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칼텐브루너
1. 개요
에른스트 칼텐브루너(Ernst Kaltenbrunner, 1903년 10월 4일 ~ 1946년 10월 16일)는 오스트리아 출신 나치 독일 친위대 장성 겸 제국보안본부 본부장, 독일경찰청장으로 그 '''악명높은 아우슈비츠(오시비엥침) 수용소를 실질적으로 만든 장본인'''이며 게다가 요제프 멩겔레와 카를 브란트의 실험을 최종승인했던 반인륜 범죄자이다. 그 유명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죽은 다음에 SS친위대의 2인자가 되었으며 하이드리히의 존재감에 다소 묻히는 감이 있지만, 그도 SS친위대에서 엄청난 카리스마와 능력을 보여주었고 죄질도 하이드리히에 뒤지지 않았다. 애초에 칼텐브루너의 지시로 피살된 사람 수만 따지면 오히려 하이드리히보다 더 많다.
2. 출생과 성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산하의 제후국 상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리트 임 인크라이스에서 가톨릭 가정의 변호사 아들로 태어났고, 린츠와 그라츠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나치의 주요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칼텐브루너는 1913년에 린츠의 실업계 김나지움에 입학해 재학 중 범게르만주의와 반교권주의적 단체인 호엔슈타우펜에 가입했다. 여기서 알게 된 아돌프 아이히만과 친구가 되었다. 1921년 가을에 그라츠 대학교에 입학한 칼텐브루너는 처음에 화학을 전공했지만 1923년에 법학으로 갈아탔고 1926년 여름에는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대학생활은 탄광에서 야근하면서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며 공부했다고 하며, 이를 근거로 자신이 노동자들의 매우 가까운 친구임을 강조했다. 또한, 대학 생활 중 다른 학생과 결투를 벌여 얼굴에 깊은 흉터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텐브루너는 1926년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잘츠부르크에서 1년간 로펌 소속변호사로 일했고, 그 후엔는 린츠에서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려 활동했다. 1929년에 호국단의 준군사 활동에 참가한 칼텐브루너는 이들 단체가 자신의 목적이던 오스트리아 병합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어졌다. 그러다가 요제프 디트리히의 추천으로 1931년 9월 31일에 친위대에 입대했고 1932년 당시 비합법이었던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가입했다.
오스트리아의 친위대 부대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지휘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독일의 친위대 전국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의 직접 지휘하에 있었다. 1932년부터 칼텐브루너는 부친의 법률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나치당원의 무료변호 활동에 종사했다. 1933년에 독일에서 나치당이 정권을 잡자 오스트리아에서도 나치당의 활동이 활발해졌지만 1933년 6월에 엥겔베르트 돌푸스 수상에 의해 오스트리아 나치당이 금지당하고 당원들이 체포되자 칼텐브루너도 1934년 1월 14일에 엘리자베트 에델과 결혼식을 올린 다음날 체포되었다. 카이저슈타인불프 수용소에 감금된 그는 4월에 석방된 후 1934년 6월 15일에 린츠의 친위대 제37연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불법 정치 활동과 엥겔베르트 돌푸스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었고, 1935년 5월에 국가반역죄로 다시 체포된 칼텐브루너는 징역 6개월형을 받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래도 힘러는 칼텐브루너를 오스트리아에 남겨두어서 약 6개월 뒤 풀려나 이듬해에는 여단지도자로 진급해 오스트리아 친위대 지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힘러는 1935년 6월 15일에 칼텐브루너를 제37연대 사령관에서 친위대 8지구(린츠지구)의 사령관으로 승진시켰다.고
칼텐브루너는 가끔씩 린츠에서 밀입국으로 독일에 들어가 힘러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하인츠 요스트 등에게 첩보를 보고하며 활동했다. 1936년 이후 독일의 “오스트리아 구제사업국”으로부터 구제사업기금을 불법으로 설립한 칼텐브루너는 오스트리아 지하운동 조직의 자금줄이 되어 그를 통해 독일정부에서 내려오는 비밀지령을 수행했다. 1936년 7월 11일에 빈 주재 독일공사였던 프란츠 폰 파펜의 중재로 오스트리아 수상인 쿠르트 슈슈니크와 아돌프 히틀러 사이에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오스트리아 병합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었다. 힘러로부터 오스트리아 친위대에 이 협정을 파기하는 활동을 하지 말 것을 지시받은 칼텐브루너는 이 명령을 바탕으로 1937년 1월 20일에 오스트리아 나치당 내의 급진파를 누르고 오스트리아 연방국 전역의 친위대 총지도자인 친위대 상급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칼텐브루너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당 지도자인 프리드리히 라이너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그를 밀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는 그렇게 급진파 지도자인 요제프 레오폴트를 실각시킴으로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당내 항쟁에서도 사실상 승리했다. 1938년 2월 12일에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와 슈슈니크의 회담에 기초하여 2월 16일에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오스트리아 내무장관에 임명시켰다.
그러나 슈슈니크는 오스트리아 독립을 지키려고 했기에 히틀러는 3월 11일 새벽 2시에 독일군 부대를 국경으로 출동시켰고, 히틀러와 괴링으로부터 요구 를 받고 오전 7시에 슈슈니크는 수상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빌헬름 미클라스 대통령은 하는 수 없이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새 수상으로 임명해야 했다.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신임 수상은 힘러의 압력으로 인해 보안국방장관 자리에 칼텐브루너를 임명했다. 3월 13일에 오스트리아에서 “오스트리아와 독일과 재통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오스트마르크 주로 편입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합병 후에도 오스트마르크 주 국가대리관이 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아래에서 1938년 8월까지 칼텐브루너는 보안국 장관을 유지했다. 힘러의 명령으로 린츠의 동쪽 약 20km 지점에 건설된 마운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설립에 관여한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는 오스트리아의 게슈타포 조직창설에도 관여했다. 1938년 3월에 합병과 함께 친위대 상급지구 에스터라이히의 본부를 린츠에서 빈으로 옮기고 1938년 5월에는 이름을 “도나우“로 바꾸었다.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후에는 제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39년 1월에는 독일 국회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집단지도자로 승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무장친위대로 위치를 옮겨서 주로 독일 내의 치안경찰 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그리고...'''마왕이 각성했다.'''
3. 홀로코스트의 주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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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4월에 오스트리아의 마운트하우젠 수용소의 시찰에 나선 칼텐브루너(왼쪽)[1] , 힘러(중앙)와 수용소장인 프란츠 치라이스(오른쪽)
1942년 6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체코에서 암살당한 뒤 독일경찰청장과 제국보안본부장에 임명되었고, 상급집단지도자와 경찰대장 칭호를 수여받아 게슈타포를 비롯한 독일 전역의 경찰력을 통제하는 위치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애주가였으며 주사가 심한 사람이어서[2] 매번 동료들이나 지인들과 술판을 벌이는 것을 일삼았고,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이 거대하고 야비한 인간과 접촉하게 된 사람들은 그가 역겨운 존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3] 빌헬름 카나리스는 "그는 차가운 눈과 살인자의 손을 가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오스트리아 합병 후 파견되어 유대인 국외이주본부를 창설시 칼텐브루너는 여기에 관여하지 않았다. 칼텐브루너는 1943년 1월 31일까지 도나우의 지도자 직위와 친위대 경찰고급지도자 국가보안본부 장관직을 유지했다. 1943년 1월 30일에 칼텐브루너는 국가보안본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월 31일에 히틀러가 칼텐브루너의 국가보안본부 장관임명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칼텐브루너는 게슈타포, 형사경찰, 나치 친위대(SS)의 정보부들을 이용하여 동부전선의 후방에서 나치 독일의 패망때까지 '''약 100만명을 살해한 아인자츠그루펜과 같은 학살 조직의 총 책임자가 되었으며''' 유대인 처리문제의 집행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학살로 유럽의 유대인 색출이 조직적으로 실시되었고 이로인해 '''무려 수백만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하지만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는 원래는 하인리히 힘러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가지고 있던 반유대주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43년 봄과 여름에 걸쳐서 독일계 유대인의 말살계획 홀로코스트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반유대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4]
1944년 2월에는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의 실각과 더불어 그의 지휘 아래에 있었던 국방군 첩보부는 국가보안본부 제6국의 하부조직이 되었다. 1944년 3월에 “탄약포고“ 발령으로 미국인과 영국인을 제외한 도망한 전쟁포로는 국가보안본부의 보안경찰과 친위대에 인계되어 마운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총살하게끔 했다. 1944년 3월에 독일군이 추축국에서 이탈하려 한 헝가리 왕국을 점령하자 칼텐브루너는 1944년 3월 22일에 헝가리로 건너가 '''유대인 처리 문제에 관여하여 유대인의 이송하고 말살하는 것을 빠르게 진행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실제 작전의 지시를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맡겼고 '''아이히만은 칼텐브루너의 지시로 1944년 5월부터 6월 30일까지 약 38만 1,600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그 가운데 무려 24만명의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서 살해했다.''' 1944년 6월에 독일을 공습한 연합국 조종사 포로는 친위대에 넘겨져 고문 및 살해에 관한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칼텐브루너는 1944년 7월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에 의해서 일어난 쿠데타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하자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때에 관여했던 주모자와 가담자들의 재판과 처형에 대한 권한을 담당하여 관련자들을 무자비하게 색출하였고 색출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처형하여 '''약 200여명이 넘는 관련자를 제거하였다.''' 그 외에도 동료였던 오토 슈코르체니와 스탈린과 처칠, 루스벨트 등 연합국 지도자들의 암살기도 작전이었던 롱 점프 작전을 입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친위대 실권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와는 계속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계급이 오르고 권력이 강해질수록 양자 간의 권력투쟁도 심화되었다. 12월에는 최종적으로 무장친위대와 경찰대장(General der Polizei und Waffen-SS)으로 승진, 사실상 힘러 다음가는 친위대의 실권자로 자리를 굳혔다.
4. 전후
전쟁 말기였던 1945년 4월에는 힘러로부터 남부유럽의 독일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웃긴 것은 그도 힘러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칼텐브루너는 1945년 3월 후반부터 4월 중반까지 독단으로 단독강화를 꾀하여 친위대 장교였던 빌헬름 헤틀 소령을 스위스로 파견하여 미국의 정보기관인 OSS[5] 의 유럽대표인 알렌 덜레스와 협상하게 했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어 실패했다. 패전이 목전에 다가 온 전황 악화로 인해 5월에 사령부를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로 옮겨 은거했다 1945년 4월 19일에 칼텐브루너는 측근들과 함께 베를린을 떠나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 자신의 사령부를 만들었다. 알프스 국가요새에서 농성하려고 했던 그는 1945년 5월 11일에 미육군 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노르트하우젠 미군 수용소에 구금되었다. 처음에 미군은 그를 단순한 독일군 장교로 여겼지만 한 독일인 여성의 밀고로 그가 칼텐브루너임을 밝혀냈다. 결국 룩셈부르크의 팔레스 호텔에 설치된 수용소로 이동한 칼텐브루너는 독일 나치당의 거물급 들인 헤르만 괴링, 카를 되니츠,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빌헬름 카이텔, 프란츠 폰 파펜, 얄마르 샤흐트 등과 함께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되었다. 재판에서 칼텐브루너는 미군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연합국 판사들에게 항변했다. 하지만 칼텐브루너는 "침략전쟁에 대한 공동모의", "전쟁범죄", "포로인도에 관련한 범죄"로 기소되었다. 기소 당시에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는 가족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슬프게 울었다. 재판 개정 전에 그는 뇌출혈을 일으켜 독방에서 기절하는 바람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불안과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서 혈압이 올라갔고 그로 인해 혈관이 파열된 것이 뇌출혈의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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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받기위해 휠체어로 법정으로 이동중인 칼텐브루너.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은 1945년 11월 20일부터 열렸는데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는 치료 때문에 12월 10일부터 시작되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재판이 시작되자 그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사형을 피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은 게슈타포 같은 책임자로 있기는 했지만 자신은 범죄와 관련한 혐의를 한 일이 없다고 주장을 계속했다. 자신은 실행자가 아니라 명목상의 대표에 불과하다고 변호하며 실제로는 첩보활동 이외에는 관여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6] 그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으며, 심지어 진술서 등 관련 서류에 서명조차 하기를 거부했다. 칼텐브루너는 기소장에서 전쟁범죄와 관련한 죄는 하인리히 힘러의 지시로 한 것 뿐이었다며 자신을 변호했다. 그는 에어리 니브에게 "나는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나의 임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나는 히틀러의 대용품 노릇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또한 뉘른베르크의 교도소 심리학자 구스타프 길베르트를 상대로 한 또 다른 답변서에는 자신은 대량학살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명령을 내린 적도 명령을 수행한 적도 없다고 이야기하거나 "당신은 이러한 일들이 얼마나 은밀하게 진행되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일들은 나도 모르게 이루어졌습니다."라면서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자 검사는 칼텐브루너가 직접 서명했던 명령서들을 그의 눈앞에 들이댔지만, 그것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부인하거나 서명이 위조되었다고 항변했다. 이렇게 무조건 자신의 사인은 가짜라고 일관되게 진술한 것 때문에 변호인단 사이에서 칼텐브루너에게 붙인 별명이 바로 '''Der Mann ohne Unterschrift''', "서명이 없는 자"이다. 그러자 그의 부관인 디터 비슬리체니(Dieter Wisliceny) 친위대 대위는 칼텐브루너의 태도를 거세게 비난하면서 "유대인 문제에 관해 취해진 모든 조치들은 기본적으로 칼텐브루너의 결정을 필요로 했다."라 말했다. 젊은 소령으로 뉘른베르크에서 피의자들의 기소를 위해 일했고 이후 영국의 하원의원이 된 에어리 니브(Airey Neave)는 칼텐브루너에 대해 이렇게 썼다. "...... 거대한 손을 가진 거인 ...... 그의 길고 여윈 얼굴에는 입 왼쪽 끝에서부터 코까지 올라오는 큰 흉터가 있었다. 검은 치아들은 벌어져 있었고 귀가 몹시 컸다." 재판을 몇 차례 방청한 영국의 소설가 에블린 워(Evelyn Waugh)는 그를 "정말로 범죄자처럼 생긴 유일한 피의자"라고 묘사했다.
1946년 10월 1일에 피고인 전원에 출석한 가운데 칼텐브루너는 그가 원하는 대로 오스트리아 병합과 침략전쟁에 대한 공동모의 및 수행혐의는 무죄로 선고되었다. 그러나 강제수용소와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점을 들어서 학살의 책임자로 인정되었고 탄약포고 등 포로에 관한 학살과 즉결처형 등을 지시한 혐의로 인해 전쟁범죄와 인도주의에 반한 죄가 인정되어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46년 10월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1946년 10월 16일 오전 1시 10분에 자살한 헤르만 괴링을 제외한 사형수 10명의 교수형이 차례대로 집행되었는데, 칼텐브루너는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 총사령관에 이어 3번째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마지막 최후발언에서 칼텐브루너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우리 독일 국민과 나의 조국을 열성적으로 사랑했고 봉사했다. 나는 우리 국민의 법에 따라 나의 의무를 다했다, 그리고 곤란한 시대에 우리 국민들이 오로지 군인 같은 자들에게 끌려다닌 것이 유감이다. 범죄가 이뤄진 일도 유감이지만 나는 여기에 관련하지 않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범죄들이 저질러졌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독일이여 영원하라." 밧줄 끝에서 그가 고통스럽게 질식사로 숨을 거두기까지 15분이 걸렸다고 한다[7] . 그를 동정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처형된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시체 혐짤 주의 자살한 괴링을 포함한 칼텐브루너와 같은 11명의 핵심 전범들은 뮌헨 근교의 화장장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소각되었고, 유골은 이자르 강의 지류인 콘벤츠 강에 뿌려졌다.
5. 기타
전 북한 외교관 고영환의 저서 <평양 25시>에 의하면 김정일이 간부들 앞에서 찬사(...)를 바친 인물이라고 한다. 흠많무.
"나는 정확한 것을 좋아한다. 독일의 칼렌부룬너[인용자주]
(나치스 독일의 제국안전 총국장. 살인마로 악명 높은 SS성원이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히틀러에게 보고할 때는 항상 간단명료하고 정확하게 사태의 진상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히믈러(독일 부총통)가 어떤 때 거짓을 보고하면 바로 그 앞에서 <그것은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배짱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이러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고영환, <평양 25시>, 130쪽.
[1] 참고로 키가 매우 크며, 뉘른베르크 재판당시 프로필상으로는 194cm이다. 일설에 의하면 200cm였다고 한다. 191cm인 하이드리히보다 컸을 정도이다.[2]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계속 오열을 해댔고 술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조금 불쾌해도 그러려니 하지만, 그곳은 독일임을 생각해 보자...[3] 독일의 퇴근문화는 바로 칼퇴근해서 바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 역할을 하는 공과 사가 뚜렷한 일할 땐 슈퍼맨, 가정에선 충실맨 문화인데, 이 상사이자 동료는 퇴근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회식을 하자고 하니 참 난감한 사람이였다고 한다. 게다가 이 인간은 나치의 신념과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지인들은 증언했다.[4] 나치당 내에선 의외로 이런 일이 흔했다. 헤르만 괴링도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같은 말도 해댔고, 유대인들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사람들과 정치적인 목적으로 죽이려는 사람들이 혼재되어 있었다.[5] 훗날 CIA의 전신이 된다.[6] 당연하지만 개소리. 오히려 '''명령에 의구심을 품은 부하를 불복종이랍시고 가스실에 처 넣은게 이놈이다'''.[7] 이는 집행 과정에서 소련 측이 전 사형수 질식사로 추가적인 고통을 주면서 교수형으로 집행 할 것을 강하게 요구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자국민이 2000만명 이라는 엄청난 인명이 고통스럽게 사망했으니 소련 입장에서는 사형수들에게 롱 드롭으로 편하게 죽인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기에 사형수들 전부 추가적인 고통을 주면서 집행하라고 강하게 요구한 것이다.[인용자주] 칼텐부룬너의 오기로 보임.