하여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폴란드 공수부대도 존재했다.
또한 폴란드군은 그동안 수집해 왔던 독일군 암호 체계 에니그마에 대한 모든 자료와 암호 해독 인력을 영국 정부에 넘겼으며 영국은 이를 바탕으로 독일군 암호 해독에 성공, 대서양 전투에서 유보트를 막을 수 있었다. 이외에 프랑스 침공으로 독일에 함락당한 프랑스 내에서도 폴란드인들이 프랑스 국내군과의 연계 하에 저항 활동을 펼쳤다.[60]
단순히 국외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애국적인 폴란드인들이 반독 운동에 참여했다.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괴뢰정부도 세우지 않고 총독부(Generalgouvernment)를 설치하여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을 노예화하고 학살했다. 그 절정은 유대인들에게 행해진 홀로코스트로, 아우슈비츠에서만 15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과 폴란드인, 러시아인, 기타 민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노예화 교육과 공공연히 행해진 공개 처형[61]과 일제 검거[62]는 폴란드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독일은 쇼팽의 피아노곡을 연주하거나 허가 없이 가축을 길렀다는 이유만으로 폴란드인들을 처형하기도 했다. 또한 독일은 친독 우크라이나인을 원조하여 폴란드 동남부에서 폴란드인들에 대한 인종청소를 벌였고, 종전 때까지 12만에 이르는 폴란드인들이 이들에게 학살당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폴란드인들이 다시 2만여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을 학살하는 끔찍한 일까지 벌어졌다.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에 충성하는 '''폴란드 지하 국가'''(Polskie Państwo Podziemne)가 폴란드 국내에 결성되어 조직화 및 정보 수집,[63] 대외 선전(지하 신문 발행 및 대외 연락, 라디오 방송 등), 군사 활동(대독 봉기 및 독일 주요 요인 암살, 폴란드인 강제이주 및 학살에 대한 저항. 이는 폴란드 지하 국가의 군사적 축인 국내군을 통해 이루어졌다)에 주력했다. 전쟁 기간 동안 폴란드의 국내군(Armia Krajowa)의 수효는 40만 명에 이르렀으며(일반적으로 국내군의 인원 숫자를 40만 명이라 하며, 실제 동조자의 숫자까지 합치면 최고점은 '''100만 명'''이 넘어간다) 이외에도 공산주의 성향의 인민군(Armia Ludowa),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민족방위군(Narodowe Siły Zbrojne), 중도 및 농업주의 성향의 농민 대대(Bataliony Chłopskie)까지 모든 노선의 폴란드인들이 가세하여 반독 투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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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피노스 집단(Grupa Kampinos) 소속 국내군을 기리기 위한 십자가. 십자가 중앙에 코트비차가 새겨져 있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반독 운동은 더더욱 활발해졌다. 예를 들어 1942년까지만 해도 폴란드 레지스탕스에 의해 1달 평균 250~320여 명의 독일군 손실이 있었으나 1944년 초에 이르러 850~1천 7백여 명으로 증가했고, 조직도 더욱 확대되었다. 유대인들의 구출에도 협력하여 바르샤바 게토 봉기바르샤바 봉기에서 유대인들의 저항활동을 돕고 구출하는 동시에 아우슈비츠에도 비톨트 필레츠키(Witold Pilecki)를 파견하여 내부 정보를 수집하여 연합국에 전달했다.
전쟁 기간 동안 폴란드 저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추축군의 숫자는 15만여 명에 이른다.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한 선전에 과장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전투 과정에서 발생한 부상자와 행방불명자, 포로까지 합치면 1개 군 이상이 폴란드 내에서 녹아 내렸다는 말이 된다. 소련군에 의해 최전선의 독일군의 뼈와 살이 발리던 1943년 4월에도 독일군은 45만여 명의 독일군을 치안 유지를 위해 폴란드 지역에 주둔시켜야 했다. 이 수치는 독일 지역으로 병합된 폴란드 회랑 및 그 일대와 폴란드 동부 지역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64]
소련은 포로로 잡은 폴란드군 사병들은 모두 조기 석방했고, 장교들은 자국 내의 수용소로 데려갔다.[65] 이후 여러 번의 심문을 통해 비협조적으로 판명된 장교들은 모두 1년 후 처형해서 암매장했고, 이 수는 2만 2천여 명에 달한다. 학살 희생자 중에는 단순히 장교뿐만 아니라 성직자, 작가, 정치인, 교수, 조종사, 변호사, 의사 등 폴란드 엘리트들도 포함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폴란드가 다시는 소련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아예 지배층을 모조리 섬멸하려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모두 처형당한 것은 아니며 소련 측에 협조적이었던 인사들은 살아남았다. 이들은 독소전쟁 발발 이후 소련이 조직한 친소 폴란드군(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 정부와는 대립하는 세력)에 들어가 나치와 다시 싸웠고, 훗날 소련의 위성국이 된 폴란드군의 수뇌부가 된다. 소련군과 함께 싸운 폴란드인들은 서방군과 싸운 폴란드인들보다 수가 훨씬 많아서[66] 1945년 시점에 44만 명에 달했으며, 레니노 전투, 콜베르크 전투, 베를린 전투와 바우첸 전투에서 열심히 싸웠다.
단 레니노 전투의 경우는 전투에 참가한 폴란드군이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병력과 보급품도 부족했기에 독일군에게 패배했으며, 전쟁 말기 바우첸 전투의 경우는 폴란드 공산군 측의 지휘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바우첸 전투는 영미군과 소련군에게 샌드위치로 쌈싸먹히고 있던 나치 독일이 전쟁 말기에 이르러 거둔 '''사실상의 유일한 승리'''이기도 하다. 뭐 그래도 이 승리는 유종의 미를 거둔 건 제외하고 독일에게 아무런 전략적 의미도 없었지만. 한편 인민군의 장교 수는 4만여 명에 이르렀지만, 소련이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장교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탓에 장교 숫자가 모자라서 절반을 소련 출신으로 때웠다고 한다.
침공 과정에서 나치당이 절대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단치히 자유시는 독일로의 합병을 선언했고, 이후 폴란드 서부 영토 일부와 단치히 회랑이 독일 본토에 편입되었으며 나머지는 총독부가 설치되어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당연하지만 나중에 패배한 후 독일은 폴란드로부터 뜯어낸 영토를 모두 토해낸 건 물론이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그나마 남아 있던 동부 영토까지 거의 대부분 폴란드에게 빼앗겨(쾨니히스베르크와 그 인근 지역은 러시아에게 뜯겼다) 훌륭한 인과응보의 예를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문서를 참고할 것.

5.5. 가짜 전쟁


한편 9월 3일,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 영국과 프랑스는 '''전혀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국내 반전 여론과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예산 부족에 발목이 잡혀 전쟁할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동안 독일이 깽판치는 데도 뮌헨 협정 전까진 묵인하고 있었다. 또 제1차 세계 대전처럼 방어적으로 나서서 소모전으로 끌 계획이었지, 침공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리고 폴란드가 적어도 3달은 버틸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일부 프랑스군이 독일 국경을 넘어서 밀고 들어갔다가 그냥 되돌아왔다. 이는 폴란드가 너무 빨리 무너지자 동원령에 따라 병력이 충분히 소집된 후 공세를 가하려던 작계 자체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
그런데 만약 이때 영국과 프랑스가 현역 부대만으로 공세를 가했다면, '''독일은 항복했을 가능성이 높다'''. 독일은 장기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 물자도 상당수를 폴란드와 전쟁을 치루면서 써 버렸기 때문이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폴란드가 무너질 때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동원을 끝낸 다음 폴란드에서의 손실을 아직 회복하지 못했을 독일을 1940년 이전에 빨리 공격했더라면, 적어도 독일이 전 유럽을 지배하게 되는 1940년의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1940년 5월 독일군의 본격적인 프랑스 침공까지 영불 연합군과 독일군은 선전포고 상태이면서도 서로 마주보면서 편안히 쉬었다. 이런 상황을 일명 가짜 전쟁(혹은 앉은뱅이 전쟁)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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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3일, 영국이 대독 선전포고를 하자 주폴란드 영국 대사관에 모여 환호하는 폴란드 시민들. 하지만 영국은 전혀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왜 우리가 단치히를 위해 죽어야 하는가?"'''

ㅡ 1939년 프랑스의 반전구호.

'''"프랑스인은 곧 공격할 거라고 폴란드인을 속였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음에도."'''

ㅡ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


5.6. 손실과 교훈


마지막으로 독일의 경우, 폴란드 침공 진행 과정에서 병력 및 장비의 손실이 의외로 컸으며, 비실전적인 전술과 전략을 교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전략적인 면에서는 폴란드군이 완패했지만, 전술적인 면에서는 TKS7TP 같은 탱켓이나 경전차가 주력인 빈약한 기갑 전력을 가진 폴란드군에게 독일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은 전투도 많았으며, 보병 간의 전투에서는 그야말로 백중지세. 공중전의 경우도 제공권을 잡긴 했으나 폴란드 공군의 완전한 무력화에는 실패하여 독일군의 폭격기가 다수 격추되는 등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전략적인 면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세히 살펴보면 독일의 입장에서는 상처뿐인 승리였던 전투가 상당히 많았다. 덕분에 폴란드 침공에서 잃어버린 장비의 보충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서부전선에 참여한 독일군 부대도 꽤 있었다.
독일군은 침공 기간 동안 동원된 2,315기의 항공기 중 566기를 손실했으며, 이 중 285기는 격추, 279기는 반파된 것이었다. 격추된 항공기 중 130기는 폴란드 공군에 의해, 150기는 폴란드 방공 병력에 의해 격추되었다. 폴란드 공군의 손실은 333기(전투기 118기 포함) 및 351기 노획(이 중 63기만이 정상 운용이 가능함)이었다. 또한 독일 육군이 투입한 2,750대의 전차 중 832대를 손실했는데 이 중 341기는 완전 파괴되어 복구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추가로 319대의 기타 기갑 차량이 완전 파괴되었다. 폴란드 육군의 전차 및 기타 기갑 차량 손실은 1,040대 중 432대였으며, 추가로 전차 111대, 대포 1,596문이 독일군에 노획되었다. 또한 독일군은 프랑스 침공 당시 소모된 군수 물자의 2배 이상을 폴란드 침공에서 소모해야 했다. 결국 폴란드에서의 큰 손실과 다가오는 겨울 때문에 독일군은 부득이하게 프랑스 침공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폴란드 침공은 '''독일군이 상당한 수업료를 지불하고 전쟁 기계로 재탄생하는 계기'''가 되며 경험치를 쭉쭉 빨아먹는 레벨업의 장이 된다. 반면 제대로 된 전투 없이 폴란드의 동부를 집어삼킨 소련군은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으며, 그 결과는 독소전쟁 발발 시점, 즉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초기 소련군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패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를 나누어 가진 소련과 독일의 운명은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과 패전국으로 확실히 갈렸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진 독일은 당연히 자신들이 폴란드를 침략해서 강탈한 영토를 다시 돌려주게 되었고, 승자라는 이유로 소련이 강탈한 폴란드 영토는 그대로 소련 영토로 확정되었다.[67] 독일은 또한 해당 영토를 잃어버린 폴란드를 달래기 위해서 소련이 압력을 행사한 결과 융커(토지 귀족)의 기반이었던 동프로이센의 2/3 정도를 폴란드에 내주었다. 그 외 메멜 지방 등 동프로이센 동부 지역은 소비에트 연방의 일부였던 리투아니아에, 쾨니히스베르크는 러시아로 넘어갔다. 그리고 원래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 지류의 동부에 속한 독일 영토를 분리해 폴란드에 내주는 오데르-나이세 선으로 폴란드-동독 국경이 확정되었다.
이 때문에 원래 폴란드의 중앙에 위치했던 수도인 바르샤바는 현재의 폴란드 영토에서는 상당히 동측으로 이동한 것처럼 보인다. 미국-영국-프랑스 서방연합국은 1933년 이전 국경대로 원상 복귀를 원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이 폴란드 동부를 합병했기 때문에 이 원칙은 물 건너가고, 오데르 강 동쪽만 폴란드에 넘기려고 하자 폴란드에 보상이 적다는 요구에 현재 국경인 오데르-나이세 라인으로 확정되었다. 오데르-나이세 라인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서 해당 축선의 서쪽 도시인 슈테틴도 폴란드로 넘겼다. 프랑스는 샤를 드 골이 집권하면서 이 오데르-나이세 라인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시간이 흐르자 미국과 영국도 결국 현실을 받아들였다.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그려진 이 새로운 국경에 대해 동독/서독 가리지 않고 독일 전체가 반발했으나 동독은 종주국 소련의 압력으로 인해 울며 겨자먹기로 1950년 폴란드와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오데르-나이세 선을 수용했다. 반면 서독은 1949년 전후 치뤄진 최초의 총선거에서 승리해서 집권한 서독의 보수 우파 기민련/기사련 연립 정부는 오데르-나이세 라인을 거부하고 1933년 국경을 주장했다. 강경한 반소반공 노선을 표방하던 기민련 집권 내내 이것이 서독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으나, 1969년 중도 좌파 독일 사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공식 입장이 바뀐다. 수상에 취임한 빌리 브란트는 소련 및 공산권과의 화해와 협력을 의미하는 동방정책을 표방하였고, 1970년 제일 먼저 폴란드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오데르-나이세 라인을 인정한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68] 독일 국내에선 우파 진영의 엄청난 반발이 터져 나왔지만, 정작 1982년 사민당을 밀어내고 다시 정권을 잡은 우파 연정도 동방정책과 오데르-나이세 라인을 사실상 수용하였다.
그리고 1990년 통일에 즈음해서는 국제 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현재 독일-폴란드 국경 동쪽 영토 요구권을 영구히 포기하는 것을 명문화했다.[69] 허나 폴란드에 귀속된 영토 중 슐레지엔 지역은 공업화된 지역이지만 포젠, 동프로이센, 포메라니아는 애초에 농업 지역인 데다 인구도 적은 곳이었다. 즉 경제적으론 그다지 가치가 높은 지역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이 지역에서 추방된 독일인들이 서독으로 유입되어 빠른 경제 복구가 가능했다는 견해도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항목에는 독일, 폴란드, 러시아 간의 영토 문제에 대한 역사적 기원과 여러 관점이 자세히 나와 있다.
냉전 종식 후 유럽 각국이 군축을 진행하는 와중에도 폴란드는 이 당시에 동맹국들에게 전혀 도움 받지 못한 기억으로 인해 여건이 되는 한에서 악착같이 재래식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유럽에서 전차 보유량이 1천 대 이상 되는 국가는 러시아를 제외하면 폴란드밖에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틴 집권 하에 러시아가 살아나며 강경 모드로 나오는 통에 졸지에 유럽 방위의 핵심 국가로 떠오를 정도. 유럽 연합이 독자적인 방위 체계를 주장할 때도 '''미국의 지원 없이 안 된다!'''라고 단호하게 말할 만큼 유럽에서 폴란드의 군사력은 무시할 바가 못된다.[70]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비운의 장소 베스테르플라테에는 오늘날 전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 기념비에는 폴란드어로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더 이상의 전쟁은 안 된다(Nigdy Więcej Wojny).'''


7. 뒷이야기


  • 히틀러를 포함한 독일 수뇌부는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결국 9월 3일, 양국의 선전포고를 전달받은 히틀러 포함 독일 수뇌부는 망연자실한 채 "20년 만에 다시 패전의 길을 걷는가?" 라며 좌절했다. 뮌헨 협정 파기를 묵인했기 때문에 폴란드도 봐 줄 거라 예상했지만, 영프의 반전 여론은 뮌헨 협정 파기 후 사라졌고 폴란드 침공 때 참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따라서 히틀러의 오판. 이 부분은 프랑스 침공 항목 참고.[71] 사실 히틀러와 독일 수뇌부의 망상은 누가 봐도 말도 안되는데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는 소국에 영토도 작지만 그래도 폴란드는 앞서 독일에 먹힌 두 나라보다야 나은 편이며 시기도 대독일 포위망을 형성했던 국가들 중에 폴란드와 프랑스 둘만 남았다. 더군다나 이런저런 일로 히틀러는 오늘날로 치면 신용불량자가 된 상태. 히틀러는 영국, 프랑스 등도 속는 것도 한두번이지 맨날 속아주면 나중에는 더 큰 욕심을 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거라는 생각도 못해본 모양이다. 다만, 단치히같은 경우 "속아줄 수도" 있었다. 단치히같은 경우 독일계가 95%(1921년 단치히 자유시 총인구 366,730명중에서 348,493이 독일계)였고, 국제적으로도 폴란드가 영토 욕심 때문에 소련에게 전쟁을 걸고,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에 참여하는 등 너무 어그로를 끌었기 때문에 막상 영국, 프랑스도 독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어도 독일이 여기에서 멈췄다면 더 이상 전쟁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로 옮겨보자면 어떤 사람이 돈을 빌리고 싶은데 갚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어찌저찌하여 돈을 빌렸는데 생각대로 안 갚았다. 이후에 더 크게 빌리려고 했는데 빌려주려는 사람이 "너는 안돼!" 하자 그 사람이 "어라? 또 빌려줄 줄 알았는데?" 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와야 정상일까? 더군다나 그 사람이 안 빌려주면 강제로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물론 선전포고만 하고 멀뚱멀뚱 구경만 하며 딸피가 된 독일이 체력을 회복하는 걸 기다려 줬다. 영프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독일이 폴란드에 꼬라박는 걸 방관한 건 사실이다. 내 피는 안 흘리고 남의 피만 흘리겠다는 계획의 댓가로 프랑스는 6주, 영국도 몇년동안 고통받았다.)실제로 독일은 노르웨이, 프랑스, 영국, 그리고 소련을 침공하여 전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어 놓는다.
  • 프랑스가 폴란드보다 1주일이나 더 버텼으니 '폴란드는 프랑스만큼 강력했다!'는 폴란드 옹호론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폴란드가 프랑스만큼 강했다는 것은 아니고 말 그대로 마지막 1인까지 절망적인 저항을 벌였던 점을 높이 산 것이다. 프랑스는 폴란드보다 훨씬 강력하고 중무장한 국가였다. 차라리 폴란드가 더 잘 싸웠다고 말한다면 모를까[72], 폴란드가 프랑스 수준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프랑스는 프랑스 침공 당시 낫질 작전에 당했으면서도 아직 100만 이상의 병력이 멀쩡히 남은 상태에서 핵심 주력 부대의 소멸과 수도 방어 불가 등이 겹치면서 조기에 항복한 경우이니 감투 정신을 비교할 수는 있으나 직접적으로 강약을 비교할 수는 없다.[73]
(물론 그 100만명이 남아 있지만 칼서렌을 쳐버리며 역사에 영원히 남을 6주 업적을 달성했다)
  • 만약 프랑스가 폴란드처럼 결사 항전으로 나왔으면 전쟁은 몇 달을 끌었을지 모르는 일이다.[74][75] 실제 군부 내 소장파들은 항복 불가, 철저한 저항전을 주장했으나, 서전의 패배로 인해 지상군 1/3이 그대로 소멸되고 나머지 1/3이 마지노 선에 묶이자 그것으로 사실상 패전이 확정된 것이라 여겨 넋이 나간 우파 정권과 군 상층부는 항복을 결정했다. 이후 영국으로 망명한 항전파 장교들을 샤를 드 골이 결집해서 자유 프랑스를 만들었다.[76]
  • 결론적으로 폴란드는 못 싸운 것이 아니라 정말 잘 싸운 것이었다. 나치 독일조차 9월 말이 접어들기 시작한 시점에서는 "이러다가 우리 보급품 다 떨어져서 우리가 역관광당하는 거 아님?" 이라는 두려움이 점점 더 커졌고, 소련은 아예 폴란드 눈치 보면서 우물쭈물하다가 폴란드가 다 죽어가는 시점인 9월 17일에서야 겨우 참전했다. 그리고 당시 폴란드의 주력 전차인 7TP는 독일의 1호 전차2호 전차보다 성능이 뛰어났고, 소련의 T-26이나 T-28, BT 전차와 비교해도 질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덕분에 전차전에선 오히려 폴란드가 독일이나 소련을 격파한 전투도 꽤 많았다(문제는 전차의 보유 숫자가 너무 적었던 데다가 제공권을 빼앗긴 탓에 전세를 뒤집을 만큼의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을 비롯해 그 어떤 나라에게도 절대 '항복'한 적이 없다. 항복을 주도할 고위 공무원들과 정치인들도 대부분이 전멸할 때까지 항전했으니까 말이다.
  • 폴란드의 외교 정책은 약소국이 주위 국가의 곤경을 정치, 군사적으로 악용함으로서 생길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보여 준다. 제1, 2차 세계 대전 사이 폴란드가 아직 신생국일 때, 이 나라가 전쟁을 걸지 않은 주변국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결국 주변국들, 특히 독일과 소련이 힘을 회복하자 헬게이트로... 특히 소련과 관련해서 많이 까이는데, 왜냐하면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는 러시아 내전으로 헬게이트가 열린 상황에서 폴란드가 소련 서부를 침공하여[77] 키예프까지 점령했기 때문. 이후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이끈 소비에트군에게 열나게 얻어터지면서 바르샤바까지 밀렸다가 겨우 살아났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험악한 이웃을 만들어낸 것이 폴란드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당장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는 폴란드가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침공을 당한 후 일방적으로 얻어터졌고,출처 우크라이나의 경우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당시 동갈리치아 지방의 폴란드 중심 도시 중 하나인 르부프(Lwów, 우크라이나어로는 리비우(Львів; L'viv))를 자신들의 수도로 선언(당시 르부프에는 폴란드인들이 더 많았다)해 버리자 폴란드가 깜짝 놀라서 우크라이나에 덤벼든 것이기 때문.
  • 독일의 경우에는 대폴란드(Wielkopolska)와 상부 실롱스크 지대의 폴란드인들이 독일인들에게서 벗어나 폴란드에 합치려 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폴란드 분할 이전에 이 지역은 명실상부한 '폴란드 영토'였다. 123년 만에 국가 재건에 나서는 폴란드 입장에서 과거 영토였던 데다가 '바다로 향하는 통로'인 대폴란드 지역을 먹는 것은 당연했던 것. 게다가 실롱스크의 경우는 독일인들이 폴란드인들을 상대로 학살까지 벌인 상황이었다. 여기에 과거 역사까지 감안한다면 일방적으로 폴란드가 깽판을 부려서 주변 국가들과 모두 적대 관계에 돌입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지적할 게 있다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전쟁 기간인 1919-1920년 이웃한 리투아니아를 공격하여 원래 리투아니아 수도인 빌뉴스에 괴뢰국을 설립하고 나중에 자국 영토로 강제 편입시킨 것 정도.[78] 하지만 1938년~1939년에 걸친 폴란드의 외교 정책은 변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1938년 뮌헨 협정 때 체코 분할에 가담하여 자기들과 함께 독일에 맞서 싸울 강소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너뜨린 일이나, 1939년 독일의 위협에 맞서 영국, 프랑스와 소련이 군사 동맹을 모색할 때 차라리 나라가 망하고 말지라면서 끝내 소련군의 지원을 거부한 케이스가 대표적. 다만 폴란드는 나라가 망할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폴란드는 독일을 상대로 혼자 이길 수 있다고 여겼다. 게다가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39년까지 폴란드는 단치히 문제에 대해서 독일과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거라 믿었으며,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여파로 폴란드군은 소련군과의 전쟁을 주로 대비했을 뿐, 독일과의 전쟁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 서양 지식인, 그리고 이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주의 좌파 지식인들에겐 악몽 같은 사건이다. 스페인 내전과 달리 파시즘(나치 독일)과 공산주의(소련의 스탈린주의)가 연합했으니 파시즘에 맞서 싸우던 지식인들의 입장에선... 사실 이런 조짐은 스페인 내전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의 정치질과 그 외의 사회주의 분파와 의용군을 향한 숙청, 그리고 이들을 굴라그에 가둔 소련의 행태로 예고된 참사였다. 이것을 경고해온 지식인이자 스페인 내전 참전자가 "동물 농장"으로 유명한 조지 오웰.
  • 일본 제국에서는 추축국이긴 하지만 폴란드 침공이 벌어지자 아베 노부유키 일본 총리가 앞장서서 아돌프 히틀러나치 독일을 거세게 비난했다. 만주국을 국가로 인정했던 폴란드 제2공화국은 일본에 매우 우호적인 우방국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폴란드 제2공화국을 추축국 강철동맹에 끌어들이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독소 불가침조약, 곧바로 이어진 폴란드 침공으로 일본의 계획이 틀어지자 일본은 히틀러를 비난한 것이다. 일본은 일본 국내에 있던 폴란드 대사관을 온전히 보존하고,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폴란드 망명 정부에 대해 계속 금전적인 지원을 했다고 한다. 독소전쟁 발발 후 히틀러의 기대와 달리, 일본이 소련을 치지 않은 것도 폴란드 침공으로 독일이 일본한테 뒤통수를 날린 것이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다. 1941년 연말 태평양 전쟁을 일본이 일으키자 폴란드 망명 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일본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대 일본 선전포고는 영국의 강요로 인한 것"이라고 간주하여 선전포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폴란드 망명 정부 역시 형식적인 선전포고 이후 일본 제국과 1945년 9월 9일까지 별다른 전투 행위를 하지 않았다.
  • 대체역사 소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폴란드를 침공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국경지대 방송국에 폴란드군으로 위장해 잡입하여 선전포고 자작극을 벌이려던 SS 단원들을 주인공의 언질을 받은 국방군 병력들이 제지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후 주인공은 이것을 '평화를 주장한다던 나치가 독일을 다시 대전쟁의 위험에 빠트리려는 자작극을 벌였다'며 내전중 여론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7.1. 폴란드 기병에 대한 왜곡 선전


이 전쟁에서 폴란드 기병대인 울란후사르가 독일 전차에게 기창 돌격했다가 전멸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이는 폴란드의 제18 포메라니안 울란 기병연대의 돌격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부대는 8월 26일 국경에 배치되었다가 9월 1일 5시에 공격을 받고 후퇴했고, 독일 보병연대가 점령한 국경도시 크로얀티를 탈환하기 위해 그날 저녁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근처에 있던 독일 공군과 숲에 매복해있던 장갑차들에 의해 부대가 와해되었고, 후에 독일 종군기자가 이를 보고 "독일 전차에 랜스돌격한 멍청한 폴란드 기병들" 운운하는 식으로 프로파간다 기사를 써낸 게 널리 퍼진 것. 이에 대해 사실 전차가 골판지 전차인 줄 알았다느니[79], 포위된 상황이라 마지막 저항으로 돌격한 것이라느니 등 여러 이야기가 퍼져있으나 모두 거짓.
기병 돌격은 폴란드 침공 내내 일반 보병이나 포병 부대를 상대로도 종종 행해져 성공했고, 문제의 대 기갑 부대 돌격도 퇴로가 끊기는 등 절망적인 경우에 이루어지긴 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어느 특정 전투라 꼽을 것 없이 전역 곳곳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폴란드군에서 기병이 상당한 비중(약 10% 가량)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당시 폴란드군의 기병은 소총기관단총 등으로 무장한, 실질적으로는 오늘날의 기계화보병 내지 헬기 강습 보병의 역할을 맡도록 훈련되어 있었다. 신생국인 만큼 공업 생산성도 뒤떨어지고 기계화 비용을 감당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기갑 차량 대신 말을 사용한 것뿐이었다. 즉 이들은 멍청해서 돌격한 게 아니라, '''죽을 걸 알면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돌격한 것이다'''. 또한 폴란드 기병대가 아무런 대책 없이 전차에 뛰어든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37mm 대전차포와 대전차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어 제한적으로나마 대전차전 능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다지 강력하다고 볼 수 없는 37mm 대전차포와 이미 시대에 뒤쳐진 무기가 되어가고 있던 대전차 소총이었지만, 1호 전차 및 2호 전차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화력이었다.
실제로 1920년대 소련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폴란드 기병이다. 그리고 일부 기병 부대들에는 이미 상당수의 오토바이수송트럭, 장갑차경전차가 군용 장비로 주어지는 등 부분적이나마 기병의 차량화와 기계화가 진행 중인 상태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침공 이전에 폴란드 군부는 빨라도 1942년 이후에나 침공이 발발하리라 생각했기에 기계화 일정도 그렇게 잡아 놨다. 실제로 폴란드가 독일의 침공 위협을 느끼고 급하게 대비를 시작한 것은 1939년 중반, 즉 체코슬로바키아를 먹어 치운 독일이 다음에는 그단스크를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폴란드군이 기계화에 집중하지 못한 것은 독립 직후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80]과 1920년대 국경선 문제로 야기된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81] 및 1920년대 후반기에 들이닥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폴란드의 무역 및 수출이 정체된 까닭이 컸다. 이로 인해 폴란드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데, 예를 들어 1929년 당시 폴란드의 1인당 GDP는 1933년까지 계속 추락하다가 이후 반등하여 1938년에 이르러서야 1929년의 수준을 회복했다. 또한 전간기 폴란드의 주요 지도자들이 공군 부대가 현대전에 끼치는 영향을 경시한 영향도 한몫했다. 실제로 전간기 '폴란드 공군의 설계자'라 불리는 공군 사령관 루도미우 라이스키(Ludomił Rayski)나 공군 감독 유제프 자용츠(Józef Zając), 라이스키의 후임 사령관 브와디스와프 칼쿠스(Władysław Kalkus) 등이 폴란드 공군의 확충과 현대화를 부르짖었지만 상관들의 실수와 폴란드의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면서 이 목표가 상당히 지지부진해졌다.
그리고 공군 확충론자들의 의견이 서로 맞는 것도 아니었는데, 줄리오 두헤의 영향을 받은 라이스키의 경우는 폭격기를 주요 공군력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임하던 폭격기의 개발은 그 결과물이 시원찮았으며, 그 결과 1939년 시점에 폴란드 공군 전투기는 구식화된 PZL P.11가 주력이었다. 그리고 자용츠의 성향은 라이스키와 정반대로 전투기를 중시하여 라이스키의 폭격기 생산 계획의 상당 부분을 갈아엎어 버렸다.[82]
외국에서 항공기를 수입하는 방안도 시원찮았는데, 당시 폴란드의 부족한 경제력으로는 외국에서 항공기를 사 와서 주요 전력으로 삼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1939년 전쟁 전야에 이르러서는 많은 종류의 신형 폴란드 공군기들이 개발되거나 계획 중에 있었지만 폴란드의 부족한 공업력과 경제력, 그리고 시간 문제로 인해 충분한 숫자가 생산되지 못하면서 패배로 이어졌다. 여기에 당시 폴란드 신형 항공기 주요 개발진의 잇따른 죽음이라는 악재도 있었다. 그리고 군사적, 경제적, 실업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폴란드는 중앙 산업 지대(Centralny Okręg Przemysłowy)를 건설했지만 시간이 부족하여 폴란드 침공이 발발하기 전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전격전의 전설 같은 책에서는 폴란드 정부와 군부가 자신들이 베를린 레이스를 펼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적어놨는데, 당시 폴란드 수뇌부는 자신들이 독일군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도 '''베를린 레이스를 펼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83][84] 사실 이게 당연하다. 국경선이나 국력, 전력 면에서의 열세를 잘 알고 있는데도 적국의 수도까지 쳐들어가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이런 선전 내용은 당시 독일 쪽에서 폴란드인들을 의도적으로 비하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전략의 일환이었는데, 폴란드인들을 '''교만하고 허황되며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 민족'''으로 선전하려는 목적이었다.

8. 둘러보기




[1] 데이비드 로우 화백의 작품. 아돌프 히틀러이오시프 스탈린이 공손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지만, 서로를 가리켜 히틀러는 "이 세상의 쓰레기(the scum of the earth) 아니신가요?", 스탈린은 "빌어먹을 노동자들의 암살자(the bloody assassin of the workers) 되시는 분 아닙니까?"라고 하고 있다. 가운데 쓰러져 있는 사람은 당연히 폴란드. 독소 불가침조약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을 담은 만평이다. 출처 데이비드 로우는 이 외에도 당대의 정치적 상황을 풍자하는 만평을 그렸는데, 특히 나치를 비꼬는 만평을 많이 그렸다. 저 만평은 제56회 영국 총선 당시 영국 노동당 당수 에드 밀리밴드영국 독립당 당수 나이젤 패라지를 패러디한 만평, 일명 Miliband-Farage Pact에서 오마주되었다.[2] 뒤에 있는 장교들은 왼쪽부터 발터 폰 브라우히치 상급대장, 프리드리히 폰 코헨하우젠 중장,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 빌헬름 카이텔 상급대장이다.[3] 이 사진에서 맨 왼쪽에서 폴란드 국장을 들고 있는 병사가 전후까지 살아남아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국경에 도착한 2제대였다. 먼저 온 전차부대가 막무가내로 가로대를 부수고 진격해 버리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지 몰라 당황하던 폴란드 세관원들이 자기 부대가 도착하자 매우 환영했다고 한다. 사진은 폼나는 사진 하나 찍어보자는 보도반원의 지시에 따라 이미 부서진 기둥을 들고 폼만 잡고 찍은 거라고. 심지어 이 컷에서는 잘린 사진 오른쪽에는 폴란드 세관원들도 함께 기둥을 잡고 있었다. '가로대 보수를 도와주려는 줄 알았나 봐'라고 회고.[4] 침공 시점까지 사실상 폴란드 영토였지만, 거주민 대부분이 독일인이라 명목상으로는 독립된 '자유시'였다. 게다가 단치히 경찰을 비롯한 거주 독일인들은 침공해 온 독일군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조했다.[5] 이외에도 폴란드로 망명한 체코슬로바키아군이 결성한 군단도 있으나 숫자가 1천여 명에 불과했고 침공 시점까지도 조직이 완료되지 못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6] 이 중 완편되지 못한 사단도 상당수 있었다.[7] 보유대수 자체는 1,900기에 달했으나 이 중 650기가 훈련용이고 700기는 노후화가 심한 기체로 가동률조차 보장하기 어려웠다. 유효한 전력으로 볼 수 있는 게 전략예비인 요격여단(Brygada Pościgowa)과 폭격여단(Brygada Bombowa) 소속 전투임무기 146기, 수송 및 지원기 60기와 각 군에 배속된 육군항공대 소속 전투임무기 246기, 지원기 42기 정도였다.[8] 하지만 전쟁에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슬로바키아군의 피해는 37명 전사, 11명 실종, 114명 부상, 그 밖에 2대의 항공기와 장갑차 1대를 손실했다.[9] 독일군에 의해 42만여 명, 소련군에 24만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사상자 중 7천여 명의 전사자와 2만여 명의 부상자가 소련과의 전투에서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 폴란드 민간인 15만~20만 명이 독일군의 폭격과 학살로 사망했다. 이 민간인 사망자 수치에는 독일계 제 5열 및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게릴라, 공산주의 빨치산에게 살해당하거나 동부 폴란드에서 소련군에게 학살당한 민간인들도 포함된다.[10] 소련 측의 공식적인 발표로 우크라이나 전선군에서 972명 전사 및 실종, 1,741명 부상, 벨로루시 전선군에서 503명 전사 및 실종, 642명 부상의 피해를 냈다.[11] 당시 독일의 괴뢰국.[12] 체코-폴란드 국경의 톄신(Těšín) 지방(독일명 '테셴', 폴란드명 '치에쉰(Cieszyn)', 또는 '자올지에(Zaolzie)'), 그 외 야보리나(Javorina), 레스니차(Lesnica) 등 폴란드-슬로바키아 국경 지대의 소규모 영토. 면적은 작지만 석탄이 매우 풍부하고 보헤미아-슬로바키아-폴란드 크라쿠프를 연결하는 철도 교통의 요지인 데다 거주하는 폴란드인들의 숫자도 적지 않아 폴란드에게는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이 지역은 1919년에 일어났던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전쟁에서 빼앗기기 전까지는 폴란드 영토에 속한 곳이기도 했다. 그 이유만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에 가담했다는 사실에 면죄부를 주기는 어렵지만.[13] 당시 그단스크는 폴란드의 간섭을 받는 자유시였다. 사실 이 지역도 원래는 완전히 폴란드 영토가 되어야 했다.[14] 인프라에 투자하면 거기서 수익이라도 나오거나 수익이 나오는데 기여라도 하지 군수 방면은 수익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무기를 해외에 수출한다면 모를까 독일은 그럴 입장도 아니었다. 독일의 군수물자 수출 물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던 나라가 중화민국이었는데, 중일전쟁의 발발 이후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위해 1938년 초에 고문단 철수와 함께 대중 무기 수출의 중단을 히틀러가 명령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나마 외화 획득을 할 수 있던 경로가 크게 축소되었다.[15] 체코를 병합한 후 가장 먼저 했던 짓거리가 바로 체코 중앙은행의 금괴를 턴 일이었다.[16] 그리스경제위기가 벌어진 2015년, 이렇게 강탈당한 금괴를 포함한 액수를 독일에 손해배상 청구를 했는데, 독일은 이미 끝났다며 깔끔히 씹고 있다. 독일은 이렇게 제2차 세계 대전 중 점령국으로부터 강탈한 금괴를 모두 제대로 돌려 준 것도 아니며, 상당 액수는 은닉되었다가 독일의 전후 경제 부흥 자금으로 쓰였다는 설도 있다.[17] 유대인인데다가 대숙청으로 긴장된 당시 소련 분위기를 생각하면 시베리아로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워낙에 서방과 폭넓은 인맥 관계를 자랑하던 리트비노프였으므로 미국 대사로 좌천되는 선에서 끝났다. 사실 미국이 소련을 인정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말 그대로 귀양살이나 다름없었다.[18] 현 폴란드 글리비체(Gliwice).[19] 이는 직접적으로 독일군 당국에 처형된 수치만을 합산한 것으로, 실제 폴란드 침공 당시 20만에 이르는 폴란드 민간인이 사망했다.[20] 그렇다고 해도 폴란드의 방어선은 너무 과도하게 독일군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늘어진 감이 있다. 당장 폴란드 회랑도 개전 3일 만에 분단되는 판국이다. 차라리 폴란드 회랑과 대(大)폴란드 지역의 병력을 빼내어 중앙과 남부의 산업 지대를 보호하거나 비스와 강의 방어선을 강화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21] 연철로 제작된 TK-3 초기생산분 차체에 47mm wz.25 보병포를 장착한 모델[22] 독일군 야포는커녕 독일군의 대공포인 8.8cm Flak 37의 보유량과 비교해봐도 차이가 별로 없었다. 이게 독일군의 "대공포" 수량이었으니...[23] 기존의 야전군 소속 장갑열차 10량과 침공 중 급조된 무장 열차 6량 합산.[24] 모크라 전투에서는 독일 기갑부대를 갈아버리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25] 7TP도 그렇고 이 폭격기도 폴란드 이외의 각국(벨기에, 불가리아, 그리스 등)에서 많은 관심을 가진 항공기였다. 전간기 폴란드의 무기 개발사는 국내외적인 정치적, 경제적 문제가 겹치면서 꽤나 안타까운 면이 많다. 만일 독일이 좀 더 늦게 침공했더라면 폴란드는 더 많은 현대식 무기를 생산하여 침략자에 맞설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1939년 9월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금씩 사용한 것도 워낙 숫자가 적었기 때문이었다.[26] 그래도 폴란드인들이 숫적으로 제2민족을 차지하기는 했다.[27] 1935년 피우수트스키가 지병으로 사망하자 폴란드 유대인들이 그의 죽음을 크나큰 비극으로 받아들였을 정도였다.[28] http://www.yadvashem.org/odot_pdf/Microsoft%20Word%20-%206215.pdf, p.3[29] Waldemar Rezmer, Stanowisko i udział Ukraińców w niemiecko-polskiej kampanii 1939 roku, w: Polska-Ukraina. Trudne pytania, t. 4, s. 24[30]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예를 들어 폴란드 제6보병사단장 베르나르트 몬트(Bernard Mond)는 유대계였으며, 피오트르쿠프(Piotrków) 작전집단 지휘관 빅토르 톰메(Wiktor Thommée)는 프랑스계, 제16보병사단 부사단장 알렉산데르 츠헤이제(Aleksander Czcheidze)는 조지아계, 폴란드 국경방위군단(KOP; Korpus Ochorny Pogranicza) 사령관 빌헬름 오를리크뤼케만(Wilhelm Orlik-Rückemann)과 폴레시에(Polesie) 독립작전집단 지휘관 프란치셰크 클레베르크(Franciszek Kleeberg)는 독일계였다.[31] 당시 독일 해군에는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슐레지엔이 있긴 했지만, 시대상 이들이 활동하기엔 너무 구형이었다.[32] 당장 영화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브와디스와프 슈필만(Władysław Szpilman)의 동명의 회고록에서도 바르샤바의 신문 판매원이 '''독일이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공격했다'''고 열을 내며 길길이 날뛰는 장면을 볼 수 있다.[33] 이런 모습은 프랑스 침공에서도 프랑스 피난민들에 의해 재현된다.[34] 이 과정에서 9월 7일부터 10일까지 720명 규모에 대전차소총 2문으로 무장한 폴란드군에게 350대의 전차와 657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항공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던 42,200여 명에 이르는 독일군이 3일 동안 쩔쩔매는 비츠나 전투가 벌어졌다.[35] 공장에서 가져온 테레빈유를 길거리에 쏟아 붓고는 전차대가 진입하자 불을 질러 버렸다.[36] 폴란드 침공 기간 동안 2천여 명의 독일 반란군이 전사했다. 전쟁 기간 동안 2만여 명의 독일군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게다가 반란 행위 이외에도 독일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폴란드 민간인을 학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결국 이로 인해 폴란드인들의 원망을 받은 독일계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폴란드 전토와 새로 폴란드가 얻은 독일 동부 영토에서 독일 본토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독일계였음에도 폴란드에 충성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37] 벨로루시 전선군(미하일 코발료프): 37만 8,610명, 전차 2,406대 및 대포 3,167문, 우크라이나 전선군(세묜 티모셴코): 23만 8,978명, 전차 2,330대 및 대포 1,792문[38] 러시아 위키피디아 참조[39] 칼 하인츠 프리저, 전격전의 전설, p.63[40] 폴란드의 중심부와 변경은 지평선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드넓은 평지이지만, 남쪽으로는 험준한 산맥이 펼쳐져 있어 방어에 유리했다. 또한 당시 중립이었던 헝가리루마니아와의 국경 지대였고, 이들 나라를 통해 무역을 하거나 물자를 지원받을 수도 있었다. 북쪽으로는 스트리(Stryj) 강과 드니에스트르(Dniestr) 강을 비롯해 계곡, 언덕과 늪지대가 펼쳐져 있었다.[41] 단 모든 지역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르부프(Lwów) 시(市)는 주민의 2/3이 폴란드인들이었으며, 타르노폴(Tarnopol) 주와 르부프(Lwów) 주(州)는 폴란드인이 인구상 제1민족이었다. 스타니스와부프(Stanisławów) 주와 보윈(Wołyń) 주에서만 우크라이나인들이 제1민족이었다.[42] 컬리네스쿠 총리도 암살당할 것을 예감했는지 이전부터 의전차량이었던 캐딜락 대신 장갑차를 달라고 정부에 건의했던 적이 있었다.[43] 철위단은 이미 이전에 수상 이온 두카(Ion Duca)를 암살한 전례가 있었다.[44] 당연하지만 바르샤바는 아직 항복하지도 않았고, 전선의 전투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 시점에서 독일의 승리는 확실했지만.[45] 첫 번째 전사자는 슈츠슈타펠 소속으로 9월 10일 오포츠노(Opoczno) 근방에서 전사한 빌헬름 프리츠 폰뢰티히(Wilhelm Fritz von Roettig) 소장이었으며, 폴란드 장성 중에서도 16일 폴란드 남부 우와주프(Ułazów)에서 제21산악보병사단을 지휘하던 유제프 쿠스트론(Józef Kustroń) 준장이 독일 제45보병사단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한편 9월 23일에는 크라스노브루트(Krasnobród) 전투에서 독일 제8보병사단을 지휘하던 루돌프 코흐에르파흐(Rudolf Koch-Erpach) 기병대장이 폴란드 기병대에 포로로 잡혔지만 이후 풀려났다.[46] 본래는 국경 전투에서 우치 군을 이끌던 지휘관이었으나 국경 전투 이후 9월 8일 밤 바르샤바로 넘어왔고 직후 바르샤바와 모들린 일대에 있는 폴란드 방위군의 전체적인 지휘권을 위임받았다.[47] 보내준 날짜가 기가 막힌데, 하필이면 9월 17일, 즉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한 날'''이었다.[48] 나치독일 피해 숨겼던 6조 원대 금괴 8000개 비밀 운송작전(서울신문) [49] 웃기게도 이 말들은 독일군의 팀킬 때문에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즉 이유없는 화풀이.[50] 이 악행에 대한 벌인지, 후일 제15차량화보병연대가 소속된 제29차량화보병사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 제 21군의 공격을 받고 전멸했다.[51] 켐프 기갑사단은 므와바 전투 당시 폴란드 민간인들을 인간방패로 세운 적이 있다.[52] Geoffrey P. Megargee, War of annihilation: combat and genocide on the Eastern Front, 1941, Rowman & Littlefield, 2007, p. 14[53] 다만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폴란드 내 독일계는 주데텐란트의 독일계처럼 병합을 직접 신청하거나 한 게 아니라 침공이 끝나고 나서 점령된 폴란드 땅에서 부역을 한 정도이기에 매국노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전 버전에서 수십 만이 죽었다는 건 추방 과정에서 죽은 게 아니라 독소전쟁 중에 소련의 공격을 받아 사망한 것이다.[54] 이후 폴란드 내에서 '우리가 너무 심했던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반짝 대두되긴 했지만 압도적인 비판에 밀려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소련이 추방한 거라고도 하지만 소련은 전후 동독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더라도 굳이 이 지역 독일인들을 강제 추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점령하기로 결정한 이상 현지 독일인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게 이익이었던 만큼 전쟁 중에 병사들이 개별적으로 저지른 보복이라면 모를까, 국가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보복한 건 별로 없다. 즉 독일인 추방은 현지 정부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고, 독일이 후일 이 문제에 대해 강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소련이 배제된 상태였기 때문이다.[55] 그런데 웃기게도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오히려 폴란드에서 독일과의 역사 교과서 대화에 열성적이었다.[56] 사실 그 이전에 집권하던 폴란드 통합노동당(Polska Zjednoczona Partia Robotnicza, PZPR)도 소련 공산당과 그렇게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57] 캅카스 에미레이트가 아니다. 체첸 저항 세력은 크게 두다예프,마스하도프가 이끌던 이츠케리아 체첸 공화국과 1차 체첸전 이후 유입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으로 나뉘는데, 2007년 이후 세속주의 세력의 궤멸로 극단주의자가 체첸 정부를 장악해 카프카스 레미레이트를 수립하게 된다.[58] 만일 NATO가 우크라이나를 최종적으로 포기한다면 폴란드가 단독 참전할 가능성도 있다.[59]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숫자에 비해 가장 큰 활약을 한 게 폴란드 파일럿들이었다.[60] 하지만 망명 정부가 이렇게 많은 협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윈스턴 처칠얄타 회담에서 폴란드 동부 영토를 소련에 넘겼다.[61] 예를 들어 1943년 바르샤바에서는 국내군의 공격으로 독일 경찰 5명과 친위대원 1명이 죽은 적이 있는데 독일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폴란드인 100명을 학살했다.[62] 폴란드어로 łapanka. 거리에서 갑자기 폴란드인들을 한 구석으로 몰아넣고는 이들을 강제 이주시켜 학살하거나 강제 노동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63] 예를 들어 V2 로켓의 정보를 수집하여 연합국에 전달한 게 이들이었다.[64] 나치의 점령지에 대한 과도한 탄압과 학살, 그로 인한 점령지 시민들의 저항과 독일군의 피해,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독일군 병력을 전선보다 점령지에 할애해야만 했기에 나치 독일 패전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65] 이 외에도 120만여 명에 이르는 폴란드인들을 소련 내의 시베리아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송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이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절반 정도에 불과했으나, 카틴 학살과 달리 이는 서방 국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66] 이는 소련이 폴란드 동부에서 서부로 진격하면서 징집령을 발표해 폴란드 젊은이들을 막무가내로 군에 처넣은 것도 있긴 하다.[67] 단 비아위스토크를 포함해 기존 커즌 선 서쪽에 포함되어 있던 일부 동방 영토는 다시 폴란드에 돌아왔다. 하지만 르부프 주변 지역은 원래 커즌 선 서쪽에 위치했음에도 소련이 반환하지 않아 계속 소련령 영토로 지속되다 지금은 우크라이나 영토가 되었다.[68] 이 와중에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태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는 일명 '''브란트의 무릎꿇기(Brandt Kniefall)'''로 폴란드의 거센 반독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전 세계인들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69] 다른 조건으로는 동독 지역에 독일군을 제외한 나토군 배치 금지, 핵무기 영구적 포기, 통일 독일 상비군 37만 이하 제한 등이 있다.[70] 해공군은 처지는 편이지만 해군은 원래 지리적 특성 때문에 큰 역할을 할 수 없고 공군은 보유한 기체를 꾸준히 업그레이드하고 F-35 수출을 요청할 만큼 지속적으로 신경쓰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와 대치하는 유럽 국가들 가운데 영국, 프랑스, 독일을 제외하면 이만한 공군력을 가진 나라가 없다.[71] 독일계의 숫자는 폴란드보다 체코슬로바키아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독일이 애초에 폴란드에게 요구한 영토들을 보면 독일계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논쟁의 핵심이었던 단치히(그단스크)같은 경우 독일계의 구성이 90%가 넘어갔고, 단치히(폴란드) 회랑같은 경우 말이 폴란드 회랑이지 오랜 프로이센 영토로써 독일계와 폴란드계의 비율이 비등했다. 이렇다 보니까 단치히 자유시 같은 경우 폴란드 영토인데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에 합병되기 전까지 연거푸 지역 독일민족주의 정당들이 압도적으로 선거를 이기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연합군이 1차대전 이후에 민족구성을 고려하지 않은채 독일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무리하게 이 지역을 폴란드에게 할양한 결과로, 골때리게 폴란드는 1차대전 이후 이 지역들에 '독일 색채'를 빼는 폴란드화를 시도한다. 대표적으로 1차대전까지 단치히(폴란드) 회랑의 지역들의 독일계 비율은 40%가 넘어갔는데, 이 비율은 1921년 18.8%까지 떨어진다. 즉, 독일계 입장에서는 폴란드야말로 압제자였다. 이렇다 보니까 독일 입장에서는 독일계 숫자가 우세하거나 우세했던 단치히, 단치히 회랑, 슐레지엔같은 지역들은 당파를 불문하고 당연히 독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알짜배기 지역들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 폴란드 입장에서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폴란드가 비판받아야 할 점은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에 참여한 것이다. 당시 수준급의 선진국이자 공업국으로 강력하고 훌륭하게 무장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육군은 대(對)독일전에 있어 폴란드 및 영국과 프랑스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는 과거에 체코슬로바키아에 강탈당한 톄신 지방을 돌려받고 싶어 영국과 프랑스에게 배신당한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리고 오히려 체코슬로바키아의 분할에 동참해 해당 지역을 다시 먹어버렸다. 이런 폴란드의 영토 욕심은 주변국들의 어그로를 너무 끌었다.[72] 폴란드의 경우는 국경이나 지형 자체가 국토 방어에 매우 불리하게 되어 있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폴란드와 독일의 국경선은 폴란드의 핵심 지역을 둘러싼 형태였다. 여기에 소련의 침공까지 받았는데 그럼에도 프랑스와 비슷하게 버텼으니...[73] 그런데 사실 폴란드도 병력의 80% 정도가 멀쩡히 남은 상태에서 독일과 더 오래 싸울 수 있었지만 뒤에서 소련이 침공해서 저항 기간이 더욱 줄어든 것을 생각하면...[74] 다만 이 경우에도 1939년의 독일군과 1940년의 독일군이 전력 면에서 체급이 달랐음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1939년 10월부터 1940년 5월까지 독일군의 중(中)/중(重)전차 보유대수 현황에서 3호 전차는 151대에서 785대로, 4호 전차는 143대에서 290대로, 체코제 전차(LT vz. 35+LT vz. 38 합산)는 247대에서 381대로 늘어나 있었다. 이 중 실제로 부대에 배치된 전차 숫자는 이보다 적었지만, 그래도 1939년의 독일군과 1940년의 독일군은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75] 칼 하인츠 프리저, 전격전의 전설, p.65~66[76] 그렇다고 프랑스가 잘 싸웠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애초에 폴란드는 홀로 독일과 힘겹게 전쟁하다가 소련이 동쪽을 가격하여 패배가 더욱 가속화된 것이지만, 프랑스의 경우는 베네룩스, 영국과 함께 싸웠음에도 6주만에 나치 독일에게 털리는 역사적 참패를 당했다(이탈리아 왕국은 독일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리고 1939년과 1940년의 독일군이 질적으로 서로 달랐다 하더라도 독일군은 폴란드군에 비해 군사력 면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프랑스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77] 흔히 알려진 것처럼 폴란드가 갑툭튀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국경 지대(라기에도 뭣하지만)에서도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당시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던 혁명을 지원하고 싶었기 때문. 하지만 어쨌든 먼저 본격적인 대규모 군사적 행동을 벌인 것은 폴란드였다.[78] 단 이 당시 빌뉴스에는 폴란드인 인구가 전체의 5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인구 중 44%는 유대인이었다. 리투아니아인의 비율은 3%에 불과했고.[79] 이 이야기를 그대로 쓴 책이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과 이를 참고한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 그리고 전격전의 전설이다.[80] 1795년부터 1918년까지 123년간 분할 통치를 당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간신히 나라가 다시 수립되었다.[81]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은 1934년까지 계속되면서 폴란드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당시 폴란드 무역의 40%가 독일과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82] 폴란드 침공은 결과적으로 라이스키가 아니라 자용츠의 의견이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훨씬 현대화된 독일 공군의 전투기가 제공권을 장악하여 독일 공군 폭격기와 육군이 활약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83] Hermann Graml: Europas Weg in den Krieg. Hitler und die Mächte 1939. Oldenbourg, München 1990, S. 187[84]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